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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님의 딸이 되었습니다 (33)화 (33/167)

33.

진중하게 바랑을 보며 침을 뱉어줄까, 말까, 고민에 빠져 있을 때 즈음, 은월이 손에 들고 있던 빨간 두루마리를 바랑에게 던졌다.

“아야.”

정확히 바랑의 머리에 던져진 두루마리를 잡은 바랑이 맞지도 않아 놓고 볼멘소리를 내었다.

맞지도 않았으면서, 엄살은.

“서쪽 땅 일은 걱정 마. 자하가 잘 보고 있을걸.”

“아니! 왜 하필 그놈이냐고! 야, 이미 유능한 내 직속 부하, 하운이 아주, 자알, 처리하고 있단 말이다!”

바랑의 말에 은월의 회색빛 눈이 반짝였다.

“흐음, 그래?”

“그래, 우리 하운이 얼마나 똑똑한데! 일 처리는 나보다 훨씬 더 잘해.”

……자랑이다, 똥개야.

반사적으로 나와 은월이 동시에 바랑을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큼큼, 아무튼 자하 녀석보다 훨씬 더…….”

“그렇다는 건 며칠 정도는 궁에 안 들어가도 괜찮다는 거네.”

“어?”

은월이 눈을 휘며 특유의 웃음을 지어 보였다.

“뭐 해, 안 가고?”

“어, 어……?”

“잘 부탁해, 홍화관.”

“응?”

“어차피 네 집 근처잖아.”

홍화관이 똥개 집 근처였구나…….

새로운 지식을 머릿속에 넣고 바랑을 바라보니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었다.

이런, 이런, 안 되겠어. 내가 얼른 현실을 일깨워줘야지.

나는 바랑이 가는 홍화관이란 곳이 어떤 곳인지, 누가 사는지조차 모르지만 하나만은 확실했다.

당분간 바랑은 내 근처에 얼씬도 못 할 것이란 걸.

“똔깨, 빠빠!”

내 인사를 끝으로 바랑은 은월에 의해 청화관에서 질질 끌려나가게 되었다.

“아리, 아리야? 아리야!”

***

‘이렇게 끌려가는 것도 나쁘지 않네. 내 발로 안 걸어도 되고.’

아리를 외치다 지친 바랑이 은월에게 몸을 맡기고 얌전히 질질 끌려가고 있을 때였다.

퍽.

청화관 입구 앞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바랑이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은월을 올려다보았다.

“아, 씨, 야!”

“이제 네 발로 걸어. 어딜 감히 무임승차야?”

“냉정한 놈. 퉷.”

은월이 무표정으로 바랑을 바라보자, 바랑이 재빨리 말을 돌렸다.

“아, 아니, 안 그래도 내 발로 걸어가려 했다고.”

은월은 바랑에게 꽂혀 있던 시선을 떼고 길을 따라 걸었다.

바랑이 무어라 구시렁대며 은월의 뒤를 따랐다. 바랑의 구시렁거림이 어느 정도 익숙한 은월은 들려오는 소리에 개의치 않았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한 거 아니냐고.”

은월이 아무런 대꾸도 해주지 않자, 점점 바랑이 목소리를 높였다.

“왜 하필이면 홍화관으로 가래! 나보고!”

바랑이 머리를 긁었다. 그의 뾰족한 귀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왜 하필이면 홍화관이 서쪽 땅에 지어진 건지.’

그는 홍화관이 매우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홍화관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청화관과 크게 다를 바 없으니. 오히려 그런 기관이 있는 땅이란 것은 좋은 의미였다. 그런데도 짜증 나는 이유는 홍화관의 부가적인 부분.

“진짜 내가 가야 해? 놀고먹는 다른 신수들도 많잖아! 굳이, 이 늙은 내가 가야 되냐?”

“내가 아는 놀고먹는 신수는 너 하난데.”

그런 바랑의 절규에도 은월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힐끗 보던 바랑은 기가 막혔다.

“뻥치지 마. 다른 노는 신수 많잖냐.”

“어, 그런데 걔들은 홍화관에 못 들어가겠지. 얼른 이랑 녀석 좀 키워서 자리 물려주던가.”

‘나도 그편이 더 좋고.’

은월이 나지막하게 말을 덧붙였다.

지나치게 맞는 말인지라 아무런 대꾸도 못 하던 바랑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나쁜 놈.”

은월은 그저 묵묵히 걸을 뿐이었다. 얼른 바랑을 보내버리고 청화관으로 돌아가서 남은 일을 처리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래야 아리의 수업에도 차질이 생기지 않을 테니까.

“은월.”

익숙한 목소리에 은월과 바랑의 발걸음이 멈췄다.

“……백령.”

은월을 불러세운 자는 다름 아닌 백령이었다.

“무슨 일이지?”

“청화관이 꽤 시끄럽더군.”

“아아, 이제 곧 치워버릴 거니까, 걱정 마.”

은월이 바랑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제야 백령이 은월의 뒤에 서 있던 바랑을 발견했다.

“백령, 온 김에 내 말 좀 들어봐라!”

바랑이 씩씩대며 백령을 불러세웠다.

백령은 애써 무시하고 싶었던 상대가 말을 걸어오니, 상당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뭐지?”

“아니, 글쎄, 은월이 나보고 홍화관에 이걸 전달하라는 거잖아!”

그게 뭐?

백령은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듯 바랑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백령의 초점은 다른 데에 맞춰져 있었다.

“내가 동쪽 땅에는 발붙이지 말라 했을 텐데.”

“……이런 매정한 호랑이 놈들, 자기들도 비천 만나는 거 꺼리는 거면서.”

바랑이 황급히 화제를 돌리려고 일부러 그들이 꺼리는, 아니, 세 신수가 모두 꺼리는 자의 이름을 입 밖에 꺼냈다.

‘비천’이라는 말에 은월과 백령이 잠시간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기에 바랑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아무리 성격 좋은 나라도 그 미친놈은 만나는 거 자체가 꺼려진다고.”

백령과 은월은 앞의 쓸데없는 사족이 심히 거슬렸지만, 굳이 무어라 하지 않았다.

둘이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자, 바랑의 입이 다시 삐죽하니 튀어나왔다.

“너무하네, 그럼 나 아리라도 데려가면 안 되냐?”

바랑의 말에 백령과 은월이 동시에 그를 찢어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에 바랑이 당황하며 재빨리 입을 열었다.

“아, 아니, 어차피 언젠간 만나야 하잖아! 서쪽 땅도 구경시켜 줄 겸…….”

“입 다물어.”

“죽고 싶은가 보군.”

호랑이들의 말에 바랑은 바로 꼬리를 내렸다.

‘이런 호랑이 새끼들, 무서워 죽겠고만.’

“언제까지고 비천과 만나게 하는 걸 막을 순 없잖아?”

백령의 푸른 눈이 일렁였다.

“안 그래도 계속해서 압박이 들어오고 있는 마당에.”

바랑이 들고 있던 붉은 두루마리를 내밀었다.

“이거, 홍화관의 초대장을 거절하는 내용이잖아.”

두루마리의 내용을 본 적 없는 바랑이 확신에 찬 표정으로 둘을 바라보았다. 그에 은월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언뜻 보기에는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가 상당히 짜증이 난 상태라는 걸 백령과 바랑이 모를 리 없었다.

“그 머리로 일 좀 하지? 쓸데없는 데에 쓰지 말고.”

“쓸데없는 데라니, 이거 보고 화난 비천의 힘을 내가 감당할 수 있을지, 없을지 짐작도 안 가는데.”

백령과 은월이 처음으로 바랑의 말에 어느 정도 수긍이 됐다.

“못 감당한다.”

“못 감당할걸.”

백령과 은월이 동시에 무심히 대답했다. 바랑의 뾰족한 늑대 귀가 세워졌다.

“……근데 나보고 가라고?”

“어, 그렇지.”

은월의 대답에 백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늦출 순 있을 테니.”

바랑의 표정은 세상이 무너져 내린 듯이 일그러졌다.

“……너흰 노인 공경, 연장자에 대한 배려, 뭐 이런 거 없냐?”

아무 의미 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바랑을 보는 두 호랑이의 표정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새파랗게 어린놈들이, 하여간 너무하다니까.’

본인이 불리할 때마다 신수에게 아무런 의미 없는 나이를 들먹이는 바랑을 보며 은월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게, 서쪽 땅으로 돌아가서 일이나 하지, 청화관에 기어들어 오긴, 왜 기어들어 와?”

은월의 입가에 특유의 미소가 걸렸다. 그에 바랑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이런 악귀 같은 놈들…….”

백령이 품 안에서 서찰을 꺼냈다. 곧이어 서찰은 푸른 빛으로 감싸였다가 그 빛은 점점 사그라들었다.

빛이 완전히 사라지자, 서찰에는 푸른 인장이 찍혀 있었다.

서찰을 바랑에게 건네자, 바랑이 눈을 깜빡이며 서찰을 바라보았다.

‘뭐 어쩌라고?’

바랑이 서찰을 바라보다 집어 들었다.

“비천이 당장이라도 동쪽 땅을 밟으려고 하거나.”

“으응……?”

“동쪽 땅에 올 기미가 조금이라도 보이면 산에게 전해라.”

“동쪽 땅에? 비천이?”

바랑이 잠시간 비천을 떠올려보았다.

“그래, 비천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긴 하지.”

바랑이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동쪽 땅에 더 이상 뱀의 방문은 사양하지.”

백령이 피곤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보던 은월 또한 굉장한 피로감이 느껴졌다.

***

오줌 마려운 똥강아지마냥 안절부절못하는 포포의 모습에 정신이 사나웠다.

저 요망한 여우가 또 왜 저래?

“뽀뽀야, 모해?”

총총 걸어 다니는 포포의 꼬리를 잡아끌었다. 포포는 꼬리가 잡힌 줄도 모르고 계속 다리를 움직였다.

“뽀!뽀!야!”

“어, 어?”

또박또박 크게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포포가 발걸음을 멈추고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뭔데 그렇게 심각해?

“아리야. 싸부가 왜 이리 안 오실까?”

“으응……?”

“혹시, 그 똥개 자식이 우리 싸부한테 무슨 짓이라도 한 거 아닐까?”

얘, 또 쓸데없는 걱정 하네.

뽀뽀야, 은월이 똥개한테 뭘 했으면 했지, 똥개가 감히 은월한테 개길 일은 없단다.

“으널이 더 쎄!”

“그건 알아! 우리 싸부가 똥개 따위보다 약할 리 없지.”

뭐지, 이 여우?

그럼 대체 뭐가 문제라는 거야?

포포가 고개를 저으며 심각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그 똥개는 제정신이 아니잖아. 고양이, 아니, 스라소니보다 심각하던 걸…….”

뽀뽀야, 네가 아무리 눈치가 없고, 예의가 없고, 겁대가리를 상실했어도 사람, 아니, 신수 보는 눈만큼은 정확하구나.

짝, 짝, 짝.

포포의 의외인 면모에 감탄하며 박수가 절로 나왔다.

“뭐, 뭐야, 그 박수는?”

뭐긴 뭐야, 네 귀여움 다음으로 긍정적인 면모를 본 나의 감탄에 반사적으로 나온 박수인 거지.

“그냥.”

환하게 웃으며 포포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당황한 포포의 흰 볼이 연분홍빛으로 물들어갔다.

“뭐, 뭐야! 기분 나빠!”

뭐, 인마?

기분 나빠아아?

이 여우가, 기껏 기특하게 생각해서 내 비싼 손뼉도 쳐줬는데, 뭐라고?

괘씸하다, 괘씸해.

잡고 있는 꼬리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자, 포포가 볼멘소리를 내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 아……! 아리, 너 이거 학대야!”

뭐? 학대애애?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어가지고.

이게 학대면, 네가 여태까지 나한테 한 건 뭔데!

넌 나한테 정서적인 학대를 가한 게 한두 번이 아니야, 이 여우야!

여태까지 포포에게 당한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생각해보니 참으로 서럽다. 내가 데려왔고, 백령의 궁에 머물 수 있게 해주었으며, 맛있는 다과도 잔뜩 주고, 제일 예뻐해 주고 놀아줬는데.

왜 나한테만 맨날 저렇게 투덜거리는 거야?

이 정도면 너 괘씸죄 성립이야, 이 여우야!

“뽀뽀, 바보! 너 미어!”

“씨이, 나도 아리 너, 미워!”

포포의 붉은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씨이, 너만 울 줄 아냐? 나도 울 줄 안다!

포포의 삐죽 나온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짜증 나게도 그 모습이 너무나도 귀여웠다.

아니야, 아리야. 이번에 아주 혼구멍을 내주자. 이것 또한 어른 된 도리로서 해야 하는 과업인 것이다. 암, 그렇고말고.

절대, 내가 어린애처럼 섭섭해서 그러는 거 아니야. 버릇을 들이기 위한 거라고!

힐끔, 포포 쪽으로 눈을 굴리다 포포와 눈이 마주쳐 버렸다.

“흥!”

“흥!”

동시에 서로 고개를 돌렸다.

“……너희들 왜 그래?”

언제 온 건지, 돌아온 은월이 서로 눈도 안 마주치는 우리 둘을 턱을 괴곤 번갈아 보았다.

그러다 은월과 나의 눈이 마주쳤다. 그의 회색빛 눈동자가 차분히 나를 응시했다.

“모, 모가.”

퉁명스러운 내 말에 은월이 고개를 돌려 포포를 바라보았다. 은월의 시선에 포포가 적잖게 당황했다.

“아무 일도 없었어, 싸부. 절대 나랑 아리랑 싸웠다던가 그런 거 아니야!”

……저, 저 바보 여우.

저거 일부러 그러는 거 맞지, 그렇지?

반사적으로 포포에게 고개가 돌아갔다. 그리고 곧바로 무의식적으로 입이 열렸다.

“바보야, 구걸 말하면 어떠캐!”

“뭐, 뭐가!”

“너어느은, 정마알…….”

“뭐, 뭐!”

됐다, 내가 저 우매한 여우랑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냐.

포포를 한심하게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 너 지금 나 무시한 거냐?”

“에휴.”

“이, 이……! 감히 백 년 묵은 여우인 나를 무시해?”

백 년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백 년이 뭐 떠먹여 주냐? 맨날 우려먹고 있어!

은월은 그저 우리 둘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뿐이었다.

뭔진 모르겠지만, 은월, 너도 괘씸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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