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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님의 딸이 되었습니다 (44)화 (44/167)

44.

백령의 집무실 안. 그곳엔 나와 은월, 그리고 포포가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자하는 양손을 들고 무릎을 꿇은 채, 집무실 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손, 점점 내려가는데?”

은월이 차를 마시며 말했다. 그러자, 자하가 양손을 번쩍 들었다.

“그럴 리가요, 은월 님…….”

“반성은 좀 하고 있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저, 자하, 제 잘못을 인지하고 사무치게 반성하는 중입니다…….”

“그렇다는데, 아리야?”

은월이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를 흘렸다.

“이만 용서해주는 게 어때?”

자하의 반짝이는 눈망울이 날 향했다.

흥, 어림도 없지.

고개를 격하게 저었다.

“안대.”

“들었지? 좀 더 고생해.”

“아, 아리 님, 아리 님……?”

“흥.”

자하가 절박하게 나를 불렀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자하에게서 등을 돌린 채 입을 열었다.

“짜하.”

“네, 네! 아리 님!”

“손, 좀좀 내료간다.”

“그, 그럴 리가요.”

자하가 울상을 지으며 다시 양손을 번쩍 들었다. 그의 귀가 축 처졌지만 포포를 제외하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포포는 그런 자하가 안타까운지, 연민의 눈빛을 보내며 혀를 끌끌 찼다.

“쯧쯧, ……바보.”

물론, 그렇다고 그를 옹호하는 건 아니었다.

“곧 출발할 시간이군.”

백령이 읽고 있던 두루마리를 옆으로 옮기며 말했다. 그의 말에 은월이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남쪽 땅에 도착하면 바로 서찰을 보낼게.”

“기다리지.”

백령이 무덤덤하게 답했다. 백령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 옆으로 와, 앉았다.

백령이 나와 눈을 마주했다. 그의 푸른 눈에는 처음 보는 오묘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걱정하는 건가, 백령.”

“부정은 못 하겠군.”

“하긴, 남쪽 땅은 지금 많이 혼란스러우니까.”

“…….”

“어디에 있어도 위험하긴 매한가지지만.”

백령이 내게서 시선을 거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월도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노를 붙여주지.”

“여노를? 바쁜 일은 마무리 됐나 보네.”

“어느 정도는.”

“여노라면 나도 환영이지. 유능하고 똑똑한 신수니까.”

여노? 오랜만에 만날 수 있는 건가?

여노를 못 만난 지 벌써 몇 달은 된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게, 은월이 궁에 온 뒤로 여노는 항상 바빴고 나를 돌봐주는 시녀도 매번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 후 여노를 만난 건 끽해야 두어 번 궁에서 스치는 정도였다.

여노라니, 난 좋아.

“배, 백령 님, 저는요?”

자하가 한쪽 손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백령을 불렀다. 그의 귀가 쫑긋, 세워졌다.

눈을 반짝이며 물어보는 자하를 보던 백령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자하.”

“네, 백령 님!”

“손이나 똑바로 들지.”

“네…….”

자하가 조용히 자신을 가리키느라 내렸던 한쪽 손을 다시 들었다.

“여노가 도착하면 바로 출발 준비를 하지.”

백령의 말에 은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

몇 시간 후, 여노가 도착했다. 여노를 기다리다 지친 나는 깜빡 잠이 들었었지만, 어찌 되었든 출발 준비를 마친 것 같았다.

뭐, 애초에 나는 준비랄 것도 없지만.

어느새 여노가 밝은 미소와 함께 내 옆으로 다가왔다.

“여너, 오랜망이야!”

“저도 너무 반가워요, 아리 님. 아리 님이 너무 보고 싶었어요.”

여노가 나를 끌어안았다. 그녀가 나를 들어 올리자, 시녀로 보이는 신수가 여노에게 면사포처럼 보이는 것을 건네주었다.

“아리 님. 남쪽 땅에 도착할 때까지만 이것으로 가리고 있어도 될까요?”

“왜애?”

“남쪽 땅으로 가는 길이 조금은 험난하거든요.”

“갠찬은데…….”

“아리 님이 봐서 좋을 풍경은 아니라서요.”

조금 답답할 것 같지만, 여노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여노의 말에는 다 이유가 있으리라.

내 머리 위로 푸른 면사포가 씌워졌다. 그 안으로 포포도 슉, 하고 들어왔다. 시야가 가려져서 어둠 속이라 답답했지만, 포포가 옆에 있어서인지 무섭거나 하진 않았다.

“죄송해요, 아리 님. 답답하셔도 잠시만 참아 주실 수 있을까요?”

“우웅, 알아써.”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일찍 도착하도록 할 테니깐요.”

여노가 그 말을 끝으로 어딘가로 향했다. 이윽고 여노가 청마 위로 올라탄 건지, 어딘가에 앉았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빠른 속도로 이동했다.

“우왓!”

“뽀뽀, 조심해.”

빠른 속도에 놀란 포포가 앞으로 쏠릴 뻔해서 그의 꼬리를 꽉 잡았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여노가 몸을 실었던 청마에서 내린 듯했다. 그리고 곧 어두웠던 시야가 한순간에 밝은 빛으로 흐려졌다. 눈살을 찌푸리며 초점을 잡았다.

“도착한 고야?”

“네, 아리 님.”

여노가 안고 있던 나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내 눈앞에는 커다란 궁이 있었다.

타오를 듯 붉은 궁은, 장엄했으며 외관만 봐도 굳이 누구의 궁인지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이건 누가 봐도 나래의 궁이 아닌가.

“여기가 남쪽 땅의 중심, 나래 님이 계신 궁이랍니다.”

“벌써부터 귀찮네.”

여노의 설명에 은월이 진저리를 쳤다. 그가 남쪽 땅의 궁 앞에 서자,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궁 안에 있는 하인들로 보이는 이들이 모두 고개를 숙여 은월의 방문을 환영하고 있었다.

“은월 님, 오셨습니까. 먼 걸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래, 자타. 나를 찾았다고 들었는데.”

“나래 님이 계신 곳은 이쪽……, 저분은…?”

자타라는 하인이 말을 하다 멈칫하더니, 내게 시선이 닿았다.

“동쪽 땅의 작은 주인, 아리다.”

“아, 아리 님이……?”

자타가 당황스러워하더니, 고개를 숙였다. 그를 따라 다른 하인들도 내게 고개를 숙였다.

“동쪽 땅의 작은 주인, 아리 님을 뵙습니다.”

모두가 내게 고개 숙여 예를 갖췄다. 서쪽 땅과는 다른 느낌에, 신기하게 그들을 바라보았다. 곧이어 그들이 고개를 다시 올리고, 자타가 내게 다가왔다.

“저는 나래 님의 직속 하인인, 자타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리 님.”

“으응, 나도 잘 부탁해.”

자타의 인사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래 님이 반가워하시겠군요. 은월 님, 나래 님이 애틋하게 기다리십니다. 이쪽으로 따라오시지요.”

자타가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우리 모두 그를 따라 천천히 나래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나래가 누구야?”

포포가 총총, 따라오며 귓속말 아닌 귓속말로 내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뽀뽀는 나래를 한 번도 본 적이 없구나.

“나래는……, 움…….”

뭐라 설명해야 하지?

나도 나래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은지라, 포포에게 설명할 수 있는 게 그렇게 많지 않았다. 게다가 바로 앞에 그녀의 직속 하인이 있지 않은가.

하지만 눈치라고는 선택적으로 밥 말아 먹은 포포의 눈에 그는 보이지 않았나 보다.

“이름만 들으면 왠지 모르겠지만 고집 쎈 녀석일 거 같아.”

이번에도 귓속말 아닌 귓속말로 내게 속삭였다.

뽀뽀야, 다 들려…….

“하하, 저희 나래 님이 조금 고집이 세시기는 하죠. 나래 님은 이 궁의 주인이자, 남쪽 땅의 ‘현’ 주인이랍니다.”

자타가 털털한 웃음과 함께 포포의 속삭임에 답했다. 그러자 포포가 적잖게 당황하며 내 뒤로 숨었다.

“엇, 이게 드, 들리나…?”

그렇게 포포는 당연한 사실을 이제야 깨달은 듯해 보였다.

“은월 님, 이번에는 꽤 오래 잔류하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러시게 된 연유가…….”

“그게 중요한가?”

은월이 특유의 미소와 함께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자타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희로선 감사할 따름이죠. 은월 님이 남쪽 땅을 굽어 살펴주시니, 나래 님의 불안감도 사라지실 거로 생각합니다.”

“글쎄……, 어떻게 될진 아무도 모르지.”

“그렇죠,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것이 현 남쪽 땅의 상황이니깐요.”

자타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 뜻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저 위태로워 보이는 이 땅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며칠 동안 잔류하시는 거라면, 궁에서 머무르시겠습니까?”

“사양하지. 밤낮 안 가리고 나래에게 시달리고 싶진 않아서.”

“아쉽군요. 나래 님은 은월 님이 오래 머무르신다 하여 별채를 단장해 놓으셨는데.”

“어느 정도 관광도 할 목적이라서. 아리도 있으니까.”

“아, 그러시군요.”

자타의 눈빛이 일시적으로 나를 향하는 것 같았다.

뭐지? 잘못 본 건가? 눈빛이 조금, 조금……, 이상했던 거 같은데.

찝찝하지만 기분 탓이려니, 하고 넘겼다.

“그나저나 아리 님은 정말 대단하시군요. 구슬을 하사받은 것만으로도 대단하신데, 그 힘에 대해 가르치는 스승이 은월 님이라니…….”

자타가 감탄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이거 너무 사기인 것 아닙니까?”

“별로. 그릇이 돼야 가르침을 받을 수도 있으니까.”

“나래 님의 부탁은 거절하셨지 않습니까.”

자타의 말에 은월이 자리에 멈춰 섰다. 그제야 자타는 정신을 차린 것인지, 은월에게 고개를 숙였다.

“자타.”

“죄송합니다, 은월 님.”

“오늘따라 쓸데없는 말이 많네.”

“조심하겠습니다, 은월 님. 경솔했습니다.”

“그게 그렇게 불만인가?”

은월이 차갑게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신비로운 회색빛 눈동자에선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 눈동자가 자타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닙니다, 은월 님.”

“당연히 아니겠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게 현 남쪽 땅이니까.”

은월이 뒷말을 강조했다. 그러자 자타는 아무런 말도 못 한 채 고개를 들지 못한 채로 자리에 굳었다.

나는 그보다 훨씬 작은 키를 가지고 있기에, 고개를 숙인 그의 표정이 얼추 보였다.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는 굳어 있었다.

“나래, 기다릴 텐데?”

은월의 말에 정신을 차린 자타가 가까스로 다시 발을 움직였다. 묘한 긴장감과 함께 나래가 있을 것으로 보이는 문 앞에 섰다.

자타가 이도 저도 못 하며 한동안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자 은월이 그에게 가라는 손짓을 했다.

“가, 바쁠 텐데.”

“은월 님…….”

“지금 가는 게 좋을 텐데,”

“알겠습니다, 다음에, 다음에 뵙겠습니다. 아까 일은 정말 죄송합니다.”

자타가 뒤로 물러서며, 자리를 떠났다.

그가 떠나고, 무언가 위화감을 느낀 나는 은월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으널.”

“왜?”

내가 그를 부르자, 특유의 미소를 머금은 은월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째한테 화나써?”

“아니, 별로.”

“구치만, 재는 무서어하던 걸?”

“쟨 내가 화난 거 같아서 저러는 게 아니야.”

“그롬?”

“그냥 제 발 저린 거지, 뭐. 쟤가 어떻게 생각하든 관심 없어.”

은월이 어깨를 들썩이고는 무어라 말할 새도 없이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오랜만에 보는, 전보다 성장한 것처럼 보이는 나래가 보였다.

전에 만났던 나래의 모습은 앳돼 보이는 어린 소녀 같았는데, 어느덧 소녀는 소녀지만, 제법 숙녀와 가까운 보다 성숙한 소녀처럼 보였다.

여전히 타오를 듯 붉은 머리칼을 만지작대던 나래가 문이 열림과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월!”

그녀가 반갑다는 듯 은월을 맞았다. 그러나, 은월을 보고 반가워하는 것도 잠시, 옆에 있는 나와 여노, 포포를 발견한 나래는 바로 표정을 굳혔다.

“뭐야? 쟤들이 왜…….”

“네가 알 것 없어.”

“은월, 쟤들이 함께 온다고 말한 적은 없잖아.”

“난 혼자 방문하겠다고도 말한 적 없는 거 같은데.”

“그건, 그렇지만…….”

대놓고 홀대를 하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나래가 나를 썩 좋게 보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결국 오지 않았어도 전에 초대에도 응해줬었고, 내게 나름의 선물도 권하지 않았던가.

후우, 아리야, 괜찮아. 쟨 어린애야. 언니인 내가 참아야지.

“나래, 잘 지내써?”

먼저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나래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은 채 은월만 바라볼 뿐이었다.

“새는 귀가 안 들리나 봐.”

“뭐? 은월, 무슨 소리야?”

“청력이 안 좋은 건가? 바로 앞에서 말해줘야 들려?”

“그게 무슨…….”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지, 안 그래?”

은월이 특유의 미소를 짓더니, 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나래가 그제야 은월의 말을 이해한 것처럼 보였다.

“쟤넨 초대한 적 없어. 그러니 인사를 받을지 안 받을지도 내 자유 아니야?”

나래의 말에 은월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예의 갖춰. 내 일행이고, 아리는 동쪽 땅의 작은 주인이야.”

“그게 뭐?”

“네가 이 땅에 있는 다른 신수들 대하는 것처럼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거지.”

나래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당황해했지만, 은월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제대로 예의 갖춰, 운 좋게도 시기랑 상황이 맞아서 네 부탁대로 남쪽 땅에 오긴 했지만, 언제 떠날지는 내 마음이야.”

은월이 구구절절 맞는 말을 하자, 나래가 분하다는 듯, 입술을 꽉 깨물고 내 쪽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에는 한기가 어려 있었다.

대체 넌 나한테 왜 그래……?

어이를 상실한 채,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를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어째, 얘 전보다 나를 더 싫어하는 거 같다……?

착각이겠지? 착각일 거야. 난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그렇겠지?

하지만 어째서인지 자꾸만 불길한 예감이 든다.

그녀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나를 노려보다 무거워 보이는 입을 뗐다.

“남쪽 땅에 방문한 것을 환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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