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은월이 발걸음을 다시 재촉했다. 그의 뒤를 씩씩대며 따라갔다. 안 그래도 다리 아파 죽겠는데 계속해서 걷는 은월이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그것보다 과거사는 언제 얘기해줘?
나 또 속은 거야?
“은월, 이로기야?”
뾰로통하게 그에게 톡 쏘아붙이자. 그가 발걸음을 멈췄다.
“앉아.”
“응?”
은월의 말에 눈앞을 보니, 앉아서 쉴만한 터가 마련되어 있었다. 뜨거운 햇살을 막아줄 수 있는 마른 큰 나무, 앞에는 강이 흐르고 있었고, 앉을만한 자리 또한 마련되어 있었다.
정신없이 은월의 꽁무니만 쫓아오다 보니, 주위 풍경을 돌아보지 못했었나 보다.
은월의 말대로 자리에 앉았다. 안 그래도 다리가 저려 왔던 터라, 살 것 같았다.
남쪽 땅의 날씨는 너무 더우니까.
지쳐 앉아 있는 내 옆으로 은월이 앉았다. 지친 내 모습을 보던 은월이 내게 마실 것이 담겨 있는 병을 내밀었다.
이건 또 언제 샀대?
은월이 내민 병을 받아들였다. 그러자 은월이 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의 오묘하고 아름다운 회색빛 눈이 나와 마주쳤다.
“그래서, 뭐가 궁금해, 아리야?”
“우음…….”
잠시 그의 눈을 피하고 생각에 잠겼다.
그냥 다 궁금한데…….
“다.”
“다?”
“그 후에, 어떠케 됐는데?”
“그 후? 아아, 남쪽 땅에 흘러 들어온 후를 말하는 건가.”
“응응.”
“이 땅에서 그녀를 만났지.”
“그녀?”
“응.”
그녀가 누군데?
은월이 말하는 그녀에 대해 더 자세히 듣고 싶어졌다. 하지만 은월은 전혀 딴 얘기를 시작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녀를 본 날이었지. 그 당시 나는 신국의 체계와 높은 신수들의 권력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던 시절이라, 오히려 그녀가 뭐 하는 신수인지조차 몰랐지.”
은월은 덤덤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녀는 뜬금없이 내게 사법관의 자리를 권했어. 마침 사법관에 적당한 신수를 찾고 있었다며. 난 바로 사양했지만.”
“그래써……?”
하지만 지금은 사법관이잖아……?
은월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내게 거절당한 그녀가 천강에게 내 존재를 알렸지. 그날 처음 천강을 만났어.”
그 물러난 남쪽 땅의 전대 주인?
“천강은 내게 계속해서 다가왔지. 그는 내 재능을 알아보고 곁에 두고 싶어 했어.”
“그럼 사법간 전에, 천강 곁에서 지낸고야?”
“어림도 없었지. 난 노예계약은 사양이었거든. 그리고 한 군데에 묶이고 싶지도 않았고.”
“으응…….”
그래, 은월이 그런 거에 넘어갈 위인이 아니긴 하다.
“그때, 천강에게 넘어갈 거였다면 그녀의 부탁으로 사법관 자리를 꿰찼을 거야, 차라리.”
그래, 그건 맞지…….
천강 밑에서 일하는 것보단 차라리 독립된 권력을 지니는 게 훨씬 나았을 것이다. 은월의 성격상으로도.
“그론데, 어쩌다 사법간이 된 고야? 천강이 옆에 두고 시퍼 했다며.”
“천강이 좀 끈질기게 굴긴 했어. 지금 생각해도 피곤하니까.”
그 당시를 떠올려본 것처럼 보이는 은월이 고개를 저었다.
“그 후, 천강과 친해지고 난 후, 신국에 안 좋은 일이 생겼지. 조금 크게.”
“응? 그게 몬데?”
“그녀가 죽었거든.”
“……!”
죽었다니?
놀란 토끼 눈으로 은월을 바라보았다. 은월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어깨를 들썩였다.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그녀에 대해 잘 몰라. 그래서 그녀의 죽음도 한참 뒤에 알았어.”
“그러쿠나…….”
“하지만 그녀의 죽음으로 많은 게 변했고, 사법관을 권했던 그녀가 떠올랐어. 그래서 미호가 내게 사법관을 권하려 찾아왔을 때,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지.”
“미호?”
“어.”
은월이 대체 왜 미호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걸까?
그녀의 죽음을 늦게 안 은월. 그녀를 잘 몰랐던 은월. 그 정도였다면 그녀의 죽음으로 슬퍼서 그런 것은 아닐 텐데…….
물론 그녀의 죽음이 안타까워서, 또는 그녀의 죽음으로 인해 미안해서도 아닐 것이다.
대체 왜?
“왜? 은월, 대체 왜? 은월은 그녀의 죽음에 대해서 잘 몰라짜나.”
“응. 하지만 미호를 보는 순간 알 수밖에 없었으니까.”
“뭐를?”
은월이 그때를 회상하듯 눈을 감았다. 남쪽 땅 특유의 더운 바람이 불었다. 시간이 멈춰버린 것만 같았다. 오로지 은월만을 응시하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은월이 천천히 눈을 떴다. 더운 바람에 그의 흑색 머리칼이 날렸다.
“죽은 그녀는…….”
은월이 입을 열었을 때, 낯선 이의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은월.”
낯선 이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처음 보는 신수가 서 있었다.
나래와 같이 등 뒤에 망토처럼 덮인 검은 날개, 새하얀 머리칼, 새까만 눈동자. 앳돼 보이는 얼굴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연로해 보이는 얼굴도 아니었다. 바랑과 비슷해 보이는 정도?
하지만 그에게서는 바랑과는 확연히 다른 무언의 위엄이 느껴졌다.
누구지?
“언제부터 엿들은 거지, 천강?”
“네 과거 얘기가 나왔을 때부터인 것 같군.”
……천강? 남쪽 땅의 전대 주인이었던 그, 천강?
아니, 그것보다 은월 과거 얘기가 나왔을 때부터 엿 들은 거면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었다는 거잖아.
천강인 나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왜인지, 내 정체를 모르겠다는 듯한 눈빛으로.
“나는, 동쪽 땅의 자근 주인, 아리라구 하는데…….”
“아아, 들어본 적 있습니다.”
“으응?”
존댓말……? 은월에게 반말을 하다 내게는 존댓말을 하니, 혼란스러웠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이니, 천강이 내게 고개를 숙였다.
“최근, 미호 님에게 구슬을 하사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은월에게 들은 대로 저는 남쪽 땅의 전대 주인입니다. 지금은 모든 권능을 잃었으니, 아리 님에게 감히 편히 말할 수 있는 자는 아닙니다.”
“그, 구치만…….”
당황해서 은월을 바라보았다.
“은월은 제게 친우이니, 편하게 대하는 겁니다. 부디 여의치 마시길.”
무심한 말투였지만, 상당히 정중했다. 그의 설명에 이해가 되었지만, 그래도 은월에게 편히 대하는 신수가 내게 고개를 숙이니, 너무 어색했다.
아니, 진짜로, 상당히 어색하다고, 이 독수리야.
“구럴 필요 업써. 편하게 말해.”
“제 신분으로 어찌 그러겠습니까.”
“안니, 진짜 갠차나. 편히 대해조.”
“저는 권능을 잃은 지 오래입니다.”
아니, 다 필요 없고 내가 불편하다니까?
얘……. 매우 고지식하다. 미치도록 고지식하다. 정말 고지식하다.
심지어 거기에다 고집도 더럽게 쎄다.
이 정도면 뽀뽀보다 쎄겠는데……?
“그냥 아리 뜻대로 해. 아리도 그편이 편한 것 같으니까.”
옆에서 우리 대화를 지켜보던 은월이 내 말을 거들어주었다.
그래, 내 말이 그 말이야.
은월의 말에 적극적으로 동의하며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천강이 의심 가득한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뭘 봐, 인마.
“정말 그게 편하시겠습니까?”
“응.”
뭘 물어? 은월 말을 똥구멍으로 들었냐?
천강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하도록 하겠……, 아니, 그렇게 하지.”
천강의 말에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그러자, 천강이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네가 여긴 웬일이야?”
“네가 온다는 소식은 들었다. 지금쯤이면 향안 시장 조사를 시작했을 테니, 혹시나 싶어 온 거지.”
“나한테 할 말이라도 있어?”
“…….”
“뭔데.”
“아니다.”
은월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나 천강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냥 와 본 것이다.”
“그래, 알았어.”
은월이 눈을 휘며 미소 지었다. 하지만, 내게 이따금 보여주는 웃음과는 조금 달랐다.
“반란군 때문이지? 내게 온 이유.”
은월의 말에 천강의 얼굴이 잠깐 당황으로 물들었지만, 이내 다시 본래의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역시 알고 있었군.”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 모르기가 더 힘들 정도 아닌가. 그렇게 티를 내고 다니는데.”
“그런가. 예나 지금이나 네 녀석은 예리하군.”
“별로. 못 알아채는 놈이 이상하지.”
“바랑은 몰랐던데.”
걔는 똥개잖아.
“걔는 바랑이니까.”
은월과 마음이 통했다.
은월의 대답에 천강이 그건 그렇다면서 수긍했다.
그러곤 천강이 은월에게서 시선을 떼고 날 바라보았다.
마치, 내게 할 말이라도 있는 듯이.
응……? 아까부터 나한테 왜 그래?
“조심해라, 아리.”
“응?”
짧은 말이었지만 강렬히 새겨졌다.
뭐지? 갑자기 천강이 내게 왜 그런 말을…….
날 바라보고 한다는 말이 조심하라니.
“지금의 남쪽 땅은 조심하는 게 좋다는 뜻일 뿐이다.”
천강이 당황한 내게 부연 설명을 덧붙였지만, 어딘가 찝찝했다. 마치 뭔가를 알고 있는 듯한, 이상한 느낌.
반란군을 조심하라…….
잠시만, 그런데 반란군이 반란에 성공하면 천강한테는 좋은 기회인 것 아닌가?
그는 아직 창창해 보였고, 그의 위엄은 상당했다. 그런 그가 반란군을 걱정하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새까만 눈동자는 진심이었다. 한 치의 떨림도 느껴지지 않았다.
천강이라는 자는, 참 속내를 알 수 없는 신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
달이 태양에게 완전히 가려진 날. 동쪽 땅에는 피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꽃도, 나무도, 풀도, 사시나무 떨듯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그 가운데는 한 사내가 있었다. 아름다운 푸른 빛이 도는 은발의 사내가.
그의 앞에 선 신수들은 떨림이 멈추질 않았다. 그의 위엄에, 그의 눈빛에, 그리고 자신들의 정해진 미래에.
그들은 후회했다. 눈앞만 보기 급급해서 큰 것을 보지 못했다. 그 유명한 백호제가 이런 날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배, 백령 님. 저, 저희는 그런 것이 아니오라…….”
한 신수가 땀을 뻘뻘 흘리며 백령의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하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그들은 이미 동쪽 땅의 내부 사항에 대해, 아리에 대해, 백령에 대해 정보를 사주한 자에게 전한 뒤였다.
어느 땅이든 첩자와 반란을 꾀하는 자는 존재했다. 네 땅의 주인들은 서로를 견제하기도 하고, 다른 땅의 상황에 대해 궁금해하기도 하니까.
하지만, 백령은 그들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오래전, 그날 같은 일이 되풀이되는 걸 막기 위해서라도.
사주를 받은 자들은 어차피 주술로 인해 자신들을 사주한 자에 대해 입도 뻥긋할 수 없다. 애초에. 잊은 지 오래니까.
그렇기에 그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차례차례,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는 자신과 같은 처지의 신수를 보면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수밖에.
“백령 님. 이 자가 마지막입니다.”
자하가 마지막 신수를 가리키며 백령의 앞에 엎드리게 했다. 이내, 마지막 신수도 숨을 거뒀다.
피로 얼룩진 백령의 궁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하인들은 아무런 말도 못 한 채, 멀리서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궁이 많이 더러워졌군.”
곧이어 신수들의 시신이 사라져갔다. 하인들이 처리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푸른 백령의 궁은, 이날만큼은 붉게 물들 수밖에 없었다.
어두운 밤하늘에서 비가 한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소나기가 쏟아졌다.
백령이 고개를 들어 텅 빈 눈으로 내리는 비를 바라보았다.
월식은 백령에게 다른 의미였다. 어떻게 보면 애도, 어떻게 보면 살육, 어떻게 보면…… 포효.
그런데 어째서인지, 이번 백호제에서의 그의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아리가…….”
“예?”
자하가 백령의 말을 못 알아듣고 되물었다. 그러자, 그는 자하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뒤를 돌아 그의 집무실로 향했다.
‘아리가 보고 싶구나.’
어째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그도 모른다. 그렇기에, 그는 갑자기 든 그 생각을 떨쳐 버렸다.
“백령 님, 제가 남쪽 땅으로 가 봐도 되겠습니까?”
자하가 집무실 안으로 따라 들어왔다. 자하는 남쪽 땅으로 간 아리가 너무 보고 싶기도, 걱정되기도 하였다.
백령이 그런 자하의 마음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여태껏 대부분 아리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던 자하라는 걸 아주 잘 아는 그였다. 자하를 옆에서 상시 붙어 있게 한 건 백령이었다. 그런데도 그의 눈에 아리는 항상 불안하고 위태로워 보였다.
하지만, 아리가 오기 전 정리해야 할 것들이 많은 백령이었다. 그렇기에 자하의 물음에 아무런 답도 주지 않았다.
“하하, 당연히 아루도 없으니, 제 할 일을 마저 끝내러 가야겠군요. 아루가 없다는 걸 새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백령 님. 게다가 지금 아리 님 곁에는 은월 님이 계시니.”
자하가 멋쩍게 웃으며 줄줄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그의 말은 대부분 백령이 대답할 필요 없는 것들이었다.
백령은 묵묵부답인 채로, 일에 집중했다. 서쪽 땅에 다녀오느라 그간 쌓인 일이 상당했다.
그렇기에 자꾸만 드는 잡념을 떨치려 일을 시작했다. 상당히 오랜만에 느끼는 기분이었다.
아리가 궁에 없다는 게, 이렇게 쓸쓸한 일일 줄, 신경 쓰이는 일일 줄, 백령은 꿈에도 몰랐다.
‘이번엔…… 꼭 지켜야 한다.’
어째서인지 백령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깊게 파고들지 않았다.
아니, 파고들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백령은, 자기 손에 흐르는 피가 누구의 피인지도 모르는 채 일에만 몰두했다.
그렇게 백호제의 밤은 깊어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