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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님의 딸이 되었습니다 (51)화 (51/167)

51.

나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어처구니없다는 듯, 나와 포포를 번갈아 보기만 할 뿐이었다.

뭐, 쟤가 알아듣던, 못 알아듣던 그건 내게 중요치 않았다. 어쨌든, 내 뜻을 전했으니까. 속이 다 후련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아까부터 그녀의 방에서 달콤한 향이 계속해서 났다는 것이었다.

이 향, 어디선가 맡아본 거 같은데.

똑똑.

적막을 깬 건 다름 아닌 누군가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나래 님, 들어가도 될까요?”

“들어와.”

목소리를 들어보니, 자타였다. 이내, 자타가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자타의 손에는 여러 종류의 과자들이 바구니에 담겨 있었다. 그럴뿐만 아니라, 처음 보는 과일들과 차도 마련되어 있었다.

달콤한 향이, 저기서 나는 건가?

“시장하지 않으실까 싶어, 준비해 보았습니다.”

“쓸데없는 짓을.”

“여기에 두고 가겠습니다.”

자타가 바구니를 두고 나갔다. 포포의 감동으로 젖은 눈망울이 한순간에 눈앞에 놓인 과자를 향한 욕망의 눈망울로 바뀌었다.

저, 저 간사한 여우 녀석.

포포가 놓인 과자를 하나둘 집어먹기 시작했다. 구박할 것 같았던 나래는 관심도 없다는 듯, 시선도 주지 않았다.

“아리야, 이거 맛있다.”

……뽀뽀야, 네 귓속말은 귓속말이 아니라니까.

저번 깨달음은 어디로 달아나버린 건지, 포포가 나래에게도 다 들릴 만큼 큰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아니, 그것도 그건데, 아무거나 주워 먹지 말라니까, 이 요망한 여우 녀석.

“헤헤.”

포포가 행복한 듯이 꼬리를 흔들었다.

……그래,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으렷다.

“이제 볼일이 끝났으면 나가줄래? 저거 데리고.”

나래는 매우 심기가 불편한 듯, 거북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포포를 가리켰다.

“그래, 안 그래도 이제 갈 고야. 걱정 마.”

“저것도 들고 가고. 더러운 하급 신수가 손댄 음식 먹을 생각 없으니까.”

저게, 말을 해도 왜 저렇게밖에 못하냐?

진짜 저 정도면 문제 있다.

뽀뽀야, 이때다. 지금이야말로 네가 잘하는 특기를…….

“들고 가래, 헤헤.”

……바보 여우.

얘를 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까…….

“어쨌든, 란은 이미 궁을 떠났다는 고지?”

“그래,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어?”

“한 세 번쯤 더 말해조.”

“하?”

나래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가자, 뽀뽀야.”

“그래, 이제 여기 볼일도 없다.”

나래가 짜증이 잔뜩 담긴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가 타오를 것만 같았다.

뭐, 인마? 그렇게 노려보면 어쩔 건데.

열이 잔뜩 오른 나래에게서 등을 돌린 후 뒤도 안 돌아보고 방을 나왔다. 많이 화가 난 것인지, 방 안에서는 물건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닭이 미쳐 날뛰나 보네.”

“구런가 바.”

***

노군의 저택으로 돌아오자, 익숙한 얼굴의 너구리가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아리 님, 대체 어디 가셨었던 겁니까요!”

네 놈 찾으러 갔었다.

네 놈 때문에 쓸데없이 나래한테 가서 힘만 빼고 왔잖아, 이놈아!

당장 멱살이라도 잡고 흔들고 싶었지만 그럴 기운도 없었다. 나래와의 신경전에 조금 지쳤나 보다.

“너구리, 너! 어디 갔었어!”

“어?”

란이 포포의 손에 들린 바구니를 보고 갸우뚱거렸다.

“이건, 나래 님 궁의 문양이 박힌 바구니잖습니까? 헉! 설마, 저를 찾으러 나섰던 것이었습니까요?”

그래, 이놈아. 이제 너의 죄를 알겠…….

“아리 니이이이임!”

이거 왜 이래…….

란이 내게로 뛰어들더니 내 치맛자락을 잡고 훌쩍이는 것이 아닌가.

“란, 감동했습니다요.”

“으응?”

아니, 감동했으면 이거 좀 놓아주지 않으련?

“크흡, 역시 아리 님입니다. 저를 구해주셨던 은인…….”

아니, 그건 내가 아니라 수하라니까…….

“아, 그러고 보니 천강 님이 아까 찾아왔습니다요.”

“응? 왜……?”

“그건 모르겠습니다요. 은월 님과 아리 님, 두분 다 지금 안 계신다 전하니, 돌아가셨습니다요.”

생각지도 못한 천강의 등장에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그가 나와 은월을 찾아올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천강과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은월의 과거사를 얘기하던 도중, 찾아온 그. 은월에게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었다.

천강이 전하려던 말은 뭐였을까.

그가 뭘 얘기하려는 거지?

자꾸만 그가 말하려는 걸 망설이는 이유는 뭘까.

“란, 천강은 어떤 신수야?”

“천강 님이요? 전대 남쪽 땅의 주인이시자, 네 땅의 주인 중 가장 오래 사셨었습니다. 지금은……, 아니지만요.”

가장 오랫동안 네 땅을 지켜봐 온 신수라…….

“봉황이신 나래 님이 태어난 후, 강제로 물러나시게 되셨지만, 천강 님을 바로 옆에서 보좌하시던 우리 할아버지 말씀에 따르면, 통치자로서의 능력은 다른 땅의 주인들과 겨뤄도 손색이 없을 정도라고 하셨었습니다요.”

그리고 은월의 잠재력을 알아볼 만큼 보는 눈이 좋은 자.

천강이라면 왠지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것만 같았다. 은월에 대해서도, 그리고…….

백령에 대해서도.

그를 만나봐야겠어.

“란. 안내해 조.”

“산책이라도 가시렵니까요? 그런 거라면 저, 란에게…….”

“천강의 거처로.”

“예……?”

뭐야, 일부러 또박또박 말해줬고만.

후우…….

다시 한번 또박또박 발음하기 위해 숨을 들이켰다.

“천강의 거처로.”

“아, 아니, 아리 님. 갑자기 천강 님께는 왜…….”

“안, 내, 해.”

“……예, 알겠습니다.”

나의 말에 란이 천강의 거처로 안내를 시작했다. 나와 포포, 란, 셋은 노군의 저택에서 벗어나 천강의 거처로 향했다.

가는 내내 내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던 란이 입을 열었다.

“저어, 아리 님, 천강 님께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요……?”

“그런 게 이써.”

“미리 간다고 말씀은 드려놓으신 겁니까요……?”

“아니.”

“아리 님, 그럼 혹시, 천강 님이랑 만나기로 약조라도 하셨습니까요……?”

“그런 고 안 했는데.”

“아니면 천강 님이랑 아는 사이이십니까요……?”

“잘 몰라.”

나의 대답들에 란이 석연찮은 표정을 지으며 곤란하다는 듯이 땀을 뻘뻘 흘렸다.

“그럼 대체 뭘 믿고 천강 님께 가는 겁니까?”

“은월.”

“예에……?”

은월 친구면 내 친구지, 뭐. 암암, 그렇고말고.

“우리 싸부라면 믿을 만하지.”

포포가 옆에서 뿌듯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넌 무슨 얘기인지 알고?

언제나 생각하지만 참 요망한 여우다.

란이 더는 내게 묻지 않고 조용히 천강이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란이 그리 커 보이지 않는 가옥 앞에 발을 멈췄다. 저택 안에서 느껴지는 기운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이곳이 천강의 거처라는 것을.

이곳은 나래의 궁과도. 노군의 저택과도 어느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따로 대문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의 허락을 받고 들어가기 위해 들어가지 않고 밖에 멈춰 서 있었다.

“천강.”

그리 큰 소리로 그를 부르지 않았다. 이 작은 마당 앞에선, 굳이 큰 소리로 그를 부르지 않아도, 내 목소리가 그에게 닿을 거라 생각했다.

곧이어 닫혀 있던 가옥의 문이 열리고, 그곳의 주인이 얼굴을 비췄다.

전에 보았던 백발과 흑색 눈동자, 위엄있는 독수리 날개. 그는 천강이었다.

나를 발견한 천강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지만, 그가 적잖게 당황한 것은 알 수 있었다. 한동안 굳어 움직이질 않았으니까.

이후 천강이 천천히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네가 왜 이곳에…….”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와써.”

천강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가 한동안 물끄러미 내 눈동자만 바라보았다.

꿀꺽.

그의 위엄 있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침을 한번 삼켰다.

“들어와라.”

그가 뒤를 돌아, 가옥 안으로 향했다. 그에 나도 그를 따라나섰다.

포포와 란도 나를 따라 천강의 가옥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가옥 앞엔 마루가 있었다. 천강이 마루에 조그마한 탁자를 준비했다. 천강이 탁자 앞에 앉았고, 나는 그의 맞은편으로 가 앉았다.

탁자에는 차와 적은 양의 다과를 두었다. 다과가 적은 이유는, 날 푸대접하려는 의도가 아닌, 그의 집에 다과를 두지 않는 것이 이유일 것이리라.

포포와 란이 눈치를 살피다 하나, 둘씩 집어먹었다.

천강이 내게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듯이, 눈치를 주었다.

“너는, 나래에 대해서 어떠케 생각해?”

주목적은 아니었지만, 남쪽 땅에 관한 얘기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아 보였다.

“나래 님이라……. 몇 백 년 만에 나타난 봉황.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남쪽 땅을 통치할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위치지.”

“그래……?”

천강은 나래에게 자리를 뺏긴 것에 그리 억울해하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그가 강하게 말했다.

“지금 그녀에겐 자격이 없는 듯하군.”

“지금의 나래?”

“그녀도 그녀 나름대로 노력을 한다고는 하지만, 중요한 건 결과이니.”

그거 맞지, 백번 천번 맞는 말이지.

“애초에 은월이 아니면 스승을 두지 않겠다고 한 그녀니까.”

“응?”

……이건 처음 듣는 얘기인데?

그러고 보니 나래는 자존심 탓에 일을 배우는 것도 거부한다고 들었던 거 같기도 하고…….

“그래서 남쪽 땅에서 그에게 부탁했지만, 그 녀석은 단호하게 거절했지.”

“그, 그랬구나아…….”

이건 전에 자타에게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지금 이렇게 개판인 것이지.”

개, 개판이라니……. 물론, 얘기를 들으면 개판이 맞긴 하다.

“그래서 진짜로 알고 싶은 것이, 뭐지?”

그가 갑자기 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아무래도 그의 눈에 내가 진정으로 듣고 싶어 하는 질문이 아니라는 게 보인 것 같았다.

하지만 쉬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 것처럼 보였다. 이대로 그를 계속 붙들어둘 수는 없는 노릇이라. 심호흡을 한번 크게 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천강, 너는 알고 있는 고지?”

“뭐를?”

“은월이 전에 말했던 그 과고와…….”

“응.”

그가 천천히 이어질 나의 말을 기다렸다. 그는 예상했다는 듯, 흑색 눈동자에 어떠한 흔들림도 없었다.

나는 무거운 입을 가까스로 떼며 다음 말을 내뱉었다.

“백령에 대해서.”

‘백령’이라는 말에 변함없던 그의 표정이 잠시 흔들렸던 것도 같다. 하지만 이내 그는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은월이 전에 네게 과거를 설명하지 않았던가.”

“네가 중간에 끊어짜나.”

너 때문에 다 못 들었다, 인마.

“……내가 끊었으니 책임지라는 것인가.”

“응.”

알면 빨리 말해봐.

그에게 얼른 말해달라는 재촉의 눈빛을 보냈다.

“어디까지 들었지?”

“기억 안 나. 처음부터 말해조.”

거짓말이다. 그 당시 은월의 말에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기에 말 한 톨도 흘리지 않고 머릿속에 입력했지만…….

혹시 알아? 은월이 내게 알려주지 않은 과거가 있을지.

“뭐, 좋다. 처음부터 말해주지. 은월, 그는 사법관에 오르기 전, 자신에 대해서 신국에서 몰랐을 거라 생각하는데.”

“응.”

“그거, 은월의 착각인지,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신국에선 그의 존재에 대해 안 지 오래다.”

“으응?”

“그가 태어났을 때부터 신국은 알게 모르게 그에게 관심이 컸으니까.”

신국이 은월에게 관심이 많았다고?

“아리, 너도 이미 알고 있을 것인데…… 흑기에 대해.”

“알고 이써.”

“흑기는 과거에 신국을 어지럽혔지만, 마땅히 그들에게 나설 수 있는 자가 없었지. 네 땅의 주인들은 각각 땅들을 다스리기 바빴고, 다른 신수들은 마땅찮지 않았으니……. 미호와 시호가 골머리를 많이 앓았었지.”

“미호가 있자나.”

“미호와 시호는 신국의 권능을 지닌 자들이었지. 하지만 그녀들은 함부로 나설 수 없었다. 그녀들이 움직이는 것에는 ‘대의’라는 명분이 필요했으니까.”

명분……?

“그렇기에 그들이 단체로 중죄를 짓는 것이 아닌 이상, 함부로 나설 수 없었지.”

“그런데, 지금의 흑기는…….”

분명 미호가 전에 화난 어조로 말했었다. 흑기의 신력을 다 빼앗았다고. 그래서, 흑기들은 능력을 사용할 수 없고, 그들의 무기인 흑도를 쓸 수 없다고…….

……미호가 나설만한 ‘명분’이 생긴 거구나.

나의 표정을 읽은 듯한 천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은월은 태어날 때부터 존재감이 상당한 신수였다. 그가 사법관의 자리에 올랐기에, 그나마 질서가 잡혀갔지.”

“그래꾸나……. 근데, 혹시.”

“나는 그 일에 대해서 자세히 언급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렇기에, 이 이상을 말해줄 수 없다.”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가 엄포를 놓았다.

“나는 권능을 잃었으니까.”

그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그는 슬픔도, 후회도 없는 듯했다. 그저 지금의 남쪽 땅에 대해 걱정을 할 뿐.

“미리 말하지만, 백령에 대해서도 나는 말해줄 수가 없다.”

응? 이건 예상 못 한 일인데……?

왜, 왜? 나 그게 제일 중요한 거였는데?

서글픈 눈망울로 그를 쳐다보았지만, 그는 어림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봐도 소용없다. 나는 백령에 대해 아무것도 말할 수 없으니.”

“대, 대체 왜?”

“포기해라, 아리.”

말을 마친 천강이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 나쁜 놈아, 이유라도 좀 알려주고 가!

새라서 그런가, 행동 한번 더럽게 빠르네,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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