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간다네요.”
“결국 가는군.”
“가는 거죠, 수하?”
수하의 붉어진 얼굴을 본 신수들이 차례대로 말을 덧붙였다. 호랑이 두 마리와 자하는 어딘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지 떨떠름한 표정으로 수하를 바라보았다.
“누, 누가 간답니까?”
“어머, 가는 거 아니셨나요?”
“저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아리 님한테 이미 넘어가신 것 같은데, 수하.”
“어머니!”
……어머니?
수하의 ‘어머니’라는 발언에 모든 이의 눈길이 영아를 향했다. 나 또한 놀란 토끼 눈으로 영아를 바라보았다.
“어, 어머니?”
내가 아는 어머니 뜻이 맞나? 그렇다면 영아가 수하의 어, 어머니?
거북이…… 모자(母子)였어?
“영아, 이거 처음 듣는 소리인데, 무슨 소리지? 수하는 네가 주워온 아이가 아니었어?”
뭐? 주워 와?
이거 나는 처음 듣는 소리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알고 있었다는 듯, 의문을 품지 않았다.
은월이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영아에게 묻자, 영아는 그에게 답을 주는 대신 수하를 바라보았다.
“수하.”
무언가 뚝 끊기기라도 한 것처럼 영아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싹 빠졌다. 처음 보는 모습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앞으로 제가 그 호칭으로 부르지 말라 이르지 않았던가요?”
“무, 물론 그랬긴 하지만…….”
“전 수하의 어머니가 아닙니다. 미혼이라고요.”
영아가 억울하다는 투로 수하에게 말하자, 모두의 의문은 점점 커져만 갔다.
저게 무슨 헛소리여…….
영아가 머리에 손을 짚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까 그 온화하던 영아는 어디로 가버린 걸까…….
“물론 처음에는 작은 거북이가 졸졸 따라다니면서 어머니, 어머니 거리니 차마 귀여워서 봐줬었지만…….”
“아니, 영아가 먼저 어머니라 부르라 하셨…….”
“하지만 이렇게 큰 거북이가 어머니, 거리니…… 이제라도 바로 잡아야 한다 생각한 것입니다.”
“저번에는 애먼 신수, 혼삿길 막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게 그것입니다, 수하.”
또박또박 말을 이어가는 영아에 수하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입을 다물었다.
“이번 건은 당황스러운 마음에 차마 신경 쓰지 못해, 흘러나온 실수라 넘어갈 순 있습니다만.”
수하는 무언가 할 말은 많아 보였지만, 영아에게 감히 또 무슨 말을 했다가 이상한 논리를 들을지 몰라, 말을 아끼는 듯하였다.
“그럼, 그만 떠들고 다녀오시지요.”
훠이, 훠이.
영아가 손짓하며 수하를 쫓아냈다. 나도 그를 따라 조용히 방을 나서기 위해 움직였다.
그러다 하필이면 나가는 내 모습을 애처롭게 바라보며 입 모양으로 무언가를 속삭이는 자하의 모습을 발견했다.
‘저 보고 싶어도 참으셔요, 우리 아리 님. 흑.’
그냥 못 본 척하기로 했다.
***
거리를 걷는 한동안 수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갈 길만 가고 있었다.
계속 이대로 돌아다닐 심산은 아니겠지?
“쑤하, 나랑 돌아다니눈 고, 시러?”
“누, 누가 싫다 했습니까?”
아까 네가 싫다며?
이놈, 참으로 어이없는 놈일세. 말과 행동이 따로 놀질 않나, 아까 자기가 싫다고 자기 입으로 말해 놓고 부정하질 않나.
속으로 혀를 차며 그를 바라보는데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독심술이라도 배웠나?
“그런데, 왜 저를 그리 친근하게 부르시는 겁니까?”
혹여나 속마음을 읽힌 것일까, 불안해하고 있는데 수하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상관없는 말이었다.
그가 말을 하며 고개를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그럼 이름으로 부르지, 뭐라고 불러?
“시러?”
“다, 당연히 달갑지만은 않습니다.”
“구래, 구럼.”
이름으로 불리는 게 싫으면 어쩔 수 없지, 뭐.
“꼬부가. 헛소리 하지 말구 어서 가자.”
“……?”
그래, 나도 처음부터 이쪽이 더 마음이 가긴 했어.
“꼬, 꼬북…… 저 말입니까?”
수하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럼, 여기 거북이가 너 말고 또 누가 있냐? 참 내.
“웅, 꼬부기.”
“설마 제가 거북이라서요?”
“웅!”
수하가 가던 걸음을 멈추더니, 충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어안이 벙벙해져 있었다.
왜 저래? 거북이라고 불린 적이 없는 건가?
그런데 갑자기 잔뜩 얼굴에 열이 올라 있지 않은가. 아까 내가 설득할 때와 같이.
“저, 저는 그런 애칭 싫어합니다.”
“애, 애친……?”
“절대, 그 애칭이 귀엽다거나 생각해 본 거 아닙니다.”
……얘도 제정신은 아니구나.
대체 신국에 제정신인 신수가 몇이나 되는 걸까? 영아도 만만치 않던데.
오늘도 개성 넘치는 신수들에 감탄하며 수하를 바라보는데, 그가 입을 열었다.
“절대 아닙니다.”
그래, 너도 정상은 절대 아니야.
처음 와보는 저잣거리는 생각보다 많은 신수로 붐볐다. 장사하는 신수, 물건을 사는 신수, 놀고 있는 어린 신수들까지. 각양각색의 신수들의 모습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우와…….”
이렇게 많은 신수는 처음 본다. 그래서인지 구슬의 힘으로 기운을 느끼려 하거나, 정신을 집중하게 되면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무래도 수많은 기운이 동시에 여럿 느껴지니 아직 내가 감당하기에는 벅찬 것 같았다.
은월한테 더 열심히 교육을 받아야겠어…….
그렇게 처음으로 학구열을 불태우고 있는데, 수하가 장신구를 파는 난전처럼 보이는 곳에 가더니, 웬 목걸이를 하나 사 와서는 내게 내미는 것이 아닌가.
“……어쩌라거?”
“하도 좋은 물건이라길래 샀는데, 제겐 쓸모가 없습니다.”
“구래서……?”
“아리 님이라면 좋은 곳에 쓰실 것 같습니다.”
그냥 선물이라고 말하면 어디가 덧나니?
엉겁결에 그가 내민 목걸이를 받아들자, 그가 고개를 돌리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목걸이를 받아들고 작은 손으로 들고만 있자, 수하가 친절하게도 직접 내 목에 걸어 주었다.
이상한 사족을 붙이면서, 말이다.
“이런 것도 제대로 못 거십니까? 흠, 제가 걸어드릴 수밖에 없군요.”
목걸이 매는 법은 나도 충분히 알고 있지만, 목걸이를 걸어주며 흐뭇해하는 수하의 모습을 보니 그냥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얘도 자하만큼이나 피곤해.
“됐습니다.”
“으응…… 고마어…….”
“뭘 이런 걸 가지고. 칠칠찮게 흘리고 다니지나 마십시오.”
……이젠 그냥 그러려니 하련다.
“저놈 잡아라!”
“으익!”
어디선가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틀자, 웬 작은 너구리 한 마리가 무언가를 입에 머금은 채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빠르게 달려오는 너구리를 수하가 한 손으로 잡아 올렸다.
곧이어, 쫓아오던 신수가 우리 앞에 당도하더니 수하에게 머리를 숙였다.
“하, 핫. 감사합니다, 수하 님. 요 녀석이 저희 가게 물건을 훔쳐 가서요.”
너구리가 부르르 떨고 있었다.
너구리가 입에 머금고 있는 물건을 자세히 보니, 동그랗고 예쁜 구슬이었다.
“요 녀석, 이리 안 내?”
가게 주인으로 보이는 신수가 너구리 입에 물린 구슬을 빼가려 했지만, 너구리는 안간힘으로 버티고 있었다.
수하가 나지막한 한숨을 내뱉었다.
“제가 이 구슬의 값을 드리겠습니다. 얼마면 되겠습니까?”
“수, 수하 님이 대신이요……?”
대충 값을 부르니, 수하가 소매에서 돈을 꺼내 그에게 넘겼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수하 님.”
그가 머리를 긁적이며 떠나자, 수하가 너구리를 살펴보았다. 너구리가 수하의 시선을 피했다.
그런데, 어디선가 똑, 똑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꼬. 꼬부가. 얘 피 나.”
너구리의 배 쪽에서 피 몇 방울이 떨어지는 것이었다.
“다친 것 같군요.”
“돌아가야 해?”
“아닙니다, 큰 상처도 아니고 이 정도면 저도 고칠 수 있는지라.”
수하가 한 손에 들고 있던 너구리를 품에 안았다.
“저를 따라오시겠습니까?”
수하를 따라간 곳은 작은 주막이었다.
***
“여어, 친구들.”
원치 않는 이의 등장에 방 안에 있던 모든 이의 표정이 기하급수적으로 구겨졌다. 하지만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당사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너무 오랜만이라, 감격스러워서 눈물이 날 것 같다. 흑흑”
바랑이 우는 시늉을 하자, 은월이 짜증을 머금은 미소로 답했다.
“끔찍할 정도로 너무 자주 보는 것 같은데.”
“나도 넌 안 반갑거든? 내가 반가운 건 백령이랑 아……,”
바랑의 말에 본인의 이름이 나오자 불쾌하다는 듯 백령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로 인해 바랑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의 눈동자가 퍽 차가웠지만, 바랑은 개의치 않았다.
“워워, 눈 풀어, 백령.”
바랑이 눈에 띄게 주위를 둘러보며 누군가를 찾았다.
“그나저나, 귀여운 아리는 어디 있냐?”
‘네가 싫어서 도망갔다, 멍청아.’
모든 이의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아무도 그에게 굳이 진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첫 번째 이유는 아리 얘기를 굳이 그와 함께하고 싶지 않은 것이고.
두 번째 이유는 아무리 말해줘봤자, 자기 듣고 싶은 것만 듣는 바랑에게는 말짱 도루묵이기 때문이었다.
굳이 입 아프게 말할 필요가 없었다.
바랑의 꼬리가 아래로 처졌다.
“아리 보고 싶어서 달려왔는데, 어디로 간 거냐?”
“그래서 약속 시각보다 일찍 오셨군요, 참으로 쓸데없게도.”
“여어, 영아. 너도 한잔할래?”
“대체 이 술은 또 언제 가져오신……. 아니, 가져온 건 둘째로 치고, 술판은 또 언제 벌여 놓으신 겁니까?”
그랬다. 누구보다 빠르게 빛의 속도로 술판을 깔아놓았기에, 오늘은 절대 서화관에서 술을 못 마시게 하겠다는 영아의 굳은 다짐이 언제나처럼 무용지물이 되었다.
“백령, 한잔할래?”
“거절하지.”
백령의 단호한 거절에 바랑이 고개를 돌려 은월에게 향했다.
“은…….”
“꺼져.”
바랑이 마지막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율을 바라보았다.
“바랑 님, 무슨 일이세요?”
해맑게 웃는 율을 보며 도저히 술을 권할 수가 없었다. 마치 깨끗한 물에 진흙을 던져놓는 기분이랄까.
하는 수 없이 바랑이 혼자 술잔을 들이켰다.
“아, 맞아. 비천, 걔가 이상한 말을 하던데.”
“무슨 말?”
“아리가 의심스럽다나, 뭐라나. 백령의 아이인 거 자체가 의구심이 든다더라고.”
“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랬다면 미호 님이 아리 님에게 구슬을 하사하셨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듣다 보니 묘하게 거슬리긴 하더라고.”
바랑의 말에 백령이 인상을 팍 찡그렸다. 동시에 그의 푸른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잘도 헛소리를 지껄이는군.”
“그냥 듣다 보니까 혹시나 하였던 거지.”
“비천한테 서찰을 전해달라 했지, 그가 말한 헛소리를 옮겨달란 것은 아니었는데.”
백령의 단조롭고 차가운 어조에 바랑이 한동안 말을 아꼈다. 아무리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바랑이라고는 하나, 더 이상 그의 심기를 거스르면 안 되리라는 것은 육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바랑의 얘기를 들은 은월은 그저 무언가를 골똘히 혼자 생각하고 있었다.
“딸꾹, 아리 진짜 어디 갔냐? 귀여운 우리 아리…….”
바랑의 눈앞에 아리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뭔 말을 하기만 하면 볼이 잔뜩 부풀어 올라선, 새초롬한 눈망울로 자신을 노려보던 모습을 떠올리니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바랑이 무언가가 생각난 듯이, 눈을 번쩍 떴다.
“설마, 저잣거리 구경 간 건 아니겠지?”
‘에이, 아닐 거야.’
아닐 거라 안심하며 바랑의 눈이 술에 취한 특유의 반쯤 풀린 눈으로 바뀌었다.
바랑의 혼잣말에 누구 하나 신경을 기울이는 이가 없었다. 오직 율 혼자서만 바랑의 말에 꼬박꼬박 대답해주었다.
“예? 왜 그러세요, 바랑 님?”
“오늘 비천이 저잣거리에 나선다고 그랬단 말이야? 혹시나 마주칠까 봐, 그러지.”
‘바랑 님만 아니었으면, 아리 님이 나갈 일은 없었어요…….’
율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굳이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바랑이 마지막 잔을 들이키며 술상 위에 엎어졌다.
“우리 아리, 비천 같은 놈이랑 마주치면 안 될 텐데…….”
“에이, 설마요. 저잣거리가 얼마나 넓은데…….”
율이 고개를 좌우로 격렬하게 흔들었다.
“그래, 그렇겠지……. 딸꾹.”
바랑은 그 말을 끝으로 곯아떨어졌다.
그가 마신 잔은 고작 세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