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은월이 반달 모양으로 곱게 눈을 휘며 웃었다.
오랜만에 보는 그의 미소가 무척이나 반가웠다.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나 또한,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는 남쪽 땅의 일을 하느라, 상당히 지쳐 보였지만, 일부러 내색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은월이 덮어준 도포로 몸을 감쌌다. 추위에 몸부림치던 몸이 점차 원래 온도를 찾아가는 듯했다.
“왜 추운데 밖에 나와 있어?”
“안이 더 추워서.”
누군 나오고 싶어서 나온 줄 알아?
안이 더 추운 걸 어떡해.
나의 말에 은월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해 안 간다는 표정이다.
진짜라니까, 거참.
“사화의 궁 안은 따뜻할 텐데……. 왜 그런 거지?”
……사화가 내게 좋은 감정이 없어서 그런 거 아닐까.
“아리의 말이 맞아, 싸부. 안이 너무 추웠어.”
어느새 내 옆으로 온 포포가 나의 말에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흐음……. 그래?”
“싸부, 너무 오랜만이야, 헤헤.”
저, 저…… 요망한 여우 봐.
은월 앞이라고 헤실거리며 꼬리를 흔드는 포포를 보니, 내 눈이 절로 가늘어졌다.
저런 간사한 여우 같으니라고……. 며칠 전까지 백령한테 ‘형님, 형님’ 거리면서 꼬리 흔들 때는 언제고.
쯧쯧.
물론, 은월이 반가운 건 나도 마찬가지이지만.
이번 중앙 회의에는 남쪽 땅이 참석하지 못한다고 했었다. 그래서 나는 은월도 참석하지 않는 줄로만 알았기에, 그와의 만남이 반가우면서도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그럼, 은월은 남쪽 땅의 대리인으로 나온 건가?
갑자기 그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다.
“근데, 은월.”
“응?”
“은월이 여기 올 줄 몰랐어. 남쪽 땅은 이번에 참석하지 않는다고 들어서…….”
“난 사법관이잖아. 법을 집행하는 데에 사법관이 없으면 어떡해?”
아, 그래서 남쪽 땅은 참석을 안 하는 거로 된 거구나.
은월은 사법관의 신분이니까. 그쪽 신분으로 참석하는 게 맞는 거긴 하다.
그의 말을 이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은월이 나를 보고 입을 열었다.
“잘 지냈어?”
그가 눈을 휘며 물었다. 그의 회색빛 눈이 아름답게 빛났다. 그가 나의 답을 기다렸다.
잘 지냈냐니…….
흐음…….
어찌 잘 지낸 것 같긴 하다. 은월의 수업이 없어 조금은 심심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자하와 아루 덕분에 쉴 틈 없이 놀고, 먹고, 잤다.
은월을 생각할 틈이 없었달까…….
그러고 보면 언제나 내 곁에는 자하와 아루, 포포와 여노가 함께 있구나…….
그들에게 다시 한번 고마움을 느꼈다.
“응, 난 잘 지낸 거 같아.”
작은 사건 사고들이 있긴 했지만, 이 정도면 뭐…….
“은월, 너는 어때?”
“난 잘 못 지냈는데.”
“응?”
그의 대답에 그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자, 은월이 아까와 같은 미소를 지었다.
“농담이야, 잘 지냈어.”
“……그래?”
“일이 좀 많아진 것만 빼면.”
……못 지낸 거 맞네.
남쪽 땅의 일이 터지기 전에도, 일에 치여 살던 그였다. 그런데, 전보다 더 많아졌다면 잘 지낼 수 있을 리 없다.
“남쪽 땅은 점점 안정을 되찾아 가는 중이야.”
“그렇구나…….”
“응. 그러니까 그렇게 보지 마.”
안타까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가 살짝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내가 생각해도 은월의 현 상황은 너무 끔찍한걸.
나라면 진작에 사법관 같은 건 때려치웠을 것이다. 저렇게 힘든 일을 대체 누가 해?
그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생각에 잠긴 그를 보자, 그에게 할 말이 떠올랐다.
“아, 맞다. 은월!”
그를 불렀다. 그러자 그가 하던 생각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오묘한 회색 눈동자와 눈을 마주했다.
내 머리를 덮고 있던 천을 거뒀다. 그러자, 감춰져 있던 내 귀가 드러났다.
“귀가 생겼네.”
그의 눈을 크게 떴다. 나의 귀에 그도 꽤 놀란 듯했다.
그가 내 귀를 보더니,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의 눈이 곱게 접혔다.
“예쁜데?”
은월까지 예쁘다는 말을 할 줄은 몰랐다. 자하와 아루, 여노의 반응은 그리 놀랍지 않았지만, 은월의 반응은 예상치 못했기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아니, 은월.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
그에게 중요한 사안을 말해주려 하는데,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은월, 은월의 눈에도 혹시…….”
“구슬의 영향인가.”
“……백령은 그럴 거 같대.”
은월은 역시 은월인가……. 확실히 자하와 아루, 여노와는 달리 파악이 빨랐다.
“뭐야, 뭐? 무슨 영향? 구슬이 왜?”
아무것도 모르는 포포가 나와 은월을 번갈아 보며 폴짝폴짝 뛰었다. 포포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자신의 존재를 강조했지만, 은월과 나는 그런 포포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들켜도 딱히 큰 문제는 없을걸.”
“왜?”
“구슬의 힘을 이어받은 자는 네가 처음이니까.”
“응?”
그게 무슨 상관……. 아.
“무슨 일이 생겨도 변명할 수 있는 거구나. 어차피 구슬의 힘을 받은 신수가 어떻게 변하는지 잘 모르니까.”
“맞아.”
……은월은 역시 똑똑하구나. 잠깐만, 그런데 백령이 이걸 생각하지 못할 리 없었다.
근데 왜 백령은 굳이 주술을 써서 나의 귀 모양을 다르게 보이도록 한 거지?
“증거는 없어도 안 믿을 수 있으니까.”
“응?”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잖아. 아직 구슬의 힘을 완벽히 다를 수 없기도 하고.”
……그건 그렇지.
그래서 백령이 주술을 걸어준 거구나. 이제야 그의 행동이 이해가 갔다. 또한, 그 짧은 시간 안에 모든 계산을 마친 백령과 은월이 참 대단해 보였다.
……호랑이들이 유전자가 뛰어난 건가.
“계속 여기 있을 거야?”
“응? 왜?”
“곧 바랑이 올 거 같거든.”
“똥개?”
은월을 만나고 나서 완전히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중앙 회의에 똥개도 온다는 사실을.
은월이 바랑 얘기를 꺼내서 그런지, 왠지 꺼림칙한 기운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아니야, 아닐 거야…….
속으로 아니라고 계속해서 부정했지만, 그 기운이 점점 우리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틀림없었다. 이건 똥개와 작은 똥개, 이랑의 기운이었다.
곧이어 내가 느낀 기운이 틀린 게 아니라는 듯, 전혀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리야아아아!”
굳이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똥개의 목소리라는 것을.
일단은 천으로 다시 내 머리 위를 덮었다. 그리고 최대한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척했다. 하지만 이내, 내 바로 앞으로 바랑과 이랑이 뛰어왔다.
아니, 호랑이도 아닌 놈들이 왜 제 말하니까 눈앞에 나타나고 야단이야!
“아리야, 이게 얼마 만이냐.”
바랑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즐거워했다. 그와 상반되게 나는 표정이 점점 썩어들어갔다.
뭘 얼마 만이야, 이 똥개야.
똥개라 그런지, 기억력도 안 좋은 건가…….
단기간에 만난 그가 전혀 반갑지 않았다. 바랑은 나의 똥 씹은 표정을 봤음에도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건지, 아니면 진짜 모르는 건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요 녀석, 내가 반가웠고만.”
그럴 리가. 어디서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있어?
내게로 다가오는 그를 은월이 막아섰다.
“요즘 보고가 자꾸 늦어지던데, 바랑.”
은월의 물음에 바랑이 딴청을 피우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큼, 큼. 은월, 무슨 소리야. 내가 요즘 하운한테 붙잡혀서 일만 하느라, 얼마나 힘든데.”
“그래? 어제도 도망가려다 잡혔다며.”
“어떻게 알았냐……?”
바랑이 충격받은 듯한 얼굴로 은월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우리 궁에 첩자가 있는 건가? 어떤 간 큰 놈인 거야?’라며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은월이 그를 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진짠가 보네.”
“……때려 맞춘 거냐?”
“너무 뻔하잖아.”
……불쌍한 하운.
바랑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당황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이랑이 신나서 입을 열었다.
“그래서, 하운이 이번에 삼촌 어디 도망가지 않나, 잘 감시하랬어.”
“그게 무슨 소리야? 감시라니?”
“하운이 삼촌 감시하랬어. 일에 치여 죽어가던 삼촌이 아침부터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출발만 손꼽아 기다리는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알아차릴걸? 너무 티 났어, 삼촌.”
이랑의 이야기에 바랑이 금시초문이라는 듯, 자신의 귀를 쫑긋, 세웠다. 그리고는 이랑의 어깨에 자신의 팔을 두르고는 그에게 뜨거운 눈빛을 보냈다.
이후, 작은 소리로 그에게 속삭였다.
물론, 모두에게 들렸지만.
“삼촌, 왜?”
“야, 이랑아……. 이 삼촌이, 요즘 일만 해서 그런지 몸이 너무 뻐근하다.”
진짜 변명도 참 가지가지다. 같잖은 그의 변명에 절로 혀를 내둘렀다.
좀 성실하게 살아, 바랑아.
“삼촌, 몸 뻐근하다는 말 원래 달고 살잖아.”
“아니, 이랑아. 잘 들어봐. 요즘 들어 두루마리만 보면 현기증이 난다니까?”
“그래서?”
이랑의 물음에 바랑이 서운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알면서 왜 그러냐, 너.”
“안 돼, 삼촌. 나 하운한테 잔소리 듣기 싫단 말이야.”
이랑이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 듯했다. 그러나 이에 절대 포기하지 않는 바랑이었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떻냐, 이랑아. 중앙 회의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뻥 치고, 백령의 궁에 놀러 가서 며칠만 있다가 가는 거야. 어때, 좋은 생각이지?”
뭐? 지금 저 똥개가 뭐라는 거야?
바랑의 말을 들은 이랑의 귀가 쫑긋, 세워졌다. 그리고는 이랑이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날 왜 보는 거야?
이랑이 심히 갈등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아까 단호하던 태도 어디 갔어?
“하지만, 백령이 우리가 가는 걸 허락할까? 자하랑 아루도 있던데.”
절대 허락할 리 없지. 똥개들이 감히 어디라고 온다는 거야?
너무 터무니없는 말이라, 상대하기도 귀찮았다. 다행히 이랑은 바랑과 달리 이성이 남아 있었…….
“우리가 막무가내로 쳐들어가면, 천하의 백령이라도 뭐 어쩌겠어. 예전에 한 번 그런 적 있잖아. 정말로 우리를 내쫓디?”
“듣고 보니 그렇네.”
그들의 대화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듣고 보니 그렇긴, 뭐가 그래, 이 작은 똥개야!
애초에 남의 궁에 쳐들어오는 게 정상이냐, 정상이냐고!
너무나도 당당한 그들의 태도에 할 말을 잃었다.
이것들이 진짜, 장난하자는 건가…….
은월은 그저 둘의 대화를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지 말고, 뭐라 말 좀 해줘, 은월…….
은월을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내 시선을 느낀 은월 또한 바랑과 이랑에게서 눈을 떼고 나와 눈을 마주했다. 그러나 싱긋, 미소만 지을 뿐, 그들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누구 맘대로 우리 궁에 와?”
결국, 참다못한 내가 말했다.
그러자 바랑의 솟아 있던 귀가 축, 처졌다. 그의 눈망울에는 상심이 가득했다.
“아리야……. 삼촌이 요즘 좀 많이 힘들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똥개 둘이 나란히 우리 궁에 오면 내가 힘들어, 이 똥개야.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바랑을 노려보았다.
“좀 봐주라, 응?”
“아리야아.”
두 똥개가 간절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진지하고 절박해 보이는 눈빛이 당황스러웠다.
“요즘, 흑, 얼마나 힘들다고.”
급기야 바랑이 훌쩍이기까지 한다.
“삼촌이 요즘 무리하긴 했지. 아리야, 너도 알지? 우리 삼촌 절대 일 안 하는 거.”
“맞아, 아리야. 나 일 엄청 안 하는 거 너도 알잖아. 삼촌 죽을 거 같아, 진짜.”
자랑이다…….
아니, 그리고 자꾸 왜 자길 삼촌이라고 불러?
그의 호칭이 매우 거슬리긴 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근데, 이번에 일주일이나 궁에 틀어박혀서 일만 하다 보니까, 많이 힘든 것 같아. 안 그래도 정상이 아니었는데, 요즘은 정말 말이 아니거든.”
“뭐, 인마?”
이랑의 말에 바랑이 그를 노려보았다.
이랑아, 틀렸어. 똥개는 정상이 아닌 정도가 아니었다고…….
“아무튼, 이번 한 번만 봐주면 안 돼? 응?”
“이렇게 부탁할게.”
……이걸 어찌해야 할까.
그들이 급기야 바닥에 머리를 박고 내게 말했다.
이렇게까지 할 일이냐고…….
고개를 들어 은월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은월은 방관하고만 있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상했다. 은월이 이럴 신수가 아닌데…….
“아리야아.”
“부탁할게, 아리야, 응?”
그들이 워낙 간곡하게 부탁하는 터라, 무어라 말할 틈도 없었다.
그래도 똥개들의 방문은 싫은데…….
“은월, 어떻게 해야 해?”
“그냥 내버려 둬.”
응? 은월, 이러기야?
아니, 쟤네 하는 말 못 들었어? 우리 궁에 쳐들어온다잖아!
저 둘이라면 진짜 막무가내로 쳐들어오고도 남을 위인들이었다. 그걸 잘 알기에, 애석하게 은월을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괜찮아. 지금 상대해 봤자, 힘만 빠져.”
은월이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기운 넘치는 녀석들은, 기운 넘치는 녀석이 맡아야지. 아니면, 아예 그 기운을 눌러버리는 상대거나.”
알 수 없는 은월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은월은 그런 날 보고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언제 보아도 예쁜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