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백령이 내 귀를 가리고 있던 머리띠를 풀고는, 내게 머리띠를 쥐여 주었다.
“답답할 듯해서.”
백령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띠를 쓰고 있는 건 생각보다 답답하긴 했으니까.
그러고 보니, 그날, 백령이 내게 떠나도 좋다고 말한 날 이후로 단둘이서 있는 것은 처음이었다.
“형님! 오늘도 멋지십니다!”
……내가 이 간사한 여우 녀석을 잊고 있었구나.
너무 조용해서 있는 줄도 몰랐다. 얜 왜 여태까지 조용했던 거람?
그건 금방 알 수 있었다. 포포의 입가에는 과자 부스러기가 잔뜩 묻어 있었다.
먹느라 바빴구나…….
백령은 포포의 말을 신경 쓰지 않은 채, 계속 내 귀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귀에 달린 장식을 바라보고 있었다.
“못 보던 물건이군.”
백령의 말에 내 귀에 달린 장식을 만지며 입을 열었다.
“바, 받았어…….”
“누구한테?”
그가 무심히 물었다.
하지만 그는 장식이 꽤 신경 쓰이는지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은월한테.”
은월이라는 말에 백령의 인상이 잠시 찌푸려졌다.
은월 얘기에 저렇게 인상을 찌푸리는 백령은 처음인지라, 의문이 들었다.
은월한테 받은 게 문제라도 되는 건가?
“그랬군.”
이내 그는 찌푸렸던 인상을 피고 고개를 돌렸다. 더는 장식에 시선을 두지 않았다. 나는 그런 그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장식이 마음에 안 드는 건가?
“백령,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거라도…….”
나의 물음에 백령이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나는 귀에 달린 장식을 가리키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거…… 별로야?”
나의 물음에 한동안 백령이 나와 장식품을 번갈아 보았다. 이내, 백령이 고개를 저었다.
“예쁜데.”
그의 물음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게 선물한 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군.”
응? 선물한 자라면…… 은월?
은월이 선물한 게 마음에 안 든다는 것인가?
“언제 받은 거지?”
음……. 언제 받았더라? 아, 네가 내 기분을 망쳐놓은 날이려나.
그날을 생각하자, 자동으로 입이 삐죽, 튀어나왔다. 백령은 그런 내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며 답을 기다리는 듯했다.
“내가 동쪽 땅에 온 것을 축하받은 날. 은월은 그날, 선물로 준 거야.”
“그랬군.”
백령이 한동안 잠시 생각에 빠진 듯했다. 곧 생각을 마친 듯한 백령이 자신의 책상으로 가더니, 서랍을 열어 무언가를 내게 건넸다.
“그날 줘야 했는데, 못 줬군.”
백령이 준 건 작은 상자였다. 예쁘게 포장되어 있는 상자는, 무엇이 들어 있을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상자를 조심스럽게 열었다. 안에는 푸른 보석이 박힌 반지가 있었다.
“이건……?”
푸른 보석에는 어떠한 기운이 느껴졌다. 내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와 비슷한 기운이면서도, 어렴풋이 백령의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동쪽 땅의 수호석이 박힌 반지다.”
아, 그래서 이랑이 주었던 보석과 비슷한 기운이 느껴졌던 거구나.
“수호석에 내 기를 넣어놨으니, 네 모습을 가려줄 것이다.”
백령이 무심히 설명을 덧붙였다.
그러면 미호나, 바랑 같은 높은 신수들 앞에서도 머리띠나 천으로 굳이 가리지 않아도 된다는 건가?
여노가 만들어준 머리띠도 예쁘긴 했지만, 조금은 불편했던 차였다. 그렇기에, 내게는 반가운 선물이었다.
백령이 준 반지를 손에 끼었다. 나의 네 번째 손가락에 알맞게 들어갔다.
푸른 보석이 신비롭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아름답고 신비로운 백령의 푸른 눈동자처럼.
“뭐야, 뭐? 뭘 가려?”
포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와 백령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그는 나와 백령의 대화를 알아듣지 못한 듯했다.
백령의 집무실을 나와서도, 포포가 옆에서 계속 그에 관해 물었다.
“뭘 가리는 건데? 뭘?”
포포가 내 치맛자락을 잡아끌었다.
“뽀뽀.”
“응?”
“꼬리 잡히고 싶어?”
“히익!”
나의 물음에 곧바로 포포가 자신의 꼬리를 숨기기 급급했다. 그에, 자연스럽게 포포가 더는 묻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조용해진 포포와 함께 궁 안을 산책하고 있던 와중, 멀리서 자하가 꼬리를 흔들며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아리 님, 아리 님, 아리 님!”
내 경험상, 자하가 내 이름을 일반적으로 짧고 간결하게 ‘아리 님.’하고 부르지 아니하고 ‘아리 니이이임.’이라던가, ‘아리 님, 아리 님!’처럼 여러 번 부른다면 그것은 좋은 신호가 아니다.
고로,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하가 나의 바로 앞까지 당도했다. 그의 손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아리 님!”
“안 해.”
나의 확고한 거절에, 자하가 당황하며 눈을 깜빡였다.
“이, 이게 뭔 줄 알고요?”
“실뜨기인가 뭔가잖아. 나 그런 거 안 해!”
절대 내가 못해서 그런 거 아니다, 정말 재미없어서 그런 거다.
나의 외침에 자하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에요! 실뜨기가 아니라, 새로운 놀이를 가져온 거라고요!”
아니, 그새 새로운 걸 가져왔다고?
이 무슨 끔찍한 소리인가.
실뜨기를 끝낸 지 몇 시간도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새로운 놀이라니. 또 자하를 놀아줘야 한다니!
대체 백령은 얘 일 안 시키고 뭐 하는 거야!
아루랑 여노한테 일 시킬 거 자하한테 좀 시키라고!
아, 물론 자하라면 일 내팽개치는 한이 있어도 날 따라다닐 게 분명했다.
자하가 손을 펼치더니, 반짝거리는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나와 포포는 자하가 펼친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하의 손아귀에는 다섯 개의 반짝거리는 돌 같은 것이 있었다. 어디서 구한 건지, 돌 다섯 개는 예쁜 오색빛깔로 물들어져 있었고 자하의 눈만큼이나 반짝거렸다.
포포와 나의 눈이 동시에 자하의 얼굴로 향했다.
이거, 뭐 어쩌라고?
저걸로 뭔 놀이를 한다는 거야?
“헤헤, 아리 님도 궁금하시죠?”
그래, 인정한다. 조금은 호기심이 생겼다.
단, 자하와 하는 놀이가 아닌 저 돌 다섯 개로 뭘 한다는 건지, 그게 궁금한 거야! 암, 그렇고말고.
자하를 따라 정자로 향했다. 자하가 정자 바닥에다 돌 다섯 개를 놔뒀다.
“이건 공기놀이라는 거에요!”
“공기?”
자하가 반짝거리는 돌들을 가리키며 신나게 대답했다.
“네, 이 돌들을 공기라고 불러요.”
“왜?”
“어쨌든 그래요.”
으, 응, 그렇구나…….
굳이 자하가 모르는 것을 들춰내고 싶진 않기에,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근데 이걸로 뭘 하는데?
아무런 감도 잡히지 않아, 바닥에 놔둔 공기라는 것들을 콕콕 찌르고만 있었다.
“후, 이것도 단계가 있어요!”
“그렇구나.”
“자, 잘 봐요!”
자하가 바닥에 놔둔 공기 하나를 집더니, 위로 던졌다. 그리고 그사이에 재빨리 바닥에 놔둔 다른 공기 하나를 집고 위로 던졌던 공기를 받았다.
그 짓을 몇 번 반복하던 자하가 다섯 개를 모두 손에 쥐었다.
“후우, 이게 1단이에요!”
자하가 땀을 닦으며 말했다. 완벽히 해낸 자신이 대견한 것 같았다.
“아리 님이 1단을 완벽히 해내시면 제가 2단도 알려드릴게요!”
2단은 또 뭐일까…….
1단도 충분히 어려운 것 같은데…….
“자하, 2단은 어떻게 하는 건데?”
“그건 아리 님이 1단을 완료하시면 알려드릴 거에요!”
“미리 시범 보여주면 안 돼? 그러면 할 마음이 생길 것 같은데…….”
최대한 눈을 반짝이며 자하를 바라보았다. 자하한테 내 눈빛이 먹히지 않을 리 없었다.
자하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아, 안 돼요! 아리 님이 1단을 완료하시면 그때 알려드릴 거에요! 저도 시간이 필요하다고요!”
“응? 무슨 시간?”
나의 물음에 자하가 삐질삐질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아, 아차. 아, 아무튼 그런 게 있어요.”
자하가 얼른 나에게 해보라는 손짓을 했다.
흐음……. 어려워 보이는데, 굳이 내가 이런 걸 해야 할까?
“이 놀이는 성장기인 아리 님의 집중력 강화에도 도움이 된다고 그랬어요!”
자하가 눈을 빛내며 뿌듯하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근데 그런 거라면, 나보다는 자하, 너한테 더 필요한 놀이가 아닐까?
근데 이런 건 또 누가 쓸데없이 자하한테 알려준 거야?
“누가 그래?”
“여노가요.”
또 여노, 너의 짓이었구나…….
왜 자꾸 여노는 자하한테 쓸데없는 것을 알려주는 거야!
자하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내가 공기놀이를 시작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 내가 틀리면 가르쳐줄 생각에 신이 난 듯해 보였다.
잘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해보자. 자하가 저런 눈빛으로 바라보니…….
공기놀이를 시작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쉬웠다. 보기엔 굉장히 어렵고 현란해 보였는데, 차근차근 진행하니,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한 번 삐끗한 걸 빼면, 완벽하게 공기놀이를 완료했다.
이 놀이는 생각보다 쉽고, 재미있었다.
“2단은 어떻게 하는데?”
자하가 멍하니 그런 내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의 반짝거리는 눈은 온데간데없었다.
“자하?”
그를 부르자, 멍하니 있던 그가 고개를 저었다.
“네?”
“2단은 어떻게 하는데?”
“아리 님, 아직 1단을 좀 더…….”
“1단은 쉬운걸?”
“그럴 리가 없어요! 제가 1단을 얼마나 힘들게…… 헙!”
……뭐?
자하가 자신의 입을 급히 막더니, 헛기침하기 시작했다.
“어, 어쨌든 1단을 완료하시기 전까진 2단을 알려드릴 수 없어요. 저, 저는 그럼 이만, 일하러…….”
자하가 재빠르게 정자를 떠났다. 나와 포포는 빠르게 달려가는 자하를 보며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자하, 너 아직 2단 못하는구나.
잠깐만, 그렇다는 건, 여태까지 일하고 있었던 게 아니라…… 공기놀이 연습하고 있었던 거야? 나랑 하려고?
자하의 집념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아니, 저 집념을 다른 곳에다 쓰면 세상이 아름다워질 텐데…….
“고양이 갑자기 왜 저래? 요즘 자꾸 신기한 놀이를 막, 생각해 오고.”
“내버려 둬, 성장기인가 봐.”
자하의 성장기에 필요한 놀이래.
포포가 자하가 떠나간 방향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자하가 내버려 두고 간 돌들 다섯 개를 가지고 포포랑 열심히 공기놀이를 했다.
마땅히 다른 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암, 그렇고말고. 절대 이게 너무 재밌어서 그런 거 아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계속해서 똑같은 것만 반복하다 보니 쉽게 질렸다.
“흐음, 이제 뭐 하지?”
포포가 꼬리를 살랑거리며 고민했다. 그도 이제 공기놀이가 질린 것 같았다.
“아리 님?”
그때,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목소리의 주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자타?”
자타의 손에는 편지가 하나 들려 있었다.
“그건 뭐야?”
“아아, 이거 말입니까?”
자타가 들고 있던 편지를 가리켰다.
“이건 아리 님한테 온 편지가 아닙니다.”
“그럼?”
“백령 님에게 온 것인데…… 아리 님과도 연관이 없는 건 아닙니다.”
“응?”
이게 무슨 소리지?
“누구한테서 온 건데?”
“하운에게서요.”
하운? 하운이라면, 서쪽 땅에서 왔다는 거네?
……나 왠지 그 편지 내용 알 것 같아.
“혹시, 이랑의 성년회와 관련된 편지인 거야?”
나의 물음에 자타가 크게 당황했다.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 그냥……. 여러 소식을 들어서.”
“네, 성년회의 일정을 알려주는 편지입니다. 다른 땅의 신수들도 참석하는 게 좋으니까요.”
성년회의 일정이라면……. 미호가 말한 기한이기도 하다.
“성년회는 언제인데?”
“일주일 뒤입니다, 아리 님.”
생각보다 빠르잖아……? 그때까지 미호가 말한 걸, 백령이 생각해낼 수 있을까?
생각보다 빠듯한 기한에 나까지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대론 안 되겠어, 나도 생각해 봐야 해. 백령에게만 기댈 순 없어.
나래와 같은 일이 반복되게 하지 않을 방법……. 그건 무엇이 있을까…….
해결책을 찾으려면 원인을 먼저 찾아야 한다. 나래가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 단순히 어린 나이에 아무것도 모르고 그런 높은 자리에 올라서 그런 건지.
“무엇을 그리 골똘히 생각하십니까?”
자타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내 표정이 심각해 보였는지, 그의 눈동자엔 걱정이 어려 있었다.
잠깐, 자타라면…… 나래를 가장 옆에서 지켜본 측근이잖아.
그라면 방법을 알고 있지 않을까?
“자타.”
“네?”
생각을 멈추고 그를 불렀다. 그러자, 그가 곧바로 대답했다.
“나래…… 일 말인데.”
“네.”
“나래가, 왜 그렇게 됐다고 생각해?”
나의 물음에 자타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곧바로 입을 열었다.
“그녀는 타고나길, 그릇이 작았습니다.”
아, 아니, 그런 대답을 바란 건 아닌데…….
그릇이 작은 거면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거잖아.
“게다가 그녀는, 자신보다 높은 자의 말이 아니면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배움의 기회를 스스로 놓아버린 거였죠. 노군 님이 그녀를 가르쳤다면, 그렇게까지 되진 않았을 텐데…….”
자타의 말투에 안타까움이 묻어 나왔다. 자타 또한 그녀가 그렇게 된 것에 대해 아예 동정하지 않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가장 옆에서 지켜봐 온 그였으니까.
배움……. 배움이라…….
타고난 그릇이 작아도, 배운다면……. 그 그릇 이상을 해낼 수 있지 않을까?
배움의 기회를 스스로 놓아버린 나래. 어쩌면, 이게 미호의 고민을 해결할 수도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