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정말 왜 이러는 걸까…….
“뭘 그렇게 생각해, 아리야?”
그래, 너 말이다, 너.
사화가 돌아간 후에도 은월의 미소는 가시질 않았다.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날 바라보고 있는 은월은, 내게 부담을 주기에 충분했다.
정자에는 나와 은월, 포포만이 나란히 앉아 있었고, 결국 참다못한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고마해, 으널.”
“뭘?”
저, 저……. 능청스러운 호랑이 녀석.
뾰로통하게 볼을 부풀렸다. 그런데도 은월은 조금의 표정 변화도 보이지 않았지만.
“난 지금 상당히 기분이 좋아, 아리야.”
어쩌라고.
은월이 지금 상당히 기분이 좋은 게 나랑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보았지만 은월은 그에 대한 대답을 주지 않은 채 아까와 같은 불변의 표정을 보일 뿐이었다.
대체 뭐 어떡하라는 거…….
그때, 불현듯 백령과 은월의 대화가 떠올랐다.
‘이번 조사를 왜 반대하는지는 의문이지만.’
그래, 맞아. 사화가 뭔가를 반대한다고 했어.
그리고 그 당시, 나는 누가 봐도 그 이야기에 대해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궁금해했다.
그러다 은월과 눈을 마주친 게 한두 번이 아니긴 하지.
상당히 기분이 좋은 은월이라면, 내게 친절히 알려줄 수도 있다.
조심스럽게 조그마한 입을 열었다.
“으널…….”
“왜?”
“사하가, 머해써?”
자세히 묻는 것보단 이쪽이 더 자연스러울 것 같았다. 나의 물음에 은월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의 회색빛 눈이 반짝였다.
항상 생각하는 거지만, 은월도 참 더럽게 잘생겼다.
그의 외모에 새삼스레 감탄하고 있자,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사를 반대했지.”
그건 나도 알아, 인마.
그거 말고 더 자세한 걸 알려달라고!
“쪼사……?”
답답한 마음에 노골적으로 조사에 초점을 맞췄다.
“응, 조사.”
그러니까 무슨 조사냐고!
속에서 열불이 났지만, 애써 마음을 가다듬고 은월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흐음…….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잠시 망설이던 은월은, 고개를 숙이고 턱에 손을 가져다 대더니 고뇌에 빠졌다.
그리고 얼마 안 가, 고개를 다시 들었다.
“과거의 행적을 찾는 거라고 해둘게.”
……응?
이 호랑이가 지금 날 갖고 노는 건가?
나랑 말장난하자는 건가?
은월의 찝찝한 대답에 무의식적으로 정색을 했다. 내가 뭔 짓을 해도 표정을 유지하던 은월의 표정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대답이 마음에 안 들어?”
“으응.”
너라면 마음에 들겠냐? 나랑 장난해?
나의 진지한 표정을 본 은월은 잠시 고민하더니, 다시 한번 말을 덧붙였다.
“시호라는 신수랑 관련된 일이야.”
어? 시호?
굉장히 오랜만에 듣는 이름에 바로 표정이 풀렸다.
의외의 인물에 대한 것이기 때문인지, 감이 아예 잡히지 않기 때문인지……. 더 이상 은월에게 무언가를 물어봐선 안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물어본다 해도 은월이 대놓고 알려줄 리는 없지만.
“시호? 어디서 들어본 듯한 이름인데…….”
태평한 여우는 옆에서 작은 의문들을 던졌지만, 그 누구도 그에 신경 쓰지 않았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꼬리털 안 뽑힌 거나 감사히 여겨라, 뽀뽀야.
***
“헥, 헥. 은월 님…….”
자하가 땀을 흘리며 정자로 달려왔다.
……무언의 종이 두루마리들을 가득 안은 채로.
저게 다 뭐람.
나와 포포는 두루마리들을 보며 놀라기 바빴다. 그와 상반되게도 은월은 자하가 가져온 두루마리들에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누가 보낸 거야?”
“……청아 님이요.”
“다?”
“아뇨, 한두 개는 산 님이에요.”
청아? 산?
처음 듣는 낯선 이름들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에 포포도 나를 따라 고개를 옆으로 갸우뚱했다.
“그게 누구야?”
조금 더 둘의 대화를 들어보고 어떤 신수인지 유추하고 싶었으나, 옆에 있는 눈치 없는 여우는 아무 망설임 없이 은월과 자하에게 물음을 던졌다.
자하와 은월이 잠시간 인상을 찌푸렸지만, 그 찰나의 순간을 여우가 봤을 리 없지.
“헤헤.”
그래, 봤으면 저렇게 당당하고 뻔뻔하게 웃을 수 있을 리 없다.
자하가 들고 온 두루마리들을 조심스럽게 정자에 놓았다.
“음……. 청아 님과 산 님은 자잘한 법들을 집행하는 은월 님의 대리인 같은 신수지.”
직속 부하라는 거구나.
포포와 나는 같은 타이밍에 고개를 끄덕였다.
“산 님은 비천 님의 명을 수행할 때도 많긴 하지만.”
비천은 또 누구야?
모르는 신수들의 이름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자, 약간은 복잡하게 느껴졌다.
“그건 또 누군데?”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건지, 포포가 코를 긁으며 천연덕스레 물었다.
“비천 님은…….”
“자하.”
비천이라는 신수에 관해 설명하려던 자하의 입을 막은 건 다름 아닌 은월이었다. 그의 검은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렸다.
“이것들, 청화관에다 던져놔.”
“아, 네.”
언제부터인지 자하가 가져온 두루마리들을 대충 훑어보던 은월이 들고 있던 두루마리를 제자리에 던졌다. 그중 두루마리 하나가 데구루루, 구르더니 바닥으로 떨어졌다.
떨어진 두루마리를 줍던 자하가, 도로 손에서 놓았다.
“……청화관에요?”
“어.”
“제가요?”
“문제 있어?”
턱을 괴고 있던 은월이 무언가를 깨달은 듯,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아.”
“은월 님!”
“문제 있네.”
“……일단 서재에 둘게요.”
자하는 한숨을 쉬며 두루마리들을 하나씩 모으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찝찝한 의문이 하나 생겼다.
……그런데 시선은 왜 나한테 꽂혀 있는 거야?
그것도 엄청나게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자하의 황금빛 눈동자에서 빛이라도 뿜어져 나올 것만 같았다.
한마디로, 부담스러워 죽을 것 같다.
저거 진짜 왜 저래?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보자, 그가 두루마리를 모으는 걸 뒤로 하고 대놓고 나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뭐 잘못 먹었나?
“아리 님, 아리 님.”
자하의 뭉툭한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얘 진짜 왜 이래?
아니, 이게 자하한텐 정상이긴 하다.
“저한테 하고 싶은 말 없으세요?”
이게 뭔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인가.
자하의 헛소리에 인상이 더욱 찌푸려졌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꼬리의 흔들림 또한 멈추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살랑거린다.
하고 싶은 말이라…….
너, 제정신인 날이 있기는 해……?
아, 아니야, 아리야. 어른스러운 내가 참자. 아직 어린 애야, 어린 애.
“업써.”
애써 고개를 저으며 선의의 거짓말을 시전했다. 하지만 그에 자하의 귀가 축, 처졌다.
“아리 니이임. 진짜 없어요?”
얘가 진짜 왜 이래? 기껏 생각해서 없다고 해줬구만.
“업써!”
“진짜, 진짜, 진짜요?”
아니, 이게 속고만 살았나. 왜 자꾸 현실 부정을 하는 거야?
……혹시 원하는 대답을 미리 정해두기라도 한 걸까?
그의 행동으로 미루어 보아, 확실히 내게 듣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다. 자하가 내게 원하는 말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자하가 듣고 가장 기뻐했던 말이 뭐더라……?
“짜하…….”
“네, 네!”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의 귀가 쫑긋 세워졌다. 기대감에 부푼 그의 모습을 보며 애써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었다.
“바버……?”
나의 말에 자하의 귀가 빛의 속도로 축, 하고 처졌다.
아니, 뭔데! 뭐냐고!
답답해 죽을 것 같았다. 뭐길래 저렇게까지 듣고 싶어 하고, 귀까지 저렇게 쳐졌단 말인가.
“흐윽.”
방금 사랑 고백했다가 차인 비련한 남정네마냥 자하가 울상을 지었다.
……저 정도면 진짜 어디 문제라도 생긴 거 아니야?
진심으로 그에 대해 고민하고 걱정할 때 즈음, 자하가 상처받은 듯한 황금빛 눈을 나와 마주했다,
뭔진 모르지만 내가 나쁜 년 같잖아…….
“머, 머야……. 말해바.”
“아리 님…….”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렇게 찝찝한 분위기를 잡아?
물론 나와 자하를 제외한 나머지는 자하의 심각성에 초지일관 일말의 관심조차 두고 있지 않다.
그리고 그에 대답하듯, 자하의 입에선 정말 신박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저 안 보고 싶었어요?”
한동안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게 틀림없다.
제발 잘못 들은 거라고 해줘…….
하지만 그가 누구인가? 우리의 자하 아니던가.
현실 부정이 무색하게도 곧이어 자하가 내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네, 네? 저 안 보고 싶으셨어요, 아리 님?”
“왜 구래…….”
얜 또 어디서 뭘 주워 들었길래 나한테 이런 시련을 주는 걸까…….
은월 성격상 하고 많은 이들 중 굳이 자하와 쓸데없는 잡담을 한 것은 아닐 테고, 얜 대체 어디서 뭘 들은 거야?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의 의문은 금방 풀리게 되었다.
“저 여우한테 은월 님은 보고 싶어서 불러 달라고 했다면서요!”
“으응……?”
“흐윽, 아리 님, 저, 자하는 보고 싶지 않으셨던 건가요?”
“아, 안니…….”
“무려 34시간 13분 2초나 못 봤는데…….”
그걸 또 세고 있었어?
아니,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진지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에 자하가 기대에 찬 듯이 눈을 반짝였다.
“짜하.”
“네!”
“바버! 몽총이!”
“아, 아리 님……?”
어떻게 믿을 게 없어서 저런 여우 말을 믿어?
아니, 그것보다 왜 자꾸 나 괴롭혀!
나의 진심 어린 눈초리에 자하가 꽁꽁 얼어버린 얼음처럼 굳었다.
“이제 가서 일이나 해.”
은월은 그런 자하의 모습을 보더니, 마지막 남은 두루마리를 자하의 품에 안겨주며 그를 돌려보냈다.
“헤헤.”
이 와중에도 포포는 뭐가 그리 좋은지, 꼬리를 살랑거리며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무튼 이 모든 게 태평하게 코를 긁고 있는 저 여우 탓이렸다?
더 이상 참지 못한 나는 오물거리며 과자를 먹는 포포의 꼬리를 잡아챘다.
과자는 또 언제 먹고 있었대.
“아야, 왜, 왜 그래, 아리야…….”
나의 과격한 손놀림에 포포가 적잖게 당황하며 손에 들고 있던 과자를 떨어트렸다.
너야말로 대체 나한테 왜 그래, 이 화상아!
“나빠써, 뽀뽀!”
“힝, 왜애.”
이게 울먹이면 단 줄 알아?
포포가 울상을 지으며 날 올려다보았다. 그의 크고 붉은 눈동자에 내 모습이 비쳤다.
어휴, 진짜 내가 못 살아.
잡고 있던 꼬리를 놓자, 포포가 재빨리 내게서 멀어졌다.
이번 한 번만 봐준다, 여우야.
“히잉……. 아리 무서워.”
……봐주지 말까?
속이 부글거려 폭발하기 직전, 무언가가 내 입속으로 들어왔다.
익숙한 향과 맛, 그러나 미묘하게 느껴지는 게 달랐다. ……이건 틀림없는 향과였다.
고개를 들어 은월을 바라보았다.
“기분 좀 풀어, 아리야.”
“우움…….”
향과로 인해 가득 찬 내 작은 입은 무어라 발음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간식에 넘어가는 어린애 취급 하지 마!
향과로 인해 입속에 달콤한 향이 퍼졌다. 향과가 입 안에서 녹아들어 사라질 때 즈음, 부글거리던 속 또한 가라앉아 있었다.
왠지 모르게 분하다.
“으널, 햔가 참 조아해…….”
구하기 쉬운 것도 아니라던데, 이걸 맨날 구해오는 거 보면 정말 향과에 대한 사랑이 대단하다고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응?”
의외였다. 그냥 웃으며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긍정할 줄 알았던 그가 나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향과를 좋아하니까 매일 그렇게 남쪽 땅에서 사 오는 거 아니야?
눈을 깜빡이며 은월의 반응에 당황을 감출 수 없었다.
가면 뚝딱, 사 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분명 동선을 좀 더 낭비해야 할 텐데…….
나는 은월이 향과를 좋아하기에 매일 사 오는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항상 그의 소매에서 향과가 나오는 것에 대해 크게 의의를 두지 않고 있었다.
“향과라…….”
그러나 곧이어 이어진 은월의 대답은 나의 예상과 정반대였다.
“별로.”
“어……?”
“있으면 가끔 요깃거리로 먹기도 하는데, 딱히 찾아 먹을 만큼 좋아하진 않는데?”
“으응……?”
그럼 대체 왜 사 오는 거야, 맨날? 항상 소매에 몇 개씩 들어 있던데…….
“네가 좋아하잖아.”
……어?
은월이 눈을 휘며 웃었다. 그의 회색빛 눈동자가 유독 아름답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