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어쩌다 이렇게 됐지?
어쩌다 상황이 이렇게 되어버린 거냐고!
대체 왜?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한 거야?
잠시간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내 기억 속의 난 자잘한 잘못들 말고는 누군가에게 원한을 살 일 따위 한 적이 없었다.
특히, 요망한 여우한테는 더더욱.
허탈한 표정으로 현재 근심의 원인인 요망한 여우 녀석을 바라보았다.
“이고, 놔!”
“헤헤.”
포포가 나의 외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 손을 잡아끌었다.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내가 포포를 질질 끌고 다녔는데, 지금은 입장이 완전히 뒤바뀌어 버렸다.
저번에 끌고 간 그 길 그대로 내가 포포에게 질질 끌려가고 있으니까.
이 쪼그마한 놈이, 손힘은 또 더럽게 세다.
“……뽀뽀야.”
“왜?”
“내가, 잘 모 해써…….”
“뭐가?”
포포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을 지었다. 포포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고, 저 여우는 진심으로 나에게 악감정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게 더 문제다.
진심으로 날 끌고 다니는 게 좋다는 뜻이고, 앞으로도 계속될 예정이라는 거잖아!
바삐 걸음을 움직이던 포포가 익숙한 장소에서 발을 멈췄다.
아니나 다를까, 포포가 나의 손을 잡아끌고 당도한 곳은 백령의 집무실 문 앞이었다.
포포가 급 진지한 표정을 짓더니, 문 앞으로 다가가, 본인의 몽실몽실한 여우 귀를 갖다 댔다.
유심히 백령의 집무실 안 소리를 도청하던 포포의 귀가 쫑긋, 세워졌다.
“……형님, 지금 누구랑 대화 중이신가?”
형님 같은 소리 하네.
우리 백령이 왜 네 형님이야!
저런 요망한 여우 녀석.
팔짱을 끼고 괜히 다른 데로 시선을 돌리며 혀를 찼다.
잠깐씩 반짝반짝한 눈으로 여전히 집무실 문에 귀를 갖다 댄 포포의 모습을 눈으로 흘겨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포포의 귀가 부르르, 떨렸다. 이내 포포가 인상을 찌푸리며 내 쪽으로 시선을 틀었다.
“어……? ‘사화’가 누구야?”
“머……?”
고개를 다시 돌리고 곧장 포포 옆에 가서 붙었다.
사화? 사화라고?
내가 아는 그 사화?
포포를 따라 귀를 바짝 갖다 대고 집무실 안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몇 초간의 시간이 지나고, 천천히 집무실 안의 소리가 귀에 전달되기 시작했다.
“백령 님, 하오나…….”
“그만하지.”
그래, 저 간드러진 요망한 목소리는 사화가 분명하다.
저 우아한 척하는 요망한 뱀 같으니라고!
틀림없다, 틀림없어. 저건 사화가 맞다.
내가 저 뱀의 시커먼 속을 모를 줄 알아?
“야, 뽀뽀야.”
“응?”
여전히 문에 귀를 바짝 붙인 채로 포포와 내가 마주 보았다. 진지한 표정으로 포포를 바라보자 포포가 눈망울을 두어 번 깜빡이더니,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까딱했다.
“들어가자.”
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포포가 문을 두드리려 소매를 걷어 올렸다.
아니, 이 바보 여우가!
곧장 포포의 손을 잡아 그를 저지했다. 그러자 포포가 인상을 팍, 찡그리며 나를 노려보았다.
“들어가자며!”
포포의 짜증 섞인 외침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바버야! 우리 힘으로 드러가야지!”
“……굳이?”
응, 굳이.
원래 상대방의 허를 찌를 땐 상대방 모르게 일을 행해야 하는 법이야!
쯧.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는 포포를 보며 혀를 찼다.
더 이상 찡그려질 미간도 없겠다 싶었던 포포의 미간이 더욱 찡그려졌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는 본인의 길고 뾰족한 귀를 만지작댔다.
“그렇지만, 너나 나나 문을 못 열잖아.”
왜 못 열어? 충분히 열 수 있지.
원래 세상 모든 생물은 발등에 불이 떨어지면 무엇이든 가능한 법.
“뽀뽀야.”
“응?”
“업뜨려 봐.”
포포가 또다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까딱거렸다.
“응? 엎드려? 왜?”
“빠리!”
나는 최대한 시간이 촉박하다는 표정으로 빠르게 손짓을 했고, 나의 재촉에 순진한 포포가 쭈뼛쭈뼛 움직이더니, 곧장 무릎을 굽히고 팔로 몸을 지탱하며 자세를 엎드렸다.
꽤 그 자세가 편했던 건지, 포포의 복슬복슬한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쩝, 만지고 싶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지.
엎드려 있는 포포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준비는 끝났다.
크게 숨을 들이쉬고는, 포포의 작고 소중한 등을 가볍게 밟았다.
내가 포포의 작은 등을 밟자, 포포가 움찔거렸다.
“으악! 야, 너 뭐해!”
“가마니 좀 있어 봐!”
“아프단 말이야!”
포포가 정말로 아픈 건지, 내가 딛고 있는 바닥이 아닌 포포의 등이 몹시 떨렸다.
“뽀뽀야……. 자꾸 그러면 나 떠러져!”
일부러 무서운 척 연기를 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포포에게 말하자, 내 목소리의 심각성을 인지한 포포의 등이 얌전해지기 시작했다.
밑을 내려다본 나는 포포의 일렁이는 붉은 눈동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덤으로 글썽이는 눈물방울들까지.
포포가 이를 악물었다.
“빨리 열어!”
으휴, 우리 여우 힘들구나.
포포의 등을 밟아 한층 커진 내 키로도 문고리가 닿을락 말락 거렸다.
뽀뽀야, 조금만 참아라…….
포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까치발을 들어 올렸다.
곧이어 문고리가 내 손에 닿았다.
포포의 소리 없는 아우성이 들렸지만, 문고리를 잡은 나는 애써 포포의 외침을 무시한 채 힘껏 문을 열었다.
문의 마찰음이 들림과 동시에,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포포를 위해 그의 등에서 내려왔다.
“……뽀뽀, 괜찮아?”
내가 등에서 내려오자 포포의 몸이 축, 하고 처졌다.
“뽀뽀, 정신 차려!”
포포를 살살 흔들었지만, 그는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런 걸로 죽었을 리는 없는데.
“아리…… 님은 상당히 활동적이시군요.”
사화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입을 닫지 못했다.
나는 지금, 한창인 나이라고!
사화의 앞자리에 앉아 있던 백령이 몸을 일으키고 나와 포포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 맞다, 뽀뽀!
뽀뽀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 어? 얘 어디 갔어?
“형님, 좋은 아침입니다.”
좋은 아침 같은 소리 하네. 해가 중천에 떴는데, 무슨.
포포는 언제 쓰러져 있었냐는 듯, 내 옆에 곧게 서 있었다. 공손하게 두 손을 모으는 것도 잊지 않은 채.
“헤헤.”
그는 특유의 바보 같은 웃음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저, 저 요망한 여우 녀석.
포포의 눈웃음이 예사롭지 않다. 저런 간사하고 요망한 여우 같으니라고.
백령이 우리 둘을 보곤 문을 잡고 있었다.
……아무래도 우리보고 들어오라는 거겠지?
아직도 요망한 눈웃음을 지으며 ‘헤에’거리고 있는 포포의 꼬리를 잡고 백령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포포를 질질 끌고 사화의 맞은편에 앉았다. 나를 본 사화의 눈꼬리가 가늘어졌다.
이내 나를 보던 사화의 시선이 천천히 내 옆으로 향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화가 본인의 황금빛 뱀 눈망울로 포포를 차근차근 뜯어보고 있었다.
내가 다 기분이 나쁘네.
포포가 그녀의 시선에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포포의 뾰족한 여우 귀가 덜덜 떨렸다. 덩달아 그의 복슬복슬한 꼬리도 불안한 듯 이리저리 흔들렸다.
사화의 검은 머리칼이 오늘따라 더욱 차분해 보였다.
“백령 님 궁에 웬 여우 한 마리가 있나, 했더니…….”
사화의 짜증 날 정도로 빛나는 황금빛 눈을 곱게 반으로 접었다.
“이렇게 저급한 신수일 줄이야.”
사화가 시선을 내리더니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입에 대었다.
뭐? 저급?
지금 저 요망한 뱀이 우리 요망한 여우보고 저급하다고 했어?
머리가 찬물을 끼얹어진 것마냥 천천히 식혀지기 시작했다.
“이 아인, 아리 님 취미이신 건가요?”
사화가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고 눈웃음을 지으며 예의 바른 투로 내게 물었다.
말투와 달리 내용은 굉장히 무례하지만 말이지.
우리 뽀뽀가 물론, 하찮고 귀여운 존재이기는 하지만, 말을 저렇게 한다고?
포포의 꼬리가 묘하게 떨렸다. 포포는 이도 저도 못하며 사화와 눈을 못 마주치고 그저 그의 붉은 눈을 내리깐 채,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온 신경을 사화와 포포에게 집중하고 있을 때, 어느샌가 백령이 내 옆자리에 와서 앉았다.
풀이 죽은 포포를 잠시간 바라보던 백령이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은월이 데려온 아이니, 입조심 하지, 사화.”
백령의 말에 아주 잠시였지만, 아름다운 사화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아무래도 은월이 데려온 아이인 줄 몰랐던 것처럼 보였다.
“은월 님이 어째서 이런 하급 신수를…….”
사화가 대답을 원하는 듯, 조심스러운 눈길로 백령을 바라보았지만 백령은 그에 대해 대답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내 그것을 알아차린 사화는 백령에게 머물러 있던 눈길을 거두고 찻잔을 들어 올렸다.
차를 한 모금 마신 사화는 애써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개를 들었다.
“동쪽 땅의 차는 언제 마셔도 향이 좋군요.”
“사화.”
“네, 백령 님.”
“동쪽 땅에 남아있는 볼 일이 더 있기라도 한 건가.”
속뜻이 훤히 보이는 말이었다.
‘이제 좀 가라.’
그리고 저 요망한 뱀이 그걸 모를 리가 만무했다. 그런데도 사화는 눈도 깜짝 않고 부드러운 미소를 잃지 않았다.
“동쪽 땅을 밟은 것도 간만인데, 오랜만에 은월 님도 뵙고 가려 하는데, 제가 좀 더 머무는 것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백령 님?”
뭔 소리야, 난 허락 못 해. 돌아가.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말을 애써 꾹꾹 눌러 담았다.
저, 저 요망한 뱀 녀석. 내 너의 속을 모를 줄 아는 것이냐!
은월을 보고 간다는 건 구실일 뿐이다. 동쪽 땅에 좀 더 머무를 구실.
한층 튀어나온 입으로 사화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내 시선을 느낀 사화가 짜증 나게도 미소로 답해주었다.
왜 쟤가 웃을 때마다 화딱지가 나지?
“사화, 네가 인사치레를 필요로 할 정도로 은월과 친밀한 관계인 줄은 몰랐군.”
“땅의 주인인 자로서, 어찌 사법관 은월 님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그냥 간단 말입니까.”
웃기네. 놀고 있다.
그니까 은월이 올 때까지 여기에 죽치고 앉아 있겠다? 내가 그 꼴은 또 못 보지.
멍하니 앉아 있는 포포의 꼬리를 잡아당겼다.
“뭐, 뭐야? 꼬리 만지지 마!”
포포가 화들짝 놀라며 말을 더듬었다. 덤으로 그의 처져 있던 귀도 바짝 세워졌다.
지금 네 꼬리가 중한 게 아니란다, 이 요망한 여우야.
바짝 세워진 포포의 여우 귀를 잡아당기고, 작은 소리로 그에 속삭였다.
“은월을 데려와.”
나의 말에 포포가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을 지었다.
“왜?”
눈치라고는 밥 말아먹은 지 오래인 포포가 큰 소리로 물음을 표했다.
이, 이, 바보가!
포포의 등을 가볍게 때렸다.
“아, 왜 때려!”
“조용히 해!”
나의 말에 포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러니까, 때리지 마.”
그리고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기 시작했다.
……진짜 살살 때렸구만, 엄살은.
“아리야, 근데 나 싸부가 어디 있는지 모르는데…….”
응? 그걸 왜 몰라?
내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포포가 한심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너랑 달라, 아리야.”
아, 그랬었지, 참.
포포에게 괜스레 살짝 미안해졌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빨리 저 요망한 뱀을 내 안식처에서 쫓아내야지.
두고 봐, 사화. 은월을 금방 데려오고 말 테니까. 물론, 내가 아닌 뽀뽀가.
“그럼 내가 어딨는지 알아볼 테니까, 은월을 데려와.”
나의 말에 포포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실력 발휘 좀 해볼까?
구슬의 기운에 온 정신을 집중시켰다.
은월의 기운이……. 어디 있지?
이내 은월의 기운이 그다지 멀지 않은, 익숙한 곳에서 느껴졌다.
“정자야.”
나의 말에 포포가 붉은 눈을 깜빡거렸다.
“정자에 자하와 함께 있어.”
뭐해, 안 가고? 정자에 있다니까?
포포에게 서두르라는 눈빛을 보내자, 포포가 한숨을 쉬며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이구, 말 잘 듣네, 우리 포포.
포포가 백령의 집무실을 나가는 모습을 보며 왠지 모를 만족감이 느껴졌다.
어휴, 귀여운 여우 녀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