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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님의 딸이 되었습니다 (55)화 (55/167)

55.

자타는 납득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눈동자는 허망했고, 공허했다. 천강은 그런 그의 칼을 힘으로 내렸다.

“어째서……, 말리시는 겁니까, 천강 님.”

“내 전에 말하지 않았던가. 나는 반란에 찬성하지도, 반대하지 않는다고.”

“근데 어째서!”

“네가 남쪽 땅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저지른 죄를 보았기 때문이다.”

자타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이미, 이미 결심한 일입니다. 제가 그런 짓을 하면서까지 대의를 위해 노력했는데, 일이 이렇게 되어 버리면…….”

“그래서……, 그래서 여기서 멈추어야 하는 것이다.”

자타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윽고 칼을 쥔 자타의 손에 힘이 풀리고, 칼이 그의 손에서 떨어졌다.

그가 천강의 뜻을 받아들인 것 같았다. 그렇기에 천강 또한 그에게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내 천강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그의 시선을 따라 자타도 나를 보게 되었다.

자타가 내 모습을 보고 많이 놀란 것 같았다. 그가 천천히 내게로 다가왔다.

왜, 왜 이쪽으로 걸어오는 거지?

침을 꿀꺽, 삼켰다. 그가 내게로 걸어오는 저의를 모르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는 어차피 내게 아무런 해를 가할 수 없으니, 겨우 진정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의 행동은 의외였다.

내 앞으로 다가온 자타는 곧바로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리 님.”

그의 진심 어린 사과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를 용서할 수 없고, 그에 대한 처벌을 내가 정할 수 있는 것 또한 아니다.

하지만, 그는 중요한 것을 깨달은 듯했기에, 조금이라도 그의 마음이 편했으면 하는 마음에 끄덕인 고개였다.

그의 눈동자는 너무, 허망해 보였으니까.

무엇인가 큰 걸 잃어버린 자 같았다.

원래 깨달음에는 대가가 필요하다지만……. 그는 잃은 게 너무 많아 보였다.

그의 긍지도, 목표도, 모든 것을 잃었다.

“은월 님.”

자타가 은월을 올려다보았다. 은월은 그의 부름에 답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얘기를 무시하지는 않았다.

“은월 님은 대체…… 몇 수 앞을 내다보시는 겁니까.”

약간은 원망이 섞인 듯한 음성이었다. 은월은 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자타는 은월에게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닌 듯했다.

“은월 님. 저희 왔습니다.”

때마침 청아와 산이 나래의 궁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나래의 궁을 둘러보며 대충 상황 파악을 마친 것 같았다.

“나머진 저희 선에서 처리하겠습니다. 은월 님과 아리 님은 피곤하실 텐데, 쉬시는 게 어떻습니까.”

“아니, 누님, 그러면 저희가 이걸 다…….”

“산.”

청아의 말에 산이 불만을 토로했지만 청아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결국, 산은 청아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고, 덕분에 은월과 나는 그 자리를 떠날 수 있었다.

언제 온 건지, 여노도 함께 합류했다. 그런데, 여노의 몸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아리 님, 무사하셔서 다행……. 어머, 안색이 왜 그렇게 안 좋으세요, 아리 님?”

아니, 누가 우리 여노를……!

“여너, 그 상처들 머야? 왜 그래?”

“아, 이거요? 헤헤, 별것 아니에요, 아리 님.”

별 게 아니기는!

온몸이 상처투성이고만!

여노가 헤실거렸지만, 나는 그런 여노의 모습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자, 여노가 난감해하며 내 눈치를 살폈다.

“아리 님, 이거 그냥, 일하다가 굴러떨어진 거예요!”

대체 무슨 일을 해야, 어디서 굴러떨어져야 저렇게 다친단 말인가.

그녀의 거짓말임이 너무나도 뻔했지만, 저렇게까지 열변을 하는 여노를 보니 더는 무어라 할 수 없었다.

“정말?”

“네. 정말요!”

여전히 믿음이 가지 않고 속상했지만, 여노가 저렇게까지 필사적으로 숨기는 모습을 보니, 그냥 그녀의 거짓말에 한 번 속아 넘어가 주기로 했다. 애초에 내가 너무 걱정할까 봐, 말하지 않는 것 같으니까.

그래서 그만 고개를 끄덕였다.

노군의 저택은 나래의 궁에서 가까웠기에, 금방 도착했다. 여노는 의방에 들러 치료를 받는 듯하였고, 나와 포포는 내 방으로 향했다. 들어가자마자 오랜만의 안락함에 뻗을 뻔했지만, 겨우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리, 어디 가?”

포포가 내 치맛자락을 붙잡았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피곤해 보이는 그였지만, 내 치맛자락을 쥔 손에는 꽤 힘이 들어가 있었다.

“은월한테 가.”

“싸부한테? 응응, 다녀와.”

나의 대답에 붙잡고 있던 치맛자락을 놓음과 동시에 포포는 깊은 잠에 빠진 듯했다.

하긴, 뽀뽀도 피곤할 만 하지…….

잠든 포포를 뒤로 한 채, 은월에게로 향했다.

은월의 방으로 들어서자, 바로 그가 보였다. 씻고 오기라도 한 건지, 그의 흑색 머리는 젖어 있었고, 방 안에 향긋한 향이 났다. 절로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런 향이었다.

그는 끝내지 못한 일이라도 있는 것인지, 그의 앞에 놓여 있는 탁자에는 두루마리들이 가득했다. 그런 그의 앞으로 가, 다소곳이 앉았다.

“은월.”

“뭐 묻고 싶은 거라도 있어?”

“……어떻게 알아써?”

“그야, 피곤한데도 네가 날 찾아왔으니까?”

그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그의 미소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뭐가 궁금한데?”

“나래, 자타, 그리고 그를 따르던 다른 신수들……, 이제 어떻게 되는 고야?”

“나도 몰라.”

“응?”

은월이 모른다니?

사법관인 그가 모르면 도대체 누가 안단 말인가.

“이번 사건은 꽤 크니까. 처분이 급한 것도 아니고. 아마 미호가 결정할 거야.”

어리둥절한 내 모습을 보던 은월이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그래서 지금 보고서를 작성 중이고.”

은월이 자기 앞에 놓인 두루마리를 가리켰다. 거기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왜 아직 아무것도 쓰지 않은 거지?

두루마리를 계속 바라만 보고 있자, 은월이 두루마리를 치웠다. 지금 할 게 아니라는 듯이.

“지금 가장 급한 게 뭐일 거 같아?”

“응?”

가장 급한 거?

은월의 물음에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현재 상황에 가장 급한 일…….

흑기를 잡는 거?

아니다, 흑기는 이미 도망간 지 오래고, 장기간 수사할 예정이니, 그리 급한 건 아닐 것이다. 나도 이렇게 무사하고.

“대리인을 골라야 해.”

그래, 맞아.

지금 남쪽 땅은 나래와 자타, 그 외에도 많은 신수가 죄인 신분이기 때문에, 남쪽 땅의 통치자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그런 거라면…… 적임자가 있지 않나?

“천강이 하면 되자나.”

“그게 문제가 있어.”

문제? 무슨 문제?

천강만큼 남쪽 땅의 주인에 걸맞은 자는 없는 거 같던데…….

“그는 이미 한 번 물러난 전적이 있는 탓에, 다시 오르려면 많은 절차를 거쳐야 해. 거기에도 시간이 걸리고. 그 시간 동안 남쪽 땅의 통치자 자리를 계속해서 비워두는 데에는 무리가 있어.”

“그렇겠네…….”

“더구나 지금 시기가 시기니까.”

혼란스러운 시기. 이 시기에 번듯한 통치자마저 없으면 남쪽 땅의 신수들은 더욱 혼란스러워할 것이 뻔했다.

“그럼 어떻게 해?”

“다른 땅에 속한 신수가 아니면서, 그들을 통치할 수 있는 신수를 찾아야 하는데.”

“응, 응.”

“내가 알고 있는 신수는 셋밖에 없어.”

그게 누군데?

눈을 깜빡이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러자,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다음 말을 이어갔다.

“미호, 비천, 나.”

……응?

그렇다는 말은…….

“넌 셋 중에 누가 남쪽 땅의 대리인 역을 자처할 것 같아?”

“……아무도 안 할 고 가타.”

“정답.”

“그래서 은월이 할 거 가타…….”

“그것 또한, 정답.”

……은월아, 힘내.

안쓰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거람.

“다른 데에 신경을 안 쓰다 보니, 잊고 있었어. 아…….”

그는 정말 잊고 있었던 것 같았다. 정말 짜증이 역력한 얼굴이었으니까.

“자타가 내게 몇 수 앞을 내다본다고 했던가.”

“응? 응, 마자. 그랬지.”

“그 말엔 상당한 어폐가 있어.”

왜? 난 맞는 말 같던데.

“난 모든 걸 예상하고 움직이지 않아. 때가 닥치면 그때 해결하는 거지.”

“정, 정말?”

의외였다. 은월은 모든 걸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자타가 반란군의 수장이라는 건 그냥 자연스레 알게 된 거고. 여태까지 내가 해결하기 어려운 사건은 없었으니까. 그냥 흘러가는 대로 두는 거야.”

“그런 거 여써?”

……근데 그건 은월이라서 가능한 거 아닌가?

어쨌든 일반적인 신수가 본다면, 은월은 몇 수 앞을 내다보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해내는 것처럼 보이니까.

“그런데, 네가 사라진 것은 그렇지 않았어.”

“응?”

잠시 딴생각을 하느라 그의 말을 잘 듣지 못했다. 그를 향해 되물었지만, 그는 입을 닫은 채로 더 말해주지 않았다.

뭐지?

내 얘기를 했던 거 같은데.

“은월?”

“내일이면 동쪽 땅으로 다시 돌아갈 거야. 준비해.”

은월이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젖어 있던 그의 머리칼은 이미 마른 지 오래였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남에 따라, 나도 그를 따라 일어났다.

“어디가, 은월?”

“노군한테.”

“왜?”

“남쪽 땅을 누구보다 걱정하는 이에게, 소식은 전해줘야 하지 않겠어? 공짜로 방도 얻어 썼는데.”

“나도 가도 돼?”

“마음대로.”

은월을 따라 노군의 방으로 향했다. 어쩌면 그곳에 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따라나선 것이었다.

란에게 감사 인사라도 해야 해.

은월이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던 건 란 덕분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와 포포 또한 무사한 것이고.

어느새 노군의 방 안에 들어왔다. 그곳에는 노군 뿐만 아니라, 여노와 란도 함께 있었다.

그런데, 란은 구석에서 눈물을 흘리며 손을 들고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은월 님, 아리 님, 두 분 다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노군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제 부족한 손자 탓에 아리 님이 그리되신 거라 들었습니다.”

으응……?

이게 무슨 소리지?

“정말 죄송합니다, 아리 님.”

아니, 나는 사과받으려고 온 게 아닌데……?

“뭐, 몬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노궁.”

당황스러움에 말끝이 절로 흐려졌다.

“난 란 때문에 그렇게 된 것도 아니고, 오히려 덕분에 살아써.”

나의 말에 란이 흘리던 눈물이 쏙, 들어갔다.

“란이 내 부탁대로, 은월을 불러줬으니까.”

“그, 그런 것입니까……?”

노군이 나와 은월을 번갈아 보았다. 은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군이 갑자기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의 갑작스러운 눈물에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신수가 당황했다.

“노, 노군 님……?”

“할아버지……?”

여노와 란이 그를 불렀지만,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고인 눈물을 닦았다.

“잘했다, 욘석아.”

노군이 란의 팔을 내렸다.

“왜 내게는 그리 설명한 게냐, 란.”

노군의 물음에 란이 슬그머니 내 눈치를 살폈다. 아무래도 그 스스로 자기 탓이라 여기는 것 같았다.

어휴, 하여간 못 산다니까.

잘한 것만 기억하면 될 것을.

그의 근심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 최후의 수단을 썼다.

“란, 고마워.”

란을 향해 활짝 웃어 보였다. 그러자, 란의 얼굴이 타오를 듯 붉게 물들었다.

“아, 아리 니임…….”

아, 아니 얘 갑자기 왜 울어?

“흐어엉.”

“아, 아니…….”

울지 마, 인마!

내 치맛자락을 붙잡고 우는 란 탓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그는 그칠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감사합니다요, 아리 님, 흐어엉.”

그래, 울어라, 울어. 맘껏 울어라……. 난 이제 모르겠다.

“은월 님, 여노 님을 통해 대충 얘기는 들었습니다.”

“그래.”

“이제 어찌 되는 겁니까.”

“노군.”

은월이 그를 부르자, 그가 긴장한 듯,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눈에는 남쪽 땅에 대한 걱정이 서려 있었다.

“나래와 자타는 미호의 처벌을 기다리겠지. 천강이 다시 남쪽 땅의 주인이 될 소지가 다분한데, 알다시피 절차가 복잡하니까. 그때 동안 남쪽 땅에는 대리인이 통치할 것이고.”

“대리인이라면…….”

“그래, 아마 내가 될 가능성이 높겠지.”

“그렇게 되면 아리 님의 교육은 어찌 되는 겁니까?”

어? 그렇게 되면 내 교육에도 차질이 생기는 거야?

나는 여태 그래왔듯이, 동쪽 땅과 남쪽 땅을 은월이 계속해서 넘나들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노군의 말을 들으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몰려왔다.

“당분간은 쉬어야겠지. 교육이 당장 급한 건 아니니까. 동쪽 땅에는 백령이 있기도 하고. 이번 사건으로 흑기들이 재정비를 할 테니까.”

……그 말인즉슨, 은월을 당분간 못 본다는 얘기잖아?

예기치 못한 상황에 은월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은월의 결정에는 변함이 없는 듯하였다. 애초에, 다른 선택지가 존재하지 않으니까.

난 아직 그에게 배울 것이 더 많은데…….

그의 회색빛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당분간 저 신비로운 회색빛 눈동자를 못 본다는 건 꽤 섭섭하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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