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옆에 있던 고양이 시녀가 눈을 비비며 자신의 눈을 의심하고 있는 듯해 보였다. 그녀가 비비던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도끼 눈을 했다.
“자, 자하 님……?!”
시녀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멍했던 정신이 서서히 돌아왔다.
뭐, 뭐야, 자하 쟤가 왜 여기 있어?
은월이 자하에게서 눈을 떼고 고개를 돌려 늑대들을 바라보았다.
“설마, 서찰을 보낸 이가…….”
“아, 네. 자하 님입니다.”
그제야 자하가 저리 가쁘게 달려오는 현재 상황이 이해가 갔다. 그리고 어이가 없는 두 호랑이의 모습에 자하의 배짱을 높게 평가내렸다.
자하가 미친 게 틀림없어.
아니, 애초에 제정신이 아니기는 했는데…….
대체 무슨 배짱으로 백령의 명을 거절하고 달려온 거래?
자하가 우리 앞에 당도하고 가쁜 숨을 내쉬었다. 숨을 고르자, 자신에게 꽂힌 차가운 시선을 의식했는지 식은땀을 닦으며 침을 꿀꺽 삼켰다.
“자하.”
백령의 차가운 어조에 자하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어찌 된 일인지 설명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네, 백령 님.”
자하가 굳은 다짐이라도 한 것마냥,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신에 찬 그의 맑은 눈동자에, 모두가 이목을 집중했다.
자하, 대체 그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거야?
그렇게 나도 그 자신감의 근거에 대해 의문을 품을 때 즈음, 자하가 굳세게 입을 열었다.
“아리 님이 자신을 지켜달라며, 따라와도 괜찮다고 제게 전했기 때문입니다.”
응? 뭣이?
“저는 아리 님의 호위하라 명을 받든 몸. 차마 아리 님의 명을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으으으응?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건가? 내 귀가 이상한 건가?
아니, 이거 꿈인가? 나 지금 꿈꾸고 있는 거야?
안타깝게도 내 귀는 지극히 멀쩡했고, 이건 꿈속 따위가 아닌 끔찍한 현실이었다.
말을 끝낸 자하가 침을 꿀꺽 삼켰다.
“아리가 그럴 리가 없는데. 사실이야, 아리야?”
은월이 내게 시선을 돌렸다.
저게 사실일 리가 있어? 날 뭐로 보는 거야!
억울함이 치밀어 올라, 어서 오해를 풀고자 청마에서 내려, 자하를 손가락질했다.
“아니……!”
“아리 님은 제게 분명 ‘괜찮다.’고 했습니다.”
“그건 마, 마자…….”
생각해보니 아까 자하 위로한답시고 그런 말을 한 것 같긴 하다.
하지만 이거랑 그건 다르다고! 내가 괜찮다고만 했지, 날 팔아먹어도 괜찮다고는 안 했다고, 이놈아!
억울함에 자하를 돌려보낼 궁리를 하는데, 백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의 뜻이 그렇다면, 그리하도록 하지.”
아니, 이 봐, 하얀 호랑이. 내 말을 끝까지 들어보지 않겠어?
저거 아니라니까! 이게 왜 이렇게 되는 건데! 날 그렇게 몰라?
억울함을 토로하려 입을 여는데, 늑대들이 비켜서며 우리를 안내했다.
“가지.”
백령의 말에 나를 제외한 모두가 자리에서 움직였다.
오로지 나 혼자만, 억울함에 발을 못 떼고 있었다.
“아, 아리 님……. 이제 가셔야 해요. 얼른 청마에 올라타셔요.”
시녀가 조심스럽게 날 들어 올리고 청마에 앉혔다. 바동거렸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놔 봐! 내가 지금 청마에 올라타게 생겼냐고!
너희 나를 그렇게 몰라? 어?
“아리 님, 어서 오셔요! 헤헤.”
저 멀리서 손을 흔들며 미소 짓는 자하를 보니 혈압이 올랐다.
아, 뒷골 당겨.
너무 화나서 이제 할 말을 잃었다. 그렇게 청마에 올라탄 채로 서쪽 땅에 발을 디뎠다.
***
서쪽 땅의 저잣거리처럼 보이는 곳에 도착하자, 저잣거리 입구 앞에 당도한 청마가 몸을 천천히 숙였다.
내리라는 뜻인가?
“여기서부턴 걸어가야 해.”
은월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고 청마에서 내렸다.
“쩡마야, 고마어…….”
청마가 기분 좋다는 듯 울었다. 고양이 시녀가 한쪽 손으론 포포를 안고, 한쪽 손으론 내 손을 잡으며 날 이끌었다.
저잣거리는 많은 신수로 북적였다. 처음 보는 광경에 눈을 반짝이며 이리저리 신기하다는 듯 둘러보자, 자하가 손뼉을 마주쳤다.
“그러고 보니 아리 님은 동쪽 땅의 저잣거리에도 나가보신 적이 없네요.”
“동쪽 땅에도 이런 곳이 있어?”
“당연하죠. 동쪽 땅은 서쪽 땅보다 더 큰걸요?”
아니, 그런 곳이 있으면 진작에 날 데려갔어야지!
눈을 깜빡이며 자하를 올려다보자, 자하의 입이 귀에 걸렸다.
“나중에 저와 함께 가…….”
“자하. 돌아가면 밀린 일이나 하는 게 어때?”
“은, 은월 님, 저 밀린 일 없는데요……?”
“없어?”
“……있습니다.”
둘의 대화에서 나는 단번에 은월이 자하에게 무슨 일을 줬는지 기억을 못 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하지만 제 발 저린 자하가 그걸 알 리가 없지.
쯧쯧, 원래였어도 도와줄 마음이 없었겠지만, 지금의 난 자하를 도와줄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다.
나쁜 자하. 바보 자하. 천치 자하.
아까 일이 떠올라 자하를 노려보자, 내 의도와는 달리 자하는 눈을 빛냈다.
“아리 님은 역시 저와 저잣거리를 가고 싶으신 거죠?”
“으응? 그럴 리가.”
“걱정 마세요, 저잣거리에서도 숨바꼭질할 수 있어요. 은월 님이 주신 일은 최대한 빨리 끝낼게요!”
……이쯤 되니 날 엿먹이려고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짜하.”
“네, 아리 님!”
“너 솔찍히 말해. 나 싫지?”
“전 아리 님께 모든 걸 바칠 수 있습니다.”
“고짓말.”
“진짜예요! 아리 님이 원하신다면 이 한 몸 당장이라도 아리 님께……!”
“피료 업써!”
자하의 계속되는 헛소리에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자하와 티격태격하는 사이, 모든 이의 발걸음이 큰 궁 앞에서 멈추었다.
호화스러워 보이는 궁은 저잣거리 중심에 있었는데, 강물로 둘러 쌓여 있는 궁만 다른 세상에 있는 것만 같았다.
대체 이런 곳에 누가 사는 걸까? 혹시 이게 홍화관?
눈을 반짝이며 궁 이곳저곳을 살피고 있는 도중, 은월이 그런 내 모습을 보곤 미소를 지었다.
“여기가 바로, 서화원. 신국에서 제일 유명한 약방이야.”
……약방이라고? 이 큰 궁이……?
상상도 못 한 궁의 정체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게 그 유명한 서화원이군요…….”
고양이 시녀의 말을 끝으로 궁의 마찰음이 들리며 궁의 대문이 천천히 열렸다.
근처에 있는 강 때문인지, 안개가 서렸다. 안개의 중심에는 신수로 보이는 검은 실루엣이 보였다. 서서히 안개가 걷히고, 문 앞에 서 있는 이의 정체가 서서히 드러났다.
“어머, 백령 님과 은월 님이 함께 저희 서화관에 들리시다니, 신기한 일이네요.”
진한 초록빛의 머리카락. 마치 바닷속에서 자란 미역과도 같은 색이었다. 아름답고 선한 자색 눈동자.
그녀에게서 풍기는 청아한 느낌에 한동안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천천히 내게 꽂혔다.
“아리 님, 처음 뵙겠습니다. 이곳, 서화원 약방 주인, 영아라고 합니다.”
느긋하고 여유로운, 정중한 말투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녀가 내게 고개를 숙였다.
백령과 은월에게는 하지 않는 인사를 내게 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나와 만난 게 이번이 처음이라 하는 인사치레 같았다.
그리고 처음 보는 내게만 인사하는 영아에 개의치 않아 하는 백령과 은월의 모습을 보고 어느 정도 지위가 있는 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분명 둘이 약방에 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일 것이다. 만약 영아가 중하급 신수였다면 백령과 은월에게 먼저 예의를 차려 인사를 했겠지.
게다가 이 큰 궁, 어느 정도 지위가 높은 신수임은 틀림없었다.
그런데 어떤 동물인 거지?
딱히 눈에 띄는 확연한 특징이 보이지 않았다.
“헌데, 어찌하여 백령 님과 은월 님이 친히 들르신 건지…….”
“설명하자면 복잡한데.”
“혹, 홍화관과 연관된 일인 겁니까?”
나긋한 말투의 질문에 어느 누구 하나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저희 서화원에 들르신 연유는 무엇이신지 여쭈어보아도 되겠습니까?”
“봐줬으면 하는 아이가 있어서.”
영아는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대화의 화제를 돌렸다. 깊게 파고들지 않겠다는 것 같았다.
은월의 대답에 고양이 시녀가 앞으로 나와 포포를 영아에게 내밀었다. 포포는 여전히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
“하급 여우 신수로군요.”
영아는 천천히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고양이 시녀가 내민 포포를 부드럽게 받아들었다.
“백령 님이 친히 서화원을 방문한 까닭이 이 아이였을 줄은 꿈에도 몰랐군요.”
“서론이 꽤 긴 것 같군.”
“죄송합니다, 백령 님. 워낙 특이한 조합이다 보니…….”
영아가 미소를 잃지 않은 채 고개를 숙였다.
포포를 살피던 영아가 다시 한번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녀가 머금고 있던 미소 또한 사라졌다.
“신력이 약한 하급 신수가 이렇게까지 기가 어지럽혀지다니, 처음 보는 증상이네요.”
“뽀뽀, 낫게 할 수 이써……?”
어딘지 부정적으로 보이는 영아의 말에 걱정이 되었다. 나의 말에 영아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특이한 상태다 보니, 맞는 약을 제조하는 데에는 시간이 좀 걸릴지 몰라도, 서화원에서 못 고치는 병은 없답니다, 아리 님.”
“다행이다…….”
“이 아이는 아리 님이 아끼는 아이인가요?”
“웅! 내가 주워써!”
“주, 주웠다고요?”
뽀뽀가 내 말을 듣는다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노발대발했을 소리지만 지금 지가 뭐 어쩌겠어?
나의 대답에 눈을 깜빡이던 영아가 포포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뒤돌아섰다.
“일단 저를 따라오시지요.”
영아가 궁 안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영아가 따라오라 했지만, 모두의 발걸음은 그대로였다.
응? 왜 다들 안 따라가는 거지?
나라도 발걸음을 먼저 떼야겠다 싶어서 움직이려는데, 그런 내 몸을 누군가가 잡아서 고정했다.
“아리야, 조금만 기다렸다 갈까?”
은월이었다. 영문을 모르겠지만 일단 은월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은월이 나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리고, 은월이 나를 붙잡고 있던 이유를 얼마 안 가 알 수 있었다.
느릿느릿 여유롭게 궁 안으로 들어가는 영아의 모습이 보였으니.
“서화원은 영아를 주인으로 받들고 있어서, 영아보다 먼저 궁 안으로 발을 못 디디게 되어 있어.”
“으응? 쩡말……?”
“응. 게다가 영아가 거북이 신수라서 꽤 걸음이 느리거든.”
아. 영아가 거북이 신수였구나. 어쩐지 여유롭고 느긋한 자태였다 했어.
영아는 다른 신수보다 조금 느릴 뿐이지, 거북이 신수라고 해서 느린 걸음이 답답해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여유로워 보이는 걸음에 우아함이 느껴졌다.
“이제 가도 될 것 같군.”
백령의 말에 발걸음을 움직였다. 영아를 따라 궁 안으로 들어서자, 대문이 저절로 닫혔다.
서화원 안은 내 생각보다 더 넓었다. 영아가 거북이라 그런지, 안에도 물이 흐르고 있었고, 매우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영아가 서화원 안에 있는 수많은 방 중, 한 군데에 들어갔다. 모두가 영아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섰다.
방 안에는 영아의 하인들로 보이는 자가 한 명 있었다.
“아, 영아 님! 안 그래도 드릴 말씀이…….”
“율아, 인사 올리거라.”
영아가 율이라는 아이가 볼 수 있도록 우리 앞에서 물러났다.
“헉, 동쪽 땅의 주인이신 백령 님과 사법관 은월 님, 그리고…….”
율이 나를 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 아이의 무례를 용서하세요,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라 아리 님에 대해 들은 바가 없답니다. 제가 미리 귀띔이라도 해주었어야 했는데…….”
“헉, 동쪽의 작은 주인님이신 아리 님이신가요?”
율이 나를 보며 눈을 빛냈다. 그 눈빛이 조금 부담스러운지라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헉, 인사 올립니다. 저는 영아 님을 보조하는 아직은 실력이 많이 부족한 약사, 율이라고 합니다.”
율이 짜고 친 반응인 것마냥 소스라치게 놀람과 동시에 인사말과 함께 허리를 숙였다.
머리가 바닥에 닿을 것처럼 깍듯이 숙였다. 그가 고개를 숙이자, 그의 매끈한 꼬리가 눈에 들어왔다.
도마뱀? 아, 아니다, 저건…….
“헤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리 님!”
도롱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