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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님의 딸이 되었습니다 (80)화 (80/167)

80.

“이랑, 너 아리 데리고 어디 갔었냐?”

모두가 있는 곳으로 돌아오자, 바랑이 이랑에게 다가와서 물었다. 그러자, 이랑이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안 알려줘.”

“쳇, 백령 눈빛을 보라고, 인마. 너 당장 잡아 죽일 수도 있는 거, 이 삼촌이 널 살렸다.”

“어떻게?”

“네 성인식이니까 한 번만 봐달라고 사정했지.”

바랑이 고된 조금 전을 떠올리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인마, 데려갈 거면 삼촌도 데려가야 할 거 아니야! 그럼 그냥 아리 보쌈해서 멀리 튀면 되는데.”

뭐? 뭘 쌈해?

저 똥개가 드디어 정신이 나가고 만 것인가?

“삼촌, 그랬으면 우리 둘 다 백령한테 죽었어. 아니, 그 전에 삼촌이 있으면 아리가 곱게 따라올 리가 없잖아…….”

이랑 말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맞다. 똥개가 감히 누굴 건드려?

“아니야, 인마. 아리가 삼촌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이름으로도 불러줬다고. 그렇지, 아리야?”

“또옹개, 바보.”

“되게 오랜만에 듣는다, 그거.”

……똥개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바랑이 눈을 빛내며 나를 바라보았지만 나는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어디선가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조금 떨어져 있는 곳에서 백령과 자하가 나와 이랑, 그리고 바랑이 서 있는 곳을 못마땅하다는 듯이 불만 가득한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백령 님, 아무리 이랑 님의 성년식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선을 너무 세게 넘는데요.”

자하는 백령이 당장 저 똥개 두 마리의 목을 베어오라 명한다면,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명을 수행할 것만 같았다.

“되었다. 그의 성년식이 이리된 데에는 책임이 있으니.”

그, 그거, 그런 표정으로 말하는 게 아닌 거 같은데, 백령……?

그들에게 다가가자, 두 신수의 시선이 일제히 나를 향했다.

“어디 다친 데는 없느냐?”

“으, 응……. 없는…….”

아, 맞다. 손목!

아까 이랑이 날 갑자기 데려가는 바람에 붉게 자국이 남았던 손목이 생각났다. 황급히 손목을 바라보았다.

아까보단 연해졌지만, 아직 붉은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재빨리 옷 소매로 내 손목을 가렸지만 눈치 빠른 백령은 이미 내 손목을 보고 난 후였다.

“바랑.”

백령이 한기 어린 눈으로 똥개 둘을 바라보았다.

“응?”

“아무래도 네 조카가 성체가 된 기념으로 동쪽 땅과 전쟁이라도 치르고 싶은 거 같군.”

“……응?”

백령의 말에 바랑이 무슨 뜻인지 몰라 눈만 깜빡였다. 이랑이 옆에서 아차, 싶었는지 입을 벌리고 있었다. 백령의 말을 들은 자하가 조용히 내 옷소매를 걷어 올렸다.

이, 이게 아닌데…….

“배, 백령! 나 진짜 괜차나아…….”

황당함에 말끝이 흐려졌다. 나의 말에 백령이 시선을 내게로 돌렸다.

손목 이제 안 아프단 말이야…….

“감히 ‘우리’ 아리 님을 납치한 거로도 모자라, 손에 자국을……! 백령 님, 이랑 님은 납치가 초범도 아니고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이상한 거 일러바치지 마, 자하!

나의 외침은 백령과 자하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무서운 그들의 기운에, 이랑이 꼬리를 내렸다.

“백령, 그건 내가 잘못했어…….”

이랑이 결국 작은 소리로 사과했다. 그에 백령이 그들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나를 바라보았다.

“이, 이랑도 모르고 그런 거야, 벼, 별로 아프지도 않아.”

한동안 나를 바라보던 백령이 다시 이랑을 보며 입을 열었다.

“다시는 마음대로 아리를 데려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럴게.”

백령이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그에 이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풀리자, 숨죽이고 있던 신수들이 다시 시끌벅적해졌다. 그러던 와중, 노군과 란이 바랑과 이랑, 그리고 백령과 나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저어……,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수고했어. 은월이 보낸 데에는 이유가 있긴 했네.”

바랑의 말에 옆에 있던 란이 신나게 대답했다.

“예, 저희가 간다면 비천 님이 열 받아서 자신을 찾아올 거라 말씀하셨습니다.”

아, 은월은 그걸 노린 거구나…….

“은월은 뭐, 비천과 맞닥뜨린다고 해도 그렇게 걱정되지 않는 몇 안 되는 신수긴 하지.”

바랑이 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확실히 나도 은월이라서 묘하게 마음이 놓이는 감이 없잖아 있긴 하다.

은월은 뭐랄까, 뭐든지 척척 해내는 느낌이랄까…….

문득 은월이 전에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난 모든 걸 예상하고 움직이지 않아. 때가 닥치면 그때 해결하는 거지.’

……아무리 그래도 은월은 정말 대단하단 말이야.

그는 몇 수 앞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현재 일을 해결하는 것뿐이라는 듯이 말했지만, 이런 것들을 보면 그의 예상이 빗나가는 경우가 거의 없으니까.

은월, 그러고 보니 못 만난 지 정말 오래됐다.

“아, 은월 님이 이걸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백령 님.”

노군이 백령에게 다가와, 서찰을 건넸다. 백령이 서찰을 받아들고 바로 읽어내려갔다.

“뭔 내용이야?”

바랑이 서찰의 내용을 흘긋, 보려 했지만 백령이 종이를 접었다.

“흑기에 관한 내용이군.”

“단서를 좀 찾았대?”

흑기? 흑기에 대한 조사는 제대로 안 되고 있는 걸로 아는데…….

남쪽 땅을 아무리 샅샅이 뒤져도 단서가 나오지 않았다고 들었었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로 은월이 흑기에 관한 서찰을 보낸 거지?

딴짓하는 척하며 백령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냥, 새로운 방면으로 조사를 시도한다더군.”

“그게 다라고? 흐음…….”

백령의 대답에 바랑이 찝찝해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은월이 그런 일로 서찰을 보낼 리가 없는데…….

무언가 숨기는 게 있는 건가?

“그래서, 설산 조사는 어떻게 하겠대, 은월은?”

“은월은 딱히 별말 않더군.”

“하긴, 뭐, 은월과는 별로 상관없는 일이긴 하니까.”

은월이 일전에 조사에 대해서 반대해서 화가 났던 건, 그 조사가 본인에게 중요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일을 방해받았기 때문이었던 건가…….

설산이 흑기와 아예 연관이 없는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그 때문인 걸까…….

흐음…….

설산 조사는 무얼 위해 조사하는 걸까? 사화의 말을 떠올려보면, 설산 조사는 시호라는 신수와 연관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백령이 설산 조사를 포기하고 내게 수호석을 준 것을 마치 시호보다 나를 우선순위에 두고 있다는 듯이 말했으니까.

“신국에 큰 변화가 올 것만 같단 말이야…….”

바랑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지만, 그의 말을 듣지 못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큰 변화라…….

왜일까, 똥개의 말이 신경 쓰이는 건.

“뭐, 아리가 나타난 것 자체가 큰 변화이긴 하지.”

바랑이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처음으로 긴장되었다. 그의 눈동자가 짙어졌다. 하지만 이내 헤실거리며 미소지었다.

뭐, 뭐야.

“아리야아아아.”

바랑이 점점 내게로 다가왔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삼촌이라고 불러줘, 응?”

삼촌은 무슨. 또 이상한 소리 하고 있네.

“바랑 님, 누누이 말했지만, 아리 님께 애칭으로 불리는 건 제가 먼접니다!”

자하가 바랑의 헛소리에 헛소리를 더했다.

응, 아니야, 자하야.

“그런데, 백령.”

바랑의 표정이 다시 진지해졌다.

똥개, 할 거면 하나만 해!

“얘, 어째 점점 더 시호를 닮아 가냐? 처음에는 네 기운이 너무 짙어서 그냥 그렇구나, 했는데.”

……어?

예상치 못한 예리한 바랑의 말에 멍하니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지금은 아리한테 풍기던 네 기운도 많이 약해진 것 같고.”

바랑의 말에 백령이 불쾌하다는 듯, 그를 째려보았다.

“네 아이 맞냐? 시호의 숨겨둔 아이라던가, 뭐 그런 거 아니야?”

바랑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백령의 칼끝이 바랑의 목 바로 밑에 닿았다.

“입조심 하지, 바랑. 목숨 건사하고 싶으면.”

백령의 재빠른 손놀림에 바랑이 두 손을 들었다.

“아, 아니, 그냥 그렇다고! 살벌하게 왜 이래! 너, 늙은이한테 그러는 거 아니다.”

바랑의 말에도 한동안 백령이 그에게서 칼을 거두지 않았다. 바랑이 침을 한번 꿀꺽, 삼켰다. 곧이어 한참 동안 바랑을 노려보던 백령이 칼을 거뒀다.

“주, 죽을 뻔했네, 진짜.”

그러게, 왜 고이 있는 백령의 심기를 건드리냐고. 안 그래도 지금 백령 예민한데.

내가 점점 더 시호를 닮아 간다라…….

바랑의 말이 맞는다면, 구슬의 영향인 건가?

어느 정도 상황이 정리되자, 노군과 란이 떠나려는 듯, 발걸음을 궁 입구로 향했다.

“아, 아차차, 아리 님!”

“응?”

란이 가려던 길을 다시 돌아, 내 앞으로 왔다. 그의 외침에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란이 목소리를 두어 번 가다듬더니, 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여우는 어디 갔습니까요?”

“아아, 뽀뽀?”

“네!”

포포의 행방을 궁금해하는 란을 보니 귀여웠다.

어린 것들끼리, 잘 놀기는.

“뽀뽀는 같이 안 왔어.”

“아, 그렇군요……. 하긴, 비천 님이 그 여우를 봤다면 놀라 자빠지셨을 겁니다.”

아니, 아마 뽀뽀를 죽이지 않았을까……. 중급 신수인 란과 노군도 아주 혐오하는 표정으로 보던데.

여노와 포포가 같이 오지 않은 게 정말 천만다행이었다. 아직도 혐오로 가득 찬 비천의 흑색 눈을 잊을 수가 없었다.

노군과 란은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았지만 그들도 내심 긴장했었을 것 같다.

잠시 고민하던 란이 무언가가 생각났다는 듯, 손바닥을 마주쳤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말 못 했던 게 있었는데 말입죠.”

“응?”

“그 여우, 아리 님이 없으면 어딘가 불편한지 자꾸 약을 먹었습니다요.”

“약?”

영아가 저번에 만들어준, 나도 한 번 먹은 적 있는 그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포포가 먹을 만한 약은 그것뿐이었다. 그건 진통 효과도 있으면서, 포포가 기운이 흐트러졌을 때 먹는 거였던 것 같은데.

란에게 되묻자,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덧붙였다.

“그래서 그런지 좀 걱정됩니다요…….”

뭐지? 분리 불안증, 뭐 이런 건가?

일단 포포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여노나 자타가 알려주었을 테니까…….

그리 크게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포포는 지금 혼자가 아니니까.

돌아가면 뽀뽀를 잔뜩 귀여워해 줘야지.

“란, 이제 가자.”

노군이 란을 불렀다. 그러자 란이 내게 고개를 한번 숙여, 묵례를 하더니, 노군에게로 총총총, 뛰어갔다. 그의 너구리 꼬리가 흔들렸다.

란과 노군이 떠나고, 어느덧 성년식도 마무리되어 가는 듯했다. 그렇기에 나와 백령, 그리고 자하도 돌아갈 채비를 했다.

“벌써 가냐, 백령? 하루 더 있다 가는 건 어때?”

뭐? 하루씩이나 똥개를 더 보라고? 새로 나온 고문인가?

“거절하지.”

“그럼 아리만 두고 가.”

그의 말에 내가 고개를 격렬히 저었다.

저 똥개가 뭐라는 거야, 지금?

“나, 나, 갈 거야…….”

백령의 옷자락을 꼬옥, 쥐었다. 설마 백령이 그럴 리 없겠지만, 날 두고 가지 말라는 일종의 신호였다.

오히려 바랑이 그런 나를 귀여워죽겠다는 듯이 내려다보았다.

역시 이 똥개는 미쳤어.

“아리야, 그냥 서쪽 땅에서 사는 거 어떻냐? 네가 온다면 이랑이고 뭐고 너한테 자리 물려줄게.”

난 서쪽 땅의 주인 자리 따위, 필요 없다, 이 똥개야!

눈을 가늘게 뜨고 바랑을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왜, 이제 동쪽 땅은 지겨울 때도 됐잖…….”

“바랑, 쓸데없는 소리는 집어치우지.”

옳지, 백령.

똥개가 헛소리하기 시작하자, 백령이 그의 입을 막았다. 바랑이 입맛을 다시며 날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어쭈, 똥개, 그래봤자 넌 똥개야.

“바랑 님, 저희 아리 님은 평생 저희 궁에서 모실 테니, 관심 꺼주시지요. 그렇죠, 백령 님?”

“이만 가지.”

자하의 말에 백령이 아무런 답도 하지 않은 채 뒤돌았다. 나도 묵묵히 그들을 따라갔다.

자하의 말에 백령이 수긍해줬다면, 좋았을 텐데…….

살짝 백령에게 섭섭한 감정이 일었지만, 금방 그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애썼다.

내가 뭐 어쩌겠어……. 백령의 생각인 걸……. 섭섭해하지 말자, 아리야.

그렇게 서쪽 땅에서의 긴 여정이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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