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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님의 딸이 되었습니다 (54)화 (54/167)

54.

“네, 네가 여기 어떻게…….”

은월의 등장에 흑기가 사색으로 질렸다. 흑기가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래도 도망치려고 궁리를 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것을 눈치 빠른 은월이 모를 리 없었다.

“어디 가려고?”

은월이 특유의 미소를 지었다. 그의 미소를 본 흑기가 자신의 입술을 깨물었다.

“……괴물 같은 호랑이가 한 마리 더 있다는 걸 까먹었네.”

“그러게, 잘 생각해 봤어야지. 네가 지금 누구 심기를 건드린 건지.”

은월이 흑도를 잡은 손에 힘을 주자, 칼이 쉽게 부서졌다.

은월의 보랏빛 도는 검은 기운이 당장이라도 흑기를 집어삼켜 버릴 것만 같았다. 그 정도로 힘의 차이는 압도적이었다. 또한, 그 흑기도 그걸 알고 있는 듯했다.

그러니, 저렇게 당황한 거겠지.

“안 그래도 너희 찾아다니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는데.”

은월의 부드러운 미소와는 전혀 다른 차가운 목소리에 흑기가 입을 꾹 다물었다.

“이제야 일이 좀 편해지겠네.”

흑기의 인상이 보기 좋게 구겨졌다.

“너무 그렇게 긴장하진 마. 들어야 할 말이 있으니, 죽이진 않아.”

죽인다는 말보다 더한 말이었다. 죽을 만큼의 고통을 선사하겠지만, 결과적으로 죽이진 않겠다는 뜻이니까.

흑기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씨익, 웃었다. 여태까지 그의 웃음은 다 기분 나빴지만, 유독 감이 좋지 않은 웃음이었다.

뭐지, 진짜 미쳐버리고 만 건가.

그의 웃음이 기분 나쁜 건 은월도 마찬가지였는지, 은월이 그의 목에 자신의 칼을 갖다 대었다.

흑기가 손을 덜덜 떨었다. 이내, 그가 손가락을 세게 깨물었다. 그의 손에서 피가 계속해서 떨어졌다.

저게 지금, 뭘 하는 거지?

은월도 그가 무슨 속셈으로 저러는 것인지 모르는 듯했다. 그렇기에 흑기에게서 물러난 후, 나를 보호하는 자세를 취했다.

이내 그의 속셈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이후 흑기 떼가 몰려오기 시작했기 때문에.

“구슬……, 구슬을…….”

흑기들의 소리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언제 들어도 귀가 찢어질 것만 같은 께름칙한 소리였다.

“은월……!”

“괜찮아.”

은월이 내게 천 재질의 무언가를 씌웠다. 그로 인해 앞이 보이지 않았다.

“잠깐만 그러고 있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목소리에 묘하게 안심이 되었다. 그렇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은월의 기운이 더욱 더 강하게 느껴졌다. 아마 힘을 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아, 소란스러웠던 주위가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은월, 나, 이거 이제 벗어두 돼?”

“마음대로.”

은월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내 시야를 막고 있던 답답한 천을 치웠다. 나를 덮고 있던 천은 연한 흑색의 면사였다.

전에 은월이 향안 시장에서 샀던…….

“아, 그 흑기는?”

“글쎄.”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와 은월, 그리고 포포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은월의 반응을 보면 은월이 처리한 것도 아닌 듯했다.

혼란을 틈타, 아까 그자는 사라진 건가…….

그래서 흑기 떼를 부른 거구나. 그 틈을 타서 도망가려고.

은월은 그자에게 딱히 미련이 없는 듯했다.

“안 쫓아가 봐도 돼?”

“필요 없어. 저거 하나 잡는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니까.”

“그래도…….”

“그리고.”

은월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오묘한 회색빛 눈동자에 서려 있던 한기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널 두고 어떻게 가.”

“응?”

“네가 무사한 것만으로도 충분해. 오히려 다행이지. 그것만 바랐으니까.”

은월의 회색빛 눈이 나를 향했다. 그와 눈을 마주할 수 없었다. 약간의 미안함이 일었기에.

내가 말을 안 듣고 천강에게 가서…….

은월이 내 머리 위에 살포시 손을 얹었다. 그의 큰 손이, 오늘따라 유독 따뜻하게 느껴졌다.

“어차피 벌어질 일이었어. 그런 표정 짓지 마. 네 탓 아니야.”

“으응?”

“애초부터 널 노렸던 거니까. 늦게 와서 미안해.”

의외로 은월이 내게 사과를 건넸다. 그는 내게 충분히 경고했고, 그걸 어긴 건 나인데…….

이제야 잔뜩 긴장했던 몸이 풀렸다.

“그럼 이제……, 죄인들을 처리하러 가볼까.”

은월이 팔을 높이 뻗어, 기지개를 켰다. 이번에 흑기들을 처리하면서 힘을 많이 쓴 탓인지, 평소보다 더 피곤해 보였다.

“싸부, 어디로 가?”

“나래의 궁으로. 지금쯤 모든 죄인이 다 거기에 집합해 있겠네. 고맙게도.”

“그런 거야?”

은월이 나래의 궁으로 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나와 포포도 그의 뒤를 따라갔다.

***

남쪽 땅의 가장 호화롭고 거대한 나래의 궁 안은 혼란스러웠다.

나래는 굉장히 심란했다. 은월에게 자신이 흑기와 손을 잡은 것을 들킨 것만으로도 매우 혼란스럽건만, 그 흑기들이 내가 아닌 다른 자들과도 손을 잡았다는 건 나래의 계산 밖이었다.

나래가 안절부절못하며 앞에 있는 여노를 노려보았다.

“어떻게 된 거야? 네가 반란군의 위치를 어떻게 알아?”

“은월 님이 제게 시켰었으니까요.”

“내 궁에 자꾸 드나들던 이유도 그런 거였어?”

“네, 맞아요. 나래 님.”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가 작게 떨렸다.

“은월은 그럼, 반란군에 대해서 알고 있었던 거야?”

“그건 은월 님께 직접 물어보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나래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깨문 입술 사이로 피가 새어 나왔다.

“아리, 그년 때문이야. 그년만 아니었어도…….”

“갑자기 왜 저희 아리 님 탓을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아리 님은 나래 님을 위해 초대장도 정중히 보냈는데 말이죠. 남을 탓하는 거보다 자신을 돌아보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요, 나래 님?”

여노의 일침에 나래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여노를 찢어 죽일 듯이 노려보는 것 말고는.

“꺼져! 내 눈앞에서 당장 꺼지란 말이야!”

“저도 그러고 싶지만, 현재 나래 님은 죄인이시고, 저는 은월 님의 명으로 나래 님을 감시해야 해서요.”

“지금 남쪽 땅의 주인인 내 명을 듣지 않겠다는 것이냐?”

여노는 나래의 뻔뻔한 태도에 기가 막혔다. 멍청한 나래 때문에 곤란해진 아리를 생각하면 지금 그녀에게 존댓말을 쓰며 예의를 차리는 것마저 여노의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라 죽겠는데, 나래는 자신의 잘못은 알지 못할망정, 오히려 뻔뻔하기 그지없었다.

‘본인의 무지를 자각하지 못하고, 오히려 우리 아리 님을 탓하는 꼴이라니.’

여노는 나래가 한참 부족한 주인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한때 그녀를 연민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연민조차 느껴지지 않을 만큼 가증스러웠다.

“나래 님은 정말…….”

여노가 무어라 말을 하려 하던 때였다. 궁 밖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뭐, 뭐지?”

나래와 여노가 상황을 살피러 궁 앞으로 나갔다.

나래의 궁 정문의 가운데, 그곳에는 자타가 서 있었다. 그 뒤로는 나래가 처음 보는 신수들이 여럿 서 있었다.

“자타가 왜 저러고 있는 거지?”

여노는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자타가 반란군의 수장이고, 저들은 그런 자타를 따르는 자들이라는 것을.

“자타! 거기서 무엇 하는 거냐! 너, 지금 내가 어떤 모욕을 당하고 있는지는 알…….”

그때였다. 자타가 쏜 화살이 나래의 바로 옆을 스쳤다.

“뭐, 뭐 하는 거야?”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된 나래가 화살에 스쳐 피가 흐르는 볼을 잡고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서, 설마……. 아, 아니지?”

나래의 표정이 순식간에 절망과 공포로 물들었다.

나래는 지금 이 상황을 믿을 수 없었고, 믿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직속 부하, 자신의 오른팔과 마찬가지라 생각했던 자가 반란군이었다니.

그런 가운데 다른 신수들이 그를 따르는 것을 보면 그는 그들의 수장임이 틀림없었다.

나래는 어찌할 바를 몰라, 몸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그제야 나래는 은월이 자신에게 했던 말들이 뇌리를 스쳤다.

“애초에 그 정도 그릇이니, 제 앞길조차 못 보는 거지.”

은월이 아예 나래에게 반란군에 대해 알려주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은월은 대놓고 알려주지는 않았지만, 항상 그녀에게 단서를 줬었다. 그걸 못 알아챈 건 그녀의 문제였다.

결국, 자신의 능력이 부족한 탓에 일이 이렇게 된 것이리라.

하지만 나래는 그걸 알면서도, 의식하지 않으려 했다. 그리고 다른 이를 탓했다.

‘아리, 그년이 가진 구슬이, 내게 있었더라면…….’

터무니없는 생각이지만, 정말 나래는 그렇게 생각했다. 구슬이 자신에게 있었더라면 이 모든 게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그 짧은 순간에도 그녀는 아리를 탓하며 자신을 연민했다.

***

은월을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나래의 궁 앞에 당도했다. 궁 안은 무척이나 소란스러워 보였다.

굳이 궁 안까지 가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자타와 그가 이끄는 반란군이 나래의 궁에 도착했다는 것을.

“은월, 어떻게 할 고야?”

“아직 생각 안 해봤는데.”

“응?”

은월이 생각을 미처 못한 상황이 존재했던가.

“내게 급한 건 널 찾는 거였으니까. 다음 일은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았어.”

“그, 그랬구나…….”

왠지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뭐…….”

은월이 반란에 대해 잠시 생각하는 듯했다.

“다 때려잡으면 되겠지, 뭐.”

많이 피곤해서일까, 아니면 정말 자신의 관심 밖의 일이라 그런 걸까, 그것도 아니면 정말 큰일이 아니라 생각해서일까.

일 처리를 저렇게까지 대충하는 은월의 모습은 또 처음 보는 것이었다. 아마 세 가지 이유, 모두 어느 정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싸부, 우리도 가는 거야? 저기?”

포포가 손으로 나래의 궁을 가리켰다.

난 가고 싶은데…….

안의 상황을 보고 싶었다. 호기심도 일었지만, 날 흑기에게 넘기려 했던 극악무도한 자타의 얼굴도 보고 싶었다.

멀쩡히 살아 있는 날 보고 무척 놀랄 테지.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고, 나는 멀쩡히 살아 있다는 걸 그에게 알리고 싶었다.

“은월, 나는 가고 싶어. 가도 돼?”

나의 물음에 은월의 피곤해 보이는 눈을 반달 모양으로 곱게 휘었다.

“마음 가는 대로.”

은월의 뒤를 따라 나래의 궁 앞에 당도했다. 곧이어 보이는 풍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나래의 궁은 불타고 있었고, 불타는 궁 앞에서 나래는 울고 있었다. 울고 있는 그녀의 앞엔 자타가 칼을 들고 서 있었다.

겁에 질려 우는 나래의 모습은 영락없는 어린 여자아이였다.

그런데 의외였다. 자타를 말릴 것 같았던 은월이 그 광경을 지켜 보고만 있는 것이 아닌가.

저렇게 둬도 되는 거야……?

“은월, 안 말려?”

나의 물음에도 은월은 묵묵부답이었다. 그저, 모든 걸 내려다보는 것처럼. 그저 관전만 하고 있었다.

“은월! 저러다 나래 죽어!”

나래가 물론 잘못한 것은 맞지만, 그녀가 죽는 모습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지 않았다.

자타가 칼을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당신의 죽음과 함께 남쪽 땅에 평화가 찾아오기를.”

나래가 그의 말에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

“내가 죽으면 남쪽 땅에 평화가 찾아와? 이렇게 된 게, 내가 원하던 것도 아닌데!”

그녀의 앙칼진 목소리에 궁 안에 있던 다른 신수들이 흠칫했다. 그녀를 주인의 자리에 올린 건 본인들이니까.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가 자타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독기 가득한 그녀의 눈빛에 주위의 신수들은 모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나래가 봉황이긴 봉황이구나.

그녀가 아예 봉황으로서의 위엄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모두의 신뢰를 잃은 지 오래라, 모두의 마음을 돌릴 수 없었다.

“그래서 제가 짊어지는 겁니다, 나래 님.”

자타의 표정엔 변함이 없었다. 이미 모든 것을 받아들인 듯이.

자타는 아무런 동요도 없이, 칼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당장이라도 내리칠 것만 같았다.

이대로 넋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나라도 자타를 말리려 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내 뜻대로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가만히 있어, 아리야.”

은월이 그런 나를 붙잡아 세웠기 때문에.

나의 힘으로는 은월의 손을 뿌리칠 수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가만히 내버려 둘 수는 없잖아…….

“은월, 하지만……!”

자타가 칼을 내리칠 때였다. 나는 그만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꽤 오랫동안 감았던 눈을 슬그머니 떴다. 눈을 감은 동안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그리고, 정말로 나래의 궁에 있는 모든 신수가 시간이 멈춘 것처럼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 이유가 누군가의 등장 때문이라는 것은 눈을 뜬 직후 알 수 있었다.

모든 신수가, 자타를 막아선 그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흰 백발의 머리칼, 검고 짙은 눈동자. 등 뒤에 달린 검은 날개.

그는 천강이었다.

“천강…… 님.”

자타가 자신을 막아선 천강을 보고 움직이질 못했다.

“어째서, 천강 님이…….”

천강이 자타를 무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자타는 그런 천강의 모습에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만해라, 자타.”

나래의 궁에 천강의 목소리가 낮게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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