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은월과 함께 언덕을 올라오며 상당히 지쳐 있었기에 이제 산책 따윈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애초에 남쪽 땅은 덥고 건조한 터라, 황량한 느낌이 강해서 은월이 말한 전경에는 관심이 없기도 했다.
그러던 중, 은월이 목적지에 도착한 듯, 걸음을 멈추었다.
“전경이 꽤 괜찮지 않아?”
은월이 지친 기색이 역력한 내게 고개를 돌리자, 강한 햇빛 탓에 그의 얼굴 사이로 빛이 번졌다. 안 그래도 잘생긴 얼굴이 더욱 빛나 보였다.
……전경이고 뭐고, 네 얼굴밖에 안 보인다.
라고 말하려는 찰나, 그의 뒤에 펼쳐진 남쪽 땅의 전경이 보였다.
황량한 남쪽 땅의 기후를 보고 그다지 기대하지 않은 것 치고는 매우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동쪽 땅과 서쪽 땅, 그리고 중앙 땅과는 확연하게 느낌이 달라서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다. 황량하지만 탁 트인 광활한 풍경은 기대 이상이었다.
방금까지 포포 때문에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들 정도로 상쾌했다.
“은월.”
그의 이름을 또박또박 불렀다.
“왜?”
그러자 은월이 특유의 미소로 내게 화답했다.
“여기, 자주 와?”
“답답할 때 가끔 와. 속이 뚫리는 기분이 좋아서.”
겉으로 보기에 완벽해 보이는 은월도 답답할 때가 있구나…….
은월은 백령과는 다른 의미로 빈틈없어 보이는 신수였다. 그렇기에 그의 대답이 의외였다.
은월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아직 그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았다. 그렇기에 그의 대답은 나의 궁금증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은워…….”
“싸부, 우리 언제 돌아가?”
은월을 부르기도 전에, 포포가 나의 말을 가로막았다.
이 요망한 여우가 진짜……!
“배고파. 밥 먹자, 밥!”
저게 과연 방금까지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나래의 방에서 슬쩍해 온 자기 얼굴만 한 과자를 먹던 여우가 맞는 것인가?
내 결론은 나왔다.
“뽀뽀, 돼지.”
쟨 여우가 아니야, 여우의 귀와 꼬리를 가진 돼지일 뿐이지.
“돼지 아니야!”
“돼지야! 그만 머거!”
“돼지는 아무거나 주워 먹잖아. 난 그렇지는 않아!”
이건 돼지 입장도 들어봐야 한다.
그리고 아무거나 주워 먹는 거 너 맞아, 뽀뽀야.
“그럼 이제 갈까? 지금쯤이면 준비도 다 되었을 거 같으니까.”
옥신각신하는 나와 포포를 보던 은월이 걸음을 돌렸다. 나와 포포도 그를 따라, 노군의 저택으로 향했다.
“오셨군요, 은월 님.”
“아리 님, 어떠셨나요?”
은월을 따라 노군의 저택으로 들어오자, 준비를 마친 듯한 노군과 여노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할아버지! 나 이제 진짜 괜찮다니…….”
어딘가에서 작은 너구리 신수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튀어나왔다. 남자아이가 달려오자, 노군이 어디서, 언제 가져왔을지 모를 지팡이로 남자아이의 머리를 콩, 내리쳤다.
“아야…….”
“욘석아, 지금은 동쪽 땅에 가면 안 되요. 그리고 내 말 했지 않았더냐. 네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그렇다고 왜 머리를……. 어? 할아버지, 이 자들은 누구예요?”
남자아이의 말에, 노군이 한 번 더 그의 머리를 콩, 쥐어박았다.
“알 거 없다, 이놈아. 제발 사고 치지 말고 집구석에 좀 박혀 있으면 덧나더냐?”
“어? 너는……?”
남자아이가 노군의 잔소리는 한 쪽 귀로 흘리더니, 나를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그러고 보니 쟤, 뭔가 낯이 익는데…….
분명 낯이 익다. 어디서 봤더라…….
“그때 수하 님 옆에 있던 그 예쁘고 작은 신수잖아?”
저 너구리가 뭐라는 거야?
작은놈이 나보고 작다고 하니 그것만큼 기분이 나쁜 게 없었다.
가만, 수하 옆에?
생각났다! 그때 그 다친 너구리!
내 구슬을 훔쳐 가려고 했지만, 길 잘못 들어서 서쪽 땅에서 헛짓거리하다가 다친, 그 너구리잖아……?
이름이……. 아, 맞아. 란이었어, 란.
어디서 많이 본 거 같다 싶더니, 그때 그 너구리였을 줄이야.
그의 정체에 대해 알고 놀란 나와는 달리 노군은 다른 의미로 상당히 놀란 나머지 기겁하고 있었다.
그가 지팡이를 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당장이라도 란을 내리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애써 진정을 되찾은 건지, 노군이 심호흡을 몇 번 하더니. 란을 향해 입을 열었다.
“란, 이분은 네가 그렇게 막말을 할 분이 아니란…….”
“옆에 있는 얘는 누구야? 저번엔 수하 님이었는데, 수하 님은 어디 가고? 웬 검은 호랑이?”
란이 내 옆에 서 있는 은월을 가리키며 말하니, 노군이 기겁을 넘어서 하얗게 질렸다. 결국 무언가가 터진 듯한 노군이 지팡이로 란의 머리를 세게 내리쳤다.
“욘석아!!!”
란의 머리에 큰 혹이 하나 생겨버렸다.
노군의 호통에 란이 억울하다는 듯이 눈물 방을 매단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그런 란을 노군이 어딘가로 끌고 갔다.
“아리야, 너 쟤 알아?”
“어? 그, 그냥.”
은월은 그러거나 말거나, 관심조차 없었지만.
노군과 란이 돌아오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돌아온 그는 나와 은월 앞에 정중하게 절을 하며 바닥에 얼굴을 박았다.
그의 머리에 있는 동그란 혹이 눈에 띄었다.
“큰 실례를 범했습니다요, 은월 님, 아리 님. 제가 귀하신 분들을 몰라뵈옵고…….”
란은 삐질삐질 식은땀을 흘리며 은월과 나의 눈치를 살폈다.
“수하랑 서쪽 땅에 갔을 때 만난 건가.”
은월은 란이 자신을 손가락질하며 무례하게 군 것은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란과 나의 사이를 궁금해할 뿐이었다.
란이 무어라 웅얼웅얼 계속 말했지만, 은월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배고파.”
포포의 딴엔 작은 소리였겠지만, 모두가 포포의 배고프다는 소릴 들을 수 있을 만큼 컸다.
“아, 안 그래도 출출하시지 않을까 싶어, 다과를 준비해 놓았습니다. 이쪽으로 드시지요.”
노군의 안내를 따라 노군의 저택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그곳엔 정원과 뜰이 있는, 독채 형식의 손님방이 있었다.
“이곳이 은월 님께서 이번에 거처하실 곳입니다. 안에 방이 여러 개 마련되어 있으니, 네 분께서 불편함 없이 지내실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신경 써주니 고마워, 노군.”
“고마어!”
은월을 따라 그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정원에는 탁자들이 놓여 있었고, 그곳엔 준비된 다과와 다구가 있었다.
옹기종기 모여 앉아 허기를 채웠다.
개중 향과와 버금갈 만큼 맛있는 다과들도 존재했다.
남쪽 땅이 원래 다과가 발전한 건가…….
남쪽 땅의 대부분 다과는 향과와 비슷한 맛이 났다. 아마 ‘향’이라는 게 들어간 거겠지?
앉아서 다과를 즐기는 내게 누군가가 쭈뼛쭈뼛 다가오기 시작했다.
“아, 아리 님…….”
갑자기 란이 내게 존칭을 쓰며 머리를 조아렸다.
안 어울리게 왜 이래……? 내가 알던 란이 아닌 거 같은데.
“저, 전에 그 일 아무한테도 말 안 하셨죠?”
“으응?”
“왜, 제가 감히 동쪽 땅의 작은 주인님이신 아리 님이 가지고 계신 구슬을 훔치려고 돌아다녔다던가, 길을 잘못 찾아서 서쪽 땅 가서 이상한 구슬 훔쳤다가 다쳤다던가, 그래서 수하 님과 아리 님이 저를 도와주셨다던가, 그런 거 말입니다요.”
“…….”
아니, 난 말한 적 없는데, 방금 네가 네 입으로 다 말했는데?
저택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싸해졌다.
“어디서 다쳤나 했더니……. 그런 짓을 하고 다닌 게냐!”
“하, 할아버지!”
노군이 다시 지팡이를 들었다. 아까 지팡이 맛을 본 란의 몸이 반사적으로 노군에게서 멀어졌다.
“동쪽 땅에 조언을 구하러 간다는 말은 거짓이었더냐. 내, 이놈을 그냥!”
“하, 할아버지, 일단 그, 그거 내려놓으시고…….”
“이놈이, 동쪽 땅에 가서 기껏 한다는 게 좀도둑이었더냐!”
“할아버지, 동쪽 땅엔 발도 못 붙여 봤습니다요. 진짜예요!”
……자랑이다.
“그렇게 된 거였군.”
은월이 이제야 나와 란의 사이가 납득이 간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 그, 그건 그렇고, 은월 님과 아리 님이 왜 이곳에 있는 겁니까?”
란이 말을 돌리려 한 건지, 아니면 정말로 순수하게 궁금했던 건지, 화제를 돌리려 했지만 이미 노할 대로 노한 노군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노군을 중재하기로 했다.
“노군, 지난 일이니까, 갠차나.”
구슬을 빼앗긴 것도 아니고, 그에게서 남쪽 땅의 상황을 들을 수도 있었으니까.
노군이 나의 말에 바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리 님. 제가 교육을 똑바로 못해서…….”
“아니야, 갠차나. 란, 용감해써.”
“그리 말씀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리 님께선 정말 올바른 지도자의 기질을 가지고 계시는군요.”
“……응?”
……내가?
뜬금없는 노군의 칭찬에 멀뚱멀뚱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가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래 님이 아리 님의 반만 닮았어도, 이 지경까지 오시진 않았을 텐데 말이죠…….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의 어깨가 무거워 보였다. 은월이 그런 그를 무심히 내려다보았다. 은월의 시선을 느낀 듯한 노군이 은월을 향해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은월 님껜 정말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거니깐요. 다만, 그렇기에 나래 님이 은월 님에게 과하게 기대고 계신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노군, 난 그저 다른 땅과 마찬가지로 영토의 주인 된 자를 관찰하고 감사하는 일을 할 뿐이야.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건 나래일 뿐인 거고.”
은월의 대답에 노군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할 따름입니다.”
“아직 과거에 머물러 있나 보군.”
“예?”
은월의 말에 노군이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마치 무언가를 들켜서 크게 당황한 듯이.
“더 이상 넌 나래의 궁 하인도 아닌데, 네가 왜 내게 사과를 하지?”
은월의 물음에 노군이 할 말을 잃었다.
“그만 짐을 내려놓는 게 어때, 노군.”
“하지만…….”
“제게 바른말을 해주는 자를 쫓아내는 건, 결국 그 정도 그릇이라는 뜻이지.”
“은월 님…….”
“애초에 그 정도 그릇이니, 제 앞길조차 못 보는 거고.”
“무슨……?”
노군의 물음에 은월은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이제야 노군의 저택이 왜 나래의 궁 근처에 있는 건지, 노군이 왜 그런 눈으로 나를 보고 그런 말을 한 것인지 이해가 갔다.
노군은, 바른말을 하다가 나래에게 쫓겨난 거구나…….
그래서 그의 눈동자에 담긴 남쪽 땅에 대한 걱정과 근심이 이해가 되었다.
“늙은이가 말이 길어졌군요. 그럼, 편히 쉬십시오. 란, 이만 가자.”
“예? 할아버지, 전 아직 아리 님께 물어볼 것이…….”
“잔말 말고 따라 오너라.”
노군이 다시 한번 지팡이를 들었다.
“예, 할아버지. 안 그래도 지금 갈 생각이었습니다요.”
란이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란.”
가려는 란을 붙들어 세운 건 나였다.
“예, 아리 님.”
“다음에 또 보자!”
“알겠습니다요! 내일 오겠습니다요!”
……?
아니, 내일 바로 오란 말은 아니었는데…….
신나서 뛰어가는 란을 보며 차마 부정할 수는 없었기에,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아무튼 노군과 란이 사라지고, 거처에는 나와 은월, 포포와 여노만이 남았다.
“아리 님, 서쪽 땅은 어떠셨어요?”
여노가 내 옆에 앉으며 서쪽 땅에 대해 물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때 여노가 없었구나. 다른 시녀가 나와 함께 갔었지…….
“음……. 재미써써.”
“정말요?”
“근데, 똥깨 때문에 쪼금 힘드러써.”
아직도 치가 떨린다. 나보고 감히 묵직하다고 하다니, 똥개 주제에.
그래도 성장했다는 건 기쁘지만.
“아, 이랑 님도 보셨겠네요? 어떠셨나요?”
“이랑운……. 마니 달라져써, 전보다.”
“하긴, 그때 이후로 시간이 꽤 지났으니깐요. 나래 님도 그렇고요.”
이랑과 나래, 둘 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그들보다 난 어째 성장이 더딘 것 같았다.
나는 원래 신수가 아니라서 그런 걸까…….
마음속 깊은 곳, 한편에 숨겨놓고 외면하던 걱정이 밀려왔다.
노군은 내게 좋은 지도자가 될 것이라 하였지만 이랑, 나래와 나는 매우 다르니까.
그렇기에 노군이 나래와 나를 비교하였을 때,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았다. 내게 기분 나쁠 만한 말은 하나도 없었고, 오히려 칭찬 일색이었지만, 마음만은 복잡해지기만 했다.
“아리 님, 표정이 왜 그렇게 울상이에요…….”
여노가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아, 아니야…….”
아무에게도 내 속마음을 말할 수 없었다. 나 혼자서 안고 가야 할 문제. 그렇기에 마음 한편 깊숙한 곳에 묻어두었으니까.
“아리, 배고파서 그런 거 아니야? 자, 이거 먹어.”
포포가 입 안 가득 오물거리며 손에 들고 있던 다과를 내게 넘겼다.
“고마어, 뽀뽀…….”
응?
근데 이 다과, 왜 모양이 이렇지?
마치 누가 한 입 베어 먹은 거 같은…….
“내가 한 번 맛봤는데, 내 취향은 아니더라고. 헤헤.”
포포의 얼굴을 잡고 과자를 냅다 포포 입속으로 집어넣었다.
“죽눈다, 진짜.”
“아이야, 잘모해써.”
포포가 터질 듯한 과자를 겨우겨우 넘기며 내게 사과를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