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자타는 어떤 처벌이라도 상관없다는 듯, 침착하게 우리를 응시하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그에게서 어떠한 두려움도, 미세한 떨림조차도 느껴지지 않았다.
“은월, 그의 죄는?”
“이 자 또한 흑기와 내통했고, 반란군의 수장이었으며, 아리에게 위협을 가했다.”
은월이 말을 마치자, 바랑이 빛의 속도로 입을 열었다.
“뭐, 볼 게 있어? 이 정도면 사형이지. 아리를 흑기에게 넘긴 장본인이라며?”
바랑의 말에 미호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바랑. 그리고 난 이미 마음을 정했어.”
미호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녀의 말에 모두가 귀를 기울였다.
“벌써 처벌을 정하다니?”
바랑이 그녀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다른 신수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래의 처벌도 못 정했던 미호가, 그녀의 하인인 자타의 처벌은 이미 정했다니. 다들 놀란 듯하였다.
나는 그저 긴장한 채로 미호를 지그시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래.”
모두가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가 천천히 입을 뗐다.
“이 자는, 백령의 궁에 보낼 거야.”
미호의 말에 모든 이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미호, 그게 무슨 소리지?”
“무슨 소리야, 그게?”
여태까지 단 한 번도 놀란 기색을 보인 적 없던 백령과 은월조차도.
자타는 눈을 크게 뜨고 미호를 바라보았다. 그 또한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 듯했다.
미호는 그들의 반응을 이미 예상한 듯했다. 그렇기에, 그들의 반응에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자타의 죄가 매우 무겁다는 건 나도 잘 알아. 하지만, 아리가 거절하지 않는다면, 아리에게 그를 맡기고 싶어.”
미호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자색 눈동자가 아름답게 빛났다.
미호는 내가 부탁했다는 말을 하지 않고, 그녀가 독단으로 결정한 것처럼 말했다. 그녀는 아마도 나를 생각해서, 자신이 내린 결단이라 말한 것 같았다.
내가 부탁했다는 걸 모두가 알게 된다면, 나를 비난하는 이가 있을까, 싶어.
그녀의 세심한 배려가 너무나도 고마웠다. 그리고 내 말을 진심으로 고민해준 것도 무척 고마운 일이었다.
“미호,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거 어때?”
“동감이군.”
백령과 은월이 굳은 표정으로 그녀에게 요구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들의 요구에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 결정에 대해서, 나는 더 이상 말을 번복할 생각이 없어.”
그녀의 단호한 말에도 그들의 표정엔 불만이 가득했다.
“하지만, 미호.”
“은월, 이번 사건은 내게 전적으로 넘기지 않았어?”
“…….”
미호의 말에 은월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를 보던 은월이 짧은 한숨을 내쉬더니, 그녀의 말에 수긍했다.
“알았어, 네 생각이 그렇다면.”
은월의 수긍에 미호가 이번에는 백령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백령, 너는?”
“……따르도록 하지.”
백령의 대답에 미호가 만족스럽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마치 그녀의 미소가 상황이 종료됨을 알리는 것 같았다.
미호가 자타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가 다가오자, 자타가 긴장한 듯 숨을 삼켰다.
“자타, 네 처벌에 대한 네 생각은 어떻지?”
미호의 물음에 한동안 자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니,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잠시간의 시간이 흐르고, 자타가 굳게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제 죄에…… 알맞지 않은 벌이라 생각합니다.”
“알맞지 않은 벌이라……. 어째서?”
그녀의 물음에 자타가 눈을 감았다. 그리고 괴로운 기억을 떠올리듯, 인상을 찌푸렸다.
“저는, 아리 님을 해하려 했던 자입니다. 그런데 그런 저를 아리 님의 가까운 곳에 둔다는 것은…….”
“그래, 네가 해하려 했던 게 맞다. 그게 네 가장 큰 죄이기도 하고.”
미호가 그의 말을 끊고, 그를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그래서 아리의 곁에서, 아리를 지키라는 말이다. 아리를 위해 살아가라, 네 남은 생을.”
“미호 님…….”
“내 명을 어길 시, 네놈의 목숨을 끊는 것만으로는 처벌이 끝나지 않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미호 님.”
미호의 권고에 자타가 고개를 숙였다.
미호가 그 말을 끝으로 그에게서 돌아섰다. 그녀의 자색 빛이 도는 은발이 흩날렸다.
“회의는, 여기서 종료하지.”
미호가 전각을 나갔다. 마루가 멍해져 있는 나래를 데리고 그녀를 따라갔다. 그녀가 사라지자, 그녀의 위엄에 굳어 있던 신수들이 크게 심호흡을 했다.
바랑이 미호가 떠나간 자리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진짜, 저 여우의 속은 알 수가 없다니까.”
……똥개도 별반 다를 건 없어 보이는데.
바랑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을 이어나갔다.
“아니, 말이 돼? ‘우리’ 아리를 해치려 한 신수를, 아무렇지 않게 아리 주위에 붙여놓는다는 게?”
‘우리’라는 단어는 좀 빼지 그래…….
“바랑 님이, 왜 아리 님께 ‘우리’라는 말을 붙이는 거죠? 상당히 불쾌해요! ‘우리’라는 말은 저희만 쓸 수 있다고요!”
“하? 너, 인마. 그러는 거 아니야.”
그거 아니야, 자하야.
난 아무에게도 허락한 기억이 없었다. 그런데, 저 둘은 서로의 주장이 옳다며 싸우고 있었다.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저 망할 여우가 아리 옆에 붙인 매 한 마리가 중요한 거지.”
자하와 실컷 말다툼을 벌이던 바랑이 요점을 바로 잡았다. 그러자, 자하가 그의 말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정말 저도 이해할 수가 없네요.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죠?”
바랑과 자하의 말에 여기저기서 말이 나오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백령, 일단 자타는 네 궁에 먼저 보내놓는 게 어때?”
“그게 좋겠군.”
은월이 백령에게 물었다. 아마, 자타가 여기 계속 있다간 웅성거림이 멈추지 않을 것만 같아서 그런 것 같다.
“자하.”
백령이 자하를 불렀다. 그러자 자하가 격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설마, 저보고 저놈을 동쪽 땅에 데려다 놓으라는 말씀은 아니시죠?”
자하의 물음에 백령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도 자하는 격렬하게 거부할 것 같았으니까.
“제가 갈게요, 백령 님.”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던 여노가 백령에게 말했다.
“여노, 부탁하지.”
“네, 백령 님.”
여노가 백령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나의 앞으로 다가왔다.
“아리 님, 궁에서 봬요. 전 먼저 가볼게요.”
“응. 잘 부탁해, 여노.”
나의 말에 그녀가 싱긋, 웃었다. 여노가 자타와 함께 전각을 떠나자, 웅성거림이 줄어들었다.
“그래서, 백령. 넌 미호의 뜻을 받아들인다는 거냐?”
바랑이 백령을 향해 물었다. 백령은 눈을 감은 채로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곳은 언뜻 보면 수긍으로 보였다. 그렇기에 바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이건 말도 안 된다니까.”
“저도 이번 일은 바랑 님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자하가 바랑의 발언에 동감을 표하며 백령에게 말했다. 하지만 여전히 백령은 묵묵부답이었다.
“둘 다 그만해. 우리가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니까.”
길길이 날뛰는 그들을 중재한 건 다름 아닌 은월이었다. 그의 말에 사화가 거들었다.
“은월 님의 말씀이 맞아요. 이건 어디까지나, 미호 님의 결정이시니까요, 저희는 따르는 수밖에요.”
사화는 이 상황이 살짝 즐거워 보이기도 했다. 그녀는 확실히 미호의 결정에 아무런 의의가 없어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그러고 보니, 바랑. 아까 백령의 궁에 쳐들어간다고 그러지 않았나?”
“어어, 맞아, 백령의 궁에…… 어?”
바랑이 자연스레 자신이 했던 말을 실토했다. 그에 백령이 감았던 눈을 뜨고 바랑을 노려보았다.
“누구 궁에 온다고?”
“하하, 백령, 그게 말이지…….”
바랑이 멋쩍은 웃음으로 상황을 무마시키려 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을 수법이었다.
“동쪽 땅엔 발도 붙이지 말라, 일렀을 텐데. 벌써 잊은 건가.”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바랑이 당황하며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은월이 아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기운 넘치는 녀석들은, 기운 넘치는 녀석이 맡아야지. 아니면, 아예 그 기운을 눌러버리는 상대거나.”
그건 이걸 뜻하는 거였구나.
그의 현명함에 감탄했다.
“나는, 그저 아리의 안전도 걱정되고 하니, 잠깐 들를까, 했던 거지.”
후, 똥개가 자꾸 되지도 않는 변명을 시도하니, 내가 상황을 종료시켜야겠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아까 며칠간 묵는다며.”
나의 말에 백령의 표정이 빠른 속도로 어두워졌다. 백령뿐만 아니라, 아까 길길이 날뛰던 자하도 표정을 구겼다.
“바랑 님, 대체 누구 마음대로 저희 궁에 눌러 계시겠다는 겁니까?”
“아니…….”
“저와 아루가 있는 한, 두 눈에 흙이 들어와도 궁에 발 못 붙이실 줄 아십시오.”
그렇게 바랑의 극악무도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을 보던 이랑이 옆에서 혀를 찼다.
“쯔읏, 삼촌, 바보.”
“똥개, 바보.”
이랑을 따라 같이 바랑을 바보라 칭했다. 10년 묵은 체증이 확, 내려가는 것 같았다.
“큼큼. 아니다, 이랑아. 일단은 후퇴하고 몰래 가면…….”
“어딜 가신다는 겁니까, 바랑 님?”
언제 온 건지, 바랑의 바로 뒤에 하운이 서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하운의 모습이었다.
하운의 등장에, 바랑이 적잖이 당황한 것 같았다. 바랑의 동공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고, 그의 귀는 바짝, 세워져 있었다.
“하, 하운. 네가 왜 여기에…….”
“바랑 님, 지금 ‘네가 왜 여기에…….’라는 말이 나오십니까?”
“아, 아니, 궁은 어쩌고…….”
바랑의 물음에 하운이 기가 막히다는 듯, 탄식을 내뱉었다.
“허, 그렇게 궁이 걱정되시는 분이, 제가 없다고 이랑 님 꼬드겨서 동쪽 땅으로 놀러 가실 생각을 합니까? 진짜 제정신입니까, 당신?”
쉴 틈 없이 몰아치는 하운의 말에 바랑이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똥개야, 내 생각엔 그냥 조용히 하고 있는 게 현명한 선택일 것 같아…….
하지만, 어리석고 우매한 똥개가 그것을 알 리가 없지.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네가 여기 있다는 건 궁이 비었다는…….”
“청아 님이 아주 자알, 봐주고 계시니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바랑 님.”
하운의 말에 바랑이 더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채, 머리만 긁적일 뿐이었다.
……좀 착하게 살자, 바랑아.
하운이 불쌍해 죽겠다.
“쓸데없는 걱정이라니, 난 그저 궁을…….”
“그렇게 궁이 걱정되시면, 산더미처럼 쌓인 일부터 처리하러 가볼까요, 바랑 님?”
“……하운, 내가 잘못했다.”
“잘못한 거 아셨으면, 좋은 말 할 때 갑시다, 바랑 님.”
바랑이 하운의 손에 질질 끌려갔다. 이랑도 그들의 뒤를 따랐다. 잠깐, 내게로 와 인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보고 싶을 거야, 아리야. 곧 만나러 갈게.”
아니, 절대 오지 마.
그에게 오지 말라는 의사를 표현하기도 전에, 이랑이 하운의 뒤를 따라 사라졌다. 시끄러운 바랑이 사라지자, 전각에는 적막감이 돌았다.
“이만 가지.”
백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그를 따라 일어났다. 은월도 더 이상 볼 일이 없는지, 자리에서 일어난 지 오래였다.
모두 함께 사화의 궁에서 나가기 위해 입구로 향했다.
“백령 님.”
사화가 백령을 불러세웠다.
그런 그녀가 나는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는 길은 좀 편하게 가면 안 되나…….
“조만간…… 다시 만날 일이 있기를 바랍니다.”
“난 없으면 좋겠군.”
백령이 사화의 바람을 칼같이 거부했다. 나와 자하는 그 모습을 뿌듯하게 지켜보았다.
백령, 잘했다.
“은월, 바로 남쪽 땅으로 가는 건가.”
“그래야지, 해야 할 일이 아직 많이 남아 있으니까.”
이번 사건의 최대 피해자는 아무리 생각해도 은월이다. 이게 무슨 마른하늘의 날벼락일까.
오랜만에 만난 그와 헤어지려니, 조금은 씁쓸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굳이 티를 낼 수는 없었다. 그는 안 그래도 바쁘니까.
“은월.”
“응?”
“힘내.”
나의 말에 은월이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의 회색빛 눈동자가 아름답게 빛났다.
“그리고 고마워.”
“뭐가?”
“똥개 처리해준 거.”
이건 진짜 몇 번을 고마움을 표해도 모자랄 일이었다.
“바랑이 일을 안 하면 나도 곤란해지니까.”
아, 그것도 그렇구나…….
진짜 오만 데에다가 똥물을 튀기고 다니는구나, 똥개야.
전부터 생각했지만 정말 바랑은 만악의 근원임이 틀림없었다. 내가 여태껏 봐 왔던 신수 중에서 가장 극악무도한 신수다.
하운이 와서 다행이었……어?
“은월, 혹시 하운을 부른 게…….”
“다음에 봐, 아리야.”
나의 물음을 끝까지 듣지 않고, 은월이 떠나버렸다. 하지만, 그의 미소로 미루어 보아, 나의 추측이 틀리지 않은 것 같았다.
……오늘 진짜 은월이 신수 여럿 살렸다.
근데, 진짜 똥개만 없으면 신국은 평탄하지 않을까?
진지하게 바랑의 존재 이유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똥개는 언제 정신 차릴까…….
똥개를 떠올리며 혀를 내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