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야, 넌 뭔데 아리 님을 아리라고 불러?”
“내 마음이야, 너구리야.”
“이, 익! 포포랬나? 너……!”
“뭐?”
이것들은 왜 대낮부터 내 앞에서 싸우고 야단이야.
그렇다. 아침부터 찾아온 반갑지 않은 손님, 란과 푹 자고 일어나 기분 최고인 포포가 만나자마자 서로 으르렁, 아니, 야옹거리며 싸우고 있었다.
그러니까, 둘이 싸우든 말든 상관없는데, 왜 하필 여기서, 그것도 나에 관한 걸로 싸우고 난리인 거야?
“아리 님이 너 같은 거랑 붙어 다니시다니, 세상에.”
“뭐? 너 말 다 했어?”
“쯔쯧.”
“너, 아리 구슬 훔치려고 했다며? 진짜 한심해 가지고.”
“그, 그건 과거일 뿐이야!”
“쯔쯧.”
포포와 란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유치함의 끝을 달리고 있었다.
진짜 시끄러워 죽겠다. 둘 다 걷어차 버릴까…….
“이 쪼끄만 여우가!”
“뭐, 이 쪼끄만 너구리야!”
쟤네 진짜 왜 저래?
안 그래도 충분히 피곤한데, 쓸데없는 일로 힘 빼는 두 작은 신수들을 보며 힘이 더 빠졌다.
결국, 나의 정신 건강을 위하여 중재에 나서기로 했다.
“뽀뽀, 란, 둘 다 고마해.”
나의 중재에도 두 신수는 옥신각신하기 바빴다.
“고마하라니까!”
나의 외침에, 서로를 노려보던 두 신수가 동시에 나를 돌아보았다.
“아리, 넌 가만히 있어 봐.”
“맞아요, 아리 님!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너희 솔직히 말해. 그냥 서로 시비 걸고 싶은 거지? 내 얘기가 나온 건 명분일 뿐인 거지?
그래, 너희 둘이 잘 먹고 잘살아라…….
내게 상관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은 둘이 다시 물 만난 물고기처럼 옥신각신하기 시작했다.
귀를 막으며 둘을 피해 은월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여기 계속 있다간 화병나서 어떻게 되어 버릴지도 몰라…….
은월의 방 앞에 당도하자, 내가 열려던 문이 알아서 벌컥 열렸다.
“아리?”
은월이 나가려는 듯, 옷매무새를 단장하고 문을 열었던 것이었다.
“은월, 오디 가?”
“어. 잠깐 시장에 가보려고. 이것도 감찰 중에 하나니까.”
“그렇구나……. 아, 그럼 여노도 거기 가 있는 거야?”
아침부터 행방이 묘연한 여노에 관해 물었다. 그러자, 은월이 고개를 저으며 미소 지었다.
“여노는 내가 시킨 일을 수행하고 있을 거야. 그래서 지금은 좀 바쁠 듯한데……. 왜, 시녀가 필요해? 시녀 정도는 금방 구해줄 수 있어.”
“구런 거 아니야.”
은월의 물음에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나는 시녀 따위 필요 없다. 혼자서 다 할 수 있는걸?
시녀가 필요했던 게 아니라, 단순히 그녀의 행방이 궁금했던 것뿐이었다.
“그럼 나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있는 거야?”
“으응? 아니, 구냥…….”
“심심해?”
포포와 란의 지겨운 싸움을 보는 게 싫어서 은월을 찾아오긴 했지만, 심심하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그렇기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은월마저 떠난다며 이 저택에 남은 신수는…… 불행하게도 란과 포포 뿐이다.
“그래? 같이 갈래?”
“시장?”
“응. 정확한 명칭은 향안 시장인데, 다들 줄여서 향안이라고 해.”
그의 제안에 조금 솔깃해졌다.
갑작스럽긴 한데…….
“음…….”
은월의 제안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새에, 어디선가 노군이 각종 서신으로 보이는 것들을 들고 왔다.
“어, 은월 님. 어디 외출이라도 하십니까?”
“향안 감찰을 해야 해서.”
“오늘부터 바로 업무에 들어가시는 군요……. 하루 정도는 푹 쉬셔도 될 듯합니다만.”
“일은 일이니까.”
“은월 님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일에 몰두하시는군요.”
“이 얘긴 그만하지. 그건 그렇고, 손에 잔뜩 들고 있는 그것들은 뭐지?”
은월이 눈짓으로 노군이 들고 온 것들을 가리켰다.
“아아, 이거……. 나래 님이 보내신 서신입니다. 어떻게 처리할까요?”
“방 안에 놔둬.”
“알겠습니다.
노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서신을 저만큼이나…….
어마어마한 양의 서신들은 절대 하룻밤 안에 준비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갈 거야, 아리야?”
서신을 물끄러미 보던 내게 은월이 물었다.
“어? 으음…….”
“향과가 향안에 있어.”
아니, 누굴 향과에 넘어가는 그런 간사한 포포 같은, 그런 바보로 보는 건가?
“향이 들어간 다른 과자들도 있어.”
“아, 아니…….”
나는 향과에 넘어가는 포포가 아니라니까?
“아리 님, 남쪽 땅의 향안 시장에서 사 먹는 향과는 타지에서 먹는 것보다 더욱 맛있답니다.”
아니, 그러니까 향과 같은 거에 안 넘어간다니…….
“안 갈 거면 말고.”
“가, 가! 가, 은월!”
누가 안 간대?
나의 급박한 외침에 은월이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근데 나 절대, 절대, 향과 때문에 가는 거 아니다.
“은월.”
“응, 아리야.”
“나 향과 때무네 가는 고 아니야.”
“알아.”
……은월의 단호한 대답에 할 말을 잃었다.
응, 그래, 아는구나…….
그나저나 남쪽 땅의 시장이라……. 서쪽 땅의 저잣거리와 비슷하려나?
어찌 되었든, 포포와 란의 유치한 싸움을 보는 것보다 훨씬 더 유익할 거 같았다.
“그럼 갈까, 아리야?”
은월의 미소에 고개를 끄덕였다.
***
은월을 따라 남쪽 땅의 풍경을 지나치며 시장으로 향했다. 그를 따라 조금 걷자, 시장으로 보이는 곳이 눈에 들어왔다.
남쪽 땅의 시장은, 서쪽 땅처럼 눈에 띄게 활력이 넘치지는 않았다. 이곳의 신수들은 더위 때문인지 면사 같은 걸로 머리와 얼굴을 가리고 있는 탓에 그렇게 느껴진 것 같기도 하다.
주위를 둘러보던 내 위로 갑자기 천 같은 것이 덮어졌다. 놀라 위를 올려다보니, 은월이었다.
“너무 눈에 띄니까.”
언제 사 온 건지, 연한 푸른색의 천이 퍽 아름다웠다. 은월을 덮은 천은 연한 흑색의 천이었다.
“이 천은 남쪽 땅에서만 파는 건데, 더위를 피하는 데에도 좋지만, 요즘 남쪽 땅은 흉흉하니까.”
“아, 그래서…….”
“그러니까, 길 잃지 않게 조심해, 아리야.”
날 뭐로 보는 거야?
내가 길이나 잃는 그런 애로 보는 거야?
살짝 기분이 나빠지려고 했을 때, 은월의 입이 열렸다.
“여긴 서쪽 땅보다 더 위험하니까.”
……나, 서쪽 땅에서 길 잃었었지, 참.
으, 은월이 내가 길 잃었던 거 아는 건가……?
아냐, 그럴 리가 없어.
……만약 은월이 알고 있다면 수하가 말한 것일 거다.
“누, 누가 길을 잃오. 걱정 마.”
“저번에 길 잃었었잖아.”
“구, 구건……!”
은월이 먼저 향안 시장 안으로 발을 들였다.
“은, 은월! 가치가!”
그를 놓칠세라 황급히 따라 들어갔다.
수하, 네 이놈……. 다음에 만나기만 해 봐.
시장 안은 북적이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적막함이 돌만큼 신수들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은월이 어느 한 노점 앞에 멈춰 서자 나도 그의 옆에 꼭 붙어 멈춰 섰다. 그러자 은월이 노점 주인에게 손가락으로 좌판에 놓인 물건들을 가리켰다.
은월이 가리킨 것들을 노점 주인이 바로 주머니에 넣고 묶었다. 그중에는 향과도 있었고, 향이 들어간 과자처럼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아이고, 이런 시기에 이렇게나 많이 사주시니, 감사합니다.”
노점 주인이 은월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은월은 그런 주인이 불편한 듯,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얼마지?”
값을 지불한 후 은월이 주머니를 풀더니 향과와 과자들을 내게 내밀었다.
아니, 나 진짜 향과 때문에 따라온 거 아니라니까?
“안 먹을 거야?”
“머거.”
주면 먹지. 게다가 은월이 향과 값으로 지불한 돈, 만만치 않아 보였다. 아까워서라도 내 입속으로 집어넣어야 한다.
향과가 저렇게 비싼 거였구나…….
맛있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
“잘 먹으께, 은월.”
“별말씀을.”
향과를 하나 집어 입에 넣었다.
확실히 현지에서 바로 먹는 거라 그런지, 더 맛있는 것 같았다.
뭐, 향과는 언제 먹어도 맛있지만.
그뿐만 아니라, 향으로 만든 과자들도 상당히 맛있었다.
오물오물 열심히 먹는 내 모습을 보던 은월이 본인도 향과를 하나 집어 입에 넣었다.
“은월, 요기서 대체 뭘 감찰하는 고야?”
“잘 돌아가나 보기도 하고, 때때로 시장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흉흉할 때가 있어. 그럴 땐 최근에 무슨 일이 있었는데, 남쪽 땅에서 감추고 있는 거라, 그걸 캐내는 거지.”
“구렇구나…….”
“시장이나 저잣거리 같은 일반 신수들 분위기까지 감찰하는 곳은 남쪽 땅이 유일해.”
은월의 말에 내포된 뜻을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래, 나래가 일을 많이 못 하는구나…….
“나래가 톤치하기 전 남쪽 땅은 오떘어?”
“나래가 통치하기 전 남쪽 땅?”
“응, 응.”
“음…….”
은월이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남쪽 땅은 한동안 특출난 신수가 태어나지 않아서 그리 활기를 띠지는 않았어.”
“그래써……?”
“그래도.”
은월이 생각을 마친 듯 고개를 들었다.
“그때 남쪽 땅은 이렇지 않았지.”
은월의 말에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은월이 곧이어 바로 입을 열었다.
“그때 남쪽 땅의 주인이 일을 못 한 건 아니었거든. 그 당시 남쪽 땅의 주인은 ‘천강’이라 하는 신수인데, 나래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성실하고 똑똑한 신수였지.”
“천강?”
“나래가 태어나고 강제로 끌려 내려왔지만.”
“억울하게따…….”
그렇게 일을 잘했는데 강제로 끌려 내려왔다니. 지금쯤이면 나래를 보면서 이마를 탁, 치고 있지 않을까…….
하긴, 뭐, 그 당시 남쪽 땅의 신수들이 나래가 그렇게 일을 못 할 줄 알고 그랬겠어?
“그는 상대를 보는 눈이 특출나게 좋았어. 자기 곁에 둬야 할 신수와 두면 안 되는 신수를 칼같이 구분하는 자였어. 지금은 주인 자리에서 물러나 조용히 살고 있지만.”
“그러쿠나…….”
“전대 신수중 유일하게 살아남아 있는 신수야. 대부분 그렇게 물러나는 경우는 없으니까. 특이한 경우지.”
확실히 전대 신수가 살아 있다니, 들어본 적 없는 얘기였다. 바로 옆인 서쪽 땅도 바랑의 형님이 돌아가신 후 바랑이 물려받았다고 그랬으니까.
“그리고 그때 천강의 직속 하인이 노군이었지. 유능한 영감이야. 남쪽 땅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그랬구나…….
나래가 노군을 곁에 두었더라면 저렇게까지 나락으로 떨어지진 않을 텐데…….
뭐, 자기 복을 차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지.
“지금의 남쪽 땅은 매우 위태롭지.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를 만큼.”
반란.
예전에 남쪽 땅에 대해 들었던 것. 곧 반란이 일어날 것이란 것.
그렇기에 은월이 내게 조심하라 그리 이른 거겠지……. 괜히 길 잃었다가 반란에 휘말리면 골치 아프니까.
“안타까운 일이지. 밥 먹듯 출석해서 좀 봐줬는데 말이야.”
그러고 보니 은월은 항상 귀찮아하고 나래의 업무 능력을 혐오하는 수준이었지만, 남쪽 땅에 밥 먹듯이 드나들었다. 그 증거로 나랑 수업할 때 대부분 그는 향과를 소매에 넣고 다녔었으니까.
“은월은, 남쪽 땅이 조아?”
그에게서 남쪽 땅에 대한 애정이 살짝 느껴졌다.
이건 애정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야…….
“나쁘지 않아. 어릴 때, 동쪽 땅에서 방황하다 남쪽 땅으로 흘러 들어온 적이 있었거든.”
듣기 매우 희귀한 은월의 과거사에 귀가 절로 쫑긋, 세워졌다.
그래서, 그래서?
그의 대답을 애타게 기다렸건만, 그는 다음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이러기야?
세상에서 제일 나쁜 짓이 궁금하게 만들어놓고 말 안 하는 거다.
“은월.”
“응?”
“내가 제일 시러하는 게 먼지 알아?”
“아니, 몰라. 뭔데?”
은월이 반달모양으로 눈을 휘며 부드럽게 물었다.
와, 방금 그냥 말할 뻔했어.
“그게 뭐냐묜, 궁금하게 만들어놓고…….”
“만들어놓고?”
은월에게서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자 그가 고개를 돌리며 실소를 터트렸다.
뭘 웃어?
지금 이게 웃겨?
나, 포포를 걸고 자부할 수 있다. 지금의 난 세상에서 가장 진지하다고.
“다음 얘기가 궁금했던 거야?”
은월이 자상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그의 듣기 좋은 목소리에, 자동으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근데 어쩌지, 다음 일들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뭐라고?
내가 방금 잘못 들은 건가?
황당함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은월의 표정은 한 치의 변화도 없었다.
이. 이. 검은 호랑이 녀석이……!
감히 나를 갖고 놀아?
너, 너어, 진짜!
뭐라 하려고 입을 열었던 찰나, 입안에 익숙한 달콤한 향이 퍼졌다.
“농이야.”
“…….”
“그러니까, 그만 표정 풀어, 아리야.”
은월의 오묘한 회색빛 눈동자가 곱게 휘었다. 그의 입가에 보는 이들을 모두 녹여버릴 것 같은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우씨, 또 날 갖고 놀아?
……이번만 봐준다.
저 얼굴을 보고 어떻게 화를 내, 나쁜 놈. 나쁜 호랑이 녀석.
“다음 얘기, 말해조…….”
그래, 어디 한번 말해봐. 들어나 보자. 빨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