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랑이님의 딸이 되었습니다 (78)화 (78/167)

78.

백령의 뒤에서 머리만 빼꼼, 내밀고 상황 파악을 위해 비천 쪽을 바라보았다.

비천은 이미 백령에게로 시선을 옮긴 후였다. 둘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먼저 입을 연 건, 비천이었다.

“이런, 백령. 저에게는 보이는 것조차 싫은가 보군요.”

매우 시비를 거는 듯한 어조였다. 그에 백령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제가 이곳에 온 게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나 봅니다?”

비천이 백령의 태도를 비꼬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잘 아는군.”

백령이 그에 짧게 대답했다. 비천의 얼굴에서 웃음이 가셨다. 한순간에 싸늘한 눈빛으로 돌변한 그에, 정적이 일었다.

굳어버린 비천의 표정을 보던 이랑이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비천, 내 성년식인데, 백령의 성질을 긁는 건 그만하지 그래?”

이랑의 만류에 비천이 입꼬리를 올리더니,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가면 갈수록 죽은 시호랑 닮아가네요, 저 아이?”

“비천!”

계속되는 비천의 말에 이랑이 비천을 노려보았다.

비천의 한마디에 모든 이가 그를 바라보았다. 비천은 분명 모두의 시선을 느꼈을 텐데도,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시호가 죽고 나서 동쪽 땅에서 꼼짝도 하지 않던 백령이, 다른 땅에 이리 다니는 거 보면…….”

그가 말을 하면 할수록 백령의 눈빛이 더욱 싸늘해져 갔다.

“저 아이가 시호의 대신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시호의…… 대신?

한 번도 생각지 못했었다. 시호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미호면 몰라도, 백령에게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 의아했다. 그렇기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비천을 올려다보았다.

비천이 그런 내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 광경을 본 백령이 더는 그의 말을 듣기 싫다는 듯, 칼을 뽑아드려 할 때, 그보다 더 화난 것 같은 이가 비천의 앞에 섰다.

“입 조심해, 비천.”

미호의 눈동자가 오랜만에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내게 한 번도 보인 적 없던 얼음장 같은 얼굴로 비천을 노려보았다.

그런 미호의 모습에 비천이 작은 실소를 터트렸다.

“미호, 당신도 저 아이를 무척이나 아낀다죠?”

비천의 목소리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에 미호가 죽일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더 이상 입을 뗀다면, 네 목을 비틀어주지.”

“이런, 당신의 심기를 건드릴 생각은 없었습니다, 미호.”

미호의 살기 어린 목소리에 비천이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백령과 미호를 재밌다는 듯이 바라볼 뿐.

여전히 미호의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그에 비천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전 그저 호기심에 물어본 것일 뿐입니다, 미호. 그러니, 너그럽게 용서해주시지요.”

호기심에 묻기는 개뿔. 그의 말은 누가 들어도 시비조였다.

비천의 말에 미호의 붉었던 눈동자가 점차 본연의 자색을 되찾아갔다.

“두 번은 없어.”

미호의 차가운 목소리에 비천이 짧게 고개를 숙였다. 미호는 그런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쟨 진짜 그냥 미친놈도 아니고 위험한 미친놈이야…….

비천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신수들은 대개 미친놈들이 많았지만,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런데…….”

고개를 든 비천이 노군과 란을 가리키며 기분 나쁜 미소를 다시 지었다.

“저것들은 뭔가요?”

비천의 뜻을 모르는 이는 없는 듯하였다.

누가 들어도 ‘저런 저급한 신수가 왜 제 눈앞에 있는 거죠?’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으니까.

그의 물음에 옆에 있던 하인이 비천에게 작은 소리로 설명했다. 설명을 다 들은 비천은 입꼬리 한쪽을 올렸다.

“은월이 보낸 거군요. 그 호랑이가.”

비천은 여유롭게 말했지만, 화가 머리끝까지 난 것만 같았다.

“산.”

비천이 산을 불렀다. 산이 이내 비천의 근처로 다가갔다.

“당장 은월에게 연락하세요. 조만간 내가 찾아가겠다고.”

“비천 님, 은월 님은 현재 업무가…….”

“언제부터 내 명령에 토를 달았죠, 산?”

산이 고개를 숙였다.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산의 수긍을 들은 비천은 노군과 란의 앞으로 점점 다가갔다.

그런 그의 앞을 이랑이 막아섰다.

“너도 방금 들었다시피, 은월이 보낸 자들이야. 비천, 네가 함부로 대할 권리는 없어.”

“이랑, 성체가 된 건 축하합니다만…… 비키세요.”

“여기선 네 말을 들을 이유가 없어, 비천. 오늘은 더더욱.”

이랑의 말에 잠시간 비천이 그를 바라보았다. 이내 마음에 들지 않는지 혀를 차며 뒤로 물러났다.

비천의 눈엔 불만이 가득해 보였다. 하지만 성년식의 주인공인 이랑의 말에, 더는 뭐라 할 수 없는 듯했다.

“아쉽네요. 좋은 구경을 할 수 있었는데.”

사화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낮게 읊조렸다. 다들 비천과 이랑을 보고 있느라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건 나뿐인 것만 같았다. 그렇기에, 나 혼자 비천에게서 눈을 떼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비천과 꽤 닮아 있었다.

하여간 이 뱀이나 저 뱀이나, 마음에 안 들어.

그 후, 비천은 조용히 이랑의 연회에 참석했다. 궁 안의 신수들은 먹고 마시며 이랑의 성년됨을 다시금 축하하였다.

나는 비천의 행동을 살피느라 그곳에만 온통 신경을 집중했다. 잠시라도 긴장을 늦춰선 안 될 것 같았다.

비천이 말한 시호의 대신…….

즉, 내가 시호의 대체재라는 것.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백령은, 나를 보내려 하지 않았던가. 무언가의 대신이라 생각한다면 날 옆에 두려 했으면 했지, 보내려 하진 않을 것 같았다.

적어도 백령에게서 난 시호의 대체재가 아닌걸…….

흔들리지 말자, 아리야.

백령에 대한 건 잠시 접어두고, 아직도 분이 삭히지 않은 듯한 미호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 백령보다 화를 내던 미호. 미호는 날 시호를 빗대어서 보고 있는 걸까?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 와중, 이랑이 내게로 다가왔다.

“아리야, 기분 안 좋아?”

“응?”

훌쩍 커버린 이랑과의 키 차이 때문에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날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이 많이 안 좋아 보이길래.”

“아, 괜찮아.”

“백령도, 너도 똑같이 비천만 노려보고 있으니까, 연회가 갑갑하게 느껴지는걸?”

그가 백령과 나를 번갈아 보며 환히 웃었다.

“그 목걸이는 아직 하고 있네.”

이랑이 내 목에 걸린 서쪽 땅의 수호석을 보며 말했다.

“응, 네가 필요하다면 다시 가져가도…….”

“괜찮아. 동쪽 땅의 수호석이 있길래, 더는 너에게 필요 없을 줄 알았어.”

이랑이 내 손에 있는 반지를 잠시 흘끗, 쳐다보더니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잘 어울려.”

“고마워, 이랑.”

“아리야, 있잖아…….”

이랑이 내게 무어라 더 말하려 했지만, 자하가 그 앞을 막아섰다.

“이랑 님, 몇 번이나 말했지만 아리 님에게 너무 가까이 붙는 건 안 됩니다!”

자하의 말에 이랑이 억울하다는 듯한 눈망울을 했다.

“나 오늘 성년식인데……?”

“성년식이고 나발이고 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자하의 단호한 태도에 이랑이 입맛을 다시며 자리를 떠났다. 곧이어 이번엔 미호가 내게 다가왔다. 아니, 정확히는 백령과 내게 다가왔다.

그녀의 자색 눈동자는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오늘따라 슬퍼 보였다.

“아리야…….”

미호가 힘없이 나를 불렀다. 그러고 보면 유독 미호는 내게만 약했다.

“응, 미호.”

그녀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러지 않는다면, 그녀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았다.

“비천의 말은, 너무 신경 쓰지 마.”

미호가 우물쭈물하며 내게 말했다. 나는 여전히 그녀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미호…….”

“왜, 아리야?”

“날 보면……, 시호가 생각나?”

그냥 궁금했다. 그녀가 내게 잘해주는 이유. 유독 약한 이유. 죽은 동생인 시호가 생각나서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내게 확실히 말함으로써 그녀 또한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았다.

미호의 자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의 마음이 그만큼 흔들린 것 같았다. 그렇기에, 나는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흔들림이 점점 잦아들며, 그녀가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아니, 아니야, 아리야.”

미호가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그녀는 분명 내게 말했지만, 내게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에게 되뇌는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이 이상 그녀에게 묻는 건 그만두기로 했다.

“응. 알았어, 미호!”

활짝 웃었다. 그러자, 미호도 나를 따라 힘없이 미소 지었다.

“미호, 신경 쓰지 마…….”

혹여 그녀가 날 보며 그녀의 동생인 시호를 떠올린다 하여도 그리 기분이 나쁘거나 하진 않기에, 이대로 넘어가기로 했다.

“아리야.”

그녀가 나긋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응?”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가 한동안 입을 열기 망설이는 듯했다.

“……아니야.”

미호가 고개를 저었다. 무언가 체념이라도 한 것처럼.

“미호.”

백령이 그런 그녀를 불렀다. 그에 정신을 차린 미호가 백령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상태가 별로 안 좋아 보이는군.”

백령의 말에 미호가 다시금 나를 바라보았다. 어딘가 쓸쓸해 보이는 눈망울이었다.

“……알았어, 백령. 난 이만 가는 게 좋겠다.”

그녀는 백령에게 말하는 와중에도,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남은 연회, 즐겁게 즐기길 바라.”

미호가 모든 신수들이 들을 정도로 큰 소리로 말하자 그에 신수들이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인사했다.

그녀가 궁을 떠나고 얼마 안 가, 비천도 발걸음을 움직였다.

“저도 이만 가야겠군요. 좀 더 많은 얘기를 나누고 싶지만…….”

비천이 나와 백령 쪽을 바라보다 노군과 란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은월을 찾아갈 일이 생겼으니.”

그가 이후, 궁을 나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바랑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여간, 초대하겠다고 한 적도 없는데 멋대로 오겠다고 통보하더니……. 연회 분위기만 망칠 줄이야, 쯧쯧.”

바랑이 혀를 찼다. 그에 백령이 그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애초에 네 입이 좀 더 무거웠더라면 이럴 일도 없었을 듯한데.”

백령의 말이 백 번, 천 번 맞는 말이다, 이 똥개야.

“나도 이렇게 될 줄 알았나, 뭐.”

“삼촌, 이번 건 정말 잘못했어. 내 성년식인데 말이야.”

이랑도 백령을 도와 바랑에게 말했다. 나도 그들에게 합심하기로 했다.

다가오는 바랑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절로 가, 똥개.”

“아, 아리야?”

“흥.”

그에게서 고개를 홱, 돌리고 백령 옆에 붙어 섰다. 그에 바랑이 다가오지 못하고 쭈뼛거렸다.

백령이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할 말 있어, 백령?”

그를 올려다보며 묻자, 그가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미호도 말했지만, 비천의 말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으면 좋겠군.”

백령이 말을 하며 어색해했다. 나름 나를 생각해서 한 말이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기에, 그를 향해 활짝 웃어 보였다.

“신경 안 써!”

백령의 아름다운 푸른색 눈이 잠시간 날 똑바로 응시했다. 그 눈빛이 싫지 않아서, 아니, 오히려 더 마주하고 싶어서 나도 그를 열심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도 잠시, 이내 사화가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백령 님, 기분은 괜찮으신지요.”

아까 좋은 구경이라 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걱정하는 척이래?

하여간 마음에 안 들어.

“아리 님, 제게 무슨 할 말이라도…….”

“없어.”

내 시선을 느낀 그녀가 내게 물었지만 나는 단호히 답했다.

“이제야 봤는데, 아리 님의 손에 있는 거, 동쪽 땅의 수호석이 아닙니까?”

사화의 눈이 가늘어졌다. 마치 뭔가가 단단히 마음에 안 든다는 눈빛이었다. 이내 사화는 백령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백령 님, 어째서 저것을…….”

사화가 백령에게 원망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그에 백령이 그녀를 무미건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제게 달라, 전에 부탁했을 텐데요.”

“네게 줄 이유가 뭐지?”

“백령 님이 원하시는 설산 조사를 허가하기로 했지 않았습니까?”

설산 조사를 허가한다고?

이제 와서 갑자기?

그녀가 여태까지 거부했던 설산 조사를 어째서 허가한 거지?

“난 분명 너와 거래하지 않는다 일렀을 텐데.”

“다른 것도 다 안 된다면, 수호석 정도는 제게 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사화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송곳니가 금방이라도 그녀의 입술에 파고들 것만 같았다. 또한 그녀의 눈동자는 촉촉이 젖어 있었는데, 그 모습마저도 너무나도 아름답고 고혹적이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도 백령은 전혀 흔들림 없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동쪽 땅의 그 무엇도, 네게 내어줄 것은 없다.”

백령이 단호히 말을 덧붙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