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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님의 딸이 되었습니다 (72)화 (72/167)

72.

청화관으로 향하는 길에 계속해서 의문이 들었다.

자타는 어째서 내게 청화관으로 가라 한 거지?

청화관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닌 거로 알고 있다. 게다가 은월이 남쪽 땅에 있어 지금은 비워놓은 지 오래인 곳인 데다, 그는 지금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것 같았다.

즉, 지금 청화관을 간다고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청화관에 다다를 때 즈음, 그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익숙한 기운이 청화관에서 느껴졌으니까.

기운을 따라 청화관 안으로 들어가자, 그곳엔 은월이 서 있었다.

“……은월.”

그가 청화관에 서 있는 것이, 굉장히 오랜만이라 반가웠다.

그가 내 목소리를 들은 건지, 아니면 내 기운을 그도 느낀 건지, 내 쪽을 바라보았다.

달빛을 받은 그의 회색빛 눈이 곱게 휘었다. 그의 입꼬리 또한 그에 따라 올라갔다.

오랜만에 보는 특유의 미소에, 마음이 따뜻하게 물들었다.

“오랜만이네.”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은월은 천천히 서로에게로 다가갔다.

“왜 이렇게 울상이야? 오늘 좋은 날 아니었어?”

은월이 내 표정을 보고 말했다. 아까의 근심이 계속해서 표정에 드러났었나 보다.

그에게 조금은, 내 진심을 털어놔도 될까…….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여태껏 혼자 앓아왔던 걸, 마음속 깊숙한 곳에 묻어두고 보지 않으려 애쓴 걸, 이제는 말해도 될까…….

“은월.”

그를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나보다 큰 키의 그였지만, 전만큼 차이가 심하지 않았다. 어느새 그와 나의 키 차이가 생각보다 많이 좁혀져 있었다.

그가 내 눈을 바라보며 내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말하려니, 입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그에게 이런 고민을 말해도 되는지, 이런 고민을 그가 어떻게 생각할지, 말보다 여러 가지 생각이 앞섰다.

“말하기 힘들어?”

그의 물음에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러자, 그가 내 손을 잡고 어디론가 향했다.

그가 향한 곳은 그와 처음 만났던 날, 은월이 앉아있던 나무 밑이었다. 그가 자리에 앉았다. 나도 그를 따라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여기서 보는 하늘이 예뻐. 이 나무가 하늘을 감싸고 있는 것만 같거든.”

은월의 말에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정말 그의 말대로, 나무 밑에서 올려다본 하늘은 그의 눈동자처럼 신비로웠다.

잠시간 계속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은월은 내게 무엇도 묻지 않았고, 무엇도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동안 하늘만 올려다보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은월.”

“응.”

내가 그를 부르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답했다.

“언젠가는 이곳을 떠나야 할까?”

“왜?”

나의 물음에 은월이 고개를 돌아 나를 바라보았다.

“그거야, 나는 인간이니까. 이곳에 있으면 안 되는 건가, 싶어서.”

“음…….”

“그리고 성장이 끝나면 백령이…… 날 떠나보낼 것만 같아.”

나의 말에 은월이 한동안 나를 가만히 바라만 보았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턱을 괴고 나를 바라만 보았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 모습이 오히려 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아리야.”

“응?”

“왜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걱정해?”

……어?

그의 물음에 우물쭈물하며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보던 은월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백령이 너보고 궁에서 꺼지래?”

“아, 아니, 그건 아닌데…….”

나의 대답에 은월이 고개를 끄덕이며

“하긴, 그랬으면 자하가 궁을 뒤집어놨겠지.”

라는 말을 작게 덧붙였다.

그냥, 신국을 떠나도 좋다고 했지, 아직 그런 소릴 들은 적은 없다.

“왜 그런 걱정을 해?”

“…….”

그의 말에 아무런 목소리도 낼 수가 없었다.

“네가 진짜 걱정하는 게 뭐야?”

“응?”

“신국에서 떠나기 싫어? 아니면, 백령 곁을 떠나기 싫어?”

백령 곁을…… 떠나는 게 싫냐고?

“……모르겠어.”

신국을 떠나는 거와, 백령 곁을 떠나는 건 다른 건가?

잘 모르겠다. 내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걱정하는 건지.

기분이 계속 안 좋아지는 건지.

백령에게 신국을 떠나도 좋다라는 말, 그 말을 듣고 기분이 안 좋아진 건 확실한데…….

난 신국을 떠나는 게 싫은 걸까?

여노와 자하, 아루와 헤어지는 게 싫은 걸까?

만약 신국을 떠난다면 백령도, 여노도, 자하도, 아루도, 그리고…… 지금 내 옆에 있는 은월도 볼 수 없겠지.

단순히 나는, 그것 때문에 기분이 이리도 안 좋은 걸까…….

머릿속이 다시 복잡해졌다. 내 감정을 내가 잘 모른다는 게, 혼란스러웠다.

“지금은 모르면, 그냥 그대로 둬.”

“그대로 두라고?”

“응. 네가 자연스레 알게 될 날이 오니까.”

은월의 회색빛 눈이 다시 곱게 휘었다. 그의 미소에 이상하게 마음이 다시 놓였다.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네가 원한다면, 모든 건 네 뜻대로 흘러갈 테니까.”

“……응, 알았어.”

그의 말에 묘하게 안심이 되었다.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회색빛 눈동자는 예나 지금이나, 아름다웠지만 달빛을 받아 더욱 신비롭게 빛나고 있었다. 다만, 전에 비해 좀 더 피곤해 보이기는 하지만.

비천 때문인가…….

“은월, 은월은 요즘 어때?”

“요즘?”

“응, 미호 말로는 비천이 일을 방해한다고 하던데…….”

“아아.”

그가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같잖게 방해하기는 하지.”

“응?”

“걘 별거 아니야.”

은월이 가소롭다는 듯, 짧은 웃음을 뱉었다.

“비천이 신경 쓰여?”

“비천?”

“응.”

“전에 만난 적이 있었는데, 느낌이…… 조금, 아니, 많이 안 좋았어.”

그를 처음 만난 날을 떠올렸다. 그는 굉장히 기분 나쁜 신수였다. 또한, 백령과도 사이가 안 좋아 보였고……. 나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진 않은 것 같았다.

“넌 그놈 신경 쓸 필요 없어.”

은월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어떻게 저렇게 단호하게 말할 수가 있는 거지? 행정관이라면, 높은 신수인데…….

“걘 자기 앞만 보느라, 딴 데다 정신을 팔 수가 없거든.”

“앞?”

“응. 그러니까 네가 신경 쓸 필욘 없어.”

이게 무슨 소리일까?

알 수 없는 말들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그 이상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이 이상 신경 쓰지 말라는 거구나…….

“아, 그리고 아리야.”

“응?”

“아까 그 고민이 필요 없는 이유, 알려줄까?”

그가 부드럽게 내게 물었다.

갑자기 다시 이 얘기로 넘어간다고……?

영문도 모른 채로 그저 은월을 향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귀를 봐.”

귀? 내 귀?

은월이 여노가 만들어준 머리띠를 잠시 풀었다.

감춰져 있던 내 여우 귀가 뽁, 하고 나타났다.

“이게 네가 삶을 선택할 수 있다는 증거 아닐까?”

“어……?”

“선택은, 네가 하는 거야, 아리야. 남이 하는 게 아니라. 네가 따라야 할 의무는 없어.”

은월의 눈꼬리가 휘었다. 그가 특유의 미소를 흘리며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내가, 선택한 다라…….

“그리고 이건, 네게 주는 선물.”

은월이 내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그가 내민 것을 받아들였다. 정말 예쁘게 포장된 상자였다.

상자는 연보라색의 끈으로 묶여 있었다.

“이게 뭐야?”

끈을 풀어헤쳐 상자를 열자 장식품이 보였다. 아름다운 연푸른색의 보석이 박힌, 언뜻 보기엔 노리개와 비슷했지만, 모양이 조금 달랐다.

은월이 그 장식품을 손에 들었다. 그리고는 내 귀로 가져다 댔다.

내 귀에 그 장식품이 걸렸다.

“귀에 하는…… 장식인 거야?”

“응.”

아아, 언뜻 미호가 했던 걸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생각해 보니, 이런 장식품은 신수들이 자주 애용하는 것 같았다. 오늘 여노도 비슷한 걸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이건 어디서 샀어?”

은월을 향해 물었다. 그러자, 은월이 하품을 하며 대답했다.

“그냥. 아는 신수한테 뜯어왔어.”

“……응?”

아는 신수? 누구?

“걔가 이런 걸 만드는 능력이 탁월하거든. 그래서 부탁했던 거니까.”

그, 그게 누군데?

은월이 아는, 장식품을 잘 만드는 신수. 나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누구지?

“아, 나 이제 가야겠다.”

“어? 벌써?”

벌써라기에는, 많은 시간이 훌쩍 지난 건 맞지만, 내게는 너무나도 짧은 시간으로 느껴졌기에, 아쉬움이 일었다.

“그러게,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나버렸네.”

은월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할 일은 해야 하니까. 금방 끝났으면 좋겠지만, 남쪽 땅이 지금 가관이라서.”

“응…….”

은월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따라 청화관 밖으로 향했다.

은월은 친절하게도 백령의 궁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그 후 그는 곧바로 사라졌다.

궁 안으로 들어가자, 자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은월 님은, 가셨습니까?”

“응. 내게 전하러 와줘서 고마워, 자타.”

“별말씀을. 저는 이런 부분에 특화되어 있으니깐요.”

응? 이런 부분?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가 자신을 가리켰다.

“전 ‘매’ 이잖습니까.”

아아, 그렇구나. 그러니 다른 신수들보다 그쪽 능력이 특화되었다고 한 거구나.

“아리 님도 다른 분께 전할 말이 있다면 언제든지 명하셔도 됩니다.”

“그럼, 나중에 부탁할게.”

다행히 은월이랑 아예 연락을 못 하진 않겠구나…….

그뿐만 아니라, 란이랑도, 노군이랑도 연락하는 데에 그리 큰 힘을 들일 필요가 없어졌다.

“자타, 너 굉장한 능력을 지니고 있구나.”

나의 말에 자타가 예상치 못했다는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내가 뭐 말을 잘못했나? 왜 저러지?

***

아리를 만나고 난 후, 자타는 마음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

그는 아리의 말을 듣고 나래에게 여태껏 들었던 말들을 떠올렸다. 나래의 말들을 떠올리며 자타는 보고를 위해 백령의 집무실로 향했다.

“너 같은 능력을 어디다 써? 에휴, 말을 말자. 다른 땅의 주인들은 유능한 부하를 옆에 두는데, 나는…… 쯧.”

나래는 언제나 자타를 마음에 안 들어 했다. 다른 신수들보다 제 능력을 쓸데없고, 뒤떨어진다고 말했다.

그도 그럴 게, 자타는 전투에 그리 특출난 능력을 지닌 게 아니었다. 하운과 자하, 아루에 비하면 전투 능력은 현저히 떨어졌다.

그래서 나래는 자타에게 불만이 많았다. 전투 능력은 곧 힘이었으니까.

그럼에도 아무 말 않고 나래를 가엽게 여긴 적이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계속되는 그녀의 불평과 불만, 그리고 높은 자존심.

자신보다 아래인 신수들을 심하도록 막 다루는 모습을 보고 그는 반란을 결심했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녀는 업무도 전혀 하지 못했다. 하려고 노력은 한다고 하나, 자존심이 강해 누군가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유능한 부하였던 노군 님도 그녀의 곁에서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문제점을 모른 채 은월만 찾아대기 바빴다. 자타는 은월을 찾아 나래의 말을 전하기 바빴다. 나래는 그렇게 자타를 부려 먹었던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타의 능력을 탐탁지 않아 했다. 제 능력을 이용해 은월에게 계속해서 본인의 말을 전하면서, 은월이 그에 응해주지 않자, 자타에게 화풀이를 해대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자타는 은월이 약간은 원망스럽기도 했다. 한 번이라도, 그는 자신의 뜻을 굽힌 적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나래의 교육을 맡아달라는 자신의 부탁을 거절한 은월이 원망스러웠지만, 아리를 보고 깨달았다.

은월이 말한 ‘그릇’이라는 게 다르다는 것을.

어느새 백령의 집무실에 도착했다. 그가 문을 열기 전, 안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백령.”

그것은 은월의 목소리였다. 분명, 아리는 그가 떠났다고 말했지만, 그는 백령을 찾아온 것이었다.

자타는 문을 열었다. 은월에게 전할 말도 있었으니. 그런데, 자타는 그대로 그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은월이 들어오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굳은 표정으로 입 모양으로 말했다.

‘나가.’

은월의 굳은 표정은 매우 오랜만에 본 그라, 생각할 틈도 없이 몸이 먼저 움직였다. 그가 집무실을 나가자, 은월이 다시 백령을 바라보았다.

“아리에게 이곳을 떠나도 좋다고 했다던데.”

은월이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백령에게 말했다. 백령은 은월이 이렇게까지 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너와는 상관없는 일일 텐데, 은월. 언제부터 참견이 늘었지?”

“참견이라면 참견이지. 그런데, 내가 아리의 일에 참견하는 게 그리 잘못된 거로 생각하진 않는데.”

은월은 명백히 그녀를 가르치는 스승이자, 친구였다. 오랫동안 함께한 그였기에, 참견할 자격은 충분했다. 그리고 그것은, 백령 또한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백령은 그의 참견이 달갑지 않았다. 애초에 그가 아리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도 그리 달갑게 느껴지지 않았던 터라, 참견하는 그가 좋게 보이지 않았다.

백령의 집무실 안엔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백호와 흑호의 신경전에, 분위기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보통 신수들이었다면 숨 막힐 정도의 기운을 내뿜었다.

두 신수는 처음으로 서로를 노려보며 신경전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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