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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님의 딸이 되었습니다 (57)화 (57/167)

57.

“아리 님! 어서 일어나 보세요!”

“우웅…….”

“드디어, 축제의 날이 밝았답니다.”

“응?”

‘축제’라는 말에 절로 눈이 떠졌다. 나를 깨우던 여노가 창문을 열었다.

어……?

창문으로 보인 궁의 풍경은 평소와 달랐다. 푸른 빛의 백령의 궁은, 온갖 꽃들과 장식품들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고, 밖은 평소와 다르게 소란스러웠다.

궁 안이 소란스러운 것은 아니었고, 동쪽 땅 전체가 시끌벅적한 것 같았다.

“우와……!”

막상 축제 날이 되니, 가슴이 설레었다. 밖의 풍경을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었다.

“안 돼요, 아리 님.”

당장 버선발로 뛰쳐나가려고 했지만, 여노가 그런 나를 붙잡아 세웠다.

왜, 왜……?

여노가 싱그러운 미소로 날 바라보았다.

“오늘 같은 날은 예쁘게 꾸며야죠.”

뭐야, 평소에도 나 예쁘다며? 그건 거짓말이었던 거야, 여노?

배신감에 여노를 노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노는 무엇이 그렇게 신나는 것인지, 활짝 웃어 보였다.

지금 웃을 때가 아니라니까, 여노. 여태까지 거짓말이었던 거…….

“오늘을 위해 제가 준비했습니다.”

여노가 나의 눈앞에 저고리와 치마를 내밀었다. 저고리는 연한 분홍색으로, 소매는 은은한 노란색이었다. 치마도 윗단은 연한 분홍색으로 시작해서 끝으로 갈수록 은은한 하늘색이 퍼지는, 척 보기에도 너무나 예쁜 치마였다.

예쁘긴 하지만, 난 지금 옷도 딱히 불편함을 못 느끼는데…….

여노가 눈을 반짝였다.

“어때요, 예쁘죠?”

“으응……. 그렇긴 한데.”

“게다가 남쪽 땅에서부터 쭉, 아리 님이 빠르게 성장하셔서, 지금 치마는 조금 작은걸요.”

그러고 보니, 저고리와 치마가 전에 비하면 조금 짧아지기는 했다.

왠지 모를 뿌듯함이 일었다.

“아리 님, 이제 정말 어엿한 아가씨가 다 되셨어요.”

거짓말 좀 하지 마. 그 정도는 아니야.

누가 속을 줄 알고? 나도 눈이 있다. 아직 성체가 된 게 아니란 말이다!

구슬 덕분인지 성장이 매우 빠른 탓에, 성체에는 못 미치는 것 같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남쪽 땅에 가기 전과 비교하면 꽤, 아니, 많이 성장한 것 같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아직 많이 앳돼 보였다.

무엇보다, 겉으로 느껴지는 기운 또한 일반적인 성체들과는 느낌이 달랐다.

그래. 그래도 뭐, 이 정도면 아기 때에 비하면 많이 크긴 했다.

기쁜 건 사실인지라, 여노에게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여노가 그런 나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이에요.”

“응? 뭐가?”

“누군가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축복받은 기분이 드는 것 말이에요.”

“어……?”

여노의 말에 가슴 한편이 울렸다. 그래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한동안 아름다운 그녀에게서 시선이 멈춰버렸다.

“감사합니다, 아리 님.”

여노가 정말 행복하다는 듯, 활짝 미소지었다.

누군가가 나를 지켜봐 주고, 사랑해주는 건 내가 고마워할 일 아닌가……. 그런데 여노는 어째서인지 내게 감사 인사를 했다.

그녀의 미소에 낯이 뜨거워졌다. 얼굴이 붉게 물드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더 고마워, 여노.”

“헤헤. 아리 님의 이런 점이 좋아요.”

“응?”

“그런 게 있어요, 아리 님.”

뭐, 뭐야?

“아리 님, 부디 앞으로도 무사히 잘 성장해주세요. 저는 그것만 바라고 있답니다.”

여노가 진심으로 내게 말했다. 여노의 따뜻한 눈빛에 절로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여노가 준비해준 의복을 입고 밖으로 나오니, 자하와 아루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도 평소와는 다른 의복과 분위기였다.

그들이 날 보더니, 놀란 듯이 여노를 바라보았다.

“와, 여노, 네가 준비한 거야?”

“네. 잘 어울리죠?”

“무척. 깜짝 놀랐잖아. 오늘따라 아리 님이 더 고우셔서. 물론, 우리 아리 님은 평소에도 고우시지만.”

옳지, 우리 아루 말도 참 잘한다.

뿌듯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자하가 아루와 나의 사이로 끼어들었다.

“아루, 이 자식. 아리 님을 ‘우리’라고 칭할 수 있는 건 나뿐이라고!”

그거 아니야, 자하야.

아무도 자하의 말에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하지만 자하는 자신의 말을 다들 알아들은 것이라 철석같이 믿고 있는 듯했다.

바보는 약도 없다……. 그냥 저대로 두자.

“이제 축제를 보러 갈까요, 아리 님?”

“좋아!”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그렇게 발걸음을 재촉하려는데, 갑자기 뇌리에 무언가가 스쳤다.

어? 뭐지? 근데 뭔가를 잊고 있는 것만 같…….

아, 그래. 뽀뽀!

뭘 잊고 있었나 했더니, 바로 나오느라 옆 방에서 자고 있을 포포를 깨우는 걸 깜빡했다.

“여노, 뽀뽀는?”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했던가. 아마 거기에 여우도 포함인 것 같았다.

“왜 나 두고 가!”

저 멀리서 포포가 작은 발로 이쪽으로 뛰어오고 있었으니.

그의 풍성한 여우 꼬리가 신나서 흔들거렸다. 아무래도 포포도 축제를 많이 기대하고 있는 것 같았다.

포포가 어느새 내 옆으로 왔다.

“헤헤, 맛있는 거 잔뜩 있겠지?”

……진짜 저게 여우인가, 돼지인가.

“그럼 이제 축제를 즐기러 가볼까요, 아리 님?”

아루의 물음에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른 가자!

아루가 앞장서고, 자하가 뒤에 붙어서 따라왔다. 아무래도 그들의 목적은 축제를 즐기는 것보다 나의 호위가 먼저인 것 같았다.

동쪽 땅은 원래 활기와 활력이 넘치는 땅이지만, 오늘따라 더욱 그런 것 같았다. 영토는 웃음소리와 수다 소리로 가득 찼고, 신수들은 지나가는 우리를 볼 때마다 고개 숙여 감사함을 전했다.

여노가 괜히 옷을 힘줘서 맞춰 놓은 게 아니구나…….

근데 이건 내가 아니라 백령이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루가 친절하게 그들이 저리 인사하는 이유를 알려주었다.

“아리 님은 구슬을 무사히 하사받은 것만으로도 동쪽 땅의 희망이자 빛이랍니다. 그래서 저들이 감사 인사를 하는 거예요.”

구슬이라는 게 대단한 존재라는 걸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하긴, 이 구슬 덕분에 내가 살았고, 묘하게도 이 구슬 탓에 죽을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니까.

여태까지 본 저잣거리 중, 동쪽 땅의 저잣거리가 가장 큰 것 같았다. 축제인 걸 감안하고 보더라도, 확실히 다른 땅과는 확연히 달랐다.

“동쪽 땅의 저잣거리는 엄청 크네? 나는 서쪽 땅밖에 안 가봤는데, 서쪽 땅의 배는 되는 거 같아.”

포포도 동쪽 땅의 저잣거리에 놀랐는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백령 님이 잘 통치해주시는 덕분이죠. 그 땅을 어떤 신수가 다스리느냐에 따라, 영토의 모습이 변하니깐요.”

대성하고 있는 동쪽 땅을 보니, 남쪽 땅의 반란이 생각나, 마음이 좋지 않았다.

차차 좋아지길 바라는 수밖에…….

나래와 자타의 처분. 이 축제가 끝나면 내려지겠지……. 그래서 더 잔인하게 느껴지는 걸지도.

“아리 님.”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즈음, 아루가 급히 나를 불렀다.

“뭔가 이쪽은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저쪽으로 가시죠.”

“왜?”

“바랑 님이 매번 처음으로 들르시는 길이거든요.”

“당장 방향 바꿔.”

그걸 말이라고 하고 있어?

무조건 피해야지.

내 오랜 경험상 똥개는 피할 수 있을 때 당장 피해야 한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날지 모르는 게 똥개라고.

아루의 말대로 바랑이 자주 간다는 길을 피해, 다른 길로 갔다. 그곳엔 아름다운 음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와.”

악기를 연주하는 신수들이 모인 곳인 것 같았다. 신기한 모습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그런데, 결코 보고 싶지 않은 자가 우리를 향해 걸어왔다.

……개똥 피하려다 쥐똥 밟은 기분이었다.

“여기서 만나네요, 아리 님.”

우리에게 다가온 인물은 사화였다. 그녀가 하인으로 보이는 자와 함께 우리 앞에 섰다.

“……오랜만입니다, 사화 님.”

“고생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아루. 항상 대단하네, 동쪽 땅의 정찰뿐만 아니라, 흑기 조사도 병행한다니.”

“과찬이십니다.”

“나도 돕고 싶은데, 백령 님이 거절하셔서 어찌할 방도가 없네.”

‘그런 거라면 설산 조사나 허가해주지.’

아루가 내게만 들릴 만큼의 목소리로 말했기에, 사화는 못 들은 듯했다.

저번에 은월이 말했던 그 조사인가…….

그걸로 은월과 백령뿐만 아니라, 아루도 골머리 썩고 있구나…….

대체 무슨 조사길래 저렇게까지 사화가 반대하는 건지.

하지만 그것에 대해 내가 알 방법은 없었다. 내게 정보를 자세하게 알려주는 은월도 상당히 애매하게 알려줬으니까.

“아루.”

“네, 사화 님.”

“백령 님, 어디 계셔?”

그녀의 목적이 너무나도 뚜렷했다. 그녀의 물음에 아루가 고개를 숙였다.

“그건 저도 잘 모릅니다.”

“항상 모르네.”

사화가 약간 아루를 비꼬듯이 말했다. 그녀의 태도에도 아루는 넉살 좋은 미소를 지으며 사화에게 고개를 다시 한번 숙였다.

“축제 때 백령 님이 어디에 계시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거, 사화 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 내가 괜한 걸 물었구나.”

모른다며 눈치 줘놓고 하는 말이 뭐 저래……?

우리 아루 고개 숙이게 해놓고 하는 말이 가관이네.

상당히 기분이 나빴다. 우리 아루를 저렇게 대하다니.

“알면 묻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만.”

뒤에서 들린 자하의 목소리였다.

순식간에 공기가 가라앉았다. 사화가 자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파충류 특유의 눈이, 소름 끼치도록 무서웠다.

마치 단숨에 자하를 삼켜버릴 것만 같았다.

모두가 긴장한 상태였다. 포포는 저번의 일 때문인지, 굳어 버린 채로 사화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작게 떨면서 내 뒤에 숨어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자하는, 거기서 한술 더 뜨기 시작했다.

“아, 속으로 생각한다는 게 그만.”

자하가 사화를 향해 싱긋, 미소지었다. 그 미소에 공기가 얼어붙을 것 같았다. 둘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먼저 입을 연 건 자하였다.

“축제 기간만큼은 백령 님이 어디에 계시는지, 아무도 모르고 그 기간만큼은 백령 님이 누구의 방해도 받고 싶지 않아 한다는 거, 잘 알고 계시잖습니까, 사화 님.”

자하의 말에 사화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자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하가 다음 말을 이어갔다.

“게다가 방해하는 게 사화 님이라면 백령 님이 반길 리도 없는데, 말입니다.”

자하 말의 의도는 누구나 알 수 있었다.

‘너, 이러는 거 민폐다.’

자하의 말에 사화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녀의 뾰족한 이빨이 눈에 띄었다.

“자하.”

“사화.”

그녀가 자하를 부름과 동시에 내가 그녀를 불렀다. 그러자 그녀의 자하에게 머물러 있던 그녀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조금 늦었지만, 동쪽 땅의 방문을 환영해. 기왕 이곳에 왔으니, 즐거운 축제가 되길 바라.”

나의 말에 사화가 기분 나쁜 미소를 지었다.

“동쪽 땅의 ‘작은 주인’이신 아리 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꼭 그리하도록 해보지요. 누구 덕분에 이미 즐거운 축제가 되긴 그른 것 같긴 합니다만.”

그녀가 어째서 ‘작은 주인’이라는 단어를 강조한 것인지는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지금은 일단 넘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아리 님도 부디 즐거운 축제가 되길 바랍니다.”

사화가 그 말을 끝으로 우릴 지나쳐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그녀의 기운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모두의 긴장감이 풀렸다.

아루가 가슴을 한번 쓸어내리더니, 돌아서서 자하를 보고 덜컥, 화를 냈다.

“야, 이 미친놈아.”

그의 갑작스러운 욕지거리에 자하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아루를 바라보았다.

“뭐, 이 자식아? 왜 편을 들어줘도 난리야?”

“너는 목숨이 여러 개냐? 대놓고 그렇게 말하면 어떡하냐고. 차라리 뒤에서 욕하던가. 게다가 너 사화 님한테 이러는 거, 한두 번이 아니잖아. 대체 목숨이 어떻게 붙어 있는 거냐, 어?”

“살아 있으면 됐지.”

“아니, 야!”

둘이 언성을 높이며 싸우자, 여노가 둘을 중재에 나섰다.

“두 분 모두 진정하세요. 아리 님도 보고 계시다고요!”

“여노, 너는 걱정 안 돼?”

“네, 안 돼요.”

“뭐? 어떻게…….”

여노의 단호한 답에 아루가 할 말을 잃은 듯했다.

“자하 님 같은 바보가 지금까지 안 죽었다는 건, 앞으로도 죽을 일 없다는 거예요, 아루 님.”

……묘하게 설득력 있는데?

아루도 여노의 대답에 설득이 된 것 같았다. 여노의 말을 이해한 아루가 여노에게 엄지를 척, 세웠다.

여노, 그녀는 진정 천재였던 것인가…….

모두가 감탄하며 여노를 바라보았다. 단, 자하만 빼고.

“뭐야, 왜 다들 수긍해!”

자하가 억울하다는 듯이 우리를 번갈아 보았다.

“짜하.”

“네, 아리 님.”

“바보.”

“……!”

자하가 한 대 얻어맞은 듯한 표정으로 굳어버렸다.

그런 자하 옆으로 포포가 총총, 다가가더니 그의 어깨에 올라타, 작은 손으로 그를 토닥였다.

“힘내, 고양아. 나는 너를 바보라 생각하지 않아.”

“……야.”

“왜?”

“진짜 죽는다, 여우야.”

자하가 포포의 꼬리를 잡고 들어 올렸다.

“야, 야! 이거 놔!”

“누구보고 고양이래? 어?”

“이, 이……! 기껏 위로해줬는데……!”

바보 두 마리의 싸움을 보던 나와 여노, 그리고 아루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들을 내버려 두고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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