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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님의 딸이 되었습니다 (63)화 (63/167)

63.

드디어 결전의 날이었다. 나와 백령, 여노, 그리고 자하와 포포. 다섯이서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북쪽 땅, 그곳에서도 사화의 궁 바로 앞이었다.

포포가 침을 꿀꺽, 삼켰다. 어찌나 소리가 크던지, 아마 모두가 그의 침 넘어가는 소리를 들었을 거라 생각되었다.

뽀뽀, 많이 긴장했구나……. 하긴, 뽀뽀는 사화를 무서워하는 것 같으니까. 충분히 이해가 가는 행동이었다.

그러니까, 아루랑 같이 궁에 있으라니까…….

포포에게 궁에 남아도 된다고 분명 말했지만, 그는 기어코 고집을 부려 나를 따라왔다.

그래서 자하와 포포, 두 신수 모두 나에게는 감시 대상이었다.

잘 살펴야지. 방심하는 사이에, 진짜 쥐도 새도 모르게 사화에게 살해당할 수도 있다.

우리가 도착한 사화의 궁은, 흑색의 어두침침한 느낌이 강했다. 하지만, 그 어두움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이 있었고, 그것이 바로 그녀를 연상케 했다. 게다가 북쪽의 땅은, 굉장히 추웠다. 웬만한 동쪽 땅의 겨울과는 차원이 다른 추위였다.

여노의 말에 의하면, 북쪽 땅은 사시사철 눈으로 덮여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하얀 설산들은 그녀의 곱고 흰 피부와 닮아 있었다.

곧이어 궁의 대문이 열렸다. 마찰음을 내며 열리는 문을 바라보며 모두가 긴장을 늦췄다.

그 안에서, 평소보다 더욱 화려하게 꾸민, 보고 싶지 않은 그녀가 서 있었다.

아름답고 긴, 흑색 머리칼. 매혹적인 파충류의 눈동자. 우아한 자태. 그녀는 누가 보아도 매력적인 여자였지만, 우리 중 누구도 그녀의 매력에 빠지는 이는 없을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게, 백령은 사화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하고, 자하는 그녀만 보면 진저리치고, 포포는 그녀를 싫어하는 걸 넘어서 무서워하는데, 어느 누가 한껏 꾸민 그녀에게 넘어가겠느냐, 이 말이다.

물론, 사화가 저렇게 꾸민 이유는 불 보듯 뻔했다.

“백령 님. 북쪽 땅의, 그리고 저 사화의 궁의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그녀의 눈에 다른 이들은 비치지 않는 것이 확실했다.

“오랜만이군, 사화.”

“예. 제가 지금 얼마나 기쁜지, 백령 님은 아마 모르실 겁니다.”

응, 맞아. 평생 모를 거야.

백령의 인사에 사화가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듯, 수줍어하기 시작했다.

뭐지, 지난번과는 전혀 다른 태도인데. 작전을 바꾸기로 한 건가.

아니면, 원래 백령 앞에서만 저렇게 행동하는 건가.

나와 자하, 그리고 포포는 경악에 찬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뭐, 우리에겐 시선조차 주지 않지만.

그녀의 뒤로는, 하인으로 보이는 자들이 줄을 서 있었다. 그녀를 따라, 그들 또한 우리에게 고개를 숙였다.

“중앙 회의는 어디서 하는 거지?”

“저희 궁, 가장 큰 연회장에서 하기로 했답니다.”

백령의 물음에, 사화가 안내를 시작했다.

연회장? 그런 곳도 있던가. 백령의 궁에는 없었던 거 같은데.

그녀를 따라 궁 내부로 들어가니, 생각보다 큰 규모에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궁 규모만 보자면, 백령의 궁보다도 더 크다.

그녀가 안내한 곳은, 전각처럼 보이는 곳이었다. 매우 넓었으며, 가운데에는 탁자가 놓여 있었고, 의자 또한 준비되어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텅 빈 전각일 뿐이었다.

연회장이라더니, 진짜 더럽게 크네.

“아직 다른 분들은 오시지 않았답니다. 미호 님은 바쁘신 관계로 좀 많이 늦으신다고 전달받았고, 바랑 님은 이랑 님과 함께 이곳으로 오고 있다고 합니다.”

와, 그거 듣던 중 끔찍한 소리네.

바랑과 이랑이 이쪽으로 오고 있다니, 그 전에 그냥 회의 시작하고 끝내면 안 될까……?

쩝, 하지만 미호 또한 없으니, 불가능하단 걸 잘 알고 있었다.

“다른 분들이 도착할 때까지, 저의 궁에서 편히 쉬시길 바랍니다.”

사화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미소가 진짜라고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 같다.

“아, 백령 님. 이번 일에 대해 의논할 게 있는데…….”

“여기서 하지.”

“여기는 보는 눈도 있고 하니, 좋지 않은 생각인 것 같습니다만……. 부탁드립니다, 설산에 관한 것이라.”

“…….”

그녀가 누가 봐도 불순한 의도로 백령을 불렀다. 백령이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따라갔다.

‘설산’에 관한 것이 뭐지? 뭐길래 백령이 고분고분하게 그녀를 따르는 거야?

백령이 제게 다가오자, 사화의 입이 귀에 걸렸다. 이후, 백령을 데리고 사화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저, 저……! 처음부터 저럴 생각이었던 거야!

“짜하.”

나의 부름에 자하가 곧장 내 옆으로 왔다.

“부르셨습니까요, 아리 님?”

“백령이랑 사화 좀 따라가 봐.”

“……예?”

“빨리!”

지체할 시간이 없단 말이다!

나의 명령에 자하가 어리둥절하며 멍을 때리다, 내가 호통치자 그제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그렇지만 전 아리 님을 호위하러…….”

“난 괜찮아. 빨리 가 봐.”

나 호위하는 것보다 백령부터 지켜야 한다고!

그런데, 자하만 보내려니 영 찝찝했다.

“여노, 혹시 자하가 헛짓거리를 하진 않는지, 잘 관찰해줄 수 있어?”

“예? 하지만, 그러면 아리 님 곁에 남아 있는 신수가…….”

여노가 나를 걱정하며 고개를 저었다.

“큼큼.”

그러자, 포포가 일부러 헛기침을 하며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포포의 헛기침에, 그녀가 그를 내려다보았다.

“포포, 저랑 자하 님이 안 계시는 동안, 아리 님을 잘 지켜드릴 수 있나요?”

“응, 응. 맡겨만 줘. 남쪽 땅에서도 아리 잘 지켰는걸?”

포포의 말에도 여노는 못 미더워하는 것 같았지만, 나의 확고함에 결국 못 이기고, 나의 명을 따랐다.

“……음, 알았어요. 잘 부탁드릴게요, 포포. 아리 님, 금방 올 테니까 어디 가지 말고 계세요.”

여노, 꼭 자하 잘 지켜봐야 해.

백령의 집무실에서 자하를 끌고 나간 전적이 화려한 그녀이니, 잘 봐줄 것이라, 의심치 않는다.

여노와 자하가 사라지자, 안 그래도 넓은 전각이 더욱 공허해 보였다.

……이건 좀 무서운데.

일단은 저쪽으로…… 가볼까?

가운데에 있기 뭐하니,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포포도 그런 나의 뒤를 따라왔다.

***

사화가 백령을 데리고 향한 곳은 자신의 집무실이었다. 그녀가 집무실에 도착하자마자, 백령에게 매혹적인 눈빛을 보냈다.

백령은 그녀의 눈빛에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설산’에 관해서만 관심이 있을 뿐.

“그래서, 나를 부른 까닭이 뭐지?”

“어찌 그리 본론부터 말씀하시나요, 백령 님.”

사화의 고혹적인 말투에, 보통 남자라면 매료된 지 오래였겠지만 백령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리고 그럴 것이란 걸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딱히 기대를 품은 적도 없었다.

그저, 백령과 단둘이 마주 보고 얘기를 나누는 이 시간에 그녀는 의미를 두었다.

사화가 백령에게 차를 권했다. 하지만 그는 단칼에 거절했다.

“제가 마음을 좀 고쳐먹어서요.”

사화의 말에 백령의 푸른 눈동자가 그녀를 향했다. 아무것도 담지 않은 무미건조한 눈. 하지만 무엇보다 아름답고, 무엇보다 고귀하고, 무엇보다 깨끗했다. 사화는 저 눈이 미치도록 좋았다.

“설산을 조사하는 거……, 그거 허가해줄게요.”

사화의 말에 백령이 그녀를 의심 가득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왜 생각을 바꾼 거지?”

“그저, 저는 제 마음이 백령 님께 닿길 바랐는데, 이런 일로 고집을 피운다고 해결되지 않는단 걸 깨달은 것뿐이에요.”

백령은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사화 또한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정말로 사화가 아무런 흑심 없이, 대가 없이 그가 원하는 걸 내어 줄 생각은 없으니까.

“전처럼 무리한 요구를 할 생각은 없어요. 단지, 제 부탁을 하나만 들어주세요.”

“부탁?”

“네.”

“전에 협상 같은 건 절대 하지 않을 거라 말했을 텐데.”

백령의 단호한 말투에, 사화가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작은 부탁입니다, 백령 님.”

“일단은 들어보지.”

애초에 그녀가 무리한 요구를 했던 이유 또한 정말로 백령이 그 요구들을 들어줄 거라, 생각지 않아서다.

처음에 무리한 요구를 한 후, 가벼운 요구를 한다면 무릇, 들어줄 마음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녀는 그거를 노린 것이었다.

“아리 님을, 일주일만 북쪽 땅에서 지내도록 해주십시오, 백령 님.”

“아리를?”

백령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가 어째서 제게 아리를 요구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어째서지?”

백령이 특유의 무미건조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옅은 미소를 띠며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그저, 아리 님에게 북쪽 땅에 관해 소개해 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아리에게 북쪽 땅을?”

“예. 저희 땅만 오랫동안 머무르신 적이 없지 않습니까.”

아리에게 북쪽 땅을 소개해 준다는 명목은 꽤 그럴싸하게 느껴질 만했다. 아리는 구슬을 하사받은 몸이고, 절대자의 권능을 지녔으니, 북쪽 땅을 소개해 준다는 것은 구실 좋은 명목이었다.

하지만 백령은 그녀와 협상할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아리를 걸고 하는 것이라면, 더더욱.

“거절하지.”

“예……?”

그녀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는 백령의 거절을 아예 생각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다만, 조금 놀란 건 사실이었다.

그녀는 사실, 백령과의 대화에서 알고 싶었던 게 있었다.

백령이 아리를 얼마나 생각하는지.

사화는 그것이 알고 싶었다.

그것을 알았으니, 그것만으로 사화는 되었다.

설산의 조사와 맞바꿀 수 없을 정도로 그녀를 아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까.

그녀가 조용히, 그리고 매섭게 이를 갈았다.

***

춥고, 공허하고, 기분 나쁜 곳이었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건 아닌지, 포포도 옆에서 몸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여기 계속 있다간 얼어 죽고 말 거 같아, 아리야.”

“……내 생각도 그렇긴 해.”

결국, 포포와 함께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조금 따뜻한 곳을 찾아봐야겠어.

포포와 전각을 나왔다. 나오니, 햇살이 들어 조금은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아리야, 여기가 훨씬 낫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뽀뽀.”

“이거 맛있을까?”

잘 나가다가 갑자기 얼음 뭉치를 가리키며 ‘맛있을까?’하며 묻는 포포에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쟨 진짜 여우가 아니라 돼지라니까.

호기심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 배고파서 그런 건지, 포포가 얼음 뭉치를 입에 넣었다.

“뽀뽀, 먹지 마! 뱉어!”

그게 뭐인 줄 알고 먹어?

나의 호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먹던 포포가 갑자기 사색이 되어 입안에 있는 것들을 도로 토해냈다.

“켁켁, 이거 맛이 이상해.”

“……내가 못 살아, 진짜.”

소매 안에 넣어 두었던 손수건으로 그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 손수건으로 저 요망한 입을 열 대 정도 때려주고 싶었지만, 북쪽 땅이라 포포가 긴장했을 걸 알기에, 그냥 닦아주기만 했다.

뽀뽀, 너, 여기 동쪽 땅이었으면 꼬리 털 다 뽑혔어. 알아?

“헤헤.”

남의 속 모르는 포포는 나의 손길에 바보 같은 웃음만 흘릴 뿐이었다.

“어라, 아리야, 근데 형님이랑 고양이랑 강아지가 좀 늦네.”

……확실하다. 뽀뽀는 아직 그들의 이름을 외우지 못한 게 확실해. 아, 아니다. 백령의 이름은 알려나?

아무튼, 자하랑 여노는 모르는 게 확실하다.

“그러게, 뭔 일이라도 생긴 건가?”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물론, 아무 일도 없을 거로 생각하고는 있지만, 내 생각보다 지체되고 있으니까.

사화, 얘는 왜 백령을 온종일 붙잡아 두는 거야? 대체 뭔 얘기할 게 그렇게 많대?

……역시 그냥 내가 따라갈 걸 그랬나.

아, 아니다, 아리야. 내가 갔다면 뽀뽀가 혼자가 되었을 게 분명하니까. 뽀뽀가 사화 무서워하니까, 같이 가기도 좀 뭐하고.

“아리야, 우리도 가볼까?”

“응?”

“나도 형님이랑 고양이가 걱정되기도 하고, 우리 둘만 있으니까, 무섭기도 하고.”

“그, 그럴까?”

잠깐만, 그럼 진작에 같이 따라가자 하던가! 이 간사한 여우 녀석이! 아까는 아무 말 없다가 이젠 또 따라가자고?

그를 노려보자, 그가 바보 같은 미소를 지었다.

휴, 그래, 내 잘못이지.

뒤늦게라도 백령에게로 가기 위해 발걸음을 돌리려던 찰나,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잠깐만, 뽀뽀.”

“왜?”

“이건…….”

분명하다. 이건 분명 그의 기운이다.

“이건, 뭐?”

“이쪽으로 따라와 봐!”

“……응?”

포포가 멀뚱멀뚱 나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그의 꼬리를 잡고 달렸다.

“아악! 아리야, 왜 그러는데!”

포포는 영문도 모른 채로 내게 꼬리를 잡히고 달렸다. 숨이 차올라, 더는 못 뛸 것 같을 때 즈음, 내가 찾던 기운이 바로 근처에서 느껴졌다.

어디, 어디지?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발만 동동 굴렀다.

“역시 잘 찾네.”

내 머리 위로, 누군가의 도포가 올려졌다. 도포의 주인을 올려다보았다.

“……은월!”

“오랜만이야, 아리야.”

그는 은월이었다. 역시 내 직감이 틀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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