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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님의 딸이 되었습니다 (39)화 (39/167)

39.

수하는 눈 깜짝할 사이에 재료를 구해오더니 능숙한 솜씨로 너구리를 치료했다.

너구리의 피가 멎자, 또 언제 만들어뒀는지, 탕약으로 보이는 액체가 담긴 그릇을 너구리에게 내밀었다.

“마시세요.”

“마셔, 마셔.”

수하의 단호한 명령과 나의 압박에 너구리가 벌벌 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셔야 빨리 낫습니다.”

“마자, 마자.”

수하의 말에 적극적으로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구리는 여전히 탕약을 물끄러미 바라더니,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할 수 없군요. 아리, 너구리 좀 잡아주시겠습니까?”

“오, 오지 마세요!”

수하의 말대로 너구리의 몸통을 잡으려 다가가자, 너구리는 기겁하며 발버둥 쳤다.

“피곤하게 구러지 마. 약이 머 어때서?”

너구리가 뭐 어쩔 거야.

발버둥 쳐봤자, 너구리는 너구리였다. 가뿐하게 양손으로 그의 몸통을 잡았다.

펑.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나며 너구리의 모습이 작은 소년으로 바뀌었다. 포포보다는 확실히 크지만, 나보다는 작은 체구의 소년이었다.

“시, 싫습니다! 저 쓴 거 싫어한단 말입니다요!”

“편식하면 몸에 안 좋습니다.”

“마자, 마자. 안 조아, 안 조아.”

“저건 약이잖습니까요오!”

너구리가 탕약을 가리키며 진저리쳤다. 그에 수하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까 더 먹으라는 겁니다.”

“암암, 구러니까 머거야지.”

수하의 말에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너구리가 세상이라도 잃은 것처럼 억울해 보이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래, 너구리야. 내 일 아니니까 막말하는 거 맞다.

“생각보다는 맛, 괜찮을 겁니다.”

“구렇대, 너구리야.”

너구리가 울상을 지으며 우리 둘을 번갈아 보았다.

“마셔 보셨습니까……?”

“나눈, 안 머거바써.”

여노와 자하가 몇 번인가, 몸에 좋은 거라며 먹이려는 시도는 했었지만 난 아직 아기라서 탕약이 입맛에 안 맞을 것 같아서 단칼에 거절했다. 절대 편식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뭐, 수하는 먹어 봤겠…….

“아뇨, 전 탕약의 탕, 자도 싫어해서 안 먹습니다. 제가 저 맛없는 걸 왜 먹습니까?”

근데 네가 맛을 어떻게 알아?

나와 너구리는 어이 없는 수하의 여유로운 대답에 동시에 그를 올려다보았지만, 오히려 뻔뻔한 당사자의 모습에 무어라 할 수도 없었다.

“입 벌리세요. 지금 안 벌리면 그냥 들이붓습니다.”

수하가 강제로 너구리의 입을 벌리고 탕약을 때려 부었다.

“윽, 악, 컥.”

요란하게 탕약을 들이마시게 된 너구리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강제로 탕약을 말끔하게 비웠다.

탕약의 그릇이 말끔히 비워진 걸 본 수하가 잡고 있던 너구리의 얼굴을 놓아 주었다. 동시에 나도 잡고 있던 너구리의 몸을 놓았다.

“흐윽, 흑, 흐으…….”

탕약 하나에 세상을 잃은 것마냥 훌쩍이는 너구리를 보며 수하가 혀를 찼다.

……그렇게나 맛이 없었나?

“마니 맛업써……?”

내 질문에 너구리가 조용히 탕약 그릇을 내밀었다.

도리도리.

나는 절대 마시지 말아야지.

그리고 내 질문의 답은 얼마 안 가, 정신을 차린 너구리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웩, 더럽게 맛없어, 우욱. 내가 마셔 본 약 중에 최악이야, 최악.”

“이제야 말하는 거지만.”

언제 그릇을 치우고 들어온 건지, 수하가 남은 탕약 재료들을 보자기에 싸며 말을 이어갔다.

“이상하게 제가 만들면 시판에 판매되는 탕약에 비해 10배 정도 쓰다는 소리를 듣곤 합니다.”

“…….”

“그래도 약효는 확실합니다, 아마도.”

……‘아마도’가 붙으면 확실한 게 아니잖아.

“약효에 좋은 거라고 소문 난 좋은 거는 다 때려 넣긴 했으니까.”

너구리는 할 말을 잃은 채 텅 빈 눈으로 수하의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았다.

……앞으로 수하가 탕약을 만들어 준다면 거들떠보지도 말자, 아리야.

이렇게 의외의 곳에서 삶의 지혜가 하나 더 늘었다.

“그것보다 당신은 뭐 하는 작자입니까?”

“저, 저요?”

수하가 남몰래 조용히 도망가려던 너구리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너구리가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나와 수하를 번갈아 보았다.

“큼큼, 저로 말씀드리자면 남쪽 땅을 구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서고 있는 란이라고 합니다.”

“그걸 묻는 건 아니었는데.”

수하는 무관심한 표정으로 너구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럼 대체 뭐가…….”

“그거 훔쳐 놓고 뭐가 그렇게 당당합니까?”

수하가 가리킨 건 너구리 손에 들린 구슬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조금 전에 구슬을 훔쳐서 쫓기고 있었지…….

그러게, 그게 먹을 거도 아니고, 대단한 물건도 아닌 거 같은데……. 그거 하나 훔치겠다고 몸이나 다치고, 영 이상하긴 하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느낌이랄까.

“이, 이것만 있으면 남쪽 땅을 구할 수 있으니까요!”

……내가 방금 뭘 들은 거지?

두 귀를 의심했다. 수하 또한 마찬가지인지, 인상을 찌푸리고 고개를 기웃거렸다.

“……머, 머라거?”

“구슬만 있으면 분명 남쪽 땅을 구할 수 있다고, 모두가 그랬다고요.”

……그, 혹시 그 구슬이 네가 들고 있는 그 구슬이라고 말하는 건 아니지?

“그 구슬로 남쪽 땅을?”

“분명 구슬이랬는데……. 반짝이고, 푸른색이고, 기묘한 힘이 있을 것 같은…….”

아니, 그렇다면 설마 훔치려고 한 구슬이…… 그 구슬이 아니라 내 구슬이었던 거야?

너구리의 어이없는 말에 수하가 머리를 짚었다.

“그런 장신구나 놀이에 쓰이는 구슬은 천하에 차고 넘치는데, 그런 물건으로 남쪽 땅의 혼란이 가라앉겠습니까?”

단호한 수하의 말에 너구리가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이…… 구슬이 아닙니까? 이상하다, 분명 동쪽 땅에 있는 푸른 구슬…….”

“……요긴 서쪽 땅인데?”

“네? 동쪽 땅이 아니었다고요? 그렇다면 제가 훔친 이 구슬은…….”

너구리의 물음은 옆에 있는 수하가 명쾌하게 답해주었다.

“서쪽 땅에 차고 넘치는 명물, 장신구로 쓰이는 구슬입니다.”

“그, 그럴 리가……. 전 분명히 길을 따라 잘 찾아왔는데.”

……그랬으면 네가 여기 있을까, 너구리야?

“전 서화원의 작은 주인, 수하입니다.”

“서, 서화원이라면, 여기가 정말 서쪽 땅이라는 겁니까?”

“……바버.”

……저런 지나치도록 순수한 바보 너구리를 보았나.

“그것보다 백령 님이 들으면 심기가 불편하실 것 같군요, 동쪽 땅과 서쪽 땅을 헷갈리다니…….”

순식간에 너구리의 몸이 축, 하고 쳐졌다. 눈가가 한층 촉촉해진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구슬을 훔치는 건 범죄입니다. 은월 님에게 잡혀가고 싶습니까? 어차피 동쪽 땅의 작은 주인이신 아리 님의 몸 안에 있는 거라 당신 같은 중급 신수는 훔치지도 못하겠지만.”

“그, 그런…….”

흠칫.

너구리한테 내 소개는 되도록 하지 말자. 왠지 귀찮아질 것만 같다.

처음 듣는 사실이라는 듯, 너구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수하를 바라보았다. 수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남쪽 땅의 상황이 매우 좋지 않나 보군요.”

“…….”

“어쩔 수 없습니다. 그것이 순리인 것을,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된다는 것을 왜 모르시는지.”

“아, 아닙니다! 충분히 저희 힘으로 막을 수 있…….”

“미련한 백성들 같으니.”

수하가 혀를 찼다. 너구리는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그 자리에 그대로 굳었다. 너구리의 입이 분하다는 듯이 작게 떨렸다. 그 모습을 보니 조금은 안쓰러웠다.

수하가 무어라 더 말하려 입을 뗐다.

“고마해, 꼬부가.”

따끔한 눈초리에 수하가 열었던 입을 곱게 다시 닫았다.

한동안 방 안에는 정적이 흘렀다. 너구리가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나와 수하는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끄응……. 하지만, 남쪽 땅 세간에는 반란을 꾸미고 있는 신수들도 있다고……. 그 소문을 들으니 더 이상 가만히 두고만 보고 있을 수가…….”

반란?

남쪽 땅에 반란을 꾸미고 있다니?

처음 듣는 소리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남쪽 땅의 사정이 안 좋단 것은 저번 의회 때부터 알고 있었지만, 내부에서 저런 소리까지 들린다는 것은 갈 데까지 갔다는 뜻일 것이다.

불현듯 은월이 요즈음 남쪽 땅에 밥 먹듯이 드나들던 일이 생각났다.

단순히 나래가 사고만 친 게 아니었구나…….

나래에게 동정심이 일었다. 내 눈에 보이는 나래는 땅의 주인, 이라는 느낌보다는 아직 작고 어린아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이 구슬은 그럼 진짜 그냥 구슬인 거야?”

“네.”

수하의 단호한 대답에 너구리가 구슬을 한참이나 바라보다 비장한 표정으로 내게 내밀었다.

뭐 어쩌라는 거지?

“가져요.”

“으응?”

“저 치료해주기도 했으니까, 이건 선물로 드릴게요.”

……필요 없어져서 주는 거 다 알고 있거든?

“치료해준 건 접니다만……?”

수하의 발언은 가볍게 무시당했다.

선뜻 손을 내밀지 않자, 너구리가 강제로 내 손에 구슬을 쥐었다.

요놈 봐라?

“피료업…….”

“비록 제가 힘들게 훔쳐…… 아니, 가져온 거라 해도 부담 갖지 않아도 됩니다요.”

아니, 필요 없어서 안 받는 건데…….

“그거, 결국엔 제가 돈 냈습니다만……?”

그렇게 얼떨결에 쓸데없는 구슬을 받게 되었다.

할 수 없이 구슬을 옷 소매에 넣자, 너구리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얘도 정상은 아니야.

***

우여곡절 끝에 평화롭게 주막을 나올 수 있었다. 너구리는 어째 아플 때보다 죽상을 하고 있었지만.

“어쨌거나, 두 분께 신세를 졌습니다요. 감사합니다.”

너구리가 꾸벅, 고개를 숙여 짧은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릿빠릿한 발놀림으로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너구리가 사라진 쪽을 보며 수하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쓰읍, 이상한 놈이네요.”

너도 만만치 않다, 꼬북아.

저잣거리의 하루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앉자, 저잣거리는 물건을 사고파는 신수들보다 술판을 벌이는 신수들이 점점 늘어나게 되었다.

“이제 슬슬 돌아가는 게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충분히 돌아본 거 같은데.”

“바란, 아직 있으까?”

“흠……. 확실친 않지만 놀랍게도 지금쯤이면 뻗어계시고도 남을 시간입니다.”

“응?”

벌써 뻗는다고? 말도 안 돼.

“그야, 바랑 님은 술을 더럽게 못 하시니까요. 세 분 중 가장 술을 좋아하시는 분이시자, 가장 못 하시는 분.”

“에?”

“못 하시는데 자꾸 드시니까 영아도 빡치지.”

영아가 빡칠 만 했다. 뒤처리는 다 영아나 율이 담당할 거 아니야?

술 마시는 놈은 따로 있고, 뒤처리하는 놈은 따로 있구나.

결론은, 어디를 가나 똥개는 민폐로구나…….

수하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더는 이곳에 볼일이 없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럼, 이제 서화원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수하가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수하를 뒤따라가려던 찰나, 어딘가 이상하고도 묘한 기운이 느껴졌다.

어? 뭔가, 뭔가 이상한데…….

어딘가 익숙한 듯하지만 낯설기도 한 기운이 점점 내게로 다가왔다.

“꼬부가, 꼬부가?”

이상한 기운을 느낀 사이, 수하를 놓쳐 버렸다. 수하의 기운을 느끼려 애써 보아도 이상한 기운이 너무 크게 느껴져서 수하를 찾아낼 수가 없었다.

왠지 모르게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기에 오히려 침착하려 애썼다.

후우, 아리야, 괜찮아.

심호흡하며 진정하려 애쓰는 사이, 뒤에서 처음 듣는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쩐지 저잣거리에서 백령의 기운이 느껴진다 했더니, 그 유명한 백령의 아이였군요.”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려 뒤를 돌아보았다. 웬 붉은 머리의 낯선 남자가 무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어딘가 꺼려졌다. 여태껏 본 신수 중 가장 꺼려지는 상대였다. 그는 신수 중에서도 잘생긴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백령과 은월보다 어두운 느낌이 강했다.

그의 흑색 눈이 나를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관찰한다는 쪽이 더 맞을 것이다.

그의 눈빛에 기분이 상당히 더러워졌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무언가 옭아매는 느낌. 그 이상한 느낌에 소름이 돋았다.

이 신수는 대체 누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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