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그 후 별 무리 없이 축제를 둘러보며 즐길 수 있었다. 자하와 포포는 그 이후로도 가끔 서로를 노려보며 싸우기도 하였지만, 유치한 말장난이 반복되다 보니, 지친 건지 어느 땐가부터 싸움을 하지 않았다.
하여간, 애들이라니까, 쯧쯧.
“아리 님, 아직 시간도 많은데, 뭐 하고 싶은 거 없으세요?”
“흐음…….”
딱히 생각나는 건 없는 거 같은데…….
축제도 즐거웠고, 처음 나와 보는 동쪽 땅의 풍경도 매우 아름다웠다. 매번 하늘 위에서 청마를 탄 채로 내려다보는 풍경과는 다른 느낌에 감탄이 절로 나오기도 했다.
그냥 이대로 축제를 즐기다가 궁으로 돌아가도 참 괜찮은 하루일 것 같았다.
그랬다. 분명 그랬는데…….
“아리야! 삼촌 왔다.”
저 멀리서 우릴 향해 미친 듯이 달려오는 바랑을 보니 괜찮은 하루로 마무리하기에는 그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만나지 않게 해달라 빌었거늘…….
“와, 진짜 독하다, 독해. 계속 우리 찾아다닌 거야?”
자하와 아루가 혐오의 시선으로 바랑이 다가오는 걸 멍하니 보고 있었다.
그들은 입을 모아 ‘질린다, 질려.’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곧이어 우리의 앞에 바랑이 당도했다. 옆에는 언제나 그렇듯, 이랑이 서 있었다.
“아리야, 삼촌 보고 싶……. 너희 뭐냐?”
팔을 뻗어 나를 만지려는 바랑의 손길을 아루와 자하가 막아섰다.
아주 칭찬해, 얘들아.
“어허, 저번에 말하지 않았습니까? 우리 아리 님께 다가오지 마십시오, 바랑 님.”
“맞아요. 바랑 님은 ‘우리’ 아리 님한테 손끝 하나 못 댑니다.”
바랑이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자하와 아루의 사이를 막무가내로 비집고 들어오려고 했다.
“그런 게 어딨어, 이놈들아!”
“여기 있습니다.”
하지만 단호한 아루와 자하를 뚫을 수는 없었다.
똥개야, 이제 포기해.
“아리야아!”
이랑이 티 없이 맑은 미소와 함께 내게 다가왔지만, 그 또한 아루와 자하에 의해 저지당했다.
어? 그러고 보니, 이랑 쟤도 못 본 사이 훌쩍 커 버렸다. 거의 성체 직전이거나, 이미 성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성장이었다.
뭐, 뭐야, 낯설어…….
이랑이 자하와 아루에 의해 내게 오는 길이 막히자, 안쓰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치, 나는 아리한테 예쁜 선물도 줬는데.”
어……? 그러고 보니, 남쪽 땅에서 위험에 처했을 때, 이랑이 주었던 보석 덕분에 살았었는데!
문득, 서쪽 땅에서 보석을 받았을 때를 떠올렸다.
“네게 도움이 될지도 몰라. ……그렇지 않길 바라지만.”
그는 보석이 수호석이라는 걸 알고 내게 준 것일까?
어쨌든 이랑에게는 감사 인사를 제대로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렇기에, 자하와 아루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이랑은 괜찮아.”
“네?”
나의 말에 자하와 아루가 경악을 했다.
“아, 아리 님……. 저렇게 생긴 늑대야말로, 정말로 위험천만하고 극악무도한, 검은 속내를 알 수가 없는 거랍니다.”
“암암, 아루의 말이 백 번, 천 번 맞습니다, 아리 님. 저런 ‘이랑 님’ 같은 분이랑 어울리시면 안 됩니다!”
둘이 이럴 때만 쿵짝이 잘 맞지, 아주.
두 사람이 격렬하게 말렸지만, 그들의 말을 한 귀로 흘리는 나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허락이 떨어진 이랑은 내 옆으로 와, 헤실거렸다. 겉모습은 많이 변했지만, 속은 그리 변하지 않은 듯했다.
“야, 이랑. 예쁜 선물이라는 게, 뭘 말하는 거냐?”
바랑이 도저히 가늠이 안 되는 듯, 진지한 표정으로 이랑에게 물었다.
“아, 그거? 우리 정원에 있는 황금빛 보석 있잖아.”
“황금빛 보석? ……설마?”
바랑이 긴가민가하다가, 생각이 난 듯, 이랑을 의심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거 아리 줬어.”
“야, 인마! 그걸 주면 어떡하냐!”
선물의 정체를 안 바랑이 길길이 날뛰었다. 하지만, 이랑은 ‘삼촌, 시끄러워. 우리 예쁜 아리 놀라잖아.’라며 웃고 있을 뿐이었다.
이랑의 ‘우리’라는 표현은 상당히 거북했지만, 일단은 넘어가기로 했다.
바랑이 내 목에 걸린 목걸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럼 아리가 하고 있는 저 보석 박힌 목걸이가…….”
“응, 내가 준 건데?”
너무나 뻔뻔하고 당당한 이랑의 태도에 바랑이 오히려 할 말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어차피 내 거잖아.”
“그건 그렇긴 한데.”
이랑의 말에 바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이게 뭔데 바랑이 저렇게까지 날뛰는 거지?
고개를 돌려 이랑을 바라보았다.
“이거, 나 주면 안 되는 거였어?”
“응? 아니야, 걱정하지 마. 그냥, 그 보석을 준다는 건 말이야.”
“응.”
“결혼할 반려를 찾았다는 뜻이거든.”
“……뭐?”
굳은 표정으로 바랑을 올려다보았다. 바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뿌듯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그렇지. 결혼해야지.”
당장 목걸이를 벗어서 이랑에게 내밀었다.
그런 거 안 해, 가져가, 인마.
어디서 약을 팔아?
“가져가.”
“노, 농담이야, 아리야.”
“가져가!!!”
“아, 아리야. 진짜 농담이라니까?”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이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진짜야, 장난친 거야.”
이랑이 한 번만 믿어달라며 애걸복걸하니, 이번만 믿어보기로 하고 목걸이를 다시 목에 걸었다.
“아리 님, 걱정 마세요.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생기는 날에는 동쪽 땅과 서쪽 땅, 둘 중 한 영지는 사라질 정도의 전쟁이 난다고 봐야죠.”
“그건 그렇지. 아마 서쪽 땅이 사라지지 않을까 싶은데.”
자하와 아루의 말에 바랑이 둘을 노려보았다.
“끔찍한 소리 하지 마, 이 나쁜 놈들아.”
네가 제일 나빠, 네가.
아루와 자하, 바랑은 자기들끼리 티격태격하기 바빴다. 그렇기에 그 틈을 타, 이랑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고마웠어.”
“응? 뭐가?”
“네가 준 이 보석 덕분에 살았어. 알고 준 거야?”
“난 잘 모르겠는데?”
모르는 척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몰라서 그러는 건지, 이랑이 어깨를 들썩였다.
“어쨌든, 고마워.”
“정 그렇게 고마우면, 나랑 단둘이 축제를 보내지 않을래?”
나는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안 고마워.”
“…….”
이랑의 늑대 귀가 축, 처졌다. 그뿐이랴, 그의 꼬리도 축 처져서는 실망이 가득한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슬픔에 젖어 있었다.
그렇게 봐도 소용없어.
“그, 그럼 우리랑 동행이라도 해줘.”
그건 똥개도 함께라는 거잖아.
싫어, 돌아가.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 싫은 건 싫은 거다.
“싫어.”
“…….”
이랑의 황금빛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그의 축 처진 귀와 꼬리는 올라올 생각을 하지 않았고, 그의 표정은 처량해 보이기까지 했다.
……에라, 모르겠다.
“……알았어. 동행만 하는 거야, 알았지?”
“응!”
아루와 자하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아리 님. 저, 정말 이 늑대들이랑 같이 다닌다고요?”
“그렇다잖아. 너흰 저기로 비켜, 훠이, 훠이. 호위나 열심히 해.”
바랑이 신나게 둘을 밀쳐냈다. 아루와 자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세게 가로저었다.
“야, 내가 있으니 마음이 놓이지 않냐?”
“전혀요. 오히려 마음이 너무 좋지 않으니 문제입니다만.”
“마음이 놓일 게 따로 있지.”
바랑이 거들먹거리며 말하자, 아루와 자하가 그를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삼촌, 그런 말은 앞으로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이랑이라고 다르지는 않았다.
“근데, 아루야. 흑기에 대한 조사는 잘 되어 가고 있냐?”
길을 걷다 멈춰선 바랑이 아루를 향해 물었다. 바랑의 질문에 아루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무런 단서도 아직 찾질 못했습니다. 남쪽 땅도 샅샅이 뒤져 보았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었고요.”
“그래? 하긴, 그렇게 쉽게 잡힐 거라면 이미 잡혔겠지.”
“은월 님의 말씀에 따르면, 이번에도 이성이 존재하는 흑기라던데……. 그가 손을 깨물고 피를 흘리자, 흑기가 떼거지로 밀려와서 짜증이 치밀었다더군요.”
아루의 말을 듣고 그 모습을 상상한 바랑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진저리를 쳤다.
“그래서 네가 여기로 온 거구나?”
“그렇다고 할 수 있죠. 어차피 조사해봐야 단서가 안 나오니, 남쪽 땅이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 수사는 잠시 중단되었습니다.”
“이것 참, 묘하네.”
“예?”
바랑이 미소를 지으며 갑자기 나를 바라보았다.
왜, 왜?
“그렇잖아. 남쪽 땅의 사건을 계기로, 양쪽 다 시간을 벌었으니까.”
“아…….”
바랑의 말을 듣고 보니, 그의 말이 옳았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흑기들은 다시 함부로 움직일 수 없게 되었고, 나는 성장할 시간을 벌었다. 반대로 흑기들은, 은월이 남쪽 땅의 사정을 보게 된 덕분에 시간을 벌게 되었고.
“누가 먼저 치냐가 매우 중요한 시점에서, 둘 다 시간을 벌었으니……. 뭐, 흑기들은 당분간은 조용하겠군. 똥줄 타고 있을 거야, 아마.”
게다가 흑기들이 숨을 수 있는 건 네 땅의 주인 중 한 명이 그들에게 힘을 빌려주었기 때문 아닌가?
은월의 말에 의하면, 나래가 흑기와 모종의 거래를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고 한다.
그들과 거래를 한 나래가 잡혔으니, 그들도 쉽지 않을 텐데.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흑기들의 행방이 아직도 묘연하다는 것이죠. 나래 님을 잡아들인 후에 미호 님의 힘으로 그들을 찾으려 했지만, 불가능했습니다.”
“왜 그런 거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아루의 대답에 바랑이 석연찮다는 듯, 잠시간 고민에 빠졌다.
“뭐, 괜찮을 거야.”
바랑이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다시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어쨌든 아리는 아무런 일이 생기지 않아도 성장을 하지만, 흑기들은 시간이 지나, 아리가 성장하면 할수록 득 볼 게 하나도 없거든.”
바랑의 말에 아루가 탄식을 내뱉으며 수긍했다.
“그건 그렇죠. 그래서 은월 님도 그리 조사를 서두르지 않는 걸 수도 있겠군요.”
“그렇지. 아리가 구슬의 힘만 잘 다룰 수 있게 된다면, 그들이 함부로 할 수 없으니까.”
구슬의 힘이라……. 이 힘을 다루는 것, 그것이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이겠지.
……살아남기 위해서.
“그것보다 요즘 은월 안 보니까 좀 살 것 같다. 이제야 동쪽 땅에 좀 편하게 드나들겠네.”
“백령 님 말은 귓등으로 들으십니까? 분명 평소에는 늑대 출입 금지라고 일렀잖습니까.”
“뭐, 어때, 그치, 아리야?”
저 똥개가 지금 뭐라는 거야.
“오지마, 똥개.”
나의 단호한 대답에 바랑이 상처받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저, 저, 만들어낸 표정 같으니라고. 아무런 타격 없는 거, 이미 다 알고 있는데.
“너무해.”
그의 말을 더는 들어주지 않기로 결심했다.
하여간, 오기만 해봐. 침을 콱, 뱉어버릴 줄 알아, 퉤.
축제를 돌아다니는데, 자꾸 이랑이 헛소리하기 시작했다.
“아리야, 저기 저 아름다운 강이 보여?”
……저 멀리 있는 코딱지만 한 저거 말하는 건가.
저게 뭐?
“으, 응……. 보이는데.”
“마치 저 푸른 물결이 꼭 아름다운 네 눈동자 같아.”
너무 작아서 뵈지도 않는데……?
곁에서 이랑의 헛소리를 같이 들은 아루와 자하가 비꼬기 시작했다.
“야, 자하야. 넌 저 푸른 물결이 보이냐?”
“어. 저 코딱지만 한 거?”
“마치 네놈의 좁디 좁은 속과 같다.”
“뒤지고 싶냐.”
둘의 대화에 이랑이 헛기침을 시전하며 이번에는 어느새 분홍색으로 물든 하늘의 구름을 가리켰다.
“아리야, 저기 저 예쁜 구름이 보여?”
“응, 보이는데.”
“마치 네 아름다운 머리칼의 색깔 같아. 연한 보랏빛이 도는 아름다운 은발 말이야.”
오, 이번엔 그래도 뭔가 그럴싸한 것 같은데.
하지만 이번에도 아루와 자하가 질세라, 곧바로 입을 열었다.
“자하야, 저기 저, 조금만 있으면 사라지고 없어질 구름이 보이냐?”
“어. 잘 보이는데.”
“곧 사라질 네놈의 털들 같다.”
“……죽인다, 진짜.”
이랑이 더는 못 참겠는지, 두 신수를 노려보았다.
“둘 다 닥쳐.”
이랑의 매서운 눈빛은 처음 보았다. 하지만 상대가 누구인가, 우리의 자하와 아루가 아닌가.
그들은 서로 이랑을 신경 쓸 새도 없이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야, 너 오늘 제삿날이다, 진짜.”
“어디서 고양이가 우네.”
“가짜 호랑이 녀석이!”
둘의 싸움에 바랑이 즐겁다는 듯이 손뼉을 쳤다.
넌 뭘 또, 손뼉을 치고 앉아 있어!
“싸워라, 싸워라, 이기는 신수 내 편!”
“바랑 님, 자하가 이겼습니다.”
“뭔 소리래. 아루, 네가 이겼어!”
둘이 격렬히 바랑을 거부하자, 둘의 모습을 지켜보던 바랑이 인상을 찡그렸다.
“야, 이 나쁜 놈들아.”
……똥개, 바보.
그 이후, 다행스럽게도 이랑은 날이 아니라 생각한 건지, 헛소리를 집어넣었고, 이후 평안하게 축제를 즐길 수 있었다.
슬슬 해가 저물어 갔다. 해가 지는 동쪽 땅의 전경 또한 매우 아름다웠다. 다른 이들과 함께 저녁노을을 바라보고 있자니, 편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 문득 두 호랑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백령과 은월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걸까?
둘의 행방이 너무나도 궁금했지만, 아루와 자하도 모르는 둘의 행방을 내가 알 수 있는 방도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