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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님의 딸이 되었습니다 (31)화 (31/167)

31.

오늘은 은월이 청화관에서 할 일이 있다고 한다. 무엇인지 알려주진 않았지만, 대충 짐작은 할 수 있었다.

어제 자하가 전달한 수많은 두루마리를 떠올렸다.

아마 어제 온 그 두루마리를 읽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런고로 나와 포포는 간만에 찾아온 휴식 시간을 내 방에서 얌전히 보내는 중이다.

“아리, 너. 어제부터 뭔가 이상해.”

“모가.”

“온종일 멍하니 있잖아.”

“구런가?”

“너도 싸부가 보고 싶은 거지?”

무슨 소리야. 덕분에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고 있는 중인데!

“아, 안니, 절때 아니야…….”

“그럼 왜 그러는데?”

왜 그러긴, 여러 생각이 들어서 그렇지.

은월이 의외로 나를 생각해줘서 놀랍다고 해야 하나…….

왠지 모를 고마움과 놀라움이 뒤섞여 마음이 복잡하다, 이 말이야!

물론 포포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을 마음은 전혀 없었다. 포포 또한 대답을 기다리다 지친 건지, 딴짓을 하며 혼자 잘 놀고 있다.

그래, 포포야. 혼란스러운 누님 건드리지 말고 혼자 놀아.

나의 속마음이 무색하게도 얼마 안 가 포포는 내 옷자락을 잡더니 칭얼거리며 늘어섰다.

“왜, 왜!”

“산책하러 가자!”

“시러!”

“갔다가 오는 길에 형님한테도 가보자.”

이, 이 속 보이는 녀석.

물론 백령이라면 나도 보고 싶긴 하다.

그렇기에 군말 않고 포포의 손에 질질 끌려갔다.

절대 내게 선택권이 없어서 고분고분하게 끌려가고 있는 거 아니다.

끌려가면서 포포의 복슬복슬한 꼬리를 보다 고뇌에 빠졌다.

……분명 처음에는 내가 저 꼬리를 잡고 질질 끌고 다녔던 거 같은데…….

어쩌다 상황이 역전이 되어 버린 거지?

아이고, 내 신세야.

“헤헤.”

……좋단다.

포포와 복도를 빠져나올 때 즈음, 멀리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어, 아리 님!”

“여, 여너!”

오랜만에 만난 여노였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며 초록빛의 머리칼이 흔들렸다.

“요즘 아리 님을 곁에서 보살펴 드리지 못해 죄송해요.”

“갠차나…….”

조금 섭섭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은월이 오고 난 후 바빠진 시녀와 하인들을 보면 충분히 이해해줄 수 있는 일이었다.

“은월 님의 명으로 잠시간 남쪽 땅에 머물렀었거든요.”

남쪽 땅에? 여노가?

그냥 은월이 와서 바쁜 거 아니었어?

뜻밖의 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뜨자, 여노가 다정하게 내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왜 여노를 굳이 남쪽 땅에 보낸 걸까?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한 눈으로 여노를 바라보자, 여노가 미소를 지었다.

“아리 님을 제외하면 그 흑기를 본 유일한 목격자이기도 하잖아요.”

아.

여노의 말에 탄식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은월은 남쪽 땅을 의심하고 있는 거구나.

그제야 여노가 남쪽 땅에 머무른 이유, 은월이 매일 밥 먹듯이 남쪽 땅을 다녀오는 이유에 대해 알 수 있었다.

단순히 나래가 사고를 많이 쳐서 밥 먹듯이 드나드는 게 아니었어.

아니, 은월의 의심이 확신이 된다면 더 큰 사고긴 하지…….

“은월 님 수업은 어떠세요, 아리 님?”

“……조아.”

“장해요. 벌써 신력을 개방하시고, 은월 님께 수업을 들으시다니.”

“그롬, 그롬.”

“기특하십니다.”

끄덕끄덕.

여노의 칭찬에 볼이 화끈거렸다. 오랜만에 듣는 칭찬들이 썩 나쁘지 않았다.

큼큼, 역시 여노라니까.

자하 놈이랑은 태도부터가 달라, 그럼 그럼.

그냥 자하 보내고 여노 오면 안 되나?

왜 하필 그때 자하가 아니라 여노가 봐서!

입이 자동으로 삐죽 튀어나왔다.

짝.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여노가 갑자기 무엇이라도 떠오른 듯이 손뼉을 마주쳤다.

“아, 아리 님, 혹시 은월 님께 가시는 길이신가요?”

“으응……?”

“은월 님께 드려야 할 보고서가 있는데, 오늘 마침 청화관에 계신다고 들어서……”

응, 아니야, 돌아가.

평소라면 흔쾌히 여노의 부탁을 들어주었겠지만, 오늘은 상황이 여의치 않다. 그렇기에 고개를 저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오느른, 으널 안 만…….”

“우리가 전해줄게! 헤헤.”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 간사한 여우가 뭐라는 거야, 지금?

멍한 표정으로 여우의 꼬락서니를 보는 데 참으로 가관이다.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여노에게 두루마리를 친히 받는 것이 아닌가.

저, 저 여우가……!

이를 바득바득 갈며 포포를 한참 노려보고 있던 찰나, 여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그런데 ‘우리’라뇨……? 이 아이도 청화관에 출입할 수 있다는 건가요?”

“응?”

여노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포포를 바라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포포는 두루마리를 받아들고는 방방 뛰며 청화관으로 갈 생각에 들 떠 있는 듯해 보였다.

못할 건 또 뭐야. 애초에 포포를 만난 것도 청화관인데.

“여너?”

나의 말에 여노가 포포에게 두던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아리 님.”

아닌 게 아닌 거 같은데…….

여노를 빤히 바라보자, 여노가 망설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청화관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거든요.”

“으응?”

“자하 님도, 아루 님도 청화관 안으로 발을 붙이지 못하세요. 하물며 아직 나래 님과 이랑 님도……. 그런데, 어떻게 하급 신수가 청화관에…….”

여노와 내가 동시에 포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포포는 두루마리를 흔들며 여노와 나의 대화에 일말의 관심도 주지 않았다. 아니, 우리의 시선을 눈치 못 채고 있다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아, 벌써 시간이……. 잘 부탁드려요, 포포, 아리 님.”

여노가 나와 포포를 번갈아 보더니 작은 보폭으로 어디론가 달려갔다.

“가자, 아리야!”

포포가 두루마리를 머리 위에 올리고는 이빨을 드러내며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내가 못 살아, 정말.

***

청화관까지 오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포포는 은월을 만날 생각에 깽깽이걸음으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흐흥.”

흐흥 같은 소리 하네.

청화관에 다다르자, 문득 여노가 아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무나 들어갈 수 없다라…….

그렇다면 포포는 어째서 들어갈 수 있는 걸까?

애초에 하급 신수는 언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왜 포포는 저런 주옥같은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거지?

수많은 의문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겉보기에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작고 하찮은 푸른 빛의 여우, 포포.

흐음…….

걸음을 멈추고 그를 빤히 바라보자, 그 또한 걸음을 멈추더니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응? 왜, 아리야?”

“뽀뽀, 너어…….”

“응?”

“……안니야.”

무어라 물어봐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 함부로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나는 작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일단은 현재 상황에 집중하자.

그래, 굳이 은월을 만나러 가지 않아도 되는 평화로운 날에 도움 안 되는 여우 덕분에 불행하게도 청화관으로 향할 수밖에 없는 현재 상황을.

다시 발걸음을 옮기자, 포포도 나를 따라 움직였다.

“싸부우!”

여우가 청화관에 들어서자마자 엉덩이를 흔들며 세상이 떠나가라, 은월을 애타게 찾았다.

이 목소리를 들었을 은월의 표정이 머릿속에 자동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상상 그대로의 은월이 곧 우리 앞에 나타났다.

“뭐야, 너네?”

당혹함으로 물든 은월의 회색 눈동자. 청화관 안에서 나온 그의 모습은 꽤 오랜만에 피곤함에 절어 있었다.

“……너희가 왜 여기에 있어?”

나도 오고 싶어서 온 거 아니야, 은월아…….

내 눈빛을 봐주겠니?

최대한 애처로운 눈망울을 지어 보였지만, 잔혹하게도 은월에게 전달되지는 못한 듯했다.

“싸부, 헤헤!”

얘가 했어, 얘가. 내가 한 거 아니야!

모든 사건의 발단은 이 여우라고!

포포가 은월에게 깡충깡충 뛰어가더니 작은 두 손으로 공손하게 두루마리를 내밀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웃긴지, 저절로 웃음이 터졌다.

“뭐야, 이건, 또?”

은월이 하품이 나오는 입을 한 손으로 막고, 한 손으로 포포가 내미는 두루마리를 가리키며 물었다.

“여너가…….”

“초록색 강아지가 갖다주래!”

누구보고 초록색 강아지라는 거야, 저 푸른색 여우가!

“여노? 아아, 남쪽 땅의 보고서인가.”

은월이 두루마리를 받아들고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멀뚱멀뚱 서 있는 우리 둘을 보고는 고개를 다시 내밀었다.

“뭐해, 안 들어오고? 계속 거기 서 있을 거야?”

나와 포포는 그렇게 나란히, 은월 따라 방 안으로 향했다.

따라 들어온 방 안에는 어제 본 두루마리들이 데굴데굴 굴러다니고 있었다.

하나라도 밟으면 미끄러지겠어…….

그때였다.

“아악.”

포포가 두루마리 하나를 밟고 콩, 하고 넘어졌다.

어휴, 조심 좀 하지…….

“아악!”

쯔쯧, 하여간 멍청한 여우 같으니라고.

포포가 정확히 3초 간격으로 두루마리를 밟고 미끄러져 넘어졌다.

……저것도 아무나 못 한다. 포포니까 가능한 거지.

연신 들리는 큰 소리에도 은월은 무시하곤 두루마리를 펼쳤다.

보고서라…….

조용히 은월의 뒤로 이동했다.

남쪽 땅에 있었댔지, 분명?

은월의 눈이 움직이며 두루마리를 읽어 내려갔다.

나도 글자 정도는 알 수 있…….

……하나도 모르겠다.

내가 원래 이렇게 멍청했던가……?

요즈음 멍청한 여우랑 놀아서 그런가……? 바보력이 옮은 건가?

몇 개는 알 거 같은데, 앞의 글자를 모르니 읽을 수가 없다.

“흐음…….”

은월이 두루마리를 내려놓고 고개를 숙이더니 잠시간 생각에 빠졌다.

“왜 그래, 싸부?”

자꾸 넘어지자 열심히 두루마리를 정리하던 포포가 귀를 쫑긋 세웠다.

“생각보다 꼬리 잡기가 쉽지 않네.”

“꼬리……?”

포포가 흠칫하며 자신의 꼬리를 뒤로 감췄다.

……그거 아니야, 여우야.

“뽀뽀…….”

“으, 응?”

“바버…….”

아무래도 요즘 포포랑 놀았더니 바보력이 점점 옮고 있는 것 같다.

한심하게 여우를 내려다보자, 포포가 꼬리를 바짝 세웠다.

“뭐, 뭐!”

어휴, 말을 말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자 포포가 인상을 팍, 찌푸리며 나를 노려보았다.

“아리, 너! 속으로 나 비웃었지?”

이 눈치 없는 자식이 웬일로 쓸데없이 내 속마음을 알아맞힌 거지?

왜 이럴 때만 눈치가 발동하는 거지?

야, 너 솔직히 말해. 선택적 눈치 장애지?

“아, 안니야…….”

“그래? 헤헤.”

“으응…….”

“아무튼, 싸부, 꼬, 꼬리는 왜……?”

포포의 되지도 않는 소리에도 은월은 여전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남쪽 땅……. 이렇게 되면 반란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데…….”

반란?

이게 무슨 소리지?

은월의 입에서 영문 모를 말들이 튀어나왔다.

기다린다고? 반란을?

“으널.”

“…….”

“으널!”

“응?”

나의 외침에 은월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샌각해?”

은월이 내게 알려줄 리 만무했지만 그래도 일단 물어보기로 했다.

은월이 잠시간 고민하더니, 입꼬리를 올렸다.

“일이 더 늘겠다.”

“응?”

“짜증 나네.”

“으응……?”

“이런 생각?”

은월이 눈을 접으며 특유의 미소를 흘렸다. 그의 회색빛 눈동자가 밝게 빛났다.

어디서 거짓말이야, 이 호랑이 자식이!

아니, 어쩌면 저것도 맞는 말일 것 같긴 한데…….

“진짠데.”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보자, 그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알아, 안다고!

근데 내가 물어본 건 그게 아니란 말이야!

“으너……!”

은월의 이름을 외치려던 찰나, 나보다 훨씬 크고,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청화관에 울려 퍼졌다.

“은월!!! 야, 이 나쁜 녀석아!!!”

……틀림없는 바랑의 목소리였다.

“하아.”

“하아.”

나와 은월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너, 인마! 은월!”

끔찍하게도 아까보다 바랑의 목소리가 훨씬 더 크게 와닿았다.

저 늑대는 지치지도 않고 꾸준하게 동쪽 땅에 드나드네.

“응? 저게 무슨 소리야?”

그렇지. 포포는 처음 보겠구나…….

포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우리 둘을 번갈아 보았다.

굳이 미리 알려줄 필요는 없어 보인다……. 바랑의 기운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으니.

어쩐지 요즘 바랑이 너무 조용하다 했다.

참으로 안타깝게도 아루랑 술래잡기하는 건 끝이 난 모양이다.

“이번엔 뭐로 굴리지…….”

은월이 혼잣말을 하며 머리를 짚었다.

이번엔 더 멀리 보내버려, 은월아. 다시는 동쪽 땅에 얼씬도 못 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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