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며칠째 이어지고 있는 평화로운 나날. 그렇게 싸운 이후로 포포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어디에 있는 건지, 뭘 하는지조차 알 방도가 없었다.
대체 어딜 간 거야, 얘는.
아니, 아니다. 생각하지 말자.
“……야.”
“…….”
“아리야?”
“으, 응?”
여느 때와 같이 정자 안, 나의 맞은편에 앉아서 지켜보던 은월이 지그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아, 내가 은월이 부르는 소리를 못 들은 거구나.
쓸데없는 여우 생각에 빠져 버려서.
왠지 모르게 화가 난다. 절대 내가 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가 아니다. 절대 여우가 옆에 없어서 수업에 집중을 못 하는 게 아니다.
여우가 너무 신경 쓰여서 그런 것 또한, 절대 절대 아니다.
그냥 오랜만의 수업이라서 정신이 딴 데에 팔려있는 게 틀림없다.
허구한 날 나 끌고 다니는 요망하고 간사하기 짝이 없는 여우 녀석이 신경 쓰일 리가 없지, 암, 그렇고말고.
“청화관.”
“으응?”
“그저께까지는 청화관에 들어오지는 못하고 근처를 맴돌고 있었는데, 지금은 어디 갔는지 모르겠네.”
은월이 따뜻한 눈빛으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회색빛 눈이 오늘따라 유난히 유해 보였다.
“누가 구런 요우룰!”
“난 여우라고 얘기한 적 없는데.”
은월이 눈을 휘며 미소 지었다. 그의 입가에 있는 보조개가 예쁘게 들어갔다. 그의 아름다운 얼굴에 피어난 미소를 보고 드는 생각은 단 한 가지.
아, 당했다.
멍해진 나의 표정을 보던 은월이 소매에서 향과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네가 좋아하잖아.”
문득 향과를 보고 떠오른 은월의 말에 멈칫했다.
“안 먹어?”
그건 아니지, 이 귀한걸.
은월의 물음에 고개를 저으며 그의 손에 있던 향과를 받아들었다.
은월이 내게 향과를 하나 더 내밀었다.
“전혀 집중을 못 하니까.”
“응?”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하지.”
그 말을 끝으로 은월이 정자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으, 으널, 어디 가……?”
무의식적으로 은월의 옷자락을 쥐어 잡았다. 은월의 회색빛 눈이 다정하게 나를 내려다보았다.
“백령한테.”
백령? 왜?
표정에 드러난 내 의문에 은월의 큰 손이 내 머리로 향했다. 다정하게 쓸어넘기는 부드러운 감촉에 마음이 놓였다.
“좀 중요한 일이 있어서.”
그 말을 끝으로 쥐었던 옷자락을 놓았고, 은월은 백령의 집무실 쪽으로 향했다.
은월이 주고 간 향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뽀뽀 갖다줄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야, 뭐가 예쁘다고! 그런 요망한 여우가!
흥.
……일단 소매에 챙겨 넣어야겠다.
향과를 소매에 넣고 나 혼자 남겨진 정자에서 일어났다.
……청화관이라.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발걸음이 절로 청화관으로 향했다.
난 그냥, 은월이 없는 틈을 타 나만의 크고 소중한 비밀기지에 가는 것뿐이야!
암, 그렇고말고.
절대, 절대 여우 찾으러 가는 거 아니다.
***
청화관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포포 특유의 작고 하찮은 기운이 느껴졌다.
……너무나도 적나라하다, 이 기운.
어째 전보다 더 하찮아진 거 같은데…….
평소보다 포포의 기운이 더욱 하찮고 약한 것은 내가 포포에게 화가 났기 때문일까?
하지만 누가 봐도 이건 포포의 기운이 맞다.
마치 ‘저 포포에요, 여기 좀 봐주세요!’라고 외치는 듯한 기운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데, 청화관 안이 아닌 바깥에서 기운이 느껴졌다.
뭐지? 왜 안에 안 들어가고 있는 거야?
기운이 느껴지는 곳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포포의 기운이 점점 선명히 느껴지는 곳은 청화관 뒤편,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뜰이었다.
나무 밑에 엎어져 있는 복슬복슬한 꼬리를 보니 알맞게 찾아온 게 맞는 것 같다.
“뽀……!”
무의식적으로 포포를 부를 뻔한 입을 재빨리 막고,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포포는 내가 다가가는 동안 여전히 엎어진 채로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얘가 왜 이래……?
포포는 평소에도 내가 다가가기만 하면 경기를 일으키며 경계하는 탓에 당황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리 엎어져 있다니…….
흠칫.
무언의 위화감에 얼른 포포의 곁으로 달려갔다.
“뽀뽀!”
엎어져 있는 포포에게로 한 걸음에 다가가자, 그제야 오늘따라 포포의 기운이 약하게 느껴진 까닭을 알 수 있었다.
포포의 몸이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포포가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뽀뽀, 뽀뽀!”
나의 부름에도 포포는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그가 달뜬 숨을 내쉬자, 불안함에 내 머리는 점점 차갑게 식어갔다.
신수가 아픈 걸 보는 건 처음이었다. 전의 자하가 다쳤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멍하니 있을 시간이 없었다. 서둘러 주위를 둘러보았다.
“짜하!”
참으로 신기하게도, 이 상황에 떠오르는 이름은 백령도, 은월도 아닌 자하였다.
“짜하아!”
곧이어 자하의 기운이 느껴지고, 익숙하지만 반가운 그의 모습이 나타났다.
“아, 아리 님?”
그의 감정을 대변하듯 자하의 귀가 뾰족하게 솟아있었다. 내 부름에 어지간히도 놀란 듯해 보였다.
그가 놀란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한 번도 자신을 부를만한 일이 없었고, 나는 그를 부르지 않았으니까.
언제부터였는지,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본능적으로 알게 된 걸지도 모른다. 자하는 내 곁을 언제나 맴돌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내가 부르면 한걸음에 달려올 것을.
고개를 들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뽀뽀, 뽀뽀가 아파…….”
“네? 저 여우가요?”
나의 말에 자하가 화들짝 놀라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자하가 포포를 안아 들었다. 그제야 눈에 그렁그렁 머금어져 있던 눈을 깜빡였다. 그러자 눈물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뽀뽀, 뽀뽀가…….”
“아리 님, 진정하세요. 괜찮을 겁니다.”
그런 나를 자하가 다정하게 다독여주었다.
“일단 이 여우 데리고 백령 님께 가보는 게 좋겠어요. 백령 님이라면 분명 원인을 알 거예요.”
자하가 포포를 안아 들고 내게 한쪽 손을 내밀었다.
나는 훌쩍이며 처음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처음 알았다.
자하의 손이 참 따뜻하다는 것을.
***
“백령 님!”
무슨 정신으로 청화관에서부터 백령의 집무실까지 달려왔는지 모르겠다.
아직 나의 짧은 다리로는 빠른 자하의 발걸음을 따라가지 못했고, 결국 자하가 나도 함께 안아 들었다. 그 후 정신을 차려보니 백령의 집무실 코 앞이었다.
멍한 표정으로 자하를 따라 백령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집무실 안에는 백령과 은월이 앉아 있었다. 무언의 대화를 나누고 있었지만, 우리가 들어오고 둘의 시선이 일제히 우리를 향하며 대화는 자연히 끊기게 되었다.
“무슨 일이지?”
두 호랑이가 자하와 나, 그리고 포포의 모습을 보며 이 상황을 이해하려 하는 듯해 보였다.
둘을 번갈아 보던 내가 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입을 열었다.
“뽀뽀가, 아파…….”
눈물은 말라 더 이상 흐르지 않았지만 내 울상을 본 호랑이 두 마리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리 줘 봐.”
은월이 자하에게 두 팔을 내밀었다. 그에 자하가 곧바로 달려가 포포를 건네주었다. 자하를 졸졸 따라 뛰어, 은월 앞에 당도한 나는 작은 고개를 올려 은월을 바라보았다.
그의 회색빛 눈에 오묘하고도 신비로운 보랏빛 빛이 감돌았다.
“신력이 어지럽혀져서, 스스로 제어를 못 하고 있어.”
은월의 눈이 본래의 회색빛으로 돌아왔다. 은월이 포포를 다시 자하에게 건네고, 백령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일이 이렇게 되네.”
“하필이면…….”
“선택지가 없네. 우연이 겹쳐도 이렇게 겹치다니.”
“귀찮아졌군.”
백령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의 푸른 눈에는 짜증이 역력했다.
척 보기에도 백령의 심기가 좋지 않아 보였다.
자하와 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두 호랑이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저어…… 무슨 일이 있나요?”
참다못한 자하가 조심스레 두 호랑이에게 물었다. 두 호랑이는 짧은 침묵을 지켰다. 곧이어 입을 연 건 백색 호랑이, 즉, 백령이었다.
“바랑에게서 서찰이 왔더군.”
“네?”
자하의 짧은 물음에 대답한 건 흑색 호랑이였다.
“서쪽 땅으로 오라고.”
은월의 대답에 자하의 귀가 쫑긋, 세워졌다. 자하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말을 더듬었다.
“서, 서, 서쪽 땅에는, 왜요? 설마 바랑 님이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와서 우리보고 오라 가라 하는 건 아닐 거고…….”
똥개가 보낸 서찰이 그런 내용이었으면 이미 백령이 갈가리 찢어놓지 않았을까, 자하야?
자하의 말에 두 호랑이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더욱 자하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서, 설마 비천 님이……?”
비천? 어디서 들어본 듯한 이름인데?
얼마 안 가, 며칠 전 은월이랑 자하가 한 번 언급한 적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뭐 하는 신수인지는 모르지만, 은월이 언급을 꺼렸었지.
근데 저 이름이 지금 여기서 왜 나오는 거야?
그 대답은 머지않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자하의 표정이 상당히 좋지 않았기에.
“비천 님이, 아리 님을 뵙길 원하는 건가요?”
“정확해.”
뭐? 누가 누굴 만나? 비천이라는 신수랑 내가, 만나야 한다고?
그니까 그 뭐 하는 신수인지도 모르는 신수가 날 만나길 원한다는 거잖아?
“비쩐, 누구야……?”
자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날 내려다본 자하의 표정은 언제 안 좋았냐는 듯, 부드럽게 펴졌다.
“음, 비천 님은.”
“으응…….”
“어디서부터 설명해 드려야 할지…….”
자하가 곤란해하자 지켜보던 은월이 날 내려다보며 답했다.
“홍화관의 주인이지.”
홍화관? 홍화관이라면…….
은월이 며칠 전, 내게 설명해준 적이 있었다. 신국의 세 기관, 그중 하나.
그 중 홍화관은 행정 업무를 다루는 기관.
그러니까 즉, 비천이라는 신수는…… 신국의 행정관이라는 거잖아?
신국의 행정관이 왜 나를……?
“아니, 그것보다 비천, 그 망할……. 아, 아니, 비천 님은 대체 왜 아리 님을……?”
내가 눈만 깜빡거리고 있자, 자하가 노발대발하기 시작했다.
“그 뱀의 속내는 도무지 알 수가 없군. 왜 굳이 내 아이라 알려진 아리에게 이리 집착하는지.”
“그렇다고 비천의 초대를 무시할 순 없어, 백령. 홍화관의 주인이니까.”
은월의 말에 백령은 썩 마음에 들지 않는지 묵묵부답이었다.
은월이 한숨을 쉬며 백령에게 향해 있던 고개를 자하와 내 쪽으로 틀었다.
“그런데, 얜 어디에서 이 모양 이 꼴로 있었던 거야? 며칠 동안 얼굴도 안 비추더니.”
“청아간에, 어퍼져 이써써…….”
“청화관에?”
은월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다, 이런 상태인데 왜 청화관 안으로는 들어오질 않은 거지?”
“뭐,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요, 은월 님.”
은월이 포포에게서 눈을 떼고 자하를 바라보았다.
“아리 님과 저는 저 여우가 어떤 상태인지 잘 몰랐으니까요…….”
“일단 신속하게 데려와서 다행이다.”
은월의 말에 자하가 뿌듯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일은 칭찬할 만 하군.”
백령의 칭찬에 자하가 머쓱해 하며 귀를 쫑긋, 세웠다.
이번 일에 대해선 나도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장해, 우리 자하.
기분이 상당히 좋아 보이는 자하가 주절주절 떠들기 시작했다.
“휴, 큰일 날 뻔했어요. 은월 님이 아리 님의 행방을 일러주시지 않으셨다면 저는 아마…….”
자하가 삐질삐질 땀을 닦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뭐? 은월이 내 행방을 알려줘?
모두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자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기분이 상당히 좋아진 자하는 우리의 표정을 보지 못한 채 말을 이어나갔다.
“휴, 분명 아리 님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는데 잠깐 하품한 사이에 사라지실 줄…….”
자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어딘가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 어린 기운 탓일 것이다.
“사라졌다?”
백령의 차가운 눈초리에 자하가 황급히 제 입을 막았다.
“자하, 분명 아리 곁에서 떨어지지 말라고 했을 텐데?”
자하의 고양이와 똑 닮은 노란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꼬리 또한 안절부절못하며 위로 아래로 흔들렸다.
은월이 그런 자하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휴, 자하 바보.
웬일로 믿음직스러워지나 했더니…….
자하는 역시 자하였다.
장하다는 말 취소다, 자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