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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님의 딸이 되었습니다 (74)화 (74/167)

74.

자하와의 숨바꼭질은 끔찍한 기억으로 자리매김했다. 다시는 그의 꼬리와 귀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리고 얼마 후, 자하는 이번에 새로운 놀이를 찾아왔다.

“아리 님. 빨리요, 빨리!”

그것은 바로…… 실뜨기라는 것이었다. 나가기 싫다는 나의 변명에 기어코 새로운 것을 찾아온 것이었다.

“……이렇게?”

실로 하는 이 놀이는, 실을 자꾸 이상하게 엮어서 신기한 모양을 만드는 놀이었다.

그런데…… 이거 생각보다 조금 어렵다?

뭐가 잘못된 것인지, 모양이 찌그러져 버렸다.

계속해서 단계가 진행되면 모양이 자꾸만 변하는 것 같지만, 나는 1단계밖에 모르겠다. 결국, 최대가 젓가락 모양을 보는 것. 이곳에서 항상 모양이 찌그러져 버린다.

찌그러진 모양에 자하가 눈만 깜빡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누가 보아도 ‘이걸 또 틀려……?’하고 묻는 듯한 눈빛이었다.

뭐, 인마?

씨이, 바보 자하한테 저런 눈빛을 받으니까 무지 기분 나쁘네.

“근데…….”

“네, 아리 님.”

“이 실뜨기라는 놀이는 누가 알려준 거야?”

“왜요?”

왜긴 왜야! 이딴 걸 누가 알려줬는지 낯짝이나 한번 보자.

누구길래 이런 걸 이 바보 고양이한테 알려준 거냐고!

“아, 그거 저예요, 아리 님!”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여노가 헤실거리며 손을 들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여노, 너!

누군가가 말하지 않았던가,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고. 헤실거리며 웃는 여노에게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몰라, 어쨌든 괘씸죄 추가야.

“자, 여우야. 너도 해볼래?”

자하가 옆에서 꼬리를 흔들며 지켜보던 포포에게 물었다. 포포가 먹던 과자를 내려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여우가 저런 거 해봤자…….

“오오, 너 꽤 잘하는데?”

“에헴.”

뭐라고?

나는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포포와 자하는 내가 보지 못한 모양으로 계속해서 실뜨기를 이어가는 것이 아닌가.

뭐야, 저거 순 바보들의 놀이 아니야?

내가 못하는 거 아니다. 저 놀이가 이상한 거다. 암, 그렇고말고.

“아리는, 이 쉬운 걸 왜 못하는 거야?”

포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게 물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열이 올라 포포의 꼬리를 잡았다.

“아, 아리야. 이거 놓고 말해, 놓고.”

“뽀뽀!”

이 요망한 여우가! 까불고 있어!

그렇게 포포의 꼬리를 잡고 있을 때, 방문이 열리고 익숙한 인물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아루 님, 오랜만이에요.”

여노가 오랜만에 등장한 아루를 반갑게 맞이했다. 아루는 내게 인사를 먼저 한 후, 여노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어딜 그렇게 바쁘게 쏘다니냐?”

“정찰도 가고, 백령 님 따라 바랑 님의 궁에도 갔어.”

자하의 물음에 아루가 하품을 하며 답했다.

바랑의 궁에 가다니, 피곤할 만하지.

“아루.”

“네, 아리 님.”

“서쪽 땅은 어때?”

내심 신경 쓰였었다. 백령이 직접 가기도 했으니까. 이랑이 쓸데없는 말로 날 꾀어낸 거면……. 백령은 헛걸음을 한 거니까.

“듣기론, 큰일이 났다던데. 이랑 님 말씀이라 완전히 믿을 순 없지만.”

자하가 안 믿을 정도면 이랑의 명성도 그다지 좋은 건 아닌 것 같다.

“아, 큰일이긴 큰일이었어.”

아루가 탄식을 내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에 나와 자하의 눈빛이 아루를 향했다.

큰일이었다고?

“뭔데?”

“그게, 바랑 님이……. 안 하던 짓을 하셔.”

“안 하던 짓?”

안 하던 짓이라면…….

바랑을 떠올려 보았다. 거기서 더 이상한 짓이 있을 리는 없고…….

자하의 물음에 아루가 믿지 못하겠단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바랑 님이…… 얌전히 일을 하셔.”

순간 방 안에는 정적이 일었다. 단번에 아루의 말을 이해할 수 있는 자는 없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 바랑이 얌전히 일만 한다는 거야?

“말도 안 돼.”

모두의 입에서 동시에 나온 말이었다. 바랑을 잘 모르는 포포조차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바랑 님이? 거짓말하지 마.”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

“네가 잘못 본 거겠지.”

자하는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 아루의 말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자하의 반응이 전혀 이상한 건 아니지……. 아니, 오히려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다.

끄덕끄덕.

고개를 끄덕이며 아루를 바라보았다.

“진짜예요. 백령 님이 궁에 계셔도 계속 일만 하셨다니까요.”

뭐? 바랑이 백령의 방문에도 일만 했다고?

정말 믿을 수가 없다.

“갑자기 왜 그러시지. 드디어 죽을 때가 되셨나?”

“그런 거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정정하시더라고.”

자하와 아루가 바랑의 건강한 몸 상태에 안타까움을 표했다.

“그럼 왜 그러시지? 바랑 님이 정신을 차렸을 리는 없는데.”

자하의 말에 모두가 동감하며 생각에 빠졌다.

“아, 혹시 저번에 그 일 때문이 아닐까?”

“그 일?”

“아리 님이 일 열심히 하라고 처음으로 바랑 님 이름을 불러드렸잖아.”

“아, 맞다!”

맞다, 그런 적이 있었지?

바랑과 연관된 일은 끔찍한 기억들이 대부분인지라 조금 전까지 잊고 있었다.

근데, 진짜로 내가 이름 불러줘서 그런 거라고? 그런 거면…….

앞으로도 애용해야겠는데?

한 번 이름 불러줘서 이 정도로 잠잠하면 남는 장사지.

“아무튼, 서쪽 땅은 지금 엄청 이상합니다, 아리 님.”

“또 뭐가 있어?”

아루의 말에 재빨리 그를 보며 물었다. 나의 물음에 아루가 어깨를 들썩였다.

“글쎄요. 잘은 모르겠지만 분위기도 평소의 서쪽 땅과는 달라요. 이랑 님이 거의 성체가 되기 직전이어서 그런 건지…….”

“이랑이 성체가 됐다고?”

“거의요. 거의 성장의 막바지인 것 같아요.”

이랑이 성체가 되어 간다니……. 난 아직 조금 남은 것 같은데.

하긴, 저번에 만났을 때도 이랑은 성체와 엇비슷해 보이긴 했다. 게다가 바랑의 말에 의하면, 이랑은 한동안 성장을 안 했다고 했으니까…….

이랑은 왜 한동안 성장을 하지 않았던 걸까?

신수의 성장은 신수마다 다르다고 했다. 하지만 대부분 성장이 빠르고, 높은 신력을 지닌 신수일수록 더욱 빠른 것으로 알고 있다.

이랑은 전대 서쪽 땅의 주인 바랑의 형의 아들. 그런데 대체 왜…….

“아, 희소식이 하나 있습니다.”

“희소식?”

한참 고민하고 있을 때 즈음, 아루가 나를 보며 말했다.

희소식이라니?

“서쪽 땅에 가셨던 백령 님께서 이랑 님에게 경고하셔서 앞으로 그런 편지를 보낼 수 없게 되었답니다…….”

“그래?”

“편지 내용을 들은 하운이 기겁하면서 이랑 님을 크게 혼냈어요.”

언제나 고생은 하운의 몫이구나…….

오늘도 고생하고 있을 하운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나라면 진작 때려치우고 궁에서 나왔다…….

***

수다를 열심히 떨던 아루와 자하, 그리고 여노는 일하러 가버렸다. 그리고 얼마 후, 백령의 궁에 큰 기운이 느껴졌다. 어딘가 익숙한 기운. 이것은 분명 미호의 기운이었다.

미호가 백령을 찾아온 건가?

오랜만에 그녀를 만나러 백령의 궁으로 향했다. 물론, 내 귀를 가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리야, 어디 가?”

포포가 나를 따라왔다. 그가 눈을 빛냈다.

“형님 만나러 가는 거야?”

“으, 응…….”

하여간 요망한 여우 녀석, 이럴 때만 눈치가 빠르다니까.

포포의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그의 꼬리를 잡아끌고 싶은 욕망을 겨우 잠재우고 백령의 집무실 앞에 당도했다.

집무실 안에는 역시나, 미호의 기운이 느껴졌다.

안으로 들어가자, 미호와 백령이 얘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미호가 곧바로 내게 시선을 돌렸다.

“아리, 오랜만이네.”

미호가 날 보고 활짝 웃으며 이리 오라는 듯, 손짓을 했다.

“미호, 오랜만이야!”

최대한 그녀를 반겼다. 누구도 이렇게까지 반기지 않는 나지만, 그냥 왠지 그녀에게는 그러고 싶었다.

날 보는 눈빛이 너무 애처로워서 그런가…….

그리 깊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 백령. 어디까지 얘기했지?”

“곧 서쪽 땅에서 성년식이 열린다, 까지 들었군.”

“아아, 그래, 맞아.”

서쪽 땅에서 성년식이 열려?

이랑의 성년식인 건 안 봐도 뻔했다. 다만 성체가 되면 성년식을 연다는 사실을 처음 안 것이라, 당황스러웠다.

“미호, 성년식이라는 게…….”

나의 물음에 미호가 미소를 머금고 대답했다.

“맞아, 성체가 되는 신수를 축하하는 날이야. 원래는 특정한 날에 다 함께 축하하는 게 관례지만, 이랑은 위치가 있으니까. 아리, 너도 마찬가지고. 나래는…… 성년식을 열기도 전에 자리에서 내려왔지만.”

아, 나래는 성년식을 앞두고 자리에서 내려온 거구나.

처음 안 사실에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아마 그것도 자타가 반란을 서두른 이유 중에 하나겠지…….

“그래서, 그게 뭐가 문제라는 거지?”

백령이 미호를 향해 무심히 물었다. 백령의 물음에 미호가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문제라고? 문제 될 게 있는 건가?

“이번 나래의 처벌을 고민하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어.”

미호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 것 같았다. 그녀가 잠깐 말을 멈췄다. 곧이어 다시 묵묵히 말을 이어나갔다.

“바랑은 자유를 좋아하고, 책임감도 없는 녀석이니까. 한시라도 빨리 이랑에게 자리를 물려주려고 하겠지.”

“그날만 손꼽아 기다리던데.”

맞아. 바로 넘겨줄 거 같은데…….

미호가 잠시간 생각에 빠졌다. 아마 할 말을 정리하고 있는 듯했다.

“나래와 같은 일이 반복될까 봐, 걱정돼. 서쪽 땅도 신수들의 평가가 그리 좋은 건 아니니까.”

“방법이 딱히 없지 않나? 누구에게, 언제, 물려주든 그건 바랑의 몫이니.”

“그건 그렇지……. 이랑은 흑랑의 아들이니까. 당연한 거고.”

흑랑이라면……. 저번에 말한 바랑의 형이자, 이랑의 아빠인 거지?

미호가 고민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알 것 같았다. 나래와 같은 일이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길 원하는 듯했다. 그리고 이제 성체가 된, 자리를 물려받을 이랑이 걱정되는 거고.

가능성을 아예 배제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백령은 전혀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걸 왜 내게 묻는 거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일 텐데. 서쪽 땅에 가보는 게 좋을 것 같군.”

냉정하긴 했지만, 맞는 말이긴 하다. 그래서 백령의 말은 무심해도 대충 걸러 들을 수가 없는 말들뿐이다.

그래서 그에게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는 거고.

하지만 미호는 내 예상과는 달리 백령의 말에 헛웃음을 흘렸다.

“네 탓이잖아.”

미호의 책임 전가에 백령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네가 조금만 덜 유능했어 봐, 다른 땅들의 신수들이 저렇게 불만이겠냐고.”

백령이 한숨을 쉬며 대답하기를 거부했다. 그러자, 미호는 쉴 틈 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니까, 네가 같이 고민해줘도 모자랄 판이라고.”

백령이 이젠 대놓고 그녀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백령이 귀찮다는 듯, 시선을 다른 데에 두더니, 아예 눈을 감아 버렸다.

“그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미호가 입술을 잘근, 씹더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이 간절했다.

마치 ‘한 번만 협조해줘, 아리야.’하고 말하는 것 같달까.

“좋아. 그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아리는 내가 데려갈게.”

미호의 말에 곧바로 백령의 눈이 떠졌다. 그가 미호를 노려보았다.

“농담이 지나치군, 미호.”

마, 맞아. 날 데려가서 어디다 쓰려고, 미호…….

나 또한, 미호를 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농담 아니야. 내겐 그럴 권리가 있잖아? 네가 아리를 데려온 것을 눈감아준 것도, 신국에서 살 수 있도록 구슬을 하사한 것도 나니까.”

그, 그건 맞긴 한데, 미호야…….

“어떻게 할래?”

미호가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백령을 바라보았다. 백령의 푸른 눈에는 한기가 어려 있었다. 그래도 미호는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았다.

“나 대신 방안을 생각해줘, 백령.”

아까의 자상하고 힘없어 보이는 그녀는 온데간데없고, 백령에게 대놓고 요구하고 있었다.

“대답 안 해? 아리, 데려간다.”

미호가 나를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아니, 이대로 미호 따라가는 거야? 이렇게 갑자기?

백령, 뭐라 말 좀 해봐!

“배, 백령!”

다급히 백령의 이름을 외쳤다. 그러자, 백령과 나의 눈이 마주쳤다.

백령이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미호에게 붙들려 있던 내 몸은 백령에게로 기울었다.

미호가 내 손을 놓고 미소를 짓더니, 만족스럽다는 듯 팔짱을 꼈다.

“좋아, 받아들인 거지?”

“귀찮게 하는군.”

백령이 여전히 미호를 노려보고 있었지만, 미호는 자색빛이 도는 자신의 은발을 한번 쓱, 만지며 입을 열었다.

“이랑의 성년식이 끝나기 전까지.”

뭐라 반박할 새도 없이 곧바로 미호의 말이 이어졌다.

“기한이야.”

그때까지 백령한테 방안을 생각하라는 건가…….

그 말을 끝으로 미호는 유유히 백령의 집무실을 나갔다. 그녀가 나가자, 백령이 내 손을 놓았다.

“여우가 노망나니…….”

다음 말은 왠지 알 것 같았다. 분명 예전에도 들었으니까.

그렇기에 내가 그의 말에 덧붙였다.

“사악하기 그지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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