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랑이님의 딸이 되었습니다 (69)화 (69/167)

69.

“헤헤, 아리야. 생일 축제에는 맛있는 게 잔뜩 있겠지?”

입에 넣은 거나 다 먹고 말해라, 뽀뽀야.

입안 가득 과자를 욱여 넣은 포포가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내가 데려온 게 여우인지, 돼지인지…….

어떻게 저렇게 지치지도 않고 식욕이 생길까, 저 여우는?

포포를 보며 혀를 찼다.

“다른 신수들도 오는 거면, 궁이 시끌벅적하겠네.”

“그렇겠지?”

“헤헤, 난 좋아. 아, 그 뱀도 오려나?”

“뱀?”

아아, 사화 말하는 건가.

……설마 날 위한 축제인데, 그녀가 오겠어?

게다가 자하도 사화 싫어하니까, 초대장을 보내지 않았을 것 같다.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으니까.

“아니, 안 올걸?”

“그래? 다행이다. 난 그 뱀 싫어. 무서운 건 아닌데, 막, 그 뱀 앞에 가면 몸이 굳어 버려.”

……뽀뽀야, 그걸 바로 무서워한다고 말한단다.

포포가 그녀를 무서워한다는 사실은 아마 그와 그녀를 본 모두가 아는 사실이 아닐까, 했지만 포포가 아니라니까, 그냥 그렇다고 하기로 했다.

“아, 아리. 네 생일이면 싸부도 올까?”

포포의 귀가 쫑긋, 세워졌다. 그의 복슬복슬한 꼬리가 좌우로 흔들렸다.

“은월? 글쎄…….”

그러고 보니 북쪽 땅에서 헤어진 후로 소식 한 통 없다. 아무래도 많이 바쁜 것 같았다.

하긴, 그날도 없는 시간 쪼개서 온 것 같았으니까.

북쪽 땅에서의 그를 떠올렸다. 그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었고, 실제로 다른 신수들도 그런 그의 모습을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은월이 이토록 바빴던 적은 없었던 것 같으니까.

심지어 바랑이 사고 쳐서 매일 서쪽 땅을 드나들 때도 그 정도는 아니었다.

나래 녀석……. 일을 대체 어떻게 해놨길래.

“아마도 못 오지 않을까……. 은월은 요즘 많이 바쁜 것 같으니까.”

“보고 싶은데, 싸부.”

포포의 말을 들으니 갑자기 며칠 전 포포가 내게 화냈던 일이 떠올랐다. 나도 모르게 손이 포포의 꼬리로 향했다.

“아, 아리야. 나 아무것도 안 했어!”

“알아.”

“꼬, 꼬리 좀 놓고 말하면 안 될까, 아리야?”

“흥.”

포포의 간절한 말투에 그의 꼬리를 스르륵, 놓았다. 그러자 그가 방어 태세를 하며 꼬리를 지켰다.

하여간, 요망한 여우 녀석 같으니라고.

포포가 꼬리를 붙잡고 과자를 먹고 있었다. 과자 부스러기가 꼬리에 하나, 둘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떨어지는 과자 부스러기를 보다 포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뽀뽀.”

“응?”

“나 심심해.”

백령의 궁은 며칠째 평화로웠다. 여노와 자하, 아루는 나의 생일 준비로 눈코 뜰 새도 없이 바쁜 것 같았다.

그래서 푹 쉴 수도 있고, 아무도 귀찮게 하진 않지만, 대신 지나치게 심심했다.

생일……. 생일이라…….

정확히는 내가 동쪽 땅에 오게 된 날이지만.

뭐, 의미가 있는 날이라면 의미가 있는 날인 거지.

“나도 심심한데……. 싸부도 없고……. 어휴, 싸부 보고 싶다.”

은월을 떠올리며 아련한 표정을 짓던 포포가 고개를 흔들더니,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아리야, 우리 형님 보러 가자!”

얘는, 무슨 틈만 나면 백령 보러 가재. 백령이 그렇게 한가한 신수도 아니고…….

“빨리, 빨리!”

포포가 다급하게 나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 모습에 못 이기는 척, 따라가 주었다.

포포와 함께 백령의 집무실에 도착했다. 그런데, 집무실 앞에 예상치 못한 인물이 서 있었다.

나는 서둘러 내 귀를 가리기 위해 소매에 넣어둔 천을 꺼냈다. 아직 그녀는 나를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아리야, 뭐 하는 거야?”

눈치라고는 밥 말아 먹, 아니, 과자에 말아 먹은 포포가 큰 소리로 내게 물었다.

……진짜 쓸데없이 목청 큰 여우 같으니라고.

“쉿.”

급히 포포의 입을 막은 것이 무색하게도, 그녀가 내 쪽을 보고 있었다.

다행히 이미 천으로 내 귀를 완벽하게 가린 뒤였다.

“아리야, 오랜만이네.”

아름다운 자색 빛 눈동자를 반짝이며 인사를 건네는 그녀는, 미호였다. 미호가 우아한 걸음으로 천천히 내게로 걸어왔다.

“백령한테 볼일이라도 있어?”

그녀가 내게 부드럽게 물었다.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자색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백령한테 딱히 볼일 있어서 온 건 아닌데…….

요망하고도 간사한 여우한테 끌려온 거지, 암암.

하지만 그녀의 물음에 사실대로 답하지는 않았다.

“응응. 뭐 물어볼 게 있어서, 근데 나중에 다시 와야겠…….”

“잘됐다. 같이 들어갈까?”

……이 신수나, 저 신수나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해석하는 건 마찬가지로구나.

“응, 아리야?”

그녀가 내 대답을 재촉했다. 하는 수 없이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활짝 웃었다.

그녀를 따라 백령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백령보다 내게 더 큰 관심을 보였고, 내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백령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미호가 입을 열었다.

“백령, 얘기는 들었어. 곧 아리가 동쪽 땅에 온 지 1년이라 기념하는 의미에서 축제를 연다고.”

“……소식 한번 빠르군.”

“자하한테서 초대장이 온 지 오래라.”

미호의 곱고 흰 손에 편지처럼 보이는 것이 들려 있었다.

……미호한테도 이미 보내놓은 거였어?

자하, 너는 대체…….

미호는 그 일 때문에 백령을 찾아온 건가?

하지만 이런 사소한 일을 굳이 그녀가 신경 쓸 이유는 없을 것 같은데…….

“그래서, 오늘 온 용건이 뭐지?”

“은월의 일이 지체되고 있어.”

미호의 말에 백령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미호도 나에게서 시선을 떼고 백령을 바라보았다.

“은월의 일에 차질이 생긴 건가?”

“그래, 비천의 짓인 것 같아.”

“하. 그 녀석인가…….”

비천? 지금 비천이 은월의 일을 방해하고 있다는 거야?

비천이라면, 저번에 서쪽 땅에서 만난 그 기분 나쁜 녀석이 아닌가. 생긴 대로 논다더니, 왜 남의 일을 방해하고 야단인지.

백령이 짜증이 난다는 듯 머리를 짚었다.

“이 뱀이나 저 뱀이나…….”

“설산에 관한 이야기는 사화에게 들었어. 내 권한으로도 그 부분은 손댈 수가 없는 부분이라.”

“어쩔 수 없군.”

“그녀가 너무 완강하게 나오니, 나도 더는 요구할 수가 없었어.”

미호의 말에 백령이 잠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미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로 그런 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래서 비천은 무엇을 하고 있지?”

백령이 비천의 얘기로 넘어갔다. 미호 또한 사화 얘기를 더 할 생각은 없었던 것인지, 그의 물음에 바로 답해주었다.

“발뺌하고 있지, 뭐. 덕분에 은월만 고생하는 중이야. 그가 계속해서 늦어진다면, 아리의 교육에도 차질이 생길 텐데.”

미호가 내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눈망울엔 걱정이 서려 있었다.

“방법이 없나 보군.”

“……일단은. 그의 시선을 돌려야 하는데, 왜인지 은월은 그걸 바라지 않아.”

응? 은월이 그걸 바라지 않는다고? 어째서?

알 수 없는 미호의 말들에 궁금증만 더해갔다.

하지만 나와 달리, 백령은 그의 행동에 전혀 의아해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해가 간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내버려 두지.”

“뭐?”

백령의 말에 미호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와 미호의 반응에 그가 말을 덧붙였다.

“은월이 괜찮다고 할 정도라면, 그 혼자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일이다.”

백령의 말에 미호는 어느 정도 수긍하는 것 같았다. 그렇기에 더 이상 그에 관해서는 묻지 않았다.

묘, 묘하게 설득되네…….

하긴, 은월이라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것 같긴 하다.

“아, 그런데 말이야……. 아까부터 거슬렸는데.”

미호가 갑자기 내 옆에 있는 포포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에 포포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얘는 뭐야?”

미호가 손으로 포포를 가리켰다.

“으, 은월이 데려온 애야.”

그녀의 말에 답한 건 나였다. 나의 말에 미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은월이? 음, 뭐 그럴 수 있지.”

미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조금 기운이 이상하단 말이야……. 백령, 너도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아?”

미호의 말에 백령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그녀는 포포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뽀뽀의 기운이 이상하다니…….

진지한 눈빛을 하고 포포의 이름을 불렀다.

“뽀뽀.”

“응?”

“뭐 주워 먹었어, 빨리 말해.”

특별히 지금 말하면 봐준다. 늦으면 국물도 없어.

“뭐, 뭐가!”

“지금 말하면 특별히 봐줄게. 뭐 주워 먹었어!”

나의 물음에 포포가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나, 나 과자밖에 안 먹었어. 진짜야!”

“웃기지 마!”

내가 널 모를 줄 알아?

“우, 우씨……. 나 진짜 아무것도 안 먹었어.”

포포가 씩씩대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게 인상 쓰지 마, 이 못생긴 여우야.

네 전적이 너무나도 화려하다, 여우야.

한동안 포포를 보던 미호가 그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그녀가 다시 내게로 시선을 옮기고 입을 열었다.

“흐음……. 뭐, 아무튼, 이 얘긴 여기서 그만하고. 아리야, 미리 축하할게.”

그녀의 뜬금없는 축하에 눈을 깜빡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옅게 미소를 띠었다.

“나는, 축제 당일은 이곳에 못 올 것 같거든.”

“왜?”

“해야 할 일도 있고, 요즘 자주 궁을 비웠었으니까.”

제발 바랑도 미호와 비슷한 생각이란 걸 좀 해봤으면 좋겠다…….

너무나도 다른 똥개의 모습이 떠올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도 이건 직접 전해주고 싶어서, 시간을 내서 이곳에 온 거야.”

미호가 내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그녀가 내민 것을 두 손으로 받았다.

그녀가 확인해보라는 듯이 내게 미소지었다. 그에, 손바닥을 열어, 그녀가 준 것을 보았다.

미호가 내게 준 것은, 예쁜 푸른색의 끈이었다. 어떤 용도인지는 굳이 생각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머리끈이었다.

“내가 해줄게.”

미호가 내 귀를 가리고 있는 천을 거두려 손을 올렸다.

아, 안 되는데…….

뒤늦게 천을 잡으려 했지만, 이미 그녀의 손에 내 천이 잡힌 이상, 벗겨질 것만 같았다.

그때, 백령이 미호의 가는 손목을 잡았다.

“미호. 여기서 노닥거릴 시간이 없을 것 같은데.”

“아, 벌써 시간이…….”

미호가 내 천을 잡은 손을 다시 내렸다. 다행이었다.

근데, 미호한테 굳이 내 귀를 숨길 이유가 있나……? 어차피 미호는 내가 인간인 거 아는데.

내가 여우 귀든, 호랑이 귀든, 미호라면 아마 기뻐할 것 같은데……. 아닌가?

뭐, 백령이 나서서 막을 정도면, 그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는 것 같았다.

미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일어나자, 포포가 갑자기 그녀의 앞으로 총총 걸어갔다.

쟤, 또 왜 저래?

갑자기 포포가 미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누님이라고 부를 수 있게 해주십시오!”

포포의 우렁찬 외침에 미호가 깜짝 놀라, 그를 내려다보았다.

……누님이라니?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지?

포포의 눈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진지했다. 그의 모습에 미호가 옅게 미소를 지었다.

“맘대로 하련. 우리 아리를 잘 부탁한단다, 꼬마 여우야.”

“헤헤. 네, 누님!”

……얼씨구?

지금 저 간사하고도 요망한 여우가 또 일을 낸 거야? 그런 거야?

미호가 백령의 집무실을 떠났다. 그녀가 떠난 뒤에도 한참 동안 포포는 미호를 ‘누님’이라 칭하며 헤실거리기 바빴다. 그의 모습에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다.

아니, 그것보다 왜 나는 그냥 아리인데?

은월은 싸부, 백령은 형님, 미호는 누님.

나는…… 그냥 아리.

이, 이 여우의 눈에는 내가 저 중에 제일 서열이 낮아 보인단 건가?

……맞는 말이라 무어라 할 수는 없었다.

이럴 땐 또 눈치가 더럽게 빠르다니까.

“뽀뽀.”

“왜, 아리야?”

왜 난 아리냐고!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나의 뜨거운 눈빛에 포포가 당황하며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왜, 왜, 아리야?”

“뿌우.”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러자 포포가 내 모습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난 왜, 아리야?”

“아리니까.”

아니, 그게 맞긴 하는데…….

그렇게 말하니 또 할 말이 없다.

“은월은 왜 싸부인데?”

“싸부니까.”

“백령은?”

“형님이니까.”

“……미호는?”

“누님이니까.”

……그러니까, 왜 쟤들은 저런 호칭이고 나는 그냥 이름이냐고.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자, 그가 또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다른 애들은 뭐라고 부르더라?

갑자기 포포가 다른 애들을 뭐라고 불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생각에 잠긴 내게, 포포가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무슨 문제 있어?”

“자하는?”

“고양이.”

“……여노는?”

“노란색 강아지.”

“아루는?”

“몰라.”

그래, 아리야. 얘한테 이름으로라도 불리는 걸 감사히 여기자.

후련한 표정을 지으며 요망한 여우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여우가 예쁜 붉은색 눈을 깜빡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