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랑이님의 딸이 되었습니다 (43)화 (43/167)

43.

서쪽 땅에서 두 번째로 가장 큰 궁, 서화원. 그곳에는 네 땅의 모든 약재를 담당하고 있는 신수, 영아가 바삐 약을 만들고 있었다.

“저, 저어…….”

백령이 데려온 작은 여우, 포포가 어느덧 정신을 차리고는 바삐 움직이는 영아의 손놀림을 보고 영아를 올려다보았다.

“왜 그러시죠?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영아가 만들고 있는 약재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답했다.

누가 봐도 포포는 자신보다 낮은 하급 신수임이 분명했지만, 백령이 데려온 손님인 이상 그에게 말을 편히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가 정확히 어떤 신수인지도 불분명하나, 서화원의 귀한 손님임에는 변함이 없었다. 게다가 동쪽 땅의 작은 주인, 아리의 소중한 존재임은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영아는 그의 반말에도 개의치 않았다.

“여긴 어디고, 내가 왜 여기에…….”

“여긴 서쪽 땅의 서화원입니다. 백령 님과 아리 님이 당신을 여기로 데려왔지요.”

“아리는 어디에 있는데?”

“바랑 님의 궁에 들렀다가, 지금 이곳으로 오시는 중이라 전언을 들었습니다. 그렇기에 제가 지금 이리 바빠진 것이고요.”

영아가 급히 만들고 있는 약재는 다름 아닌 포포의 약재였다. 백령이 이제 곧 동쪽 땅으로 돌아갈 것을 암시함과 함께 매번 찾아오기 번거로우니, 포포의 약을 넉넉히 준비해 달라 일렀기 때문에 급히 약을 만들고 있었다.

일반적으로는 서화원에 비치된 약을 그대로 갖다 쓰면 되겠지만, 안타깝게도 포포는 일반적일 때와는 조금 달랐다. 신력이 쥐꼬리만 한 하급 신수가 본인의 신력을 제어하지 못하는 경우는 굉장히 드문 일이니까.

포포가 희귀한 경우인 덕분에 오랜만에 영아는 빠르게 움직이게 된 것이다.

대충 영아가 직접 해야 하는 단계까진 완성됐다.

“율아, 이것 좀 해주지 않겠어?”

“아, 네, 영아 님.”

율에게 나머지 작업을 맡긴 영아가 포포에게 따라오라는 눈짓을 보냈다.

영아는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포포가 누워 있던 자리에 앉았다. 그런 영아를 따라 포포도 그 옆에 따라 앉았다.

영아는 하급 신수인 작은 여우에게 호기심이 일었다.

“그래서, 당신은 뭐죠?”

“응?”

“하급 신수가 언어를 구사하고, 듣기로는 청화관도 자유자재로 드나들 수 있다고 하던데.”

“그건 나도 잘 몰라.”

포포가 난감하다는 듯 귀를 축 내렸다. 영아 또한 그에게 답을 듣고자 물은 것은 아니었다. 그에 대해서 궁금해서 물었을 뿐.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거란 건 잘 알고 있었다.

은월과 백령도 알아내지 못한 일을 그녀가 어찌 알아내겠는가.

“아리 님이 걱정을 많이 하시더군요.”

“아, 아리가?”

아리에게도 존칭을 하지 않는 걸 보고 영아는 적잖게 당황했다.

‘동쪽 땅이라 가능한 건가…….’

만약 저 여우가 아리를 만나지 않고 다른 신수에게 저리 말했다면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서 상당한 이질감이 들었다.

“당신은 뭔가…….”

“응?”

“뭔가, 신국의 규율에서 자유로운 존재란 기분이 드는군요.”

“응? 그게 뭐야?”

포포가 눈을 말똥말똥 뜨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까딱했다.

“하지만, 기억하세요.”

“뭘?”

영아가 포포 앞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포포가 깜짝 놀라, 귀를 쫑긋 세웠다.

“아리 님이 안 계셨다면, 당신은 이 세상에서 존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간발에 차로 제가 살려냈지만.”

꼴깍.

포포가 침을 꿀꺽 삼켰다.

“아리 님을 지키세요, 당신의 은인이시니.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면…….”

온화했던 영아가 처음으로 굳은 표정을 지었다.

“당신도 무사하지 못할 겁니다.”

그 모습이 포포에겐 너무나도 무섭게 다가왔다.

“영아 님, 이거.”

율이 마침 나머지 작업을 마친 약을 들고 왔다.

“날이 갈수록 솜씨가 느는구나, 율아.”

영아가 본래의 온화한 미소를 되찾았지만, 포포는 놀라서 경직된 채로 굳어 있었다.

“이제 곧 백령 님이 오실 것 같으니, 슬슬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게 좋겠어.”

“네, 영아 님.”

영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제야 포포는 굳었던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영아라는 신수가 무서웠고, 처음으로 아리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자신이 무력하게 느껴졌다. 그렇기에 너무나도 무서웠다. 포포의 몸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영아의 말대로 얼마 안 가, 백령 일행이 서화원에 도착했다. 그 중 서화원 안으로 들어오는 아리를 본 포포는 그제야 경직된 몸을 서서히 일으켰다.

***

어느덧 서쪽 땅에서 돌아온 후로 며칠이 지났다. 은월은 남은 업무가 있다며 며칠을 서쪽 땅에 잔류하다 오늘 돌아왔다고 한다. 그렇기에 오늘부터 다시 언제나처럼 수업을 받게 된 나는 정자에서 은월을 기다렸다. 물론 완전히 회복한 것처럼 보이는 포포도 내 옆에서 다과를 먹으며 꼬리를 흔드는 중이다.

아직도 포포만 보면 그날의 풍경이 아른거린다.

무엇이 아른거리느냐고?

서화원에 그를 데리러 간 날. 정신을 차린 포포가 어째서인지 영아를 보며 덜덜 떨고 있었다.

우릴 발견하곤 영아를 피해 내 뒤에 꼭 붙어 숨었다.

영아는 그런 포포를 보더니 그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이제 돌아갈 때가 되었군요.”

……라고 말할 뿐이었다.

이후 백령의 궁에 도착한 뒤, 몇 번이나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며 물었지만 포포는 뻣뻣하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 어쩌면 포포도 전에 만난 너구리처럼 탕약을 극도로 싫어하는 것일 수도 있다.

영아가 억지로 탕약을 먹인 걸 수도 있지.

그래, 그렇게 생각하자.

“헤헤.”

지금은 보다시피 완전히 회복해서는, 입안이 터질 정도로 과자를 먹고 있으니까.

애써 신경 안 쓰려 노력하고 있는데,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는 문제가 한 가지 있다.

“뽀뽀.”

“으! 으응! 아리야.”

대체 왜 내가 부르기만 하면 말을 더듬으며 어색해하는 건데?

“너어, 이상해.”

“으, 응? 뭐가?”

“솔직히 말해 바. 얼릉!”

“어, 어어, 저기 싸부 오신다!”

황급히 말을 돌리며 멀리 보이는 은월에게로 총총 달려가는 포포를 보며 입이 삐죽, 튀어나왔다.

은월이 어느새 내 옆으로 와, 자리에 앉았다.

포포에게 조금 더 추궁을 하고 싶지만, 은월에게 물어볼 것이 더 급하니 잠시 포포에 대한 의문은 접어두기로 했다.

“으널.”

“왜?”

“나, 꼭 가야대?”

“가기 싫어?”

“시른 건 아닌데…….”

굳이 내가 가야 할 이유가 있을까……?

“남쪽 땅은 서쪽 땅과 달리 볼 게 많을 거야. 지금은 조금 어수선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러고 보니 언제인가, 네가 나래를 보고 싶어 한다는 소릴 들은 적이 있는 거 같은데.”

은월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물론 나래를 만나고 싶은 마음도 있긴 하다. 나래, 이 꼬맹이가 동쪽 땅에 놀러 온다고 한 지가 언젠데 아직까지도 소식도 없다.

어딜 속일 사람이 없어서 날 속여? 이런 괘씸한 새 같으니라고.

나는 나름 진심이었는데.

진심으로 나래랑 친해지고 싶었고, 그녀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는 내게 소식조차 전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더 괘씸하다.

부들대는 나를 보던 은월의 회색빛 눈이 나와 마주쳤다.

“갈 거지?”

“으응? 응, 모 정 그렇다면…….”

“그래.”

은월이 수긍하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뭔가 은월의 뜻대로 된 것 같아 기분이 살짝 찝찝하지만, 이참에 남쪽 땅에 한 번 들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긍데, 으널.”

“왜?”

“나 궁금한 고 이써.”

“뭔데?”

“피바라미 부는 날, 그게 모야?”

이거 진짜 너무 궁금했다. 며칠을 묵혀두고 은월을 만나는 날을 꼬박 기다렸다.

하지만 바랑의 궁에서는 왠지 은월한테 편히 말을 할 수가 없어서 쉽사리 물어보지 못한 질문이었다.

“흐음.”

은월이 잠시 허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으, 으널?”

은월이 그대로 한동안 말이 없자, 그를 불렀다. 그러자 그가 다시 시선을 나와 마주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까…….”

“응?”

“딱히 네게 알리고 싶진 않은 일이라서 말이야.”

“왜?”

“월식이라고 알아?”

“으응?”

“달이 가려져서 완전히 숨는 날인데, 백령에게 그날은 조금 다른 의미가 있거든.”

“다룬 의미?”

“그래, 그리고 그때 많은 신수가 죽어.”

“왜?”

“반란을 꾀하는 자, 다른 땅에서 온 첩자라던가, 그런 놈들을 잡아 족치는 날이기도 해서.”

아, 그래서 바랑과 자하가 그런 반응을 보였던 거구나…….

묵묵히 듣고 있던 나를 보던 은월이 시선을 옆으로 돌려, 연못을 바라보았다.

“신국에선 월식이 일 년에 한 번 오는데, 다른 땅들과는 달리 동쪽 땅에선 월식을 다른 이름으로 불러.”

“모라고?”

“백호제(白虎啼).”

“백코제?”

“백호가 울부짖는 날, 이라고.”

왠지 모르게 가슴 한편이 씁쓸해졌다. 백령에겐 왜 그날이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궁금한 게 많았지만 왜인지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냥, 물어보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냥 느낌이 그랬다.

그렇기에 그 이상 그날에 관해 묻는 건 그만두었다. 은월 또한 더는 말할 생각이 없는지, 마지막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좋은 소식도 있어.”

“응?”

“우리가 남쪽 땅에 갔다가, 돌아올 때쯤이면 아마 동쪽 땅에 축제가 열릴 테니까.”

“무슨?”

“동쪽 땅의 연례행사라고 해야 하나, 슬픈 일이 있으면 기쁜 일도 생기기 마련이니까.”

“으응?”

“그러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마.”

은월이 내 이마를 톡, 쳤다.

내 표정이 어땠기에…….

“괜찮을 거야. 언제나 그랬으니까. 걱정은 접어둬.”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내 생각이 적나라하게 그에게 비친 것만 같아서.

은월의 회색빛 눈동자가 반달 모양으로 곱게 접히고, 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의 부드러운 미소에 나도 몰래 구겼던 인상이 펴졌다.

“아직 오지도 않은 백호제를 걱정하는 것보다 처음 맞이할 축제를 기대하는 편이 남는 장사니까.”

“왜?”

“밤이 어두울수록 별은 더 빛나는 법이거든.”

은월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고 수긍했다. 그러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고마어, 으널.”

“뭘. 그것보다 준비해야지.”

“응? 준비?”

무슨 준비? 갑자기 웬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야?

아무것도 모른다는 눈빛으로 은월을 바라보자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머리를 짚었다.

“자하가 말 안 했나.”

“으응?”

“그래, 자하라면 그럴 수 있지.”

“구건 마찌. 근데 머가?”

“내일 남쪽 땅으로 출발이야. 너한테 떠날 채비를 하라고 전해달라 일러뒀는데, 전달이 잘 안 된 것 같네.”

“뭐……?”

내일? 내애애이이일?

그렇게 중요한 걸 왜 이제 말해!

당장 달려가서 자하의 뒷목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짜! 하!”

우렁차게 그를 불렀다. 그러자, 어딘가에서 슝, 하고 달려온 자하가 꼬리를 흔들며 눈을 반짝였다.

“아리 님, 무슨 일이신가요? 흑, 아리 님이 저, 자하를 그리도 크게 찾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

“짜하, 바버! 멍총이! 고냥이!”

“아, 아리 님……?”

“너, 지인짜 지인짜 지인짜 미어!”

나의 호통에 자하가 그 자리에, 그 자세 그대로 굳었다.

포포가 그런 자하의 모습이 신기한지, 옆에서 폭, 폭, 찔러 보았지만 자하는 아무런 반동도 하지 않았다.

“야, 야, 고양, 아니, 스라소니야.”

포포의 부름에 자하의 눈망울에서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야, 너 우냐……?”

“아리 님이 나한테 고냥이라고, 훌쩍, 밉다고, 훌쩍.”

“야, 야, 그만 울어.”

“게다가 ‘지인짜’를 세 번이나 하셨, 하셨……, 흑.”

막상 저렇게 상심한 자하의 모습을 보니 내가 너무 심했던 건가, 조금 감정적이었나, 하는 생각들이 일었다. 그를 다독여주려 몸을 일으켰다.

뭐, 어쨌든 지금이라도 알았으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닐 테고.

하지만 그의 다음 말이 나의 그런 생각들을 부질없게 만들어 버렸다.

“아리 니이이이임, 제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흑. 저는 그저 아리 님과 함께 남쪽 땅으로 가고 싶은 마음에 백령 님 옆에 붙어서 징징대던 것밖에…….”

뭐시라?

나 방금 잘 못 들은 거 아니지?

은월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그런 자하를 바라보았다.

“자하, 뭐 잊은 건 없고?”

은월의 물음에 잠시간 생각하던 자하가 검지 손가락으로 은월을 가리키며 무엇이라도 떠오른 것처럼 탄식을 내뱉었다.

“아? 그러고 보니 은월님이 내일 출발한다고 전해 달라고 하셨는데, 제가 백령 님 설득한다고 아직 안 전해 드렸……, 헙!”

황급히 자하가 본인의 입을 막았다.

아, 그랬던 거였구나. ‘못’ 전한 것도 아니고 ‘안’ 전했던 거구나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없어!

네 놈 죄를 네가 알렸다.

나한테 중요한 전언을 안 전한 걸로도 모자라 감히 바쁜 백령한테 가서 쓸데없는 소리를 해?

괘씸죄 추가야,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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