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랑이님의 딸이 되었습니다 (37)화 (37/167)

37.

율이 고개를 들어 올림으로 인해 그의 아름다운 물빛 머리칼이 흔들렸다. 영아가 고개를 든 율의 머리칼을 정돈해주었다.

거북이와 도롱뇽이라니, 상당히 독특한 조합이었다.

“율아, 아까 나한테 할 말이 있다고 하지 않았었니?”

“아아, 그게 말이죠…….”

영아가 율의 머리를 정돈해주며 사근사근하게 묻자, 율이 머리를 긁적였다.

“아까 바랑 님에게서 전언이 왔어요.”

“바랑 님이? 뭐라 하시던?”

“곧 서화원에 들르시겠다며 준비하라 이르셨어요.”

“바랑…… 님이?”

“예, 안 그러시던 분이 갑자기 들르시겠다기에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몰랐는데, 백령 님과 은월 님, 아리 님께서 친히 저희 서화원에 방문해주시니, 이해가 가더라고요.”

율의 말이 끝나자, 백령이 인상을 찌푸렸다. 은월 또한 내내 떨떠름한 표정으로 율과 영아의 대화에 집중했다.

“백령 님, 은월 님. 저희의 방금 대화에 심기가 많이 불편해 보이시는데, 이유를 여쭤보아도 될까요?”

영아가 느긋하고 정중한 투로 물었다.

“벌써 피곤하군.”

“예?”

“너희 주인을 만날 생각을 하니.”

“잠깐만요, 저희 주인이요? 누굴 말씀하시는 거죠?”

백령과 영아의 대화를 듣고 있던 자하가 무의식적으로 입을 열었다.

“그거야 당연히 바랑…….”

“예? 지금 농담하시는 것이지요? 바랑 님이 왜 저희 주인이죠?”

영아는 미소 짓고 있었지만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 모습에 자하가 꼬리를 내렸다.

“히익. 하지만 서화원은 서쪽 땅에…….”

“안 그래도 이사를 할까, 고민 중이랍니다. 그리고 서화원은 독립된 약방이에요. 앞으로 그런 끔찍한 말씀은 삼가시길 바랍니다.”

뒤를 돌아 약재를 찾던 영아가 약재 하나를 들더니 다시 미소를 머금고 우리를 바라보았다.

“당신들 때문에 바랑 님이 제 ‘서화원’에 들르시겠다는데, 전 무슨 죄죠?”

바랑의 방문에 제일 화난 신수는 백령과 은월도 아닌, 영아였다. 약재를 든 영아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일단 바랑을 극도로 싫어하는 신수치고 나쁜 신수는 없었다.

일단 영아 너, 합격.

영아는 상당히 유해 보이는 신수이다. 게다가 정중하고, 굉장히 여유롭고 선한 인상의 몇 안 되는 신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은월이 영아가 들고 있던 약재와 같은 모양의 약재를 영아에게 건네며 물었다. 영아가 은월이 건넨 약재를 받아들고 분을 삭이는 듯해 보였다.

“진상도 그런 진상이 없죠.”

모두가 영아의 말에 침묵을 택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어지간한 일이 아님을 직감할 수 있었다.

……바랑아, 좀 착하게 살자.

“왜 하라는 일은 안 하고 종종 서화원에 와서 술을 처먹으시고 가시는 것인지. 어머, 말이 헛나왔네요.”

“수, 술을……?”

“아, 가끔 잠도 처 자고 가시네요.”

“…….”

“저희 서화원을 약방이 아니라 주막으로 아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이에요, 그렇죠?”

“그, 그…….”

“선대 서화원 주인 분은 하필이면 이딴 땅에다가 서화원을 지으셨는지, 원.”

영아의 말에는 누가 보기에도 깊디깊은 한이 서려 있었다.

“여, 영아 님, 진정, 진정하세요.”

“그래, 내가 백령 님과 아리 님 앞에서 무슨 말을…….”

“게다가 바랑 님이 누누이 말씀하시길, 백령 님과 은월 님이 자신에게 말을 험하게 해도 가장 친한 친우라고…….”

“……?”

“그러니까, 백령 님과 은월 님 앞에서 자기 험담을 하면 목숨이 무사하지 못할 거라고 하셨어요. 게다가 백령 님의 아이이신 아리 님은 바랑 님을 가장 잘 따르신다고…….”

모두가 율의 말에 귀를 의심했다.

뭐? 누가 누구를 잘 따라?

똥개가 진짜 못 하는 말이 없다. 어딜 거짓말을 해도 그런 걸로……!

“고지마이야!!!”

“그럼요, 우리 아리 님이 그런 똥개를 잘 따를 리가 없는걸요. 우리 아리 님이 잘 따르는 건 저인걸요?”

너도 헛소리 하지 마, 자하야.

“제정신이실 때 그런 말을 하셨다고……?”

영아 또한 처음 듣는 헛소리에 자신의 귀가 아닌 바랑의 정신을 의심했다.

율이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한 것인지, 눈치를 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백령과 은월은 차마 율에게 무어라 하지는 못하고, 눈으로 욕을 하고 있었다.

영아가 머리를 짚으며 입을 열었다.

“……율아.”

“예?”

“바랑 님한테 욕하는 신수치고, 진심이 아닌 신수는 없단다.”

“……예, 예?”

“앞으로 바랑 님이 하는 말은 대충 걸러 들으라는 뜻이란다.”

……바랑아, 정직하게 좀 살자.

바랑의 심각한 평판에 모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새삼스레 감탄이 나올 정도로 심각했다.

똥개 보기가 심히 두려워졌다.

이번엔 또 무슨 헛소리를 시전할까?

벌써부터 똥개를 만날 생각에 피곤이 몰려왔다.

장시간 서쪽까지 달려온 이 피곤한 몸으로 똥개를 상대한다면 분명히 과로사로 죽어버리고 말 것이다.

“나 갈래…….”

“예? 어딜 가요, 아리 님?”

“똥깨 업는 곳…….”

“네, 네?”

“가꺼야!”

자유를 찾아 떠날 거야.

영아가 나긋한 미소를 지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다면 저잣거리 구경이라도 가보심이 어떠신지요?”

“……!”

“물론, 혼자 돌아다니시는 건 위험하니…….”

영아의 말에 내 두 눈이 번쩍 떠졌다.

저잣거리 구경, 너무나도 좋은 의견인데?

그런데, 영아의 말을 듣고 나보다 더 좋아하는 신수가 있었으니…….

“그럼 저와 함께…….”

“시러.”

자하가 내게 손을 내밀었지만, 그 손을 가볍게 무시했다.

“아, 아리 님?”

너 미워, 인마.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자하를 노려보았다. 자하가 눈만 깜빡거리자,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자하가 충격에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내가 가지.”

“백령, 넌 돌아다니는 거 싫어했지 않아? 내가 갈게.”

“이상한 소리를 하는군.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저 돌아다닐 필요성을 못 느낀 것일 뿐이다.”

“그게 그거지.”

두 호랑이의 묘한 신경전이 흘렀다. 서로를 노려보던 두 호랑이가 동시에 내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아리의 선택에 맡기지.”

“누구랑 가고 싶어, 아리야?”

……이거 어디서 많이 본 상황인데?

왠지 이전에도 이거랑 비슷한 상황이 있었던 것만 같은 느낌이…….

백색 호랑이냐, 흑색 호랑이냐, 백호냐, 흑호냐.

그것이 문제로다.

굳어버린 자하를 제외한 모두가 나에게 온 신경을 쏟아붓고 있었다.

백령의 푸른 눈이 아름답게 빛났다.

오랜만에 마주한 그의 눈빛에 왠지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난 역시 백령이 좋…….

“아, 아리 님이 결정하기 어려워하시는 거 같은데…….”

영아가 손바닥을 마주치며 눈을 반짝였다.

응? 아닌데, 영아야? 나 이미 마음 정했는데?

“어차피 두 분은 바랑 님을 상대해야 하니까, 서화원에 남아계시는 게 어떠신지요?”

“난 아리 혼자 못 보내.”

“어머, 저 또한 아리 님을 혼자 보낼 마음은 없답니다. 서쪽 땅은 치안이 좋은 편이긴 하지만 저잣거리는 그래도 질 안 좋은 신수들도 많으니까요.”

“영아, 네가 함께 가겠다는 뜻이냐.”

백령의 물음에 영아가 고개를 젓더니 아까 방 안쪽에 눕혀놓은 포포를 바라보았다.

“아니요, 저는 이 아이의 약을 지어야 한답니다. 율에게 맡기기에는 특이한 병세니까요.”

“저 아이를 보내려는 건가?”

백령이 미간을 찌푸리며 턱으로 율을 가리키고는 영아를 노려보았다.

백령이 왜 저렇게 기분 나빠하는 거지?

율이 우물쭈물하며 영아를 바라보았다.

“백령 님과 은월 님이 율이로 안심하실 수 있겠습니까?”

“앗, 영아 님…….”

“율아, 네가 약하단 게 아니란다. 다만 아리 님을 노리는 자들이 지나치게 강하고, 아리 님이 워낙 귀한 분이시니 저 두 분의 성에 안 차는 것일 뿐이란다.”

“알고 있습니다…….”

율의 매끈한 꼬리가 내려갔다. 확실히 율이는 영아만큼 강한 신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중급 신수 정도려나……?

은월이 긴가민가하며 영아를 바라봤다.

“설마, 그 아이를 보내려는 셈인가?”

“그 아이?”

은월의 물음에 백령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무심하게 되물었다.

“그 아이가 지금 육지에 있을 리가…….”

“설마가 신수 잡는다죠. 그 아이라면 두 분 다 흔쾌히 보내주실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답니다.”

은월의 말에 영아가 여유롭게 답했다.

드르륵.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방문이 열렸다. 모든 이의 시선이 열린 방문을 향했다.

“때마침 왔군요.”

“부르셨습니까, 영아.”

아름답고 맑은 소년의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살짝 어려 보이는 체구. 인간의 나이로 치면 17살 정도 되지 않을까 싶은 앳된 얼굴. 아름다운 금발에 살짝 사나워 보이는 위로 올라간 눈. 연둣빛 눈동자.

영아와 비슷한 기운이 느껴지는 걸로 봐선…….

……황금 거북이?

미간을 찌푸리며 금발의 소년을 바라보던 백령이 찌푸렸던 미간을 도로 풀었다.

“오랜만에 보는군.”

“그간 무탈하셨습니까, 백령 님, 은월 님.”

“여전하군.”

그는 예의를 차려 백령과 은월에게 인사를 건넸다. 풍겨 오는 분위기도 그렇고, 심상치 않은 신수인 것만큼은 분명한 듯했다.

“이쪽 분은…….”

황금 거북이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의 연둣빛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돌리며 귀에 장식된 아름다운 귀걸이가 흔들렸다.

왠지 모르게 신성한 느낌이 드는 이상한 거북이. 이상하게도 그는 은월과 백령보다도 신성한 느낌이 한층 강했다.

“동쪽 땅의 작은 주인, 아리 님입니다, 수하.”

영아가 나를 대신해 그에게 알려주었다.

“그 유명한 백령 님의 아이로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서화원의 작은 주인이자 해안(海岸)의 관리자, 수하라고 합니다.”

서화원? 해안?

그러고 보니 일전에 은월에게 들은 기억이 있다. 네 땅의 주인과, 사법관과 행정관처럼 큰 영향력을 끼치는 자는 아니지만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해안의 관리자에 대해서.

바다와 육지를 이어주는 일을 하는 신수. 그를 해안의 관리자라 불렀다고 한다.

“그나저나…….”

나에 대한 그의 관심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가 날 바라본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고개를 홱, 돌려버렸기에.

“절 이 자리에 부르신 연유가 무엇입니까, 영아?”

“큰일은 아닌…….”

큰일이 아니라는 영아의 말에 백령과 은월, 그리고 굳어있던 자하까지 영아를 슬쩍 노려보았다.

“매우 큰 일입니다, 수하.”

“……?”

“아리 님의 저잣거리 안내를 맡을 신수를 찾고 있었답니다.”

“……예?”

“그리고, 수하가 적임자일 거라 생각합니다만.”

“지금 농담하십니까, 영아?”

“그럴 리가요.”

“무슨 겨우 그런 일을 제게…….”

“……입이 너무 자유분방하시군요.”

영아가 싱긋, 웃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백령과 은월쪽을 가리켰다.

“입은 조금 조심히 놀리시는 게 신상에 좋을 것 같습니다, 수하.”

두 호랑이의 모습을 본 수하가 당황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수하의 대답에 영아가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들으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어쨌든, 아리 님의 저잣거리 안내 겸 호위를 맡아주셨으면 합니다.”

“싫습니다.”

수하의 거절에 영아와 나를 제외한 모두가 고개를 들어 그를 노려보았다.

모두의 시선을 느꼈음이 분명한데, 수하는 태연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제가 왜 그런, 아니, 그 중한 일을 해야 합니까?”

아무도 그의 거절을 예상하지 못했기에, 방 안에는 짧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짧은 침묵을 깬 주인공은 다름 아닌 아까부터 굳어 있어 말이 없던 자하였다.

“헐. 우리 아리 님의 안내를 맡을 영광스러운 기회를 거부하다니, 역시 제가……!”

“시러.”

넌 아니야, 자하야.

차라리 저 황금 거북이 놈을 설득하고 말지.

역시 설득하는 데에는 동정심 유발이 최고겠지? 게다가 내 겉모습은 지금 아이 그 자체니까. 그럼, 그럼.

수하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의 비단으로 지어진 옷깃을 잡아끌었다.

그가 무심히 내 쪽을 내려다보았다.

“가치, 가자…….”

“……네?”

“저자꺼리, 가치 가자구…….”

“제가 왜?”

“너 아니묜 업단 말이야. 으응?”

최대한 불쌍한 체를 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후, 솔직히 이 정도 불쌍한 척했으면 동정심이 들었겠지?

이렇게까지 했는데, 안 넘어오면 넌 진짜 신수도 아니다, 신수도 아니야.

슬쩍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웬일인지 수하의 얼굴이 잔뜩 붉어져 있지 않은가.

……왠지 다른 의미로 넘어온 거 같은데.

이거 괜찮을까……?

수하가 세상 진지한 표정을 짓더니, 근엄하게 입을 열었다.

“절대 싫습니다.”

너 얼굴 빨개졌어, 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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