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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님의 딸이 되었습니다 (77)화 (77/167)

77.

오랜만에 방문한 서쪽 땅은, 전보다 조금 조용해진 것 말고는 큰 변화가 없었다. 서쪽 땅의 작은 주인, 이랑의 성년식이라는 큰 행사를 앞둔 탓에 땅 전체가 긴장하고 있는 듯했다.

“오셨군요. 동쪽 땅의 주인이신 백령 님, 그리고 작은 주인이신 아리 님. 이랑 님의 성년식에 방문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하운이 궁 앞에서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그의 인사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이군, 하운.”

“오랜만입니다, 백령 님.”

백령의 인사에 하운이 가볍게 묵례를 한 후, 궁 안을 정중히 가리켰다.

“그럼, 이쪽으로.”

하운이 안내해주는 곳으로 따라갔다. 예전에 청아와 은월, 그리고 산이 있었던 그곳이었다.

성대하게 꾸며진 정원은, 척 보기에도 큰 행사를 앞두고 있는 듯해 보였다.

“아리야, 왔구나.”

이랑이 우릴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성체가 된 걸 축하한다, 이랑.”

“백령, 고마워.”

백령의 축하 인사에 이랑이 내게 오던 걸음을 멈추고 백령의 앞에 섰다. 자하도 백령의 옆에 서서 고개를 숙였다.

“이랑 님, 성체가 되신 걸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별로 진심이 느껴지진 않는데……. 어쨌든 고마워, 자하.”

누가 들어도 자하의 말투는 진심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성의가 없어 보이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이랑은 그냥 넘어가는 듯했다.

이랑이 나를 바라보았다.

축하해달라는 거겠지?

“……이랑, 성체가 된 걸 축하해.”

나의 말에 이랑이 환하게 웃었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밝게 빛났다.

“고마워, 아리야.”

그가 부드럽게 내게 말했다. 이랑이 똥개라서 그렇지, 목소리도 나긋나긋하고 얼굴도 잘생긴 것이, 제법 번듯한 신수로 자란 것 같다.

“아리야, 왔구나!”

그때, 저 멀리서 손을 흔들며 달려오는 바랑이 보였다.

아아, 그러고 보니 여기 똥개네 궁이었지…….

잠시 중요한 걸 잊고 있었다. 그래도 백령이 옆에 있으니 설마 되지도 않는 짓을 하진 않겠지.

곧 내 생각이 너무나도 오만했다는 걸 깨달았다.

“우리 아리, 많이 컸구나!”

“오지 마, 똥개!”

똥개가 내게로 점점 다가오며 손을 뻗었다. 저런, 저런 파렴치한 손이 어딜!

“바랑. 이제 이랑이 성체가 됐으니, 하루빨리 자리를 넘겨주고 싶은 건가.”

그런 바랑의 손길을 저지하고 날 구한 건 다름 아닌 백령이었다. 그의 무미건조한 눈에 바랑이 꼬리를 내렸다.

“하하, 백령, 그럴 리가. 아직 미호한테 정식으로 임명받은 것도 아니고…….”

“그럼 목숨은 아껴두지 그래.”

“어어, 당연히 내 목숨은 소중하지.”

바랑이 식은땀을 흘리며 쩔쩔맸다.

“어째, 저번보다 보호가 더 심해진 거 같은데…….”

바랑이 백령을 보며 중얼거렸지만, 백령은 그에 답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성년식을 급하게 당긴 이유가 뭐지, 바랑?”

“아아, 그거…….”

“어쭙잖은 말로 둘러댈 생각은 마라. 비천과 관련된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으니.”

백령의 말에 바랑의 뾰족한 귀가 바짝 솟았다. 바랑이 서둘러 산을 바라보았지만, 산은 딴청을 피우며 바랑의 시선을 피했다.

“큼큼, 비천이 이랑의 성년식에 참석한다고 그러더라.”

“그가 참석하게 된 이유가 있을 텐데. 네가 아리에 관한 말을 흘렸다던가.”

“…….”

백령의 말에 바랑이 아무런 말도 못 한 채 꼬리를 내렸다. 그에 백령의 눈이 가늘어졌다.

“맞나보군.”

“그가 내게 집요하게 물어봐서 어쩔 수 없었어.”

뭐? 이 똥개 녀석이 그 미친 뱀한테 내 얘기를 해서……!

바랑을 한껏 노려보았다. 나의 뾰족한 시선에 바랑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아, 아리야?”

“똥개, 내 이름 부르지 마!”

나의 호통에 바랑이 그 자리에서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 아리야…….”

내가 다시는 바랑이라고 부르나 봐라, 어림도 없어.

바랑에게서 고개를 홱, 돌렸다. 그에 이랑이 바랑을 보며 혀를 쯧쯧, 두어 번 찼다.

“삼촌, 이건 삼촌이 잘못했어.”

“네가 뭘 알아, 인마!”

바랑이 억울하다는 듯, 이랑을 향해 소리쳤다. 그럼에도 이랑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너, 너, 이제 삼촌 자리를 꿰찬다고 날 이렇게 무시하냐?”

“아니야, 삼촌. 난 원래이랬어. 그리고, 성체가 된다고 바로 자리를 물려받는 것도 아닌데.”

“빨리 가져가 버려라, 제발. 늙은 내가 뭔 고생이냐?”

바랑이 자신을 ‘늙었다.’라고 말했지만 아무도 바랑을 그런 시선으로 보는 신수는 없었다. 이랑마저 바랑의 헛소리에 혀를 찼으니.

내가 보기에 똥개는 한 오백년은 더 정정할 거 같은데.

“삼촌, 헛소리가 부쩍 늘었어.”

“가면 갈수록 형님 판박이라니까, 이랑, 너.”

바랑의 말에 이랑이 작게 미소 지었다. 어딘가 씁쓸해 보이는 미소였다.

“다들 여기 모여 계셨군요.”

그때,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뒤편에서 들려왔다.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사화였다.

“어어, 사화, 왔냐?”

바랑의 인사에 사화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랑 님, 성체가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리옵니다.”

사화의 축하에 이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사화. 이렇게까지 찾아주니.”

이랑의 말이 참 오묘하게 들렸다. 마치 ‘나를 축하해주기 위해 온 게 아닐 텐데,’라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사화는 바로 백령의 앞으로 향했다.

“백령 님, 오랜만에 뵙는 듯하군요.”

사화가 얼굴을 붉히며 백령에게 낮게 읊조렸다.

저, 저, 저럴 줄 알았어!

사화는 다른 이들은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백령에게 사화 또한 안중에도 없는 듯하지만.

“미호는 아직인가?”

백령이 바랑에게 물었다. 그러자, 바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어, 미호, 곧 온댔는데……. 늦어지네. 미호가 빨리 오면 그냥 비천 오기 전에 끝내면 되는데, 쩝.”

바랑이 아쉬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호, 빨리 와 줘…….

“근데 이제 봤는데, 아리 귀 생겼네?”

바랑이 내 귀를 가리키며 백령을 바라보았다. 백령이 그런 바랑의 손을 잡아 내렸다.

“신경 끄지.”

“맞습니다, 바랑 님은 신경 끄시지요.”

백령과 자하의 말에 내가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암암, 신경 꺼야지, 똥개는.

“흐응……. 백령처럼 ‘호랑이’귀라니, 아리한테 조금 안 어울리는걸.”

“신경 꺼, 똥개.”

“너무해.”

그의 이상한 소리에 내가 재차 그를 똥개라 부르자, 그의 귀가 축, 처졌다.

아무리 그래도 어림도 없어.

“아리가 점점 까칠해지는 거 같은데, 백령.”

“네 착각인 듯하군.”

맞아, 맞아. 똥개의 착각이지. 너한테만 까칠한 거라고.

비슷한 부류의 대화가 계속해서 흘러갔다. 그러던 와중, 누군가의 등장에 모두가 하던 대화를 멈췄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

이제 막 궁에 도착한 듯한 미호가 우릴 보며 서 있었다. 미호의 옆에는 마루가 함께 있었다.

“아리는 벌써 도착해 있었네.”

미호가 단숨에 내 앞으로 당도했다. 그녀가 부드러운 손길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미호, 아리 밖에 안 보이는 거 같네.”

이랑이 미호의 옆에서 중얼거렸다. 그럼에도 미호는 내 모습을 살피기 바빴다.

“귀가 생겼네, 아리?”

아아, 맞다. 항상 가리고 있어서 미호도 처음 보는구나.

“응, 미호.”

“그래…… 예쁜 귀구나.”

미호가 내게로 손을 뻗자 그런 그녀의 손을 백령이 잡아 저지했다.

“미호, 이제 성년식을 시작했으면 좋겠는데.”

“그래, 그러고 보니 내가 모두를 기다리게 했네. 미안해.”

미호가 싱긋 웃더니, 바랑을 바라보았다. 그에 바랑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곤 입을 열었다.

“그럼, 제대로 된 성년식을 시작해볼까?”

바랑의 말에 하인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궁의 문이 열리고, 그 앞에는 수많은 서쪽 땅의 신수가 서 있었다.

미호가 날 쓰다듬던 손길을 거두고 이랑과 수많은 신수 앞에 섰다.

그때, 서쪽 땅의 하인으로 보이는 자가 무언가를 들고 미호에게 정중히 내밀었다.

교지처럼 보이는 두루마리를 집어 든 미호가 수많은 신수 앞에서 두루마리를 풀었다.

미호가 두루마리에 쓰여 있는 내용을 차근히 읽어 내려갔다.

“서쪽 땅의 작은 주인, 이랑. 그의 성체가 됨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오늘 성년식을 올리는 그대에게 나의 축복을 전하리라.”

미호가 그 말을 끝으로, 두루마리를 이랑에게 넘겼다. 공손히 두루마리를 받아든 이랑이 미호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로써, 이랑, 너는 온전히 서쪽 땅의 작은 주인으로서의 책임을 다 해야 할 것이다.”

미호의 손에 무언의 빛이 일며 곧, 그 빛을 이랑에게 전했다.

이랑이 빛을 받아들자, 지켜보던 서쪽 땅의 신수들이 탄성을 내지르며 환호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서쪽 땅의 지도자로서, 현 주인인 제 삼촌, 바랑과 함께 그 책임을 다하겠습니다.”

이랑의 말은 환호에 살짝 묻히기도 했지만, 모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이후, 서쪽 땅의 수많은 신수에게 인사를 마친 이랑은 뒤를 돌아, 바랑에게로 다가왔다. 바랑 또한 두 손 가득 무언의 빛을 모아 이랑에게 건넸다.

바랑의 빛까지 받아들자, 신수들의 환호성은 더욱 커졌다. 곧이어, 성년식을 마무리하듯, 궁의 문이 닫혔다.

“후우, 어찌어찌 마무리하긴 했네. 고생했어, 미호.”

바랑의 말에 미호가 내게로 다가왔다.

“아리도 곧 할 수도 있겠다, 성년식.”

미호가 환하게 미소 지으며 내게 말했다. 그런데, 그녀의 웃음에 힘이 없어 보이는 건 나만의 착각일까.

“아직은 먼 듯하지만요.”

사화가 날 내려다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왠지 기분이 나빴다.

“어? 벌써 끝난 겁니까요?”

그때, 궁 안으로 누군가가 들어왔다. 궁 하인의 안내를 받으며 들어온 인물은, 란과 노군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그들에, 반가운 마음이 일었다.

미호가 그들의 앞에 섰다.

“너희는……?”

“아, 미호 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노군입니다.”

“아아, 은월이 대신 보낸다던 그자들인가. 노군, 너는 천강의 하인이기도 했었지.”

“예, 기억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직 연회가 남아 있으니, 즐기도록 하게.”

미호는 그 말을 끝으로 그들에게서 뒤돌아섰다. 그에 미호의 눈치를 살피던 란이 내게로 총총, 걸어왔다.

“헤헤, 아리 님, 오랜만입니다요.”

“오랜만이야, 란!”

란의 인사에 백령이 그를 석연치 않는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란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아는 사이지?”

백령의 눈에는 의심이 가득 차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무미건조한듯했지만, 으르렁대는 것 같기도 했다.

“저번에 은월과 남쪽 땅에 갔을 때 만난 아이야, 날 도와줬어.”

“그렇군.”

나의 설명에 백령이 란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란이 쭈뼛쭈뼛 움직이더니, 노군에게로 돌아갔다.

아마 백령의 시선에 겁을 먹은 듯하다.

“백령.”

내가 그를 부르자, 그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란 겁먹은 것 같아.”

“…….”

“너무 그러지 마.”

나의 말에 백령이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그의 호랑이 귀가, 약간 쳐진 것이,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뭐야, 내가 뭐라 했다고 기분 안 좋아진 거야?

처음 보는 백령의 모습에 입을 다물지 못한 채로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의 무미건조한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백려…….”

백령을 부르려던 찰나, 사화가 날 불렀다.

“아리 님.”

사화의 눈이 기분 나쁘게 나를 내려다보았다.

“오늘은 그 하급 여우를 데려오지 않으셨나 봅니다?”

포포를 얘기하는 건가.

그녀의 말투는 상당히 정중했고, 사근사근했지만 기분은 매우 좋지 않았다.

내가 아무런 답도 하지 않은 채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아쉽군요. 좋은 구경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사화가 내게서 시선을 거두더니, 란과 노군을 바라보았다.

왠지 감이 좋지 않은 걸…….

사화의 말이 영 찝찝했다. 계속해서 사화의 말을 곱씹어보았다. 그러자, 여노가 했던 말이 뇌리에 스쳤다.

“비천 님은 중급, 또는 하급 신수들을 매우 싫어하시거든요…….”

맞아, 그래서 여노와 뽀뽀는 궁에 남은 건데…….

그런데, 은월이 그걸 몰랐을 리가 없다. 어째서 노군과 란을 보낸 거지?

노군 또한 비천에 대해서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은월이 어째서…….

그때, 새로운 목소리가 궁 안에 울려 퍼졌다.

“오랜만에 오는군요, 서쪽 땅의 궁은.”

목소리의 주인은 비천이었다. 모두가 비천이 궁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백령의 인상이 눈에 띄게 구겨졌다.

비천이 궁 안으로 들어서자,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치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비천의 시선이 내게 머물렀다. 그가 기분 나쁜 미소를 지었다.

역시 또라이야, 쟤.

하지만 곧이어 시야가 가려져 비천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백령이 곧바로 나의 앞을 막아섰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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