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어둡고 칙칙한 땅들을 지나, 밝고 활기찬 땅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누군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와 나는 서로를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한참을 서로 바라보기만 하는데도 행복하다고 느껴졌다.
그의 얼굴은 너무나도 흐려서. 보이지 않았다. 주위 풍경은 선명했지만, 그의 얼굴만은 흐려서 자세히 볼 수가 없었다.
이곳은 어디일까?
이곳이 어디인지, 뭘 하는 곳인지는 알 수가 없다. 처음 보는 낯선 곳이기에.
하지만 한 가지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이것은 꿈이라는 것.
“가지 마.”
나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쳐다보던 그가, 갑자기 내 손을 잡았다.
“나를 두고 가지 마.”
그의 얼굴은 흐려져 알 수 없었지만, 그가 굉장히 슬픈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가슴이 저렸다.
“……아리야!”
그때, 꿈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울렸다.
“아리야, 아리야!”
……요망한 여우의 목소리였다.
천천히 눈을 떴다. 눈앞에는 나를 걱정이 가득 담긴 포포의 붉은 눈동자가 보였다.
포포의 목소리 때문인지, 아니면 의식이 돌아왔기에 깬 것인지는 모르겠다. 깬 직후라 그런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아……!”
“많이 아파? 일단 이거 먹어.”
포포가 내게 내민 것은 경단같이 생긴 동그란 약이었다.
이건?
“영아가 지어준 약이야. 혹시 몰라 먹어봤는데, 은근 약효가 돌더라고. 진통 효과도 있나 봐.”
“고마워, 뽀뽀.”
포포가 내민 경단을 집어삼켰다. 약을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약효가 도는 듯했다. 두통이 더는 느껴지지 않았고, 머릿속이 개운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약이 그리 쓰지도 않아, 삼키기 힘들지도 않았다. 크기도 적당했고.
영아, 약 한번 잘 짓네.
나는 다음에 약을 지을 일이 있다면 꼭 영아한테서 받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일단 수하는 절대 걸러야 해.
“근데 아리야.”
“응?”
“여기가 어딜까?”
포포의 말에 이제야 주위가 보이기 시작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곳이었다. 곳간처럼 보이는 이곳은 빛 한 점 흘러들어오지 않았으며, 아무것도 없이 황량했다.
이상하다? 우린 분명 천강의 가옥에서 나왔는데…….
어째서 이런 곳에 있는 거지?
일단 문처럼 보이는 곳으로 다가가서, 귀를 갖다 대었다. 포포도 나를 따라 문에다 귀를 흡착했다.
“자타 님, 정말 아리 님을 흑기 놈들에게 보내실 겁니까?”
뭐? 나를 누구한테 보내?
나보다 화들짝 놀란 포포가 잠시 귀를 떼고 나를 바라보았다.
“헉. 어떡해, 아리야?”
목청도 더럽게 큰 포포. 다행히 저기선 알아채지 못한 듯하다.
이대로라면 들키고 말겠어…….
우리가 엿듣고 있다는 걸 들켜서 좋은 일은 없었다.
“뽀뽀, 쉿.”
검지를 입에 갖다 대며 그에게 말했다. 그제야 포포가 자신의 목청이 큰 것을 깨달았는지, 자신의 입을 가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그들의 대화에 집중했다.
“이미 놈들에게 말을 해두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자타 님. 이건 정말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가시는 겁니다.”
“알고 있다.”
“아리 님에게 해가 가해진다면, 자타 님은 살아남지 못하실 겁니다…….”
“상관없어, 나는 죽어도.”
“자타 님……!”
자타와 얘기하는 신수가 답답하다는 듯, 목소리가 떨렸다.
“이 반란이 성공하고, 남쪽 땅에도 평화와 안정이 찾아온다면, 내 목숨 따위 몇 번이라도 바칠 수 있어.”
반란……?
자타가 반란군이었던 거야?
게다가 다른 신수와 얘기한 걸 들어보면 굉장히 높은 위치, 예컨대 저 정도면 반란군의 수장이 틀림없었다.
은월이 전에 했던 말이 뇌리에 스쳤다.
“애초에 그 정도 그릇이니, 제 앞길조차 못 보는 거지.”
그건, 자타를 두고 하는 말이었구나. 나래는 바로 앞에 있는 반란군의 수장도 알지 못했고, 그를 계속해서 옆에 두었으니…….
은월의 말이 이제야 이해가 갔다.
은월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거야. 자타에 관해서.
“너무 이르잖습니까, 자타 님.”
“은월 님이 눈치채신 것 같아서 달리 방도가 없었다. 거사를 서둘러야 해.”
자타도 은월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 눈치챈 걸 알고 있었구나. 그래서 은월한테 그렇게 대한 거였어.
그래서 자타가 계속해서 긴가민가하며 은월의 눈치를 본 거야.
“하지만……! 그들에 관해 아직 다 파악도 안 된 상태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차라리, 미호 님이나, 백령 님처럼 다른 땅에 도움을 청하는 건…….”
“그들이 무엇 때문에 우리를 위해 움직여주는데? 애초에 우리의 실수로 빚어진 일을.”
그는 확고했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기도 했다.
천강을 내쫓고 나래를 주인으로 모신 건 남쪽 땅의 신수들이니까.
“그, 그건 그렇지만…….”
“있지도 않은 신에게 기도하느니, 차라리 악마랑 거래하는 편이 나아.”
“자타 님…….”
“그럼, 이대로 손가락 빨면서 기다릴 건가? 남쪽 땅에 이 악몽이 계속되길 바라는 건가?”
“그건…….”
“지푸라기라도 잡아봐야지. 그게 우릴 구할 동아줄이든. 우릴 나락으로 떨어트릴 동아줄이든.”
자타의 음성이 살짝 떨렸다. 그 음성이 그들이 지금 얼마나 절박하고 간절한지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아니, 그 동아줄을 잡는데 왜 나를 끼워 넣냐고.
저들의 심정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날 흑기에게 넘기는 게 정당화될 수는 없는 일이다.
암튼 이 상황을 어찌하면 좋을까…….
문에서 귀를 떼고 포포를 내려다보았다.
“왜, 왜 그렇게 쳐다봐?”
포포를 먼저 탈출시켜서 은월을 불러오라고 할까?
아니야. 나도 여기가 어디인지 모르는데, 포포라고 알 리가 없다. 게다가 포포가 위험해질 수도 있고.
같이 있는 게 란이었으면 일이 쉬웠을 거 같지만…….
어? 그러고 보니 란은 잡혀 오지 않은 건가?
때마침 그들이 내가 궁금해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게다가, 란이라는 그 너구리한테 들켰잖습니까. 왜 그 아일 살려두신 겁니까?”
“우리 거사와 아무 상관도 없는 남쪽 땅의 신수를 죽일 순 없다.”
“걔가 은월 님한테 말하면…….”
“협박은 해두었지만, 만약 말한다 해도 이미 각오한 일이다. 우린 거사만 성공하면 돼.”
그렇다면 란이 은월에게 이 상황을 얘기했을지도 모른다.
은월이 이 상황을 알았다면, 곧 우리를 찾아낼 거야.
지금은 은월을 믿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 한다.
“뽀뽀.”
“응?”
“우린, 저들의 시간을 끄러야 해.”
“어떻게?”
포포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고 있는데, 다른 이질적인 기운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뭐, 뭐지……. 갑자기 조용해졌어, 아리야.”
“쉿.”
정신을 집중해, 다가오는 인물이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이 칙칙한 기운……. 이건……. 틀림없이 흑기다.
아니, 새들은 원래 이렇게 일 처리가 빨라?
아닌데……. 나래는 아닌 것 같던데.
마음이 변할까 봐 결심이 섰을 때, 흑기들에게 말하게 된 건가.
일단 문에 귀를 다시 갖다 대었다.
“자, 자타 님……. 왜 저들이 벌써…….”
“어쩔 수 없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말이 있으니…….”
“그래도 이건 너무 급작스럽잖습니까.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겁니다, 자타 님……. 이리 쉽게 결정할 일이…….”
그때였다.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구슬은 어디 있지?”
바로 본론부터 말하는 그였다.
이 목소리, 분명 전에 들은 적이 있다. 흑기들이 대량으로 백령의 궁에 쳐들어온 날. 그날, 정신이 멀쩡했던 이상한 흑기.
그자다.
……이건 진짜 큰일인데.
“자타 님…….”
“약속을 지켜라.”
“당연한 말을. 이미 수는 다 써두었는데. 나머진, 너희가 하기에 달린 거지.”
“구슬은……, 저기에 있다.”
“그래, 이만 가 봐. 서둘러야 하지 않나?”
그 말을 끝으로 자타와 다른 신수들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 나도 내 일을 시작해 볼까.”
그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어떡하지?
일단 포포를 숨겨야 한다. 포포에게 해가 갈지도 모르는 일이다.
“뽀뽀.”
“응?”
“너, 저쪽으로 가서 숨어 이써.”
“왜, 왜?”
“얼른!”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야 할 거 아니야!
너랑 나랑 둘 다 쟤한테 걸리면 우린 아무것도 못 한다고!
포포가 내 말에 어두운 구석으로 향했다. 포포는 하도 작으니까, 특별히 눈에 띄는 짓을 하는 게 아니라면 별 탈 없이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내가 시간을 얼마나 끌 수 있느냐인데.
그때였다. 곳간처럼 보이는 이곳의 문이, 활짝 열리고 빛이 새어 들어왔다.
“오랜만이네, 백령의 아이.”
그의 모습은 전과 조금 달랐다. 검은 날개가 처참히 찢겨 있었고, 그의 온몸에는 상처가 가득했다.
뭐지……?
그의 모습을 의아하게 바라보자, 그가 친절하게도 답을 해주었다.
“아, 이거? 저번에 구슬을 놓친 것에 대한 우리 주인님의 체벌.”
흑기들에게도 주인이 있다고?
그렇다는 건, 정신이 멀쩡한 흑기가 얘뿐만이 아니라는 거야?
“근데, 너 정말 백령의 아이 맞냐?”
그가 날 내려다보더니 한다는 말이 백령의 아이가 맞냐는 의심이라니.
본능적으로 그에게서 뒷걸음질 쳤다. 그러자, 그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기분 나쁘게 웃었다.
“뭐, 그건 나랑 상관없는 일이긴 하지.”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야 한다. 은월이 올 때까지.
“……날 어떻게 할 거야?”
“뭐야, 너 이제 말도 잘하네. 신기하다.”
그는 내가 말하는 게 뭐가 그렇게도 웃긴 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널 어떻게 할 거냐고? 안 그래도 고민 중이야, 어쩔지. 여기서 죽이고 가야 할까……. 아니면, 가서 죽여야 할까?”
그는 심각한 고민에 빠진 것처럼 인상을 찌푸렸다.
“있잖아, 넌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응?”
결국, 죽인다는 거잖아.
얘도 참 상종 못 할 미친놈이 확실했다. 그에게서 밀려오는 공포심에 차마 입을 함부로 뗄 수가 없지만.
“음……. 좋아, 여기서 죽이는 게 낫겠어. 그렇지? 백령이 어떻게 방해할지 모르니까. 하여간 괴물 같은 놈이라니까.”
이전에도 그는 백령에게 ‘괴물 같은 놈’이라 칭했던 거 같은데…….
그는 백령에 관해서 그리 좋지 않은 감정을 품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백령에 대해 말하는 그의 눈에는 한기가 서려 있으니까.
“아무튼, 이제 많이 떠들었다. 나도 내 일을 해야지. 이번에도 실패하면 어떤 벌을 내리실지 모르니까.”
그가 내게로 점점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저번에 본 ‘흑도’처럼 보이는 것이 들려 있었다.
그에게서 최대한 뒷걸음질 치며 물러났다.
“이제 더 도망갈 곳도 없어, 포기해.”
그가 칼을 위로 올렸다. 당장이라도 내 목에 꽂힐 것만 같았다.
갑자기 정신이 아찔했다. 무언의 환각이 보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흐린 잔상이 비쳤다. 마치 전에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처럼.
뭐지? 뭔가가, 뭔가가 겹쳐 보여.
하지만 그도 잠시,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오고, 그가 칼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검은 기운이 칼을 감쌌다.
“아리한테서 떨어져!”
구석에 숨어 있던 포포가, 내 앞을 막아서고 나를 보호하듯이 양팔을 벌렸다. 작은 체구의 그지만, 왠지 신기할 정도로 마음의 안정이 찾아왔다.
“이 작은 여우는 뭐야? 이런 얘기 들은 적이 없었는데.”
“아리한테 손가락 하나라도 대 봐! 용서 안 해!”
포포에게서 푸른 기운이 느껴졌다. 이어, 포포가 푸른 불꽃을 그에게 날렸다.
“간지럽네. 좋은 말로 할 때 비켜.”
그의 음성이 낮게 가라앉았다.
그가 포포에게 고개를 까딱거렸다. 하지만 그의 협박에도 포포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안 비켜?”
하급 여우가 자신의 앞길을 막아서일까, 아니면 포포의 불꽃이 짜증이 난 걸까, 그가 잔뜩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좋아. 그냥 너부터 죽이지, 뭐.”
그가 칼을 내리칠 때였다. 이대로면 포포가 칼에 베일 것이 틀림없었다.
“뽀뽀, 안 돼!”
나는 빠른 속도로 포포를 감싸 안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몇 초가 지나도 느껴지지 않는 고통에 눈을 게슴츠레 떴다.
“아리야, 괜찮아?”
포포가 나를 걱정하며 올려다보았다.
이, 일단은?
상황 파악을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이게 왜…….”
흑기가 적잖게 당황한 것 같았다. 나의 주위를 감싼 황금빛이 그의 칼을 막고 있었다. 그 칼은 빛을 뚫을 수 없었다.
“서쪽 땅의 수호석이…… 어째서 네게 있는 거지?”
“서쪽 땅의 수호석?”
그제야 빛의 출처를 알 수 있었다. 내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에서, 정확히는 이랑이 준 그 보석에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것 때문이구나.
하지만 그 빛이 영원하지 않을 거란 걸 예측할 수 있었다.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호석의 힘이 떨어져 가는가 보네.”
그가 다시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기분 나쁘게 웃었다.
어떡하지?
더는 그를 상대로 시간을 끌 자신이 없었다.
이내 수호석의 빛이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그가 다시 한번 칼을 들어 올렸다.
그가 칼을 내리치기 직전, 반갑다 못해 그리웠던 목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흑기 들고 있던 칼이 그의 손에 잡혔다.
“아리한테서 떨어져.”
아름다운 밤하늘을 연상시키는 흑색 머리카락. 오묘한 회색의 눈은 분노가 서려 있었다.
그는, 은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