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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님의 딸이 되었습니다 (40)화 (40/167)

40.

그가 내게로 손을 뻗었다. 꺼림칙한 느낌에 본능적으로 그의 손길을 피했다. 그러자 그가 적잖게 당황한 듯해 보였다.

“호오, 놀랍군요. 제 능력이 끊기다니.”

“머?”

능력? 지금 나한테 헛짓거리라도 했다는 거야?

문득 은월과 처음 만났던 때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은월도 첫 만남 때 내게 헛짓거리를 했었지.

은월은 그래도 이렇게까지 기분 나쁘고 꺼림칙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은월이 보여준 주술 같은 것은 기분이 나쁘기보다는, 신기하다는 쪽에 더 가까웠다. 애초에 기운 자체도 이 자와 은월은 심히 상반되었다.

“역시 백령의 아이라, 이건가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내가 백령의 아이라는 것을 아는 점을 보았을 때, 이 신수가 보통 신수가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다.

“백령의 아이라……. 말도 안 되는 소리.”

그의 중얼거림에 놀란 토끼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누구지?

그가 누구인지 가늠하느라 정신없이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이야 백령의 기운에 가려져 있지만, 진짜 정체는 무엇일지.”

“……?”

“궁금해 미치겠군요.”

그가 소름 돋게 미소를 지었다. 그가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쩌, 쩌리 가!”

단언할 수 있다. 이놈은 내가 봤던 그 어느 신수보다 미친놈이다.

그에게 멀어지려 천천히 뒷걸음질 쳐 보았지만, 그는 점점 더 내게 가까워졌다.

일순간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무언가를 앗아갈 것만 같은 느낌에 온몸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비천.”

이제는 익숙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목소리에 그가 내게 다가오는 걸 멈췄다. 동시에 그에 인한 떨림도 잦아들었다.

아니, 그것보다 비천? 비천이라고? 더 미친놈이 그 유명한 비천이었다는 거야?

은월이 그렇게 싫어하던 이유가 있었어. 저놈 얘기만 나오면 표정을 구기는 이유가 있었어.

그가 내게 두었던 시선을 거두고 목소리의 주인에게로 옮겼다.

“백령, 이것 참, 오랜만이군요.”

백령이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런 백령의 눈빛에 오히려 그는 흥미진진하다는 듯 관찰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여간 더럽게 기분 나쁘다, 저 비천이라는 놈.

백령이 그에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반갑군요, 백령.”

“사족은 집어치우지.”

백령, 조심해. 쟤는 진짜 미친놈이야, 바랑이랑은 차원이 다르다고.

불안한 눈으로 백령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백령의 싸늘한 눈빛은 변함없었다.

“전에도 말했던 거 같은데.”

백령이 한층 더 차가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내 것에 관심 끄라고.”

“그랬었던가요?”

백령의 경고에도 비천은 딴청을 피우며 어깨를 으쓱였다.

“하도 오래전이라……. 시호가 죽기 전 일이니, 기억도 가물가물하네요.”

시호? 방금 시호라고 했어?

챙.

무언가 생각하기도 전에, 백령이 검을 들어 그의 턱에 갖다 댔다.

“그 이름을 입에 담지 말라고도 했을 텐데.”

“배, 백련!”

반사적으로 백령을 불러 세웠다. 그러자, 백령이 나를 잠깐 보더니, 그대로 검을 거두었다.

“이 뱀이고, 저 뱀이고 가만히 내버려 두질 않는군.”

“과찬이군요. 사화도 여전한가 봅니다?”

비천의 물음을 백령은 가볍게 무시했다.

이 동네 뱀들은 왜 다 저 모양 저 꼴이야?

왜 사람 속을, 아니, 신수 속을 못 긁어서 안달이냐고!

비천 또한 백령의 답을 굳이 기다리지 않았다. 백령이 뒤돌아서더니, 내게 손을 내밀었다.

“아리.”

백령이 멍하니 보고 있던 내 이름을 불렀다.

“가지.”

“으, 웅!”

비천에게서 등을 돌리고 백령이 내민 손을 마주 잡았다.

“아리.”

그리고, 미친놈도 내 이름을 불렀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난, 안 반가워써.”

저런 놈을 일컫는 단어가 하나 있었던 거 같은데……. 미친놈보다 더한 게 있었는데…… 뭐더라?

“안 반가웠다니, 참으로 아쉽군요. 전 너무 반가웠는데, 말이죠.”

아, 그래, 생각났다.

“나눈, 너 가튼 ‘뵨태’. 시러.”

끔찍하다, 끔찍해. 어우.

몸서리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비천은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을 하고 나와 백령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백령과 어느 정도 걷자, 더 이상 비천의 이상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피곤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비천이라는 미친 변태 같은 놈 때문인지, 걷는 게 힘에 부치기 시작했다.

다리가 풀릴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걷고 있자, 백령이 우뚝 멈춰 섰다.

“힘들어 보이는군.”

“으, 으응…….”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백령은 두 손으로 나를 들어 올리더니, 품에 안았다.

오랜만에 그의 품에 안기자, 익숙하게 느껴졌던 그의 향이 새롭게 느껴졌다.

두근두근.

그래서일까, 가슴이 콩닥콩닥 작게 뛰었다.

계, 계 탔다.

비천과의 만남은 이것을 위한 액땜이었던 것이 분명해졌다.

“어디 불편한가?”

백령의 질문에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전혀. 절대.

이대로만 가줘, 백령아.

가까이서 백령의 얼굴을 보는 건 오랜만이기에, 몰래몰래 그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날카로운 턱선과 하얀 피부. 아름다운 푸른 눈동자.

……오늘 잠은 다 잤다.

실컷 얼굴 구경해야지.

그 생각이 무색하게도, 피곤했던 몸뚱이는 어느새 백령의 품속에서 새근새근 잠을 청했다.

***

“비천 님.”

아리와 백령이 떠난 자리에 혼자 머무르고 있던 비천의 뒤로 한 사내가 다가왔다.

그의 부름에 생각에 잠겨 있던 비천이 뒤를 돌았다.

“산, 왔군요. 안 그래도 당신이 해줬으면 하는 일이…….”

비천의 말은 끝맺어지지 못하고 막혔다. 익숙한 자가 산 옆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산 옆에 선 익숙한 얼굴이 자신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비천은 팔짱을 끼고 여유롭게 자신을 응시하는 회색빛 눈동자를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웃음을 흘리곤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제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비천의 물음에 그가 눈을 휘며 웃었다. 비천은 그 모습에 속으로 짜증을 내뱉었지만, 겉으론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

“아리한테 관심 꺼.”

“호오, 백령에 이어 은월에게도 똑같은 소릴 듣다니, 오늘 무슨 날인가요?”

‘짜증 나는 호랑이 녀석들.’

비천이 이를 갈았다. 자신보다 새파랗게 어린 호랑이 녀석들이 자신에게 명령할 때마다 비천은 항상 아니꼬웠다.

사법관 은월. 그는 태어났을 때부터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아, 그 대단하고 오만한 미호가 직접 사법관 자리에 앉힌 자였다.

원래대로였다면 비천이 사법관 자리까지 꿰찼을 것이다. 전대 사법관이 허무하게 죽은 이후, 그 자리를 맡을 신수는 자기뿐이라 생각했다.

미호 다음으로 가장 큰 권력을 가진 신수, 그것은 오로지 자신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혜성처럼 나타난 흑호가 그 자리를 꿰찼다. 그뿐이랴, 그의 능력이 워낙 특출났기에, 사법의 권력은 날이 갈수록 강해졌고, 그에 의해 행정의 입지가 점점 더 줄어들었다.

비천이 어디 모자란 건 아니었다. 다만, 은월이 너무나도 특출났을 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부진했던 동쪽 땅이 백령에 의해 점점 더 커지고, 비천과 은월의 권력 차는 좁혀지기는커녕, 이제는 손도 못 쓰게 생겼다.

그렇기에 비천은 백령과 은월, 두 호랑이가 매우 거슬렸다. 죽이고 싶을 정도로.

“호랑이의 명령을 듣는 건 이제 신물이 나는군요.”

짜증 섞인 비천의 말에도 은월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말에 가소롭다는 듯, 실소를 터트렸다.

“명령은 아닌데, 제 발에 저려서 네가 그렇게 느낀 거 아닐까?”

“은월.”

비천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비천이 강하게 자신의 기운을 내뿜었다. 은월은 미동도 하지 않았지만, 옆에서 둘을 지켜보던 산이 두려움에 벌벌 떨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오만하게 굴 수 있을지 참으로 기대가 되는군요.”

“글쎄, 난 네가 언제까지 그 자리를 유지할 수 있을지가 더 궁금한데. 지금 네가 백령의 아이나 신경 쓸 형편은 아니잖아?”

서늘하게 노려보는 비천을 보던 은월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안 그래?”

“제 자리 걱정을 쓸데없이 은월이 할 필요는 없죠.”

물론 아무리 은월의 권력이 비천보다 강하다고 한들, 비천의 자리가 간당간당한 것은 전혀 아니었다.

하지만 비천을 열받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리고 그것을 은월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저, 그를 도발하기 위함일 뿐.

중요한 건 은월이 비천의 권력을 대놓고 무시했다는 거였다.

“그래, 앞으로도 내가 네 자리를 걱정할 일은 없었으면 좋겠네.”

비천은 더 이상 은월에게 무어라 하지 않았다. 그저 그를 찢어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을 뿐.

은월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렇기에 비천에게서 등을 돌리고 자리를 떠났다.

중간에서 고통받던 산은, 비천과 은월을 번갈아 보다가 은월을 따라갔다.

비천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의 입술에서 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호랑이 녀석들이 주제도 모르는군.”

혼자 남겨진 비천이 은월이 떠난 자리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은월 님.”

산이 앞서 걷는 은월 옆으로 뛰었다.

“왜 굳이 비천 님을 도발하신 겁니까?”

“그냥.”

“많이 귀찮아지실 텐데요.”

“그렇겠지.”

“여태 무시하셨으면서 왜 갑자기…….”

“산.”

은월이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가 하려던 말을 멈추었다. 더 이상 그에 대해 말하지 말라는 뜻의 경고라는 것을 산 또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화제를 돌리려 산이 입을 열었다.

“은월 님, 그러고 보니 누님이 많이 뵙고 싶어 합니다.”

“청하는 내일 찾아가지.”

“네…….”

“그것보다.”

“네?”

“비천이 동쪽 땅에 대해 캐내려 하면 내게 알려줘.”

“예? 그렇지만 그건…….”

“특히 백령의 아이에 관한 거라면 더더욱.”

은월이 여태 비천에 대해 이렇게나 간섭한 적이 없었기에, 산으로서는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산이 은월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아니.”

은월이 미소와 함께 거절하자, 산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리하죠.”

하지만 비천보다 은월에게 충성심이 강한 산이었기에, 찝찝해도 은월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그럼 이만 헤어지지.”

“네, 은월 님. 내일 뵙겠습니다.”

산이 물러가고, 은월은 서화원으로 가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비천을 잔뜩 도발해놨으니, 그가 귀찮게 굴겠군.’

벌써부터 짜증이 났다. 안 그래도 할 일이 많은 그이니, 비천의 방해를 받을 것을 생각하면 절로 한숨이 나왔다.

산이 자신을 이상하게 보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의 심기를 건드려서 은월이 득을 볼 것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여태 있는 듯 없는 듯 그를 무시해온 은월이었다. 아무리 헛짓거리를 하고, 자신에 대한 적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해도 일말의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쓰지 않는 편이 덜 귀찮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를 적나라하게 도발했으니, 대놓고 은월의 일을 방해할 것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은월은 비천을 도발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자신에게로 관심사를 돌리는 데 성공했으니.

“은월, 어디 갔다 오는 거지?”

어느새 서화원 근처에 도착한 건지, 앞에 막 도착한 것처럼 보이는 백령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은월의 눈에는 백령보다 그가 안고 있는 이에게 더욱 시선이 갔다.

백령의 품에서 아리가 새근새근 잠을 자고 있었다. 아리의 위에는 백령의 도포가 올려져 있었다.

“별로.”

“……?”

은월의 모호한 대답에 백령이 인상을 찌푸렸다.

“백령, 그래서 아리는 어디 있었어?”

“비천이랑 만났더군.”

“흐음…… 그래?”

은월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처음 듣는 사실인 것처럼 반응했다. 그리고 백령도 은월이 이미 알고 있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둘은 굳이 그 사실을 드러내지 않았다.

“안에 있는 늑대나 누가 좀 처리하면 좋겠는데.”

“동감이군.”

둘은 짧은 대화를 끝으로 서화원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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