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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님의 딸이 되었습니다 (45)화 (45/167)

45.

환영 인사와는 달리 나래의 표정은 차갑기 그지없었지만, 나는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밝게 미소 지었다.

그래, 참자, 아리야. 쟨 어린 애야, 어린 애.

아직 덜 배운 병아리라고 생각하자…….

“환영해줘서 고마워.”

그녀에게 환한 미소와 함께 살갑게 대답했지만, 그녀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은월에게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저 병아리가 진짜!

아니야, 아, 참자. 참아.

“은월, 당분간 내 궁에 머무르는 거지?”

나래가 눈을 반짝이며 은월의 오른팔을 붙잡았다. 은월이 자유로운 왼팔로 나래의 손을 떨어트리며 업무들로 보이는 두루마리들이 놓인 탁자로 향했다.

은월이 탁자에 기댄 채 두루마리들을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당분간 남쪽 땅에 머무를 예정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네 궁에만 머무를 생각은 아니야.”

“뭐? 그럼?”

반짝이던 나래의 눈이 한순간에 실망감으로 물들었다.

“궁 밖에서 지낼 예정인데.”

“말도 안 돼, 왜? 내 궁에는 은월이 지내기에 적당한 별채가 있어. 굳이 다른 곳에서 지낼 필요가…….”

나래가 숨 쉴 틈도 없이 쏘아붙였지만 은월은 귀찮다는 듯 그녀의 말에 답하지 않은 채 그녀를 무시했다.

“은월? 대답 좀 해봐. 이유를 설명해줘, 응?”

“너한테 굳이 설명해야 할 의무는 없는데.”

“…….”

“그리고, 언제부터 내 거처에 관해서 네가 왈가왈부할 수 있었지?”

“그, 그건…….”

순식간에 나래의 얼굴에는 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나래가 잘근잘근 입술을 깨물며 바닥만 내려다보자, 은월이 한숨을 쉬며 두루마리로 나래의 머리를 가볍게 탁, 쳤다.

“쓸데없는 곳에 신경 쓰지 말고 밀린 업무나 시작해. 그리고 하인들 시켜서 이번 남쪽 땅 장부들 내게 넘기고.”

“……알았어.”

“보고서는 어디 있어?”

“별채에 놔뒀어. 자타에게 가져오라 명할게.”

“그럴 필요 없어. 내가 가지.”

은월이 두루마리를 원래 자리에 되돌려 놓은 뒤, 탁자에 기댔던 몸을 일으켰다.

은월이 여기서 볼일은 끝났다는 듯, 걸음을 문 쪽으로 향했다.

나래가 무어라 은월에게 말하려 입을 뗐지만 그가 나갈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저희도 은월 님을 따라갈까요, 아리 님?”

“응.”

문을 열고 나가려는 순간, 누군가가 나의 손목을 잡았다.

나래였다.

“잠깐 나 좀 봐.”

그녀의 말에 문을 열고 나가려던 여노가 멈칫했다.

“넌 나가고.”

나래의 명령에 여노가 불안한 눈빛을 머금은 채로 방을 나갔다. 그녀의 눈빛은 방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내 다리에 꼭 붙어 있던 포포를 본 나래가 포포에게 손짓을 했다.

“너도 나가.”

“싫어.”

“나가라니까?”

“싫다니까.”

포포가 그녀에게 반항을 하자, 그녀가 포포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하지만 포포가 누구인가, 그런 건 전혀 무서워하지 않았다.

나래야, 미안한데 얜 백령이랑 은월 말만 들어.

“더러운 하급 여우 주제에, 감히 내 말을 안 들어?”

“뭐?”

“하찮은 하급 여우면 하급 여우답게 기어. 괜히 내 말에 토 달지 말고.”

말이 너무 심한데.

더 이상 나래의 막말을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그렇기에 나보다 조금 더 큰 그녀를 똑바로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최대한 또박또박 말하기 위해 입에 힘을 잔뜩 주었다.

“뽀뽀한테 그러지 마. 너한테 그런 말을 들을 이유는 없어.”

“네가 뭔데 나한테 명령해?”

그녀의 너무나도 뻔뻔한 태도에 놀라 자동으로 입에 주었던 힘이 풀렸다.

얜 자기가 하는 말에 대한 자각이 없는 건가?

“머?”

“은월이 감싸주니까 눈에 뵈는 게 없나 보지?”

여기서 은월이 왜 튀어나와? 진짜 또라이도 이런 또라이가 없다.

더 이상 상대할 가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나래에게서 몸을 돌리고 나가려 문을 잡았다.

“너, 지금 나 무시…….”

쾅.

문을 일부러 세게 닫았다.

쟨 몸뚱어리는 커졌는데 왜 정신연령은 그대로인 거야?

유치하다, 유치해.

혀를 차며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여노와 함께 은월이 있을 별채로 향했다.

“아리 님, 나래 님이 뭐라고 하셨나요? 큰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요.”

여노가 조심스럽게 내게 물었다.

“별로 그런 거 아니…….”

“그랬어! 막 아리한테 신경질 내고 시비 걸고 그랬어!”

아니, 이런 눈치 없는 여우 같으니라고.

어이를 상실한 채로 포포를 내려다보았지만, 포포의 뚫린 입은 막힐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엄청 재수 없던데. 쟤 뭐야? 막 뭐라고 하는 모습이 닭 같았어. 쟤 닭이야?”

“풉.”

나래, 병아리에서 닭 되다…….

포포의 말에 여노가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참지 못한 채 작은 웃음을 흘렸다.

“큼큼. 나래 님은 봉황이에요, 포포.”

“……닭 아니었어?”

여노가 조심스레 나래의 정체에 대해 말하자, 포포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곤 생각에 잠겼다. 저 작은 머리로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양새가 꽤나 웃겼다.

저 작은 머리로도 생각이란 걸 하긴 하는구나…….

포포가 진지하게 무엇을 생각하는 걸 처음 보는 나로서는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게 그렇게 믿기지 않니, 뽀뽀야……?

“포포, 진짜랍니다.”

“……말도 안 돼. 그게?”

여노는 예의가 발라서인지, 포포에게도 예의를 갖춰 대했다. 여느 붉은 머리 닭과는 확연히 차이가 났다.

어휴, 걘 언제 클까.

나래의 나를 향한 적대감은 날이 가면 갈수록 커지는 것 같았다.

대체 내가 뭐 했다고 못되게 군담.

“왜 이렇게 늦었어?”

별채에 도착한 것 같지는 않은데, 두루마리 하나를 손에 든 은월이 천천히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아, 죄송해요, 은월 님. 그게, 실은…….”

“내가 늦장 부려써, 은월.”

굳이 나래에 관해 말하고 싶지 않아서 여노의 말을 가로챘다.

그런 어린 애 때문에 구태여 시간과 감정을 소모할 필요는 없지, 암암.

“싸부. 그게 있잖아, 그 빨간 닭이…… 읍읍.”

눈치 없는 포포가 뭐라 떠들어대기 전에 먼저 입을 틀어막았다.

다행히 은월은 포포의 말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고, 은월을 따라 궁 밖으로 향했다.

“은월.”

“응?”

“우리 오디 가?”

“수업하러.”

“응?”

수업? 무슨 수업?

내가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으로 은월을 바라보자, 그가 특유의 미소와 함께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에게 가면 배울 점이 많을 거야.”

은월은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설명해주지 않았다.

얼마 후 은월이 도착한 곳은 나래의 궁에서 별로 떨어지지 않은, 꽤 커 보이는 저택이었다. 호화롭게 단장된 것은 아니었지만, 저택에서 상당한 위엄이 느껴졌다.

이런 저택엔 어떤 신수가 살고 있을까?

똑똑.

은월이 대문을 두 번 두드리자, 문이 천천히 열렸다.

“은월 님, 오셨군요. 온다는 기별을 방금 막 전해 받아, 맞이할 준비를 충분히 못 했습니다만…….”

저택 안에는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내가 여태까지 본 신수 중 가장 연로한 남자 신수가 서 있었다.

은월에게 인사말을 건네던 연로한 신수는 나를 보더니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이분은, 혹시…….”

날 보고 크게 당황한 신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은월을 바라보았다. 은월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것으로 그에게 대답을 들은 것 같은 신수는 내게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리 님. 이런 누추한 곳에 발걸음을 하시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응? 이게 누추하다고……?

전혀 그렇지 않아 보이는데…….

뭐, 신수마다 관점이 다른 거라 생각하고 넘어가자.

“저는 이 저택의 주인, 노군이라 하옵니다.”

“아, 아리라고, 함다…….”

“예…?”

나의 소개에 노군이 당황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올리고 눈을 깜빡였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세월의 흔적에 나도 모르게 존댓말이 나온 탓인 것 같다.

“아, 아리예…, 아니, 아리야.”

“예, 아리 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옵니다.”

다시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노군의 귀와 꼬리가 눈에 들어왔다.

너, 너구리……?

“노군 영감, 당분간 여기 묵었으면 하는데.”

은월이 노군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은월의 갑작스러운 요구에도 노군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로 은월에게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당장 하인들을 시켜 거처를 마련하겠습니다.”

“아, 저도 도울게요. 전 아리 님의 시녀인 여노라고 합니다. 편하게 불러주세요, 노군 님.”

“그럼 부탁드리지요. 거처가 마련되는 동안 은월 님과 아리 님, 그리고…….”

노군이 포포를 보며 난감해했다.

“이분은……?”

“뽀뽀야. 내 칭구.”

내 대답에 그가 인자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 뽀뽀 님이군요.”

“뽀뽀가 아니라, 포포야!”

포포가 씩씩거리며 소리쳤다.

포포나, 뽀뽀나, 거기서 거기고만.

“아, 아무튼 거처가 마련될 때까지 잠시만 기다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터이니, 근처를 잠시 산책하시는 건 어떠신지…….”

“그렇게 하지.”

“그럼, 저는 이만 거처를 마련하러……. 여노 님은 저를 따라와 주시겠습니까?”

노군의 부탁에 여노가 고개를 끄덕이고 그의 뒤를 따랐다. 노군이 뒤로 돌아서자, 그의 동그란 꼬리가 더욱 돋보였다.

저런 비슷한 너구리라 함은,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거 같은데…….

어디더라……?

어디였지……?

“왜 그래, 아리야?”

“응? 아, 아무거또 아니야.”

이상하다, 정말 어디선가 본 적 있는 거 같은데…….

“갈까, 아리야?”

“응? 어딜?”

“여기 근처 전경이 나쁘지 않아.”

“조아.”

은월을 따라 대문 밖으로 나섰다. 대문 밖을 나서자, 강한 햇살 때문에 눈이 부셨다.

남쪽 땅은 동쪽 땅보다 건조하고 더웠기에, 얼마 걷지도 않았음에도 땀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러고 보니 여노가 얇은 비단으로 지어진 옷을 입힌 이유가 있었어…….

궁에 있을 때와, 노군의 저택에 있을 때와는 달리, 남쪽 땅의 날씨가 야속하게 느껴졌다.

더운 건 딱 질색이야…….

물론. 난 추운 것도 싫다. 동쪽 땅이랑 서쪽 땅, 그리고 중앙 땅은 날씨가 조금은 달라도 이렇게 크게 차이 나지는 않았던 터라, 금방 적응됐지만 남쪽 땅은 그렇지 않았다.

은월이 그런 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힘들어?”

“아, 아니. 별루.”

옆에서 헥헥, 대며 걷던 포포가 인상을 팍 찌푸렸다.

“싸부, 여긴 왜 이렇게 더워?”

“그게 남쪽 땅의 특징이니까.”

“이 땅, 별로네. 헥헥.”

“그렇지만도 않아. 남쪽 땅이기에 자라날 수 있는 열매도, 특산물도 있으니까. 예를 들면 향과라던가.”

“그 맛있는 사탕? 그러고 보니 싸부, 그건 왜 남쪽 땅에서만 만들 수 있는 거야?”

포포가 꼬리를 흔들며 은월에게 물었다. 포포가 그렇게 묻고 보니, 나도 살짝 궁금해졌다.

“향과에 들어가는 중요한 재료인 ‘향’이 남쪽 땅의 기후에서만 재배되니까.”

“구런 거구나…….”

“내가 향에 대해서는 저번에 한 번 말해준 거 같은데, 기억 안 나, 아리야?”

“응? 향?”

은월의 물음에 천천히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그러고 보니 일전에 은월에게 향에 대해 들었던 적이 있었던 것 같긴 하다. 향과에 들어가는 재료 중 하나지만, 그것을 가공하면 위험한 것이 되어 버린다고.

“기억났나 보네.”

“응, 가공하면 위험하대써.”

“그러니까 이 땅에선 아무거나 주워 먹지 마, 너희 둘 다. 상당히 골치 아파지니까.”

“아라써, 걱정 마.”

“응응, 싸부.”

애초에 난 낯선 자가 주는 건 입에도 대지 않는다. 문제는 포포지.

포포를 힐끗, 바라보았다. 지금도 어디서 가져온 건지 모를 과자를 신나게 까먹고 있었다.

“뽀뽀, 너 구거 어디서 나써?”

“헤헤? 이거?”

……아까 나래의 방에서 본 적 있는 거 같은데.

에이, 설마. 아니겠지.

세상에 그 정도로 바보인 놈이 어디 있겠어? 진짜 바보 천치도 아니고.

“그 못생긴 닭 방에 있길래 하나 집어왔어.”

“……나래 말하는 고야?”

“이름이 나래였나? 그랬던 거 같기도 하고.”

그 바보 천치가 어디 있나 했더니 바로 내 눈앞에 있었다.

“……내가 몬 살아, 징짜!”

“왜, 왜……?”

“아무거나 주어 먹으면 어떠케!”

“과자가 아무거나는 아니잖아……?”

……이 바보를 어찌하면 좋을까.

너무나도 순수한 포포의 대답에 현기증이 일어 이마를 탁, 쳤다.

대체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할까…….

과자를 먹으며 행복해 보이는 포포를 보고 너무나도 막막해졌다. 그렇기에 그에게 설명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래, 바보는 감기도 안 걸린다잖아. 이상한 거 먹어도 포포라면 다 소화할 수 있을 거야. 그럼, 그럼.

그렇게 생각하려는데, 일전에 앓아누웠던 포포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끙끙거릴 수밖에 없었다.

“뽀뽀, 앞으로는 나한테 허락 맡고 머거.”

“뭐를?”

“네 입으로 들어가는 고라면 몽땅!”

“뭐어?”

결국, 포포의 입 안에 들어가는 건 당분간 내가 관리하기로 했다.

“그, 그런 게 어딨어?”

“여기써. 아무튼 그러케 알아.”

이 멍청한 여우 때문에 내가 뭔 고생이야? 어휴, 내 팔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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