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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님의 딸이 되었습니다 (73)화 (73/167)

73.

다음 날, 날이 밝자 자타가 곧바로 향한 곳은 백령의 집무실이었다. 어제 못한 보고를 끝마쳐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 중요한 보고는 아니었지만, 백령의 궁에 오고 나서 그는 매일 자신의 일지를 보고해야 했다.

그는 아리를 해하려 하고, 남쪽 땅에서 반란을 꾀했던 위험인물로 낙인찍혔기 때문이었다.

보고차 들린 백령의 집무실에서 은월을 만난 것은 그의 예상 밖이었지만.

어쨌든, 자신에게 주어진 보고를 해야만 하는 그이기에, 아무리 은월이 무서워도 백령의 집무실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다시 한번 도착한 백령의 집무실에는 언제나 그랬듯, 백령이 업무를 보고 있었다.

자타가 백령에게 다가가자, 백령이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로 손을 내밀었다.

보고서를 주고 가라는 암묵적인 명이었다.

자타는 들고 온 두루마리를 백령에게 넘겼다.

‘은월 님과 어제 무엇 때문에 다투신 겁니까?’

그의 목구멍까지 의문이 차올랐다. 하지만 자타는 쉽사리 백령에게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근질거리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백령이 나가라는 듯한 눈빛을 보내자 자타는 가벼운 묵례와 함께 백령의 집무실을 나섰다.

백령과 은월, 둘은 사이가 그렇게 좋다고는 할 수 없는 관계였다. 하지만 그 둘은 절대 서로의 신경을 긁지 않는 호랑이들이다. 그런데, 어제 그 둘은 굉장히 심각한 얼굴로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대체 무엇 때문에 백령 님과 은월 님이…….’

그의 머릿속에서 자꾸만 의문이 커져만 갔다. 하지만 백령과 은월, 어느 쪽에 물어본다고 해도 대답해줄 리는 만무했고, 그럴 용기조차 없는 그였다.

그렇기에 그 의문은 접어두기로 했다. 생각해봤자 답이 안 나오는 의문이니까.

그리고 그에게는 백령에 대해 깊이 알 권리가 없기도 하다. 자신은 이곳의 하인이 아니니까.

그가 걸음을 움직여 아리가 있을 만한 곳으로 향했다. 자타가 이곳에 있어야 할 이유는, 아리가 다였다.

그는 이 궁에서 유일하게 백령의 하인이 아닌, 아리의 하인이니까.

***

은월과 만난 후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그를 만나고 난 후, 나는 해야 할 것이 떠올랐다.

“아리 님, 여기까진 이해가 가시나요?”

“으, 응…….”

그것은 글을 읽는 것. 전부터 해야겠다고 마음은 먹었었지만, 말을 꺼낼 기회가 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은월과 소통할 수 있는 수단은 글이 제일 편할 테니까.

그렇게 해서 여노에게 부탁해, 열심히 글을 배우는 중이다. 여노는 나의 부탁을 흔쾌히 수긍하였고, 자하나 아루, 백령, 은월에게 철저히 비밀에 부치기로 하였다.

큼, 이 나이 먹도록 글을 모르는 건 수치스럽단 말이지……. 물론, 다른 이들이 보기엔 나는 아직 어리겠지만.

뭔가, 당연히 알아야 할 것을 모르는 느낌이랄까…….

“아리 님은 습득력이 굉장히 빠르신 것 같아요! 뭐랄까, 원래 알고 있었는데, 잊고 있다가 다시 알아가는 느낌이랄까요?”

……그게 대체 어떤 느낌인 거야?

독특한 여노의 표현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리야, 이 어려운 걸 꼭 해야 해……?”

포포가 옆에서 나를 따라 글을 배우고 있었다. 그는 지루한지 느릿한 손으로 과자를 먹다 하품하며 꾸벅꾸벅 졸았다.

아니, 이 여우가, 왜 졸면서도 과자를 먹고 자빠졌어?

“뽀뽀, 잘 거면 자고, 과자 먹을 거면 과자만 먹어! 자면서 먹지 마!”

“하암. 안 잘 거야. 그런데 아리, 네가 며칠 동안 계속 공부만 하니까 졸리잖아. 난 글자만 보고 있어도 잠이 온단 말이야…….”

……자랑이다.

포포를 보며 혀를 찼다. 여노가 그런 포포를 보더니, 밖으로 산책 한 번 다녀오는 건 어떻냐며, 포포와의 산책을 권했다. 며칠 동안 날 가르치느라 고생했을 여노를 생각하며, 여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후우, 나오니까 좀 살 것 같다, 헤헤.”

포포가 밖으로 나오자, 짧은 다리로 이리저리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하여간, 요망한 여우 같으니라고.

누가 보면 포포가 고생한 줄 알겠다.

“아, 아리 님, 여기 계셨군요.”

산책하러 나온 내게 다가온 건 자타였다. 그가 웬 편지 봉투 하나를 들고 내게로 다가왔다.

“자타, 그게 뭐야?”

“아아, 이거 말입니까?”

자타가 손에 쥔 편지 봉투를 가리키자, 그가 탄식을 내뱉으며 내게 내밀었다.

이게 뭔데?

은월이 보낸 건가?

딱히 생각나는 신수가 은월뿐이었다.

은월 말고는 내게 이런 걸 보낼 자가…….

그때, 자타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난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서쪽 궁에서 온 편지입니다.”

……갖다 버릴까?

안 봐도 쓸데없는 말이 장황하게 쓰여 있을 것 같아 버리려고 하는데, 자타가 그런 나를 저지했다.

“절대 버리지 말라고 이랑 님이 당부하셨습니다.”

“……그렇구나.”

“그래도 정, 아리 님이 버리시겠다면 눈감아 드리겠습니다만…….”

“아냐, 그냥 읽어볼게.”

그래, 안 그래도 요즘 여노한테 글을 배우고 있으니까. 어느 정도 읽을 수 있나, 시험이나 한번 해보자.

편지를 열자, 예쁜 주황색으로 물든 종이가 있었다. 종이를 펼치고 처음부터 차근히 읽어보았다.

첫 문장부터 눈살이 찌푸려졌다.

‘아리야, 잘 지내? 서쪽 땅은 지금 큰일이 생겼어. 그래서 당분간 널 만나러 못 갈 거 같아.’

당분간이라니……? 그 큰일이 잠잠해지면 온다는 건가? 이게 무슨 끔찍한 소리지?

계속해서 읽어내려갔다.

‘아리야, 네 아름다운 푸른 눈망울이 너무 그리워. 너의 보랏빛이 도는 은발이 눈앞에 아른거려. 당장이라도 내 눈에 예쁜 너를 담고 싶어.’

……찢을까?

아아, 아니야, 아리야. 물론, 이 늑대 놈이 날이 갈수록 느끼해지는 게 너무 부담스럽지만, 그냥 인사치레라고 치고 끝까지 읽어보자.

일단 진정하고 다음 문장을 훑어보았다.

‘그래서 말인데, 아리, 너를 서쪽 땅에, 우리 삼촌의 궁에 초대하고 싶어, 올 거지?’

내가 미쳤냐, 내 발로 바랑의 궁에 가게?

하지만 이랑은 내 생각보다 나를 더 잘 알았다.

‘그냥 내가 오라고 하면, 네가 부끄러워할 거 같아서……. 네가 못 오겠다면 삼촌을 끌고 동쪽 땅으로 내가 갈게.’

이, 이 늑대가 감히 날 협박하는 건가?

편지는 마지막 문장까지 완벽하게 적혀 있었다.

‘기다릴게, 아리야.’

편지를 다 읽은 나는 조용히 고개를 자타의 방향으로 돌렸다.

“……왜 그러십니까?”

“앞으로 서쪽 땅에서 오는 편지는 물어오지 마, 자타야.”

“…? 무슨 일이라도.”

자타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에, 편지를 다시 한번 쓱, 훑어보고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이 편지에 대해 차분하게 간략히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냥, 아루와 자하의 말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부정 타.”

나의 말에 자타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어느 정도 수긍하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자하와 여노, 그리고 포포와 나는 백령의 집무실에 앉아 있었다. 탁자 위에는 이랑에게서 온 편지가 놓여 있었다.

“……그래서, 서쪽 땅에 가시겠다, 이 말씀이십니까?”

“응.”

미친 똥개 두 명이 여기로 쳐들어온다잖아. 차라리 내가 가는 게 낫지.

게다가, 바랑이 온다면 백령에게도 폐를 끼칠 게 분명했다.

자하가 탁자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귀와 꼬리가 전투적으로 솟아올랐다.

“전 반대입니다, 아리 님!”

“막 반대할 일은 아닌 것 같아요, 자하 님.”

반대하는 자하를 보며 여노가 그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자하가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여노를 보았다.

“왜?”

“대체 서쪽 땅에 생긴 ‘큰일’이 무엇이길래, 아리 님을 찾는 걸까요?”

“그거야, 뻔하지. 이랑 님이 아리 님을 꾀어낼 속임수에 불과할 거야!”

“하지만 요즘 바랑 님이 이상하게 조용한 건 맞잖아요? 바랑 님이 온갖 곳에 민폐 끼치고 다니는 일이 하루 이틀이 아닌데, 요즘 너무 조용해서 조금 무서워요.”

어? 듣고 보니 그렇네.

여노의 말에, 아무도 별다른 이견이 없었다.

똥개의 명성은 알면 알수록 놀랍구나…….

역시, 그냥 서쪽 땅으로 가야 할까?

“자하.”

“네, 백령 님.”

“내가 가지.”

“예?”

자하가 놀란 토끼 눈으로 백령을 바라보았다. 백령이 그런 자하에게 친절히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서쪽 땅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확인할 필요는 있으니.”

“배, 백령 님?”

자하가 ‘에이, 아니겠지…….’하며 현실을 부정했지만, 백령은 완고했다.

“요즘 그쪽의 낌새가 이상하기도 하니, 한번 살펴보는 게 좋겠군.”

“아니, 어찌 그런 늑대들의 소굴에 백령 님이 친히 행차를…….”

백령이 자하에게 말했다. 자하가 입을 다물지 못한 채로 눈만 깜빡였다.

“진짜 배, 백령 님이…… 직접 가신다고요?”

자하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이랑의 편지를 바라보았다.

‘이랑 님이 보낸 이런 편지 한 통에……?’

라고 자하가 중얼거리며 덧붙였다.

“내가 다녀올 동안 궁과 아리를 지켜라, 자하.”

“네, 백령 님!”

……상황이 왜 이렇게 된 거지?

백령이 직접 간다는 것은 나도 생각지 못한 상황이었다. 나를 남겨 두고, 서쪽 땅에 다녀온다니…….

물론 백령 혼자 간다면, 그리 긴 시간이 소요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조금 찝찝했다.

며칠 전엔 나보고 떠나도 좋다고 하더니, 이번엔 내게 온 편지 한 통에 백령이 움직인다.

이게 무슨 상황일까…….

백령의 생각을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저 가만히 백령을 바라보았다. 그는 내게 눈길도 주지 않았지만, 나는 계속해서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는 거야, 대체?

왜 안 하던 짓을 자꾸 하느냐고!

답답해 죽을 것만 같았다. 은월도 그렇고, 백령도 그렇고, 자꾸만 내게 답은 주지 않으면서 문제만 준다.

이 호랑이고, 저 호랑이고! 왜 알 수 없는 말과 행동을 하는 거야!

그로부터 얼마 뒤, 백령의 궁 안엔 그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왠지 허전한 기분이 일었다.

“아리 님, 아리 님. 저랑 숨바꼭질이라도 하지 않으실래요?”

자하가 방긋방긋 웃으며 내게 물었다. 그의 뭉툭한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나 다 컸다, 이놈아.

물론 아주 다 큰 건 아니지만, 숨바꼭질할 나이는 한참 지났다고!

“그럼 제가 숨을 테니까, 찾아……!”

“짜, 자하!”

황급히 그를 불러 세웠다.

이게 어디서 일방적으로 숨바꼭질을 시작하려고 하는 거야!

진짜 눈 뜨고 코 베일 뻔했네.

“……나 물어볼 거 있어.”

나의 물음에 자하가 귀를 쫑긋, 하며 내 옆에 와서 앉았다. 그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뭐든지, 물어보셔요, 아리 님! 제가 답해드릴 수 있는 건 다 대답해드릴 테니.”

진짜 이 기세라면 간도 쓸개도 다 빼줄 것 같다.

그것보다, 일단 숨바꼭질은 피했는데, 대체 뭘 물어봐야 하지?

평소에 자하한테 궁금한 게 있어야…….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최대한 그에게 물어볼 것을 생각해 보았다. 저렇게 눈을 빛내는데, 다른 신수에 관해서 물어본다면 바로 자하의 꼬리와 귀가 축, 처져 버릴 것만 같았다.

“으음, 자하, 너는 언제부터 이 궁에 있었어?”

평소에 전혀 궁금한 적 없는 질문이었지만, 자하에게 물어보았다. 그러자, 자하가 쑥스러워하며 입을 열었다.

그의 뭉툭한 꼬리가 빠른 속도로 좌우로 흔들렸다.

“헤헤, 백령 님이 성체가 되신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을 거예요, 아마. 백령 님은 제 은인이셔요.”

“응? 어떻게?”

나의 물음에 자하가 일순간 대답하는 걸 망설였다. 잠시 망설이던 자하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제가 죽을 뻔한 걸, 살려주셨으니까요.”

뭐? 자하가 죽을 뻔했었다고?

놀란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자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날 보며 웃고 있었다. 과거의 일은, 과거의 일일 뿐이란 듯이.

“……왜?”

“음……. 그건 아리 님이 좀 더 크시면 알려드릴게요!”

내 생각엔 내가 너보다 정신 연령 높은 거 같은데?

자하에게 저런 소릴 들으니 어이가 없었다. 그를 노려보았지만, 그는 그저 헤실거리며 웃고 있었다.

어딘가 찜찜했다. 자하의 얘기를 좀 더 듣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이런 자하의 얘기를 들은 적이 없구나…….

후, 조금만 더 크고 두고 보자, 자하야.

그렇게 자하를 보며 의욕을 불태우고 있는데, 내 눈빛을 잘못 알아들어도 한참 잘못 알아들은 자하가 끔찍한 소리를 내뱉었다.

“어? 그 눈빛은……! 아리 님, 우리 이제 숨바꼭질해요?”

“그런 거 아니야!”

나의 부정에 자하의 꼬리와 귀가 축, 처졌다.

저, 저……!

평소라면 어림도 없었겠지만, 오늘만 봐주기로 했다.

“……알았어, 해, 해.”

자하가 다시 눈을 빛냈다. 그의 꼬리와 귀가 다시 바짝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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