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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님의 딸이 되었습니다 (76)화 (76/167)

76.

“그런데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으시는 겁니까?”

자타가 생각에 잠긴 내게 물었다. 갑자기 나온 나래에 관한 얘기가 뜬금없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

“그냥. 그럴 일이 좀 있어서.”

나의 대답에 자타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 이상 그에게 답해줄 말은 없었다. 다행히 자타도 크게 신경 쓰는 것은 아닌지, 고개를 돌려 다섯 개의 반짝이는 돌들을 턱으로 가리켰다.

“공기놀이라도 하고 계셨던 겁니까?”

“어, 자타도 공기놀이를 알아?”

자타가 정자에 앉았다. 다섯 개의 돌들을 만지작거리던 자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렸을 적에 많이들 했습니다. 이 놀이는 모르는 신수들이 드물 정도니깐요.”

“그래? 한번 해볼래?”

자타가 시범을 보이듯, 공기놀이를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공기를 던지고 잡고 받는 자타의 손길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지켜보았다.

자하가 못하던 2단부터, 4단까지 완벽하게 선보인 자타는, 마지막으로 돌들을 손등에 얹더니 다섯 개의 돌들을 한 번에 던지고 잡았다.

“이게 공기놀이의 모든 단계입니다.”

“자타, 잘하네.”

“아마 시키면 못하는 신수가 드물 겁니다. 어릴 때 다들 해보니깐요.”

이상하다, 자하는 못하던데…….

자하는 1단도 연습하고 온 것 같았다. 그런데, 보통 신수들은 다 한다니…….

혹시 어릴 때 친구들이 자하랑 안 놀아준 건가?

자하의 독특한 성격을 떠올리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니면, 다른 사정이 있거나.

그래서 나랑 놀려고 놀이를 생각해 오는 건가?

흐음…….

“자타, 혹시 다른 재밌는 놀이는 없어?”

“재밌는 놀이, 말입니까?”

“응, 좀 여럿이서 즐길 수 있는 거로.”

자타가 잠시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곧 입을 열었다.

“아, 이 공기들을 이용해서 할 수 있는 놀이가 있었던 거 같기도 합니다만…….”

자타가 돌 하나를 짚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공기놀이와 달리, 여럿이서도 즐길 수 있는 놀이가 있긴 합니다.”

“그게 뭔데?”

자타가 정자에서 일어나더니, 어디론가 향했다. 나와 포포도 그를 따라갔다.

자타가 나뭇가지를 주워 오더니, 땅에 이상한 모양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칸을 나누더니 번호를 적기 시작했다.

“이게 뭐야?”

“이건 사방치기라고 하는 놀이입니다. 제가 그린 이것은, 사방치기를 하기 위한 판입니다.”

“사방치기?”

그건 또 뭔 소리야?

사방을 치라는 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자타가 설명을 덧붙여주었다.

“예, 땅따먹기라고도 합니다.”

땅, 땅따먹기?

자타가 땅에 그려놓은 것을 가리켰다.

“밑에 있는 두 칸은 땅, 맨 위에 있는 칸은 하늘. 그리고 가운데에 네 개의 땅이 있습니다.”

“응, 응.”

“어릴 때는 숫자 대신 네 개의 땅에 각각 동쪽 땅, 서쪽 땅, 북쪽 땅, 남쪽 땅의 주인들 이름을 써놓기도 했습니다.”

자타가 어릴 적을 회상하는 듯했다. 그가 옅은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사방치기에 관해 설명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아무튼, 돌을 던지고 이렇게 차례대로 땅을 따먹는 놀이입니다.”

자타가 설명을 마치고 돌을 내게 건네주었다. 돌을 넘겨받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대충 어떻게 하는 건지 알겠다.

“전 그럼, 백령 님께 편지를 전하러…….”

“아, 자타.”

뒤를 돌아 떠나는 자타를 붙잡았다.

“최근에 은월이 보낸 편지는 없어?”

“은월 님이요?”

“응…….”

자타가 은월이라는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요. 요즘 은월 님의 부름을 받은 기억은 없습니다만……. 혹, 전할 말씀이 있는 거라면 제가…….”

“아냐, 괜찮아.”

손사래를 치며 그에게 괜찮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그대로 짧은 묵례를 하곤 백령의 집무실로 향했다.

“난 싸부한테 전할 말 있는데…….”

“꿈도 꾸지 마, 뽀뽀.”

이 간사한 여우 녀석이, 은월한테 어떤 쓸데없는 말을 또 전하려고!

포포를 노려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의 복슬복슬한 포포의 여우 꼬리가 축, 내려갔다.

“근데 이 놀이, 안 할 거야?”

포포가 자타가 그려놓은 사방치기 판을 가리키며 말했다.

“자하 올 때까지 기다릴 거야.”

“고양이? 언제 올 줄 알고?”

“곧 올걸.”

포포와 정자에서 나란히 앉아 자하를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안 가 자하가 멀리서 날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아리 님! 공기놀이 2단계 하실 시간…….”

자하가 사방치기 판을 보고 우뚝 멈춰 섰다.

“이건 뭔가요?”

“셋이서 이거 하면서 놀 거야.”

나의 말에 자하가 한동안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점차 짙어졌다.

뭐, 뭐야. 자하 왜 이래?

“자하, 왜……?”

“아, 아니에요, 아리 님.”

자하의 눈시울이 붉어진 것 같은 건 나만의 착각인 걸까……?

“감사합니다, 아리 님.”

자하가 날 보며 활짝 웃었다. 그의 미소가 여태 보았던 자하의 그어떤 미소보다 기억에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한동안 셋이서 사방치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자하는 동쪽 땅을 먹으려고 열심히 했지만, 결국, 한 번도 동쪽 땅을 먹지 못한 채, 사방치기는 끝이 났다.

그로부터 며칠의 시간이 흐른 후, 예상치 못했던 인물이 백령의 궁을 찾아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동쪽 땅의 주인이신 백령 님, 그리고 작은 주인이신 아리 님.”

백령의 집무실엔 백령과 자하, 그리고 나와 포포, 마지막으로…… 곰 신수인 ‘산’이 있었다.

의외의 인물의 등장에 모든 이의 시선이 산에게로 향했다.

“산 님, 어째서 저희 궁에…….”

자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자, 산이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

“나도 오고 싶어서 온 거 아니야. 감사나 너희 일 시키려고 온 것도 아니고.”

“그럼……?”

“이번 성년식 때문에…….”

“예?”

산이 자하에게서 시선을 돌려 백령을 바라보았다. 백령과 그의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동자가 작게 떨렸다. 이어, 그가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이랑 님의 성년식에 모셔가기 위해 왔습니다, 백령 님.”

산이 말을 마치며 백령에게 고개를 숙였다.

“성년식까진 아직 시간이 남았을 텐데.”

“그것이, 조금 당겨졌다고 합니다. 저도 누님에게 자세한 얘기는 듣지 못한 터라, 설명이 불가한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의 말에 백령의 눈이 가늘어졌다. 산은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고 있었다.

“청아는 어디 있지?”

“누님은 남쪽 땅으로 갔습니다.”

남쪽 땅이라면…… 은월에게로 간 건가?

“굳이 전언을 보내지 않고, 네가 직접 찾아온 이유가 뭐지?”

백령의 물음에 산이 질끈 눈을 감았다.

“성년식 준비로 서쪽 땅의 분위기가 뒤숭숭하니, 직접 모시기로 한 것 같습니다. 은월 님께서도 그렇게 하라 명하셨고요.”

“그뿐만이 아닐 텐데.”

백령의 말에 산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지금은 부디 너그러이 넘어가 주십시오, 백령 님. 이후, 바랑 님께서 설명하실 거라 생각됩니다.”

산이 불안한 듯, 인상을 구기며 땀을 흘렸다. 산 또한 지금의 상황에 대해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뭘까, 이건…….

어딘가 수상쩍으면서도 불안했다. 무슨 일이길래 성년식을 갑자기 서두르는 거지?

백령의 집무실은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오랜 침묵을 깬 건, 백령이었다.

“비천이 연관되어 있나 보군.”

백령의 말에 산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에 백령이 그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가 아리를 찾던가?”

뭐? 날 찾아? 왜?

그 미친 뱀이 왜 날 찾아!

산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전 아무것도, 모릅니다, 백령 님. 말할 수도 없고요.”

산의 말에 백령은 확신이 선 것 같았다. 백령이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지.”

백령의 말에 모두가 분주하게 움직였다. 서쪽 땅으로 향할 채비를 하는 것 같았다.

“아리 님, 저는 이번에 함께하지 못할 것 같아요.”

여노가 아쉬움을 머금은 채 내게 말했다. 여노의 강아지 귀가 축, 처져 있었다.

여노가 함께 하지 못한다는 소식은 예상 밖이었다. 며칠 전부터 이랑의 성년식 소식을 들은 여노는 어떤 옷을 내게 입혀야 할지, 행복한 표정으로 고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가 갑자기 함께하지 못한다는 건 굉장히 의외였다. 인상을 찌푸리고 여노에게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왜……?”

나의 물음에 여노가 한숨과 함께 답했다.

“비천 님은, 중급, 또는 하급 신수들을 매우 싫어하시거든요……. 백령 님과의 사이도 그리 좋은 편이 아니신지라……. 아마 자하 님 말고는 따라갈 수 있는 자가 없을 거예요.”

“아루는?”

“아루 님은 현재 정찰을 마치고 궁을 지키러 오신다고 합니다. 자타 님이 계시니, 아무래도 감시하고 일지를 검사할 자가 필요하니까요.”

아루가 궁으로 돌아오는구나……. 정찰하러 떠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아루도 참 고생이야.

“포포, 포포도 저와 궁에 남아 있는 게 좋겠어요.”

여노가 포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포포는 그에 고개를 저었다.

“나는 아리랑 가고 싶은데…….”

“안 돼요, 포포. 너무 위험해요.”

그 미친놈이라면 충분히 포포에게 대놓고 위협을 가할 것 같았다. 그렇기에 나도 나서서 포포를 만류했다.

“뽀뽀, 내가 걱정되는 건 알지만…….”

“힝, 서쪽 땅의 과자, 오랜만에 먹고 싶은데.”

아니, 그게 문제인 거야?

포포가 입맛을 한번 다시더니, 훌쩍이며 아쉬움을 표했다.

저, 저, 요망한 여우 녀석. 나보다 과자가 중요하다, 이거지?

눈살을 찌푸리고 그를 노려보았지만, 포포는 여전히 과자 생각에 훌쩍이고만 있을 뿐이었다.

“바보 여우.”

“응? 아리야, 왜?”

포포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에 전투 의지를 상실한 나는, 고개를 작게 절레절레 흔들었다.

“금방 다녀올게, 뽀뽀.”

포포가 없다는 게 상당히 쓸쓸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비천 같은 미친놈을 굳이 포포와 함께 만날 수는 없었다.

“알았어, 아리야. 조심해.”

“응?”

“똥개 조심해, 아리야. 자나 깨나 조심해야 해.”

맞다. 비천을 신경 쓰느라 똥개를 잊을 뻔했네.

이번 성년식……. 그냥 안 하면 안 되나? 온통 미친놈 투성이인데.

바랑과 이랑의 헛소리를 들을 것만 생각해도 피곤한데, 거기에 미친 변태 비천까지 만나야 한다니……. 안 봐도 내 고생길이 훤히 열린 것 같다.

“아리 님, 이쪽으로 오시죠.”

산이 내게 손짓을 했다. 그에, 포포와 여노를 뒤로 하고 그를 따랐다.

“산, 고생했어.”

나의 말에 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요?”

“백령한테 말 전하러 오기 힘들었잖아.”

나는 그가 백령 앞에서 머리를 조아릴 때, 가늘게 떠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기에, 그가 너무나도 안쓰러워 보였다.

“저도 왜 제가 백령 님께 온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누님이 오셨으면 일이 더 잘 풀렸을 텐데…….”

“청아는 남쪽 땅으로 갔다고 하지 않았어?”

나의 물음에 산이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예. 은월 님께 상황을 보고해야 하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백령 님의 궁에 저를 보내다니…….”

산이 볼멘소리를 내며 한탄했다. 산은 백령을 많이 어려워하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도 청아는 백령에게 곧잘 말을 걸었던 반면, 산은 은월이랑 청아에게만 말을 걸었었다.

낯가림이 심한 아이인 건가?

그러고 보면, 일전에도 내게 처음 다가왔을 때를 빼면 내게 말을 잘 붙이지 못했던 그였다.

청아와는 남매 사이이지만 성격이 꽤 다르구나…….

하긴, 쌍둥이인 아루랑 마루도 성격이 꽤 다르니까.

그들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산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흑색 눈동자가 나와 마주쳤다.

그러자, 그가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리며 그의 갈색 머리칼이 흩날렸다.

참 부드러워 보이는 머리칼이다. 곰이라 그런가.

산의 머리칼을 만져보고 싶은 욕구를 꾹 참고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왜 그래, 산?”

“아뇨, 아닙니다. 아리 님을 보니, 갑자기 무언가가 떠올라서요.”

“무언가?”

“네. 비천 님의 명에 관한 걸 은월 님한테 보고한다는 걸 까먹……. 아, 아닙니다. 제가 실언을 했군요.”

비천의 명을 은월에게 보고해?

이게 무슨 소리지?

“그나저나, 전에 뵈었을 때보다 훌쩍 자라신 것 같습니다, 아리 님.”

그가 황급히 말을 돌렸다. 내가 물어도 그가 답해주지 않을 것이 불 보듯 뻔했다.

비천이 그에게 어떤 명을 내렸길래 은월에게 보고를 하는 걸까……?

답답함에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생각해봤자, 나오지 않는 답이었다. 그렇기에 그 생각을 떨쳐 버렸다.

그래, 일단 지금은 일단 미호 일부터 생각하자.

성년식이 당겨졌으니, 미호가 백령에게 준 기한 또한 당겨진 거나 다름이 없었다.

이런저런 고민을 하는 사이, 서쪽 땅으로 떠날 모든 준비를 마친 것 같았다.

저번에 서쪽 땅으로 향할 때와는 사뭇 느낌이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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