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다행히 사화는 포포의 행방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포포가 자리를 불편해했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간과한 게 한 가지 있었으니, 그것은 그가 포포라는 것이다.
암만 그래 봤자 우리 뽀뽀는 백령 ‘형님’을 두고 물러나진 않는다고, 사화야.
포포에 대해 한참을 모르는 사화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은월은 빨리 나와서 이 뱀을 데리고 가버리란 말이다.
“백령 님, 아리 님의 성장은 날이 갈수록 신기하네요.”
사화가 백령을 바라보며 티 없이 맑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백령이 아무런 반응도 않자, 사화가 특유의 미소를 잃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곧 어엿한 신수가 되시겠어요. 그렇죠, 백령 님?”
백령은 사화의 답을 바라는 듯한 말에도 아무런 답도 주지 않은 채, 지루하다는 듯 시선을 다른 데로 두고 있었다.
“사화.”
“네, 백령 님.”
그렇기에 무심하게 그녀를 부르는 소리에도 사화는 크게 기뻐하는 듯해 보였다.
“꽤 시끄럽군.”
“주의하겠습니다.”
그녀는 백령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간, 마음에 안 든다니까.
백령은 그런 사화의 태도에 익숙한 듯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나는 사화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성숙한 신수지만, 미호처럼 연륜이 있어 보이지는 않은 앳된 얼굴. 백령 앞이라 그런지 살짝 홍조가 올라온 뺨. 칠흑처럼 어두운 차분한 검은 머리칼.
뱀 신수 아니랄까 봐, 뱀의 고혹적인 황금빛 눈동자까지.
일전에 시녀들이 하는 소리를 몰래 들은 바로는, 사화에게 목매는 남자 신수가 한둘이 아니라고 들었다.
특히 사화는 성체가 되자마자 북쪽 땅의 주인 자리에 올랐으니, 명성 또한 대단하다 들었다.
물론, 백령이나 은월만큼은 아니겠지만.
그러고 보면 사화도 어지간히 나이가 어린 신수이긴 하겠네.
예전에 은월이 알려준 바에 의하면, 사화는 백령보다도 훨씬 늦게 태어난 신수라고 했으니…….
어째서 언뜻 보기에 완벽한 그녀가 백령에게 이렇게까지 목을 매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둘 사이에 내가 모르는 큰 사건이라도 있었던 걸까?
사화를 보며 조그마한 의문을 품고 있을 때, 그녀와 내 눈이 정확히 마주쳤다.
“아리 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사화의 아름다운 미소는 겉보기엔 퍽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속은 그렇지 않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물음에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거또.”
나의 대답에도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는 내게서 떨어지질 않았다. 무언가가 나를 옥죄는 듯한 느낌에 흠칫하며 몸이 가늘게 떨렸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신 건가요?”
사화가 눈을 접으며 웃었다. 그녀의 웃음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거 뭐야? 기분 나빠…….
“사화.”
백령이 그녀를 불렀다. 그에 사화가 내게서 시선을 떼고 백령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이상한 느낌이 점점 가셨다.
“오해는 마세요, 백령 님. 어릴 때부터 속마음을 숨기는 버릇은 매우 좋지 않답니다. 저는 일종의 교육을 했을 뿐이에요.”
그걸 네 입으로 말한다고?
나는 단언할 수 있다. 내가 속마음을 숨기는 것보다 그녀가 숨기고 있는 것이 훨씬 많을 것이란 걸.
그리고, 사화에게 애 취급받은 것은 무엇보다 기분이 나빴다. 대놓고 자기보다 아래라 말하는 것 같아서.
“네가 그럴 이유는 없다.”
백령의 목소리가 꽤 낮아졌다. 그리고 그걸 사화가 눈치채지 못할 리 만무했다.
사화가 조용히 미소를 띤 채로 찻잔을 들어 한 모금 입에 갖다 댔다.
차를 한 모금 넘긴 사화가 천천히 백령과 눈을 마주쳤다.
“네, 백령 님.”
사화의 대답을 마지막으로 백령의 집무실 안에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제 그녀는 내게 눈길을 주지 않았고, 나 또한 아까의 느낌이 너무나도 꺼림칙하기에 그녀의 눈을 마주할 수 없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지만, 백령의 집무실 안에는 묘한 긴장감이 돌았다.
힐끔.
맞은 편을 곁눈질로 흘겼다. 사화는 묵묵하고 평온한 표정으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녀의 차가 넘어가는 소리가 몇 번 들리고, 문이 열리며 오랜 침묵이 깨졌다.
“오랜만이야, 사화.”
문을 열고 들어온 신수는 다름 아닌 은월이었다. 사화에 집중하느라 은월의 기운을 못 느낀 탓에 그의 등장에 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으, 으널!”
이렇게 반가울 수가.
은월의 뒤에 쫄래쫄래 따라오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포포였다.
“헥, 싸부, 너, 너무 빨라.”
포포가 은월이 잡아놓은 집무실 문 안으로 들어오며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우리 뽀뽀, 대견해.
포포를 보던 나는 재빨리 사화의 안색을 살폈다.
아주 잠시였지만 상황을 파악한 사화의 얼굴이 찌푸려지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흥, 네 맘대로 일이 흘러갈 거 같아?
“온 지 꽤 지났다고 들었는데, 아직도 안 갔네?”
은월이 다가오며 사화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은월의 시선은 내게 향해 있는 걸까?
“그럼요, 북쪽 땅의 주인 된 자로서 사법관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그냥 갈 순 없잖아요.”
사화의 말에 은월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인사가 중요한 건 아닐 텐데.”
조금 화가 난 듯한 어조의 목소리.
오랫동안 은월을 봐 온 나는 알 수 있었다. 은월이 그녀에게 꽤 화가 나 있다는 것을.
“그럼 무엇이 중요한 건가요?”
사화가 미소로 답했다. 그에 은월도 미소를 지었다.
뭐야, 이 두 신수.
둘이 뭔가 있는 건가? 아니, 사화 쟤는 호랑이들이랑 뭔 사정이 있는 거야?
“난 네게 꽤 감사하고 있었어. 바랑과 나래와는 달리 사고 한 번 안 치고 말 잘 듣는 신수였으니까. 높은 평가를 하고 있었지.”
“감사합니다, 은월 님.”
“근데 이번 건에선 왜 이렇게 고집을 피우지?”
은월의 목소리가 눈에 띄게 낮아졌다. 이건 은월을 잘 아는 나뿐만 아니라, 아마 이 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신수가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가 지금 상당히 화가 난 상태라고.
눈치라고는 더럽게 없는 포포의 꼬리마저 흔들렸다.
포포가 내게로 다급히 총총거리며 뛰어오더니, 내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뭐야, 우리 싸부 왜 화났어?”
……그것도 귓속말이라고 하는 거니, 뽀뽀야?
정말 이게 귓속말이라고 알고 있다면 포포의 문제는 정말로 심각하다. 옆에 있는 백령은 물론, 맞은 편 사화, 아니, 그냥 이 방에 있는 모두가 포포의 우렁찬 목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모라.”
난들 아냐. 너네 싸부한테 물어봐.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저 시커먼 호랑이와 뱀 속을 내가 어떻게 알아.
포포의 그런 귓속말, 아니, 외침에도 사화의 표정은 변함없었다.
“북쪽 땅의 주인 된 자로서,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정말 그게 북쪽 땅의 뜻이라는 거지?”
“네, 은월 님.”
은월이 어이없다는 듯 탄식을 내뱉었다. 그가 자신의 차분한 검은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그에도 사화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차를 즐겼다.
“언제나 동쪽 땅의 차를 음미할 수 있는 건 영광이네요.”
사화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들고 있던 찻잔은 깔끔하게 비어 있었다.
“오늘은 실례가 많았습니다, 백령 님.”
백령은 사화의 인사말에도 그녀를 바라보지 않았다.
“북쪽 땅을 조사하고 싶다면, 그만한 대가를 지급하셔야 할 것입니다.”
사화의 말의 모든 게 이해가 되었다.
지금 북쪽 땅을 조사하고 싶은데, 그녀가 허가를 내주고 있지 않다는 말이잖아?
근데 백령에게 그런 걸 말해서 뭐 해? 어차피 조사 쪽 담당은 은월인데.
뭐에 대한 조사를 말하는 거지? 흑기인가?
“사화.”
은월이 그녀를 불러세웠다. 그에 사화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은월 님, 이것에 대한 사안은 제게 강제로 할 수 없습니다.”
“이해가 안 되네.”
은월의 회색빛 눈동자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은월 님, 백령 님…….”
사화가 말을 멈추더니 천천히 고개를 돌려 앉아 있는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아리 님.”
사화가 뒤를 돌아, 백령의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또각또각.
그녀의 품위 있는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그녀의 기운이 사라지자, 은월이 우리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사화가 이걸 막을 줄은 몰랐네.”
“동감이군.”
백령이 무심한 얼굴로 은월의 말에 동감을 표했다. 은월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사화가 내 건 조건이 뭐라고?”
은월이 ‘어디 들어나 보자.’라는 말투로 묻자, 백령이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두루마리를 집어 은월에게 던졌다.
은월이 두루마리를 펼치고는, 눈으로 훑으며 대강 읽어보았다.
“헛소리가 늘었더군.”
백령이 눈을 움직이며 두루마리를 읽고 있는 은월에게 설명을 보탰다.
“그러네, 죄다 개소리네.”
은월이 동감을 표한 뒤, 다 읽지도 않은 채 두루마리를 집무실 구석으로 던졌다.
“어떡할 거야?”
은월이 입꼬리를 올리며 백령을 바라보았다.
“은월.”
백령의 말에 은월이 흥미롭다는 듯 그의 푸른 눈과 마주했다. 은월은 가만히 백령의 이어지는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네가 보기엔 사화가 진심으로 이 조건을 내걸었을 거라 생각하나?”
백령의 말에 은월이 눈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지.”
“그래.”
“이번 조사를 왜 반대하는지는 의문이지만.”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이 호랑이들?
둘의 의미심장한 대화를 듣던 나는 답답하다 못해 복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너희만 알고 있지 말고 나도 좀 알자고!
흑기에 관한 조사라면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반대한다면 수상쩍어 보일 게 눈에 훤하지 않은가.
아, 화나네. 그냥 대놓고 물어봐?
잠시간 어떻게 물어봐야 저 호랑이 녀석들이 내게 알려줄까 고민을 시작했다.
아니, 아니다. 대놓고 물어본다고 한들 쟤들이 알려줄까?
은월이라면 친절히 알려줄지도…….
고개를 들어 은월을 바라보았다. 마침 은월도 백령에게 향해 있던 시선을 떼고 고개를 돌렸다.
뭐, 뭐야……. 은월 독심술도 할 줄 아는 건가?
그러나 은월의 환한 미소를 보며 내 생각이 틀려먹었다는 걸 인지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날 부른 이유가 뭐야, 아리야?”
은월이 다정하게 묻자, 내 시선은 절로 포포에게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이 눈치 없는 여우 같으니라고!
나의 살벌한 눈빛을 느끼지 못한 눈치 없는 여우는 은월의 미소에 자랑스레 꼬리를 흔들고 있을 뿐이었다.
저, 저……, 꼬리 안 내려, 인마?
내 속마음을 알 리 없는 포포는 여전히 내 쪽으론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
저 여우, 언젠가 꼬리 털 다 뽑힐 거다…….
“아리가 부른다길래, 하던 일도 자하한테 맡기고 왔는데.”
포포에게 온갖 저주를 퍼붓고 있는데, 은월이 자세를 낮춰 나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아, 이걸 어떻게 해?
‘빨리 나타나서 사화 좀 내쫓으라고 찾았어.’
……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이리저리 눈을 굴려보았다. 내가 은월을 찾을 이유가 뭐가 있지? 차근히 생각해보자.
……전혀 없다.
아무리 이유를 쥐어짜네 보려 했지만, 이미 머릿속은 백지장이 된 후였다.
“맞아, 싸부 왜 불렀어, 아리야?”
포포가 마냥 신난다는 듯 헤실대기 바빴다. 웃는 낯에 침 뱉기가 쉽지 않다지만, 나는 지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포포의 낯짝에 침을 뱉고 싶은 심정이었다.
너, 너……, 두고 보자, 이 요망한 여우.
의도치 않게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구게에…….”
일단 아무 말이나 내뱉고 보자. 그게 내 신상에 좋을 것 같다…….
“구냥, 보, 보고 시퍼써…….”
물론 의심할 여지도 없는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은월은 그걸 알 도리가 없지.
“그래?”
은월의 눈이 특유의 반달 모양으로 휘었다. 양심의 가책이 느껴져 무거운 입을 겨우 천천히 열었다.
“으응…….”
말을 이어가면서도 포포에 대한 원망이 잦아들지 않았다. 입이 저절로 꿈틀거렸다.
진짜, 꼬리 털 다 뽑아버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