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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님의 딸이 되었습니다 (56)화 (56/167)

56.

남쪽 땅에서 돌아온 후, 며칠이 지났다. 은월은 그날 이후,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고, 며칠 동안 자하는 내 옆에 꼭 붙어 있었다.

나와 포포는 정자에서 자하의 꼴값을 보며 진저리를 치고 있었다.

“흐엉, 아리 님,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몰라요.”

정확히 마흔다섯 번째로 듣는 말이다.

“저, 자하! 다시는 아리 님과 떨어지지 않을 거예요!”

저 말은 스무 번 넘게 들은 말이다.

“저거 대체 언제 끝나……?”

“그러게.”

내 말이 그 말이다, 뽀뽀야…….

“제가 없는 틈을 타, 극악무도한 흑기들이 아리 님을……! 크흡, 애통합니다. 제가 아리 님을 멋지게 지켜드렸어야 했는데!”

지금 여기서 네가 제일 극악무도하다, 자하야.

제발 나 좀 놔주면 안 되겠니?

“난 방에 가서 과자나 먹을래.”

포포가 자하를 보며 작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정자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 이 배신자 여우 녀석!

포포가 나를 버리고 방으로 향했다.

그래, 얼마나 잘 먹고, 잘 사는지 두고 보자.

“아리 님, 제가 없어서 얼마나 무서웠습니까……, 흑흑.”

난 지금 네가 더 무서워…….

하……. 제발 누가 나 좀 구해줘.

내 간곡한 마음을 알 리 없는 자하는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자하에 비하면 남쪽 땅에서 란과 뽀뽀의 유치한 싸움은 아무것도 아니었어…….

이 이상 자하의 말을 더 듣다간, 영혼이 가출해버릴 것만 같았다.

다행히 영혼이 가출하기 직전,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이 자하를 뜯어말려 주었다.

“아리 님 좀 그만 괴롭혀, 자하.”

“어? 아루, 너 언제 왔냐? 쳇, 오랜만에 아리 님과 단둘이 시간 좀 보내나 했더니만.”

격렬하게 사양할게, 자하야.

자하는 나와 단둘의 시간이 방해받아서 그런지, 아까의 활기는 어디로 가버린 건지, 약간 시무룩해져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루야, 네 덕분에 살았다, 살았어.

오랜만에 보는 아루의 모습은 상당히 지쳐 보였다. 아무래도 정찰하는 일과 조사를 병행하다 보니, 피곤해하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아리 님.”

“오랜만이야, 아루!”

아루가 싱긋, 미소지었다. 오랜만에 보는 황혼 같은 그의 붉은 머리칼이 아름다웠다.

“야, 너 왜 왔냐? 일은 어쩌고?”

“알 바야?”

“너. 너……!”

아루가 까탈스럽게 답하자, 자하가 씩씩대며 아루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쟤네 둘은 대낮부터 또 왜 저런담.

하여간, 못 말리는 녀석들이다.

“우리 아리 님한테서 당장 떨어져. 아리 님을 호위하는 게 내 일이다. 네놈처럼 재수 없는 놈은 아리 님 옆에 있을 자격이 없어!”

자하의 일침 아닌 일침에 아루가 귓구멍을 파며 대놓고 흘러들었다. 그의 모습에 자하가 더욱 씩씩대자, 아루가 귀찮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뭐래. 백령 님께서 나보고 이번 축제 끝날 때까지 아리 님 호위하라 하시더라.”

“……뭐?”

자하가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의 바짝 솟아 있던 꼬리도, 그의 고양이와 비슷한 귀도, 심지어 털 한 올조차도 아무런 미동이 없었다.

아루의 말만 들어보면, 내 호위가 아루로 바뀐 것 같았다.

이런 걸 뭐라고 하더라……. 실직이라고 하는 것인가.

“말도 안 돼!”

자하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망연자실한 그의 모습에 아루가 혀를 찼다.

“쯧쯧, 바보 녀석. 그게 아니라 백령 님이…….”

“아루, 네놈이 내 자리를 뺏어가?”

어느새 자하는 망연자실한 모습에서, 분노의 자하로 바뀌었다. 자하가 부들대며 아루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아니, 이 고양이야. 끝까지 좀 들어봐.”

“다 필요 없어! 이제, 이제…….”

자하가 그대로 정자를 뛰쳐나갔다.

그가 잠깐 뒤를 돌아, 아련하게 날 쳐다보더니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리고 뛰었다.

……방금 뭘 본 거지?

내 두 눈을 의심할 만큼 그의 표정은 심각하게 아련했다.

“이제 끝이야!!!”

“아니, 야!!!”

오늘따라 자하가 왜 저러……. 아니, 평소에도 이상하긴 했다.

그래도 저렇게 뛰쳐나간 적은……있었나? 잘 모르겠다.

하도 종잡을 수 없는 게 자하니까.

“자하, 무슨 일 있는 골까?”

아루가 손을 턱에다 갖다 대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

응? 진짜 무슨 일 있는 거였어?

“음……. 아, 그러고 보니 ‘그 시기’네요.”

“응?”

무슨 시기?

특별히 더 이상해지는 시기가 있는 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아루를 계속 쳐다보자, 아루가 나의 의문에 대한 답을 해주었다.

“자하가 털갈이 시기만 되면 저러거든요.”

“으, 응?”

터, 털갈이?

아, 하긴 자하도 고양이……. 아, 아니, 스라소니이니까 털갈이할 수도 있구나.

“보통 상급 신수들은 털갈이에 그리 예민하지 않은 게 일반적인데, 자하만 유독 이 시기에 예민해져요. 감성적으로 변하기도 하고요.”

평소보다 더 미친다는 소리를 참으로 순화해서 말하는구나, 아루야……. 넌 정말 좋은 신수야.

“제가 신경을 좀 더 썼어야 했는데.”

“아니야, 아루는 정말 좋은…….”

“자하 놀리는 게 재밌어서 그만 일부러 오해하게 말했더니, 이런 대참사가 일어날 줄이야.”

그게 무슨 소리야?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자, 그가 난감해하며 입을 열었다.

“백령 님이 자하와 함께 아리 님을 호위하라 했거든요.”

……좋은 신수란 말 취소야.

아무튼, 자하가 그래서 내 옆에서 온종일 칭얼거리던 거였구나……. 어? 근데, 생각해보니 그건 평소에도 크게 다를 바 없는데.

“일단 자하 녀석에게 가보죠.”

“응? 왜? 예민하다묘.”

그럼 그냥 혼자 있도록 내버려 두는 게 상책 아니야?

“쟤 저렇게 그냥 혼자 내버려 두면 더 이상한 짓을 해요.”

“……당장 가자.”

여기서 더 이상해지면, 그건 정말로 문제가 심각하다.

자하의 기운을 쫓아, 그의 행방을 알아냈다. 아루와 함께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기껏 뛰쳐나가 향한 곳이…… 백령의 집무실일 줄이야.

……자하, 백령 옆에서 칭얼대고 있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평소보다 더 비정상적인 자하라면 충분히 가능한 얘기다.

걱정과 함께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고, 내 걱정들은 아주 쓸데없는 일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백령의 집무실 구석에 조신하게 앉아 있는 자하는, 과연 아까 뛰쳐나간 인물과 동일 인물인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뭐야, 아까랑 너무 다른데?”

“털갈이 때문에 예민하다고 목숨을 버리는 동물은 없답니다, 아리 님.”

……동물의 본능은 무서운 거구나.

나와 아루가 집무실에 들어서자, 백령이 보고 있던 두루마리에서 눈을 뗐다.

“그래서, 여기에 온 용건이 뭐지, 자하?”

뭐야, 저기서 계속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다시 한번 본능은 대단하다는 걸 깨달았다.

자하가 침을 꿀꺽 삼키고는, 무거워 보이는 입을 천천히 열었다.

“아, 아루가 아리 님의 호위를 맡는다는 게 정말입니까, 백령 님?”

“그래.”

“어찌 저를 두고…….”

누가 보면 첩을 두겠다고 선포한 남편의 정실부인인 줄 알겠다…….

자하가 처량해 보이는 눈망울을 하고는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제게 어찌 이러실 수가 있으십니까, 흑흑.”

“아니, 자하, 내 말 좀 끝까지…….”

“조용해, 넌! 이런 배신자 녀석!”

자하는 아루의 말을 들을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어 보였다. 완고한 자하의 태도에 아루가 할 말을 잃은 듯했다.

어휴, 하여간.

“짜하.”

“아, 아리 님?”

내가 그를 부르자, 잔뜩 성나 있던 자하의 표정이 곧바로 풀렸다. 그의 짧고 뭉툭한 꼬리가 본능적으로 흔들거렸다.

“아니래.”

“뭐가요?”

“그냥 아루도 같이 나 호위한대.”

“……!”

너, 아루한테 자리 뺏긴 거 아니라고.

뒷말은 굳이 덧붙이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이해 못 할 바보 천치가 세상에 어디 있어?

자하가 눈만 깜빡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게 뭔 소리예요……?”

……잊고 있었다. 그 바보 천치가 여기 있다는 것을.

결국, 아루가 짧은 한숨과 함께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설명을 들은 자하는 아루에게 노발대발하기 시작했다.

“아루, 너 이 자식, 나를 감히 기만해?!”

“그러게, 내 말 좀 제대로 들으라 했잖아.”

……아루, 넌 그렇게 말할 자격 없다.

애초에 네가 말 똑바로 했으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어, 인마!

아루를 지그시, 바라보았지만 그는 그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그래. 그래도 아까 아루 덕분에 자하 지옥에서 벗어났으니, 이 정도는 눈 감아 주자.

“그러니까, 이번 축제 때만 나랑 아루가 같이 아리 님을 호위하는 거라는 거지?”

자하가 반색하며 되물었다. 울상이었던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자하가 털갈이하는 동안은, 그를 피해 다니리라, 다짐했다.

두 번은 못 해 먹어, 이거.

“그래, 남쪽 땅에서의 사건도 있었고 하니까……. 요즈음 전체적으로 뒤숭숭하기도 하고.”

“진작 그렇게 말했어야지, 이 가짜 호랑이가!”

“뭐? 너 말 다 했냐, 고양아?”

둘이 으르렁대며 예전처럼 티격태격하기 시작했다. 나는 둘의 모습을 보며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었다.

얘들은 변하질 않는구나…….

“그러고 보니, 백령 님. 남쪽 땅의 사건은 어떻게 됐는지, 여쭤보아도 되겠습니까?”

아루가 자하와 티격태격하다 말고 백령에게 물었다. 백령이 두루마리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입을 열었다.

“중앙 회의가 열릴 거라더군.”

“또요?”

아루가 ‘또’라고 말하는 것을 보니, 원래 중앙 회의는 자주 열리지는 않는 듯했다.

“평소대로라면 미호 님이 독단적으로 결정하시지 않나요? 왜 이번에만…….”

“아리가 보고 싶다더군.”

“아…….”

아루가 탄식을 내뱉은 후 ‘그거라면 이해가 가네요.’라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미호가 단순히 내 얼굴 보고 싶어서 네 땅의 주인들을 집합시키는 거라고……?

“중앙 회의는 언제 열린다고 하던가요?”

“동쪽 땅의 축제가 끝난 후가 제일 좋을 것 같다더군.”

“하긴, 미호 님도 지금 여러모로 신경 쓸 일이 많으니까요.”

가만 보자, 중앙 회의라면…….

오랜만에 똥개를 만나겠구나…….

차라리 중앙 회의가 찾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똥개를 볼 생각에 벌써 힘이 빠진다. 게다가 나래의 시비도…….

어? 잠깐만, 나래는 지금 죄인 신분이라 참석할 수 없잖아. 애초에 이번 사건을 명목으로 열리는 회의니까. 그럼 남쪽 땅은……?

남쪽 땅은 누가 오는 거지? 대리인을 도맡고 있는 은월인가?

“이번 회의에서 남쪽 땅은 공석이겠군요.”

아, 공석이구나.

오랜만에 그를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닌 것 같다. 하긴, 은월은 남쪽 땅 일만 해도 바쁠 테니…….

“근데, 그럼 바랑 님을 연속으로 계속 보겠네요. 그건 끔찍한데.”

……? 이 무슨 끔찍한 소리지?

잘못 들은 건가? 제발 그런 거라고 해줘.

“아, 아루, 그게 무슨 소리야?”

나의 다급한 물음에 아루가 난감하다는 듯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동쪽 땅의 축제에 참여하는 건 자유인데, 바랑 님은 안 와도 된다고 계속 말씀드려도 매해,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꼬박꼬박 참석하시거든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축제에…… 다른 땅의 신수도 참여하는 거였어?

그런 거라면 끔찍하게도 아루의 말대로 바랑이 빠질 리가 없다.

그런 거라면 그냥 취소하는 게 어떨까, 백령.

“그러고 보면, 사화 님도 매해 빠지지 않고 참석하시고, 미호 님도 매번 오시니까, 굳이 중앙 회의를 따로 해야 할까 싶긴 한데…….”

내 말이 그 말이다. 왜 보기 싫은 얼굴들을 연속으로 봐야 하는 거냐고! 내가 보고 싶으면 미호 혼자 오란 말이야!

“뭐, 미호 님이 동쪽 땅에 함부로 움직이시는 건 대놓고 편애한다는 소문이 돌 수 있으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긴 합니다. 축제도 즐기기 위해 있는 것이니, 무거운 회의를 하면서 분위기를 망치는 것 또한 피하고 싶은 거일 테고요.”

하늘도 무심하여라. 어찌 내게 이런 시련을…….

낙심한 나의 표정을 본 아루가 곤란해했다.

“그, 그래도 축제는 성대하고 아름다워요, 아리 님!”

“똥개가 오자나…….”

“밤에 궁이 푸른 빛으로 빛나기도 해요, 아리 님!”

“똥개가 온다자나…….”

“게다가, 맛있는 음식도 잔뜩 먹을 수 있…….”

다 됐고, 똥개가 오잖아!!!

무슨 말을 해도 나의 표정이 변하지 않자, 아루가 대화 방향을 바꿨다.

“……최대한 바랑 님과 아리 님을 마주치지 않으시도록 성심성의껏 모시겠습니다.”

“부탁해, 아루.”

아직 축제는 시작도 하지 않았지만, 벌써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축제에 대한 기대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똥개와 마주치는 게 두려울 뿐.

너만 믿는다, 아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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