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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님의 딸이 되었습니다 (52)화 (52/167)

52.

노군의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천강이 방 안으로 들어가 버린 후, 더는 대화도 나누지 못하였기에, 바로 그의 가옥에서 나왔다.

너무 오래 있으면 민폐지.

“저어……, 아리 님.”

내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지, 란이 조심스레 내 눈치를 살피며 나를 불렀다. 나는 그에게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천강 님과의 만남 이후…….”

“응, 이해해.”

“예?”

물론, 궁금했던 모든 것들을 알 수는 없었지만, 그의 생각과 은월의 과거에 관해 조금이나 알 수 있었기, 그에 감사하고 있다.

“그의 위치가 있으니까…….”

“아니, 그게 아니고……. 아리 님, 괜찮으십니까요?”

“응?”

“안색이 매우 좋지 않으십니다요. 식은땀도 계속해서 흘리시고…….”

내가?

그제야 내 몸 상태를 돌아보았다. 어쩐지 아까부터 계속해서 몸에 힘이 빠지는 기분이 들었었다. 기분 탓이거니, 하고 넘겼는데 겉으로도 드러날 정도였나보다.

그래도 아직까진 견딜 만…….

그때였다. 갑자기 시야가 살짝 흐려지며, 어지러움을 느꼈다.

……어?

“천강 님의 거처에서 나올 때부터 아리 님의 안색이 너무 안 좋습니다요. 이 여우도요.”

란이 포포를 가리키며 나와 포포를 번갈아 보았다.

“뽀뽀, 왜 그래?”

나와 달리 포포는 더 이상 걷지도 못했다. 그렇기에 란이 포포를 업었다.

“뽀뽀, 뽀뽀!”

흐려지는 정신을 겨우 붙잡고 포포를 불렀다. 소리를 쳐서 그런지, 정신이 점차 흐려져 갔다.

“아리 님, 아리 님?”

“으, 으응…….”

아찔해지는 정신을 붙잡으려 계속해서 노력했다.

어째서…….

왜 이렇게 된 거지?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그의 얘기를 들은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뿐더러, 천강의 가옥에서 뭔가가 잘못됐더라면, 그가 그렇게 방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대체 어디서…….

“란, 란…….”

“아리 님, 괜찮으십니까요?”

란이 다급히 나를 불렀다. 그의 목소리에 머리가 울렸다.

“은월을, 으널을 부러…….”

정신이 계속해서 아득히 멀어져 갔다. 이제 서 있을 수조차 없게 되자, 이곳이 어디인지, 주위 풍경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쓰러지듯 엎어졌다.

“아리 님, 아리 님! 정신 차리세요, 아리 님!!!”

란이 소리치는 소리가 점점 멀게 느껴졌고, 의식이 흐려져만 갔다.

의식이 완전히 흐려지기 직전, 어디서 들어본 적 있는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죄송하군요, 아리 님.”

저 목소리, 누구더라…….

지금은 목소리의 정체를 떠올릴 만큼의 의식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곧이어 의식이 완전히 끊겼다.

***

란은 쓰러진 아리를 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어떻게 하면 좋지?’

아리는 분명 저에게 은월을 데려오라 일렀지만, 정신을 잃은 아리와 포포를 두고 그가 자리를 비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란이 안절부절못하며 어찌할 바를 몰라 아리의 곁에서 자신의 머리만 쥐어뜯고 있었다.

“아리 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요! 저, 란, 도저히 알 수가 없습니다요!”

그때였다. 익숙한 자가 란의 앞에 나타났다.

“자, 자타 님?”

그는 자타였다. 나래의 직속 하인이자, 강한 매 신수. 자타의 등장에 란이 잠시간 안도할 수 있었다.

“자타 님, 아리, 아리 님이……!”

“안다.”

“예……?”

자타는 의외로 아리의 상태에 대해, 왜 이런지에 대해 궁금해하지도, 묻지도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자타의 근처에는 처음 보는 신수들이 있었다. 그 신수들이, 아리와 포포를 데려갔다.

“자, 자타 님……?”

무언가 일이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됨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란이 천천히 자타의 뒤로 물러났다.

“이 일은 아무한테도 발설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네 목숨이 소중하다면.”

자타가 란에게 협박조로 말했다. 란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정신을 잃은 아리를 떠올린 란의 눈망울에 눈물이 고였다.

나약한 자신이 이토록 미웠던 적은 없었다.

조금만 더 자신이 성장한 신수였더라면, 조금만 더 자신이 강한 신수였더라면……, 이라는 생각이 계속해서 란의 뇌리에 떠돌았다.

자타와 그를 따르는 신수들은 이미 자리를 떠난 지 오래지만 란은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홀로 남겨진 란이 머리를 계속해서 굴렸다.

자신은 나약하다. 아직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신수다. 무턱대고 아리와 포포를 구할 수도 없다는 것을 본인은 잘 알고 있었다.

문득, 은월을 데려와 달라는 아리의 말이 떠올랐다.

‘내가 약하면…… 다른 강한 자에게 알려, 도움을 청하면 돼.’

자타가 그에게 협박조로 경고를 했지만, 란은 그런 건 잊은 지 오래였다.

‘은월, 은월 님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해.’

란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현재 은월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행적을 예측할만한 신수는 알고 있다.

란이 천강의 가옥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아리와 함께 천강의 가옥으로 갈 때도 벌벌 떨며 긴장했던 란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조차 없었다.

되돌아온 란을 보며 천강이 의문을 품었다.

“무슨 일이지?”

“은월 님이 어디 계신지, 천강 님은 분명 알 거라 생각합니다요.”

“대충 짐작은 할 수 있다. 이유를 말해라.”

“은월 님을 불러 주세요. 아리 님이 갑자기 쓰러지셨습니다요. 그리고 자타 님이 아리 님을……. 저보다는 천강 님이 더 빠를 거라 생각합니다요. 은월 님을, 은월 님을 불러와 주세요, 천강 님!”

갑작스럽게 나타나서는, 자신에게 은월을 불러와 달라는 란을 보며 어처구니가 없을 만도 한데, 천강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기어코…….”

“예?”

“기어코 일을 냈구나.”

천강이 오랜만에 자신의 날개를 폈다. 이후, 어딘가로 사라졌다. 천강의 가옥에 홀로 남겨진 란은 천강을 믿으며 그의 가옥에서 기다리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부탁드립니다요, 천강 님.’

천강이 빠른 속도로 은월을 찾아냈다. 그는 남쪽 땅을 감사한 후, 저택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천강의 존재를 눈치챈 은월이 하늘에 날고 있는 그를 보았다. 은월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천강이 은월의 근처로 가서 땅에 착지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은월의 심기가 많이 불편해 보였다.

“은월.”

“네가 오랜만에 날개를 펼 정도의 일이라면, 상당히 급한 일이겠네. 그리고…….”

은월이 눈에 띄게 표정을 굳혔다.

“상당히 안 좋은 일일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

천강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은월은 자신의 예감이 적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슨 일이야?”

“일단 사과 인사를 먼저 하고 싶군.”

“전에 네가 말하려다 만 것과 관련이 있나 보네.”

“…….”

“그리고 이번 건은 아리랑 관련이 있을 거 같고.”

“…….”

은월의 말에 천강이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은월은 당시에도 그가 아리에게 조심하라며 충고를 날린 것에 대해 의아해했었다. 그렇기에, 지금 빠르게 그에 대해 예측이 가능했다.

“시간 없는데.”

말과 달리 은월은 겉으로 전혀 초조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침착해 보였다. 하지만 천강은 알고 있었다.

곧 그의 인내심이 바닥나기 직전인 모습이라는 것을.

“나는 반란군의 수장을 알고 있다.”

“그건 나도 알아.”

은월의 대답에 천강의 표정이 처음으로 변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놀랍다는 듯이 은월을 바라보았다.

은월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미소와 달리 천강에게는 ‘알고 있는 걸 듣기 위해 너한테 시간 쓰고 있는 거 아닌데.’라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실제로도, 그의 해석이 맞을 것이다.

‘은월, 너는 대체…….’

“……그 아이가 내게 찾아왔었다.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그런데, 마침 좋은 기회가 생겼다고.”

“그래서?”

“반란에 관해서는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았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지. 그런데, 그 말을 한 후, 향안 시장에서 너와 아리를 보았다.”

은월은 그의 말을 듣고는 있었지만, 머릿속으로 모든 계산을 마친 후였기에, 그리 귀담아듣지는 않았다.

“그 순간 깨달았다. 그들이 말한 ‘좋은 기회’라는 것. 이리 빨리 움직일 줄은 몰랐지만…….”

“아리를 대가로 흑기의 힘을 빌렸나 본데.”

“네 말이 맞다. 좋은 기회라는 건 흑기와 손을 잡은 것을 말하는 거였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다.”

“그게 뭐지?”

“너구리의 말로는 아리가 쓰러졌다더군.”

은월이 너구리는 란을 뜻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쓰러졌다고?”

“실은 아리가 내게 찾아와, 너와 백령에 관해 물었다. 나는 알려줄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알려줬고, 그 이후 얼마 가지 않아, 아리가 쓰러졌고…….”

천강이 은월의 눈치를 살피며 약간의 뜸을 들였다.

“그걸 자타, 그러니까…….”

자타라는 말에 은월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반란군의 수장이 데려갔다.”

은월의 회색빛 눈동자가 싸늘히 식었다.

“그 너구리는 어디 있지?”

“내 집에.”

천강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은월이 움직였다. 천강도 은월을 따라갔다.

은월이 빠른 속도로 천강의 가옥에 도착했다. 마당에 있는 란을 보고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으, 은월 님!”

“얘기는 들었어. 아리의 상태가 어땠지?”

은월은 누구보다 침착했다. 그의 침착함에 란과 천강은 그가 무서울 정도였다.

“아, 아리 님은 어지럼증이 있는 것 같았고, 식은땀을 흘리셨지만, 제가 말씀드리기 전까진 눈치채지 못한 듯해 보였어요. 옆에 있던 그, 여우도요. 하지만 저는 멀쩡합니다요!”

“어째서?”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요…….”

“아리가 천강을 만나기 전에 접촉한 신수는 없어?”

“아! 그러고 보니……. 나래 님의 궁에 잠시 들렀던 것 같습니다요.”

“나래의 궁에?”

은월이 눈을 가늘게 뜨고 란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란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엎드렸다.

“제, 제 탓입니다요. 나래 님이 절 부르시길래……. 제가 아리 님과 여우한테 말도 없이 사라져서 아리 님은 절 걱정하는 마음에 찾아가신 것이라 들었습니다요.”

“……아리답네. 일단 알았어.”

이 이상 란에게 들을 정보는 없었다. 더는 들을 필요가 없기도 했다. 은월의 머릿속에는 이미 상황 전개가 끝난 후였으니까.

그렇기에 은월이 그들에게서 등을 돌렸다. 시간이 없었다.

“은월, 어디 가는 거지?”

“나래의 궁에.”

은월의 답에 무엇을 깨닫기라도 한 듯, 천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은월이 나래의 궁 안에 들어가, 나래를 찾아내는 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은월? 갑자기 어쩐 일이야?”

은월을 본 나래가 그를 격하게 반겼다. 나래의 방 곳곳을 샅샅이 탐색하던 은월이 나래를 향해 입을 열었다.

“뭔 짓을 한 건지, 대충 짐작이 가는군.”

나래의 방 한구석에서 향초를 집어 든 은월이 나래에게 향초를 내밀었다.

“어떻게 된 건지 말해보실까.”

“그, 그거, 정말 별것 아니야! 그냥 요즘 잠이 안 와서…….”

은월이 향초에다 코를 갖다 댔다. 이내 그가, 헛웃음을 흘렸다.

“위험한 ‘향’을 잘 때 피워?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마.”

은월의 차가운 어조에 나래가 적잖게 당황하며 그의 시선을 마주하지 못했다. 하지만 은월은 나래의 눈을 무섭도록 똑바로 보고 있었다.

“네가 흑기들과 내통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는 사실이었어.”

“뭐, 뭐?”

나래가 지나치게 당황하면서 말을 흐렸다. 사실 은월은 그녀가 흑기들과 내통을 하고 있는지, 없는지, 물증도 없었고, 천강에게 들은 말과 현재 상황에 머릿속으로 유추하게 된 지 얼마 안 된 상태였다.

‘사실인가 보군.’

하지만 나래의 반응으로 유추는 단순한 짐작이 아닌 사실이 되었다.

“그 흑기들이 뭘 위해 널 도와주겠다고 한 것 같아?”

“그, 그게 아니라……!”

“그 흑기들이 너한테만 찾아왔을 것 같아?”

“무슨 소리야?”

은월의 말에 나래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곧이어 은월의 말이 겨우 이해가 된 나래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은 나래는 기겁을 하며 파랗게 질렸다.

“왜 네가 눈앞에 있는 것밖에 보지 못하는지 알아?”

“으, 은월…….”

“항상 네 눈앞에 있는 이익에 심취해 있기 때문이야. 목적을 위해서 지나치게 솔직해지니까.”

은월의 말에 나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나래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래는 자신이 너무나도 불쌍해 죽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신수도 아닌 은월이 저렇게까지 말하니,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불어.”

“뭐, 뭐를?”

“흑기들이 있는 곳.”

“나, 난 몰라.”

“다시 한번 물을게. 잘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

나래는 사색이 돼서 고개를 저었다.

“어디 있어?”

“그, 그건…….”

나래가 계속해서 망설이자, 겉으로는 하나도 티가 나지 않았지만, 은월은 더욱 초조해져만 갔다.

‘이럴 시간이 없어.’

그때였다. 나래의 방 문이 급하게 열리고, 금빛의 강아지 신수가 안으로 들어왔다.

“제가, 제가 알아요, 은월 님!”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여노가, 가쁘게 숨을 고르며 문 앞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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