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랑이님의 딸이 되었습니다 (60)화 (60/167)

60.

그는 백령이었다.

이곳에 백령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나였기에 그를 보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앗!”

그리고, 그와 동시에 발이 미끄러져, 엎어질 위기에 처했다.

“이곳은 습하니, 조심하는 게 좋아. 기껏 예쁘게 입은 옷이 더러워지니까.”

동작 한번 빠른 백령이 엎어지기 직전의 나를 잡아주었다.

“고, 고마워, 백령.”

그의 이름을 또박또박 부르는 건 처음이었다. 그가 어째서 이곳에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왕 만난 김에 얘기나 좀 나누어 보고 싶었다.

요즈음 백령이랑은 아예 단절하고 살았단 말이다.

“백령.”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아름다운 푸른색의 눈에, 달빛이 스며들어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그의 눈동자가 너무 아름다운 나머지, 입을 뗄 수가 없었다.

“말이 많이 늘었군.”

“……응.”

그의 칭찬에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그건 여노가 새로 준비해둔 옷인가.”

백령의 물음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인지 여전히 그의 눈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잘 어울리는구나.”

그때였다. 큰 소리와 함께 아름다운 푸른 불꽃들이 밤하늘에 아름답게 퍼졌다. 절로 밤하늘로 고개가 올라갔다.

하늘에 아름답게 퍼지는 불꽃들은, 마치 백령의 푸른 빛을 연상시켰다.

동쪽 땅을 대표하는…… 푸른 빛.

백령은 언제부터 동쪽 땅의 주인 자리에 오른 걸까, 그리고 그는 언제부터 저렇게…….

공허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게 된 걸까.

백령의 푸른 눈은 정말 아름다웠지만, 정작 아무것도 담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풀로 붙여진 것처럼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저, 그런 그를 바라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나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백령이 돌아가려는 듯, 뒤돌아섰다.

“이제 돌아가는 편이 좋을 것 같군. 축제도 끝나가니.”

“백령.”

발걸음을 재촉하려는 그를 불러세웠다. 그가 나의 부름에 발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았다.

“고마워…….”

“무엇을 말하는 거지?”

“다.”

백령의 공허했던 눈이, 잠시간 무엇을 담은 듯하였다. 하지만, 그가 곧바로 다시 뒤돌아 버린 탓에 그것을 그리 오래 보진 못했다.

그가 발걸음을 옮겼고, 나는 그의 뒤를 따랐다.

그를 따라 숲속을 나와 걷다 보니 어느새 익숙한 저잣거리가 펼쳐졌다. 축제가 끝난 것인지, 아까와는 달리 저잣거리는 조용했다.

“백령 님, 아리 님!”

멀리서 아루와 여노가 손을 흔들며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이 바로 앞까지 도착하자, 무언가 허전함이 느껴졌다.

엥? 자하는 어디로 간 거지?

달려온 그들 사이에 있어야 할 인물, 자하가 당최 보이지를 않았다.

“아루, 자하는?”

백령 또한 자하의 부재가 이상하게 느껴졌는지, 아루에게 물었다. 그러자, 아루가 머뭇거리며 대답하기를 망설였다.

“저어…… 그게…….”

아루가 우물쭈물하자, 여노가 옆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덕을 쌓으러 가셨습니다…….”

이건 또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야.

잠시 잘못들은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했지만, 여노의 친절한 설명 덕분에 잘못들은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자신의 덕이 부족하여, 이번 일이 이리된 것 같다면서 갑자기……. 가셨습니다.”

아니, 대체 어디로?

……정말 도통 종잡을 수가 없는 녀석이다, 자하는.

“하. 아루, 네가 데려와라.”

“……네.”

자하에 행방에 들은 백령은 더는 묻지 않고, 작은 한숨을 내쉬더니 아루에게 명령을 내렸다.

불쌍한 아루는 자하를 찾으러 어딘가로 향했다. 아루가 떠나고 여노와 나, 그리고 백령은 아루의 무운을 빌며 궁으로 돌아갔다.

***

다음 날이었다. 대낮부터 백령의 궁은 소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아루가 큰 고양이 한 마리를 질질 끌고 왔으니까.

“아루, 너 이 자식, 이거 안 놔?”

“나도 놓고 싶은 거 꾹 참고 있으니까, 닥쳐.”

자하가 붙잡힌 목덜미에, 분하다는 듯 난리 쳤지만, 아루의 악력을 이길 순 없는 듯하였다.

그렇게 아루는 자하를…… 응? 내 방으로 끌고 온다?

내가 잘못 본 거겠거니 싶어, 눈을 비빈 후 다시 바라보았다. 하지만 내 방으로 오고 있는 게 맞다.

뭔가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된 것이 틀림없다. 저걸 끌고 왜 내 방으로 와?

아니, 아루야. 그걸 왜 내 방에 들고 와!

여노가 당황하고 있는 내게 황급히 귓속말로 달갑지 않은 이 상황을 알려 주었다.

“아리 님, 털갈이 시기의 예민한 지금의 자하 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건 아리 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이걸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웃기지 마! 저거 기분을 내가 왜 풀어줘야 해!

뒤에서 아루와 여노가 짠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 너희가 내게 이럴 순 없어.

너희, 다, 괘씸죄야!

여노를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지만, 여노는 아루가 자하를 끌고 들어오기 편하게 친히 문까지 열어놓는 친절을 보였다.

곧이어, 문 사이로 아루가 자하를 끌고 오더니, 그대로 내팽개쳤다.

“아씨, 무거워 죽겠네. 어째 전보다 더 무거워졌냐.”

내팽개쳐진 자하가 이리저리 길길이 날뛰었다.

“놔, 나는 덕을 쌓으러 갈 거야, 갈 거라고!”

……참고로 지금은 아무도 자하를 잡고 있지 않다.

그런데도 자하는 성이 난 채로 머리털이 바짝, 솟아 있었다. 건들면 할퀴어버릴 것만 같았다.

저거 털갈이하고 있어서 저런 거 맞아, 진짜?

내 생각에 자하는 일 년 내도록 털갈이를 하는 것이 틀림없다.

자하의 짧고 뭉툭한 꼬리가 바짝 솟았다.

얼씨구.

“자하.”

나의 부름에 자하의 뭉툭한 꼬리가 곧바로 내려갔다.

“아, 아리 님…….”

“가.”

그래, 자하야……. 덕을 쌓든, 복을 쌓든 가서 네 마음대로 쌓으렴.

뭐, 생각해보면 나쁜 짓을 한다는 것도 아니고, 자기 덕이 부족한 것 같아 쌓겠다는데, 굳이 그를 만류할 이유는 없는 것 같았다.

얼마나 좋아, 나도 앞으로 안 괴롭히고, 안 귀찮게 굴고, 쟤는 쟤대로 덕이든 복이든 쌓고.

서로에게 좋은 거 아닌가?

“아, 아리 님…….”

자하가 큰 슬픔에라도 잠긴 듯이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내, 내가 가라고 해서 저런 거야?

……한 번은 잡아줄 걸 그랬나.

“아리 님, 저 어디에도 안 갈 테니, 안심하세요!”

……응?

잠깐만, 뭐라고?

동그래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가 확신에 찬 표정으로 요망한 주둥아리를 열었다.

“아리 님이 제가 간다니, 그런 세상 잃은 표정을 하시면 저, 자하는 어디에도 갈 수가 없어요.”

……누가 세상을 잃어? 내가?

아니야, 자하야. 나는 네가 덕 쌓는 걸 누구보다 응원해.

반박할 틈도 없이 자하의 말은 속사포로 이어졌다.

“아리 님, 평생 옆에서 지켜드리겠단 제 약속을 잊지 않고, 이리 저를 잡으시는군요.”

잊고 있었다. 정말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자하가 말해주지 않았더라면 아마 평생을 잊고 살았을 것이다.

억울하다. 나는 정말 너무 억울하다. 왜 자하는 항상 내 말뜻을 이해 못 하는 걸까……. 아니, 저 정도면 일부러 내 말을 잘못 알아듣는 거 아니냐고!

“역시, 제게는 아리 님뿐입니다! 옆에 평생 붙어 있을게요, 아리 님!”

자하가 글썽이며 내 앞에 머리를 박았다. 나는 할 말을 잃은 채로 자하를 내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여노와 아루는 그 광경을 보고, 서로에게 엄지를 척, 세우고 있었다. 확실하다. 쟤네 둘이 짜고 친 게 확실하다.

너희, 그러고 있을 시간에 나 좀 도우란 말이야!

어떡할 거야! 자하가 옆에 평생 붙어 있겠다잖아!

“역시 아리 님의 따뜻한 마음씨에 자하 님이 마음을 돌릴 줄 알았어요.”

그래, 내가 누굴 탓하겠어. 상대가 자하인 걸 간과하고 이 입을 멋대로 놀린 내 죄지…….

“여노.”

“네?”

“조용해.”

한마디도 하지 마, 찍소리도 하지 마!

너희 입 한 번씩 뗄 때마다 괘씸죄 추가야!

***

그날 이후로 정말 자하는 내 옆에 질리도록 붙어 있었다. 평화로운 나날, 언제나처럼 정자에 앉아 놀고 있던 나와 포포는 옆에 붙어 있는 자하 탓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전보다 더 심해진 거 같아.”

“뭐가?”

“저 고양이 상태 말이야.”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춤을 추는 자하를 보고 포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럴 수 있지……. 난 포기한 지 오래야, 여우야.

“아, 맞다. 아리 님!”

“으응…….”

자하가 날 부르자, 덜컥 두려움이 느껴졌다. 그날 이후로 자하는 틈만 나면 나를 부르고 헛소리를 하곤 다시 콧노래를 부르고는 했기에, 이번엔 또 어떤 헛소리를 할지 두려웠다.

“중앙 회의가 언제 열릴지, 잡혔다고 하던데요.”

“어?”

의외였다. 그래서 그의 말에 자동으로 눈이 크게 떠졌다.

지금 몇 년 만에 정상적인 소리를 하는 자하를 보는 거지?

“언제 열리는데?”

“제가 듣기로는, 다음 주 즈음 예정이래요.”

다음 주? 하긴, 급하지 않다고 해도 중대한 사안이니만큼 미룰 이유도 없지.

“근데 장소가, 중앙 땅이 아니래요.”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중앙 땅이 아니면 어디서 회의를 해?

미호의 땅이, 중앙 땅이잖아?

그에 대한 답은 금방 들을 수 있었다.

“북쪽 땅에서 한다고 합니다.”

“뭐?”

북쪽 땅이라면, 사화가 통치하는 거길 말하는 거야?

“그렇다는 건…….”

“사화 님의 궁에서 열릴 것 같아요.”

뭐? 사화의 궁에서?

왜 굳이 미호의 땅이 아닌, 사화의 궁에서 중앙 회의를 여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중요한 회의니 만큼, 중앙 땅에서 처리할 거라 생각했는데…….

“왜?”

“글쎄요, 자세한 건 저도 잘…….”

“그래서, 그래서?”

“그래서, 결론은…….”

꿀꺽.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저와 아리 님이, 북쪽 땅에서 단둘만의 만남을…….”

“자하.”

“네?”

“조용해.”

“……네?”

“입도 뻥긋하지 마, 알았어?”

어디서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있어.

자하의 입이 대발 튀어나왔다.

어쭈, 입, 안 집어넣어?

자하를 지그시 노려보자, 그가 내 눈치를 보며 천천히 입을 집어넣었다. 자하의 뭉툭한 꼬리가 좌우로 흔들렸다.

“근데, 자하. 북쪽 땅에 함께 가는 거야?”

“네? 당연하죠. 왜요?”

왜긴, 북쪽 땅 갔다가 너 살해라도 당할까 봐 그러지.

사화와 자하의 신경전을 떠올렸다. 그때 사화의 눈은 자하를 몇 번이라도 죽여버릴 것만 같았다. 그녀의 서기 어린 눈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서웠다.

자하, 정말 괜찮을까…….

하긴, 백령도 있고 하니, 사화가 평소처럼 대하지는 않겠지. 미호도 있고.

“자하.”

“네?”

“고양이는 목숨이 아홉 개라던데, 그래서 그러는 거야?”

“……네?”

자하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멀뚱멀뚱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중요한 사실을 깨달은 건지, 그의 뭉툭한 꼬리와 귀가 일자로 솟았다.

“저, 고양이 아니에요, 아리 님!”

“그래, 그래. 자하, 목숨 몇 개야?”

“하나요…….”

그냥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거였구나.

“사화 님 때문에 제가 걱정되는 거예요, 아리 님?”

“아, 아니야!”

나의 부정에 자하가 활짝 웃었다. 그가 이토록 활짝 웃는 모습은 상당히 오랜만인 것처럼 느껴졌다.

하여간, 자하 바보.

“걱정 마세요, 아리 님. 사화 님 손에 제가 죽을 일은 없으니깐요.”

“응?”

“사정이 있거든요.”

사정? 무슨 사정?

자하와 사화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건가?

“다른 신수의 손에 죽어도, 설령 아리 님 손에 죽는다고 해도, 사화 님 손에는 죽지 않을 거예요.”

처음으로 자하의 말이 묘하게 느껴졌다. 살벌한 말과 달리, 자하의 표정은 편안해 보였다.

그런데, 그의 표정이 어딘가 안쓰러워 보이는 건, 나만의 착각일까…….

“아리야, 북쪽 땅이 어디야?”

포포가 과자를 먹다 말고 나를 보며 물었다.

어, 그러고 보니 사화, 뽀뽀랑도 사이가…….

“그, 저번에 만난 검은 머리의 여자 신수가 통치하는 땅인데…….”

“뭐?”

포포가 손에 들고 있던 과자를 떨어트렸다. 포포가 저렇게까지 반응한다는 것은 정말 충격받았다는 뜻이다.

세상에, 다른 것도 아니고, 뽀뽀가 과자를 떨어트리다니.

“……뽀뽀, 너는 안 가도 돼.”

“아, 아냐! 갈 거야!”

뽀뽀의 외침에 자하가 그를 장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래, 새끼 여우야. 별것 아니야, 가자!”

“으응……. 그러자, 고양아.”

포포의 말에 자하의 귀와 꼬리가 솟아올랐다. 그러고는, 포포의 꼬리를 잡아들었다.

“뭐? 고양이?”

“이, 이! 놔!”

“고양이이이?”

“뭐! 너도 새끼 여우라고 했잖아!”

“야! 넌 새끼 여우잖아. 난 고양이가 아니라고!”

“나도 새끼 여우 아니거든?”

……정말 걱정되는 한 쌍이다.

두 신수의 모습을 보니, 다가올 중앙 회의가 걱정되다 못해, 두렵게 느껴졌다.

……정말 얘네 둘 데리고 가도 되는 걸까.

에라, 모르겠다. 백령이 알아서 하겠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