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백령의 말에 사화의 고혹적인 눈동자가 흔들렸다. 궁 안에 있는 모든 신수는, 숨을 죽이고 상황을 지켜보았다.
“동쪽 땅의 모든 것이란 건……, 백령 님의 무엇도 제게 내어줄 수 없다는 뜻이겠군요.”
사화의 목소리가 급격하게 차가워졌다. 아까까지 호소하던 감정은 온데간데없고, 너무나 이성적으로 들렸다.
“전 백령 님께 최선을 다했는데, 말이죠…….”
백령의 무미건조한 푸른 눈이 그녀를 향했다.
“백령 님께선…….”
이내 사화가 고개를 숙이고 낮게 읊조렸다. 사화의 입이 천천히 움직였다.
“제게 빈껍데기라도 주고 싶지 않으신 거군요.”
고개를 숙인 그녀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슬퍼서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분해서 그러는 것인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그리 큰 것을 바란 것도 아닌데…….”
사화가 그 말을 끝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언가를 굳게 다짐한 여인처럼.
아니, 근데 동쪽 땅의 수호석을 주고 안 주고는 백령의 마음이잖아?
그 마음을 자신에게 써주지 않은 걸 왜 백령에게…….
“이제 확실히 알겠군요, 백령 님.”
사화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한동안 그렇게 날 바라보던 그녀는 걸음을 돌려 점점 궁의 출구로 향했다.
“시호 님보다 아리 님이 현재 백령 님에겐 소중하다는 것을요.”
그녀의 말에 백령이 인상을 찌푸려졌다. 그럼에도 사화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유유히 궁을 떠났다.
시호보다…… 내가 더 소중하다고?
보통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내지는 않지 않아?
사화는 무언가 착각해도 단단히 착각한 것 같았다. 백령이 얼마나 날 떠나보내지 못해서 안달인데.
그녀가 궁을 떠난 후, 한동안 궁 안에는 적막감이 일었다. 그 누구도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러던 중, 떠나간 그녀의 모습을 보던 바랑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거, 이랑의 성년식 때문에 모인 거 맞냐?”
그러게나 말이다, 똥개야.
바랑의 말에 옆에서 이랑이 작은 미소를 지었다.
“어째 다들 내 성년식보다는 백령과 아리를 만나기 위해 온 거 같네.”
이랑이 날 보며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아리야?”
그의 물음에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전혀 기분 나빠하는 듯한 기색은 안 보였지만, 왠지 그에게 미안해졌다.
“그런데, 사화가 동쪽 땅의 수호석을 달라고 요구했다니, 사실이야, 백령?”
바랑이 백령을 보며 의아하다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 백령이 그에 입을 열었다.
“내게 첫 번째로 요구한 거였지.”
“그에 대해 넌 별말 안했었겠네. 그러니까 사화는 네게 수호석을 받을 줄 알았나 본데…….”
바랑의 말에 백령이 관심 없다는 듯이 시선을 돌렸다. 바랑이 잠시 고민하더니,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수호석이 첫 번째면 두 번째는 뭔데?”
바랑의 물음에 백령의 시선에 내게 향했다. 잠시간 나를 바라보던 백령이 시선을 돌렸다.
뭐야, 왜 날 보는 건데?
설마 사화가 부탁한 두 번째가 나와 연관되어 있는 건가?
백령이 한동안 대답하지 않자, 바랑이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사화도 그렇고, 미호도 그렇고, 요새 들어 이상하단 말이야……. 아니, 정확히는 아리가 오고 나서인가…….”
바랑이 말을 마치며 날 바라보았다. 그가 헤실거리며 미소 지었다.
“제일 이상한 건 바랑 님입니다만…….”
자하의 말에 이랑이 그를 거들었다.
“맞아, 삼촌. 여태껏 일도 안 하고 놀기만 하던 삼촌이 갑자기 일만 열심히 해서 진짜 죽는 줄 알았다고.”
이랑이 혀를 차며 말했다. 그에 바랑이 더욱 크게 미소 지었다.
“아리랑 약속했으니까.”
……어? 진짜 나랑 한 약속을 지키려고 일을 한 거야?
의외인 바랑의 모습에 눈을 깜빡거리며 그를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근데 두 번은 못 해 먹겠다, 난 역시 일이랑 안 맞아.”
그럼 그렇지, 똥개는 똥개야…….
바랑의 말에 모든 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역시 바랑은 바랑이었다.
“누가 일을 좋아서 하겠습니까, 바랑 님?”
하운이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로 바랑에게 말했다.
“난 아리랑 놀래!”
바랑이 어린아이처럼 활짝 웃으며 내게 날아왔다.
“저리 가, 똥개!”
내가 기겁하며 달아나자, 바랑의 귀가 축, 처졌다.
“아리 님이랑 놀 수 있는 건 저뿐이거든요, 바랑 님?”
자하야, 그거 아니야.
“그런 게 어딨냐, 인마!”
바랑과 자하가 이상한 주제로 투덕거리고 있을 때,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이랑이 백령을 바라보았다.
“백령, 그러면 설산 조사는 완전히 포기하는 거야?”
“그래.”
이랑의 물음에 백령이 무심히 답했다.
“의외네. 어떻게든 할 줄 알았는데. 미호도 동의한 거야?”
“그렇겠지. 그녀 또한 사화의 고집을 못 꺾었으니.”
“정말 괜찮겠어, 백령?”
이랑의 물음에 백령이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신기하네. 아버지에게 들은 바로는 네가…….”
“이랑.”
투덕거리던 바랑이 이랑의 말을 막았다. 웬일로 바랑이 진지한 표정을 하고 이랑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손은 여전히 자하와 투덕거리는 채로.
어깨를 한 번 들썩인 이랑이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예쁜 아리야, 나랑 놀자.”
그때였다. 이랑이 내 손목을 잡고 어딘가로 달리기 시작했다.
어어……?
이 작은 똥……, 아니, 이제 다 큰 똥개긴 한데…….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아무도 말릴 틈이 없었다. 자하는 바랑과 다투느라 바빴고, 백령조차 날 잡기에 이랑은 너무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뒤를 돌아 백령의 표정을 보았다. 이랑을 잡아 죽일 것 같이 노려보고 있었다.
야, 작은 똥개야, 너 진짜 죽어…….
성년식 치르자마자 죽고 싶은 건가?
하여간, 이랑, 너 돌아가면 백령한테 죽었다.
그래서일까, 이랑은 앞만 보고 달렸다. 마치 뒷일은 모르겠다는 듯이.
이랑이 날 데려온 곳은 저번에 그 정원이었다. 나에게 수호석을 건네주었던 그 정원.
정원에 도착한 이랑은 내 손목을 놓아주었다.
갑자기 잡혀서 그런 건지, 손목이 붉어져 있었다.
“이, 이, 아프잖아, 이랑!”
사실 그렇게 아픈 건 아니었지만, 아무 설명 없이 날 이곳으로 끌고 온 이랑이 원망스러워 다그쳤다.
최대한 눈살을 찌푸리고 노려보자, 이랑의 늑대 귀가 축, 처졌다.
“미안해, 아리야.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이랑이 나의 손목을 매만지며 말했다.
어쭈, 어딜 만져?
잠시 멍해져서 하지 못한 말을 하며 손을 치우려는 순간, 이랑이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성년식인데 일이 이렇게 되어 버리니까, 마지막은 내 마음대로 하고 싶었어.”
……아.
이랑의 말에 나는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어찌 보면 이랑의 성년식은 나 때문에 망쳐진 거니까.
“미, 미안해…….”
“왜 네가 사과해?”
“응?”
미안해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이랑의 물음에 내가 되묻자, 이랑이 어깨를 으쓱였다.
“넌 가만히 있었잖아.”
이랑이 날 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밝게 빛났다.
“넌 가만히 있었는데, 주위에서 널 내버려 두지 않는 거잖아.”
그의 말에 나는 한동안 아무런 답도 할 수 없었다.
저, 똥개가 뭐라는 거야…….
그래도 날 갑자기 데려온 것에 대해 따끔하게 한마디 하려 했는데, 말문이 턱, 하고 막혀버렸다.
“그 자리, 조금 버겁지 않아? 여러 군데서 시비를 걸어오니까.”
이랑이 말하는 것을 멈추고 인상을 찌푸렸다.
응?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건가?
그의 손이 점점 내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울지 마. 울라고 한 말 아닌데…….”
이랑이 내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 주었다.
아, 나도 모르는 새에 눈물이 흐른 거구나.
갑자기 눈앞이 흐려졌다. 이젠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나도 의식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눈에 힘을 주어 최대한 울지 않으려 애썼다.
지나간 나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백령에게 버려질까 노심초사하며 고민하던 나, 흑기들의 위협을 받았던 나,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음에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 주위.
“많이 힘들었구나, 아리야…….”
이랑이 날 꼭 껴안았다. 평소였다면 그런 이랑을 거부했겠지만, 오늘은 그럴 수가 없었다.
사실 많은 것이 무서웠다는 것을 깨달아버렸으니까.
“아리야, 너와 되게 비슷하다는 신수를 들은 적이 있지?”
“시호라는 신수에 관한 얘기야?”
이랑의 입에서 시호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 건 처음이었기에, 귀를 쫑긋, 세우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 또한 나를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응, 나도 시호에 대해선 사실 잘 몰라. 근데 네가 답답해할 것 같아서 내가 아는 한 말해주려 해.”
“난 좋아.”
백령도, 미호도, 시호라는 신수에 관해선 말을 심히 아꼈었다. 특히 내가 있는 공간에서는. 나는 그걸 알면서도 굳이 그들에게 묻지 않았다.
어차피 말해주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이랑에게 시호에 관해 조금이라도 들을 수 있다면, 나에게는 감사한 일이었다.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내게 말했었어.”
이랑이 쓸쓸한 투로 말했다. 그가 말하자, 나는 그의 목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뭐를?”
“되게 가엾은 신수가 있었다고.”
이랑이 말하는 가엾은 신수는 다름 아닌 시호라는 것을 나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왔다. 차갑지도, 그렇다고 덥지도 않은 바람에 몸이 감싸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랑을 보며 얌전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 신수는, 구슬의 선택을 받고 막대한 권력을 지녔었지만, 권력에는 관심이 전혀 없는 신수였어.”
“권력에 관심이 없었다고?”
“응. 그래서 자유로워지길 바란 신수였대. 그녀는 되게 사랑스러워서 많은 신수들이 따랐는데, 그런 그녀가 의지할 수 있는 신수는 존재하지 않았었대.”
“왜?”
나의 물음에 이랑이 잠시 말을 멈추고 먼 곳을 바라보다 다시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다들 그녀를 사랑하지만, 그녀에게 바라는 것 또한 많았대. 유일하게 자신과 편히 말할 수 있는 미호는 처음에 그런 그녀를 이해할 수가 없었고, 오히려 그녀를 야단쳤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랑을 올려다보았다.
“미호가?”
“응, 미호는 그녀와 달리 감정이 메마른 신수였으니까.”
……아.
미호, 예전에는 지금보다 더 감정이 메말랐었구나.
그녀가 냉정한 신수라는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나 말고 다른 신수들을 대할 때면 항상 칼 같은 그녀였으니까.
“그녀의 주위는 그녀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어. 어느 한쪽에서도 그녀의 숨통이 트일 수가 없었대.”
이랑이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시선이 오늘만큼은 너무나도 다정하게 느껴졌다.
“마치 지금의 너처럼, 말이야.”
지금의 나……?
이랑과 나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먼저 입을 연 건 이랑이었다.
“그녀와 너의 상황은 여실히 다르겠지만, 어느 정도 비슷한 거 같아서.”
“……뭐가?”
무엇인지 알면서도 이랑을 보며 물었다. 이랑이 묵묵히 대답했다.
“어느 곳에서도 마음을 의지할 수 없는 거.”
……어느 곳에서도 마음을 의지할 수 없다라.
“……그녀는 어떻게 됐어?”
“그다음부터는 들은 바가 없어. 그냥 몇 가지 사실만 알고 있을 뿐이지.”
몇 가지 사실?
눈을 크게 뜨고 이랑을 바라보았다. 호기심 가득한 내 눈을 본 이랑이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하지만 지금은 말 안 할래.”
아니, 이 똥개가 지금 장난치는 건가?
궁금하게 해놓고!
이게 세상에서 제일 나쁜 거라고, 이 작지만 작지 않은 똥개야!
눈살을 찌푸리고 이랑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이랑이 실소를 터트렸다.
“궁금해야 다음에도 날 찾아올 거 아니야.”
저, 저,……! 저런 흑심을 품고 있었다니! 역시 똥개들은 믿을 수가 없다.
이랑에게서 고개를 홱, 돌렸다.
흥.
“안 궁금해, 안 찾아올 거야.”
“……진짜?”
나의 대답이 예상 밖이었는지, 이랑의 귀가 축, 처졌다. 그의 목소리 또한 시무룩해져 있었다.
좀 궁금하긴 한데…….
아, 아니야, 아리야. 정신 차리자. 저런 파렴치한한테 휘둘리면 안 돼!
이런 거 지면 똥개한테 평생 끌려다닌다. 난 절대 그러지 않겠어.
“나, 나 진짜 열심히 설명해줬는데…….”
“응, 고마워!”
그래, 그건 고맙다, 이랑아.
나, 아리. 인정할 건 인정하고 감사 인사를 하는 신수 아닌 신수지.
환하게 웃으며 이랑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그에 이랑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아, 아니, 이런 걸 원한 건 아닌데…….”
이랑이 자신의 늑대 귀를 매만지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랑, 어째 잘 나간다 하더니, 왜 저런대, 갑자기?
나는 이해할 수 없는 그의 행동에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 알 수가 없단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