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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님의 딸이 되었습니다 (42)화 (42/167)

42.

“아리 님. 이것 좀 드셔보시겠어요?”

그런데 이 곰 두 마리, 부담스러울 정도로 내게 관심을 가지고 누구보다 공손하고 친절하다.

청아가 가리킨 것은 처음 보는 과자였다. 서쪽 땅 특유의 과자인 것처럼 보였다. 청아가 가리킨 과자 한 조각을 들어 입에 넣었다.

영토마다 과자의 모양과 맛도 다르구나…….

동쪽 땅과 서쪽 땅은 크게 다른 점은 없었지만, 이런 세세한 부분들을 보면 정말 신기할 따름이었다.

다른 영토들은 어떨까…….

문득 다른 땅을 방문해보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과자를 먹는 내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청아가 고개를 돌려 백령을 바라보았다.

“백령 님과 아리 님을 뵈러 동쪽 땅에 방문해 인사라도 드렸어야 했는데, 요즘 공사다망해서……”

“흑기 일 때문이겠군.”

“네. 다방면으로 수사를 진행 중입니다만, 쉽지 않네요.”

둘의 대화를 듣던 산이 인상을 찡그리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일이 너무 많습니다. 저와 누님은 비천 님과 은월 님의 업무도 따로 수행해야 하니깐요.”

산의 투덜거림에 은월이 특유의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난 일 줄여주잖아.”

“그래도 많…….”

투덜거리던 산의 입을 막은 건 옆에서 지켜보던 청아였다.

“산의 투정을 어여삐 봐주세요, 은월 님. 아직 어린아이니까요.”

“나 다 컸…….”

“은월 님. 요즘 많이 바쁘신 건 알지만 감히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청아가 정중히 묻자 은월이 턱을 괴고 청아의 말을 기다렸다.

한 번 들어보겠다는 뜻이었다.

잠깐의 뜸을 들이던 청아가 무거운 입을 조심스레 열었다.

“남쪽 땅의 정사를 좀 봐주실 수 있겠습니까?”

“남쪽 땅?”

“예.”

“지금도 밥 먹듯이 드나드는 곳인데.”

“나래 님이 많이 힘들어 하십니다.”

“아예 거기에 눌러살라고?”

은월이 귀찮다는 듯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부탁드립니다. 나래 님이 요즘 신경이 예민해지셔서 제 말은 귓등으로도 듣질 않으시네요.”

은월이 청아의 간곡한 부탁에 석연찮은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없군.”

“은월 님, 그럼 당분간 남쪽 땅에 체류하시는 건가요?”

자하가 귀를 쫑긋, 세우며 눈을 반짝였다.

어쭈, 꼬리 흔드는 거 봐라.

자하의 잔망스러운 눈망울이 내게로 향했다. 시커먼 속내가 훤히 들여다보인다.

눈살을 찌푸리고 자하를 노려보았다.

불길하다, 불길해.

“헤헤, 오랜만에 아리 님과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아리도 데려갈 건데.”

“…예?”

맞아, 맞아. 꿈 깨, 자하야. 은월이 나를…… 응?

뭐? 뭘 한다고? 날 데려간다고? 남쪽 땅에?

그걸 왜 은월, 네가 결정해?

물론 방금 다른 땅에 대해 호기심을 품으며 궁금해 한 건 사실이지만, 지금 내 몸은 동쪽 땅 방문만으로도 지쳐 있었다. 이 상태로 다른 땅까지 가기에는 내 체력이 따라주지 않는다.

“으널, 나 힘드러.”

“걱정하지 마. 바로 가는 거 아니니까.”

“으응?”

“동쪽 땅에 피바람이 부는 날. 그때 갈 예정이니까.”

“으, 응?”

“내게 그런 부탁을 했는데, 그 정도는 기다릴 수 있지, 청아?”

청아가 은월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보다 처음 듣는 이야기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백령을 바라보았다.

“아아, 곧 그 날인가.”

“그날이요? 헉, 정말요?”

바랑의 탄식에 자하가 귀를 쫑긋 세우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은월 님, 저도 데려가시죠.”

자하가 처량해 보이는 눈망울로 은월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 은월이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싫어.”

은월의 단호한 거절에 자하가 내게 눈길을 돌렸다.

“아리, 아리 님, 괜찮죠?”

내가 한번 속지, 두 번 속을 줄 알아?

자하를 향해 세상에서 가장 환한 미소를 지었다.

“짜하.”

“네, 아리 님!”

“안 갠차나.”

“네, 네?”

“어림두 업찌.”

“아, 아리 님……?”

자하의 귀가 아래로 축, 처졌다. 이내 꼬리를 번쩍 세우고는 은월을 노려보았다.

“뭘 그렇게 봐?”

“은월 님 때문에 우리 착하던 아리 님이, 우리 아리 님이…….”

아니, 자하야. 네가 크나큰 착각을 하는 모양인데, 난 원래 이랬어!

자하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후, 예전이었다면 ‘짜하, 갠차나!’ 하고 맑디맑은 푸른 눈으로 말씀하셨을 우리 아리 님이……, 흑흑, 이게 다 은월 님 때문이라고요!”

어디서 약을 팔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난 변한 것 하나 없건만, 자하는 내가 변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아니, 이쯤 되면 믿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은월은 더 이상 자하의 쓸데없는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렇게 철저히 무시당한 자하는 혼자 씩씩댈 뿐, 아무도 그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물론, 나도.

“삼촌, 그럼 당분간 동쪽 땅엔 발도 못 붙이겠네.”

“그건 그렇지? 아무리 나라도 그날은 좀 꺼려져서 말이야. 그날, 백령의 기운을 버틸 수 있는 신수가 몇이나 될까?”

바랑과 이랑의 대화에 주의를 기울였다.

분명 동쪽 땅에 피바람이 분다고 했지……. 백령의 기운을 버텨야 한다는 건 무슨 소리지?

조금 더 자세히 알고 싶었지만, 더 이상 그에 관한 얘기는 나오지 않았다.

“휴우, 불쌍한 하운의 일이 드디어 줄겠네.”

“무슨 그런 섭섭한 소릴. 아리가 남쪽 땅으로 간다잖아.”

바랑의 입에서 뜬금없이 튀어나온 나의 이름은 모두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게 대체 너랑 무슨 상관이야?

“그럼 당연히 나도 아리를 따라 남쪽 땅을…….”

“삼촌, 뒤를 봐, 뒤를.”

하운이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바랑의 뒤에 서 있었다.

“……너 아직 안 갔었냐?”

“안타깝게도, 그렇네요.”

“하하. 하운, 방금 건 농담인 거 알지?”

“따라오십시오, 바랑 님. 밀린 업무가 산처럼 쌓여 있습니다.”

“자, 잠깐만, 아리랑 백령이랑, 은월이 있는데 가서 일이나 하라고?”

“그래서 가만히 내버려 뒀더니, 헛소리를 하시잖습니까.”

바랑이 하운에게 잡혀 질질 끌려갔다. 하운이 꽤 버거워 보였던 탓일까, 아니면 하운을 동정해서일까, 옆에서 지켜보던 산과 자하가 그를 도왔다.

산과 달리, 자하가 하운을 돕는 이유는 얼마 가지 않아 알 수 있었다.

바랑을 보며 자하가 인상을 팍 찡그리며 빼액, 소리쳤다.

“바랑 님, 너무해요! 왜 저를 제외하는 거예요? 저는 신수도 아니다, 이거예요?”

“넌 좀 조용해 봐, 인마!”

바랑의 외침을 끝으로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자하는 곧 돌아오겠지만, 아마 다른 두 신수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휴, 똥개 없으니까 그나마 좀 살만하네.

“아, 백령. 네게 맡길 일이 있어.”

“뭐지?”

“자리를 옮기지. 여긴 보는 눈이 많으니.”

은월이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령도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흐응, 은월, 백령이랑 뭘 꾸미고 있는 걸까?”

이랑이 사라진 둘의 대화에 관심을 가졌다.

“단순한 호기심으로 깊이 알려 하지 마세요, 이랑 님. 좋은 꼴 못 보실 겁니다.”

청아의 단호한 말투에 이랑이 한쪽 눈썹을 올리며 호기심 가득한 눈망울로 청아를 바라보았다.

“청아, 넌 은월이랑 제일 가까운 신수잖아. 뭔가 알고 있는 거야?”

“은월 님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다만. 은월 님은 누구도 가까이 두지 않으셔요, 이랑 님. 이번 일에 대해서 아는 것 또한 당연히 없고요.”

청아가 씁쓸한 눈빛으로 은월이 떠난 자리를 바라보았다. 이랑이 고개를 저으며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호랑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예쁜 아리 빼고.”

응? 나 왜? 난 왜 빼?

순간 어안이 벙벙해져서 이랑을 올려다보았다.

“아리는 왜 빼냐고? 그야, 무슨 생각을 하는지 표정에서 드러나니까?”

……부정할 수 없었다. 내 생각을 쉽게 맞춘 이랑을 보고.

왠지 밀려오는 패배감에 입술을 앙, 물며 이랑을 노려보았다.

게다가 이놈 자식, 못 본 새에 조금 더 컸다.

“너 시러.”

“난 예쁜 아리 좋은데.”

“조아하지 마.”

“보고 싶었어, 아리야.”

또라이네.

이랑이 싱그러운 황금빛 눈을 반짝이며 미소 지었다. 그는 틀림없는 늑대이거늘, 헤실거리는 모습이 늑대보단 강아지같이 느껴졌다.

항상 생각하는 거지만, 얘네 집안은 그 누구보다 압도적으로 정상적이지 않다.

그래, 무시가 답이니라.

“아리야.”

“…….”

“아리야?”

“…….”

“예쁜 아리야.”

이후 이랑이 계속해서 내 이름을 불렀지만, 나는 절대로 그에게 답을 주지 않았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랑이 머리를 긁적이며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네 맘을 상하게 할 생각은 없었어, 아리야. 진심이야.”

“흥.”

콧방귀를 끼며 고개를 돌리자, 이랑의 표정이 더욱 난감해졌다.

어쩌라고. 의도가 어찌 되었든 난 이미 마음이 상할 대로 상했다.

내 모습을 보고 곤란해하던 이랑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의 머리 굴리는 소리가 나한테까지 들렸다.

“아리야. 나 따라와 볼래?”

“시…….”

“서쪽 땅의 궁에는 신기한 게 있어.”

이랑이 거절하려는 내 말을 귀신같이 끊었다.

구미가 당기는 뒷말에 그에게 의심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

“진짜야, 진짜.”

“흐음……. 안내해 바.”

“자.”

이랑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무시하려 했지만, 생각해보니 여기서 길 잘 못 잃어서 개고생하는 것보단 잠깐 강아지 손을 잡는다, 생각하고 잡는 편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가 내민 손을 조심스레 잡자, 이랑이 활짝 웃었다.

“길 잃지 않게 잘 따라와.”

이랑의 손을 잡고 바랑의 궁 곳곳을 돌아다녔다. 딱히 신기하다고 할만한 것은 전혀 없었다.

마지막으로 이랑이 날 데려간 이곳을 제외하면 말이다.

“뭐, 뭐야…?”

“어때, 이제 좀 신기해?”

바랑의 곳 깊숙한 곳. 그곳에는 위화감이 드는 정원이 하나 있었다. 큰 늑대 모양의 석상이 정원 한가운데 있었는데, 크기도 크기지만 그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성한 기운에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거 너 줄게.”

늑대 석상의 입안에 박혀 있던 황금빛 보석을 빼낸 이랑이 내게 건넸다.

“이게 뭔데?”

아니, 그것보다 이런 걸 네 맘대로 결정해도 되는 건가? 엄청 중요해 보이는 물건인데.

이랑이 내민 황금빛 보석을 선뜻 받지 못하고 바라만 보고 있자, 이랑이 보석과 같은 눈망울로 미소 지었다.

“괜찮아. 어차피 내게 남겨진 거니까. 다른 이에게 주는 것도 내 맘이지.”

“아무리 그래도…….”

“게다가 이 보석, 네 목걸이에 딱 들어맞을 거 같으니까.”

응? 목걸이?

이랑의 시선이 내 목을 향했다. 나도 그를 따라 내 목에 걸린 목걸이를 보았다. 일전에 수하가 이상한 사족을 덧붙이며 내게 걸어주었던 그 목걸이였다.

잊고 있었다, 이거.

수하가 내게 걸어준 목걸이는 동그란 모양의 특별할 것 없는 목걸이였다. 당시에는 수하에게 신경 쓰느라 목걸이를 자세히 볼 여력이 없었기에 처음으로 자세히 보게 된 이 목걸이에는 움푹 팬 빈 곳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이랑이 다가와 보석을 빈 곳에 밀어 넣었다. 그러자, 주인을 되찾은 것처럼 알맞게 들어갔다.

“네게 도움이 될지도 몰라.”

“응?”

“그렇지 않길 바라지만.”

“……구게 무슨 소리야?”

이랑의 알 수 없는 말들에 의문을 품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보석과 똑 닮은 그의 황금빛 눈동자를 응시하자 그는 그저 해맑게 웃을 뿐, 내게 의문에 대한 답을 주지는 않았다.

“신국의 모든 가호가 아리, 너와 함께 할 거야.”

“응?”

“나 또한 그렇고.”

얜 왜 자꾸 알 수 없는 말들만 내뱉고 설명을 제대로 안 해주는 거야. 대체?

점점 이랑에게 크고 작은 불만을 품게 되었을 때 즈음, 이랑이 내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어쭈? 누구 맘대로 내 머리에 손을 대?

머리를 흔들며 이랑을 노려보았지만, 그는 손을 치우지 않았다.

“이란.”

“응?”

“손 떼.”

“부드러워.”

아니, 감상평 말고 손을 떼라고.

“조금만 더 만지면 안 돼?”

“안대.”

조금은 얼어 죽을. 어림도 없는 소리.

“빠리 떼.”

이랑이 별수 없다는 듯, 손을 거뒀다.

“흥, 나 이제 갈래. 백련이 나 찾을 꼬 가타.”

고개를 돌리고 이랑에게서 등을 돌렸다.

“아리야.”

“흥.”

“거기 돌아가는 길 아니야.”

……서쪽 땅의 궁은 쓸데없이 복잡하고 난리야.

바랑을 닮아서 아주, 아주, 아주 마음에 들지 않는다. 서쪽 땅의 모든 게.

쭈뼛쭈뼛 다시 뒤를 돌았다.

“얼릉 안내해, 이란.”

“네, 네. 분부대로 하죠, 아리 님.”

왠지 모를 패배감이 몰려왔지만 어쩔 수 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이랑의 뒤를 따라갔다.

“아리 님, 대체 어디 가셨던 거예요?”

이랑을 따라 처음 봤던 정자로 돌아오자, 잔뜩 걱정한 듯한 자하가 내게 달려왔다.

청아가 대충 상황설명을 했을 테지만, 그녀의 설명을 들은 후에도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을 자하가 눈에 훤했다.

“제가 진짜, 아리 님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알아요? 진짜, 서쪽 땅의 궁은 쓸데없이 복잡하기는 또 더럽게 복잡해서…….”

“구건 동감이야.”

“아리 님, 앞으로는 저런 나쁘고도 위험할 가능성이 다분한 이랑 님을 따라가면 안 돼요.”

그게 무슨 헛소리야.

알 수 없는 자하의 말에 점점 피곤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자하는 계속해서 귀를 바짝 세우곤 위험천만한 나쁜 녀석들을 따라가면 안 된다며 내게 이르고 있었다.

진짜 시끄러워 죽겠다.

그러니까, 내가 따라간 게 문제란 거지?

이 상황을 타파할 좋은 수가 떠올랐다.

“짜하.”

“그러니까 절대 이랑 님이라던가 이랑 님이라던가 이랑 님 같은 분은 따라가면 안……. 네, 아리 님.”

“째가 나 납치한고야.”

“……! 역시 그랬던 거군요. 우리 아리 님은 절대 이랑 님 같은 분을 따라갈 리 없는데.”

빠르게 내 말을 납득한 자하가 이랑을 노려보았다.

“아, 아리야……?”

이랑이 난처하다는 듯한 눈빛을 내게 보였지만, 내 알 바 아니다.

몰라, 네가 알아서 해, 자하가 저렇게 된 것에는 이랑의 책임도 분명히 있으리라.

이랑과 자하의 티격태격하는 소리를 들으며 아직 오지 않은 은월과 백령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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