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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님의 딸이 되었습니다 (25)화 (25/167)

25.

시야를 빠르게 스치고 간 물체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으응……?

이내 그 물체의 형태가 점점 시야에 나타나게 되며 뚜렷해져 갔다.

“포오, 싸부, 얘는 누구야?”

싸부……?

놀랍게도 눈앞에 있는 귀엽고 하찮은 존재는 아기 여우였다.

푸른빛의 털이 아주 아름답고 곱게 뻗어 있었다. 여우가 다리를 들어 올려 털 손질을 하며 잔뜩 단장하고 은월을 바라보았다.

뭐야, 얘 뭔데 이렇게 작고 귀여워?

“기, 기…….”

이미 나는 내 얼굴만 한 여우에게 푹 빠져 있었다.

내 눈빛을 본 아기 여우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소스라치게 놀라기 시작했다. 그의 털이 빳빳하게 세워졌다.

“뭐, 뭐야, 너!”

“기여어!”

곧장 아기 여우를 품에 안았다. 복슬복슬한 그의 털이 느껴졌다.

그래, 이런 게 동물이지.

백령, 자하, 아루, 은월, 똥개, 등등…….

여태까지 커다란 맹수 놈들만 보다가 이런 작고 귀여운 동물을 보니, 나의 복받치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나의 말랑말랑한 볼살을 아기 여우의 부드러운 털에 비비적대자, 아기 여우가 식겁을 하며 바동거리기 시작했다.

“뭐, 뭐야, 야, 안 떨어져? 야!”

아, 자하의 기분을 살짝은 알 것 같기도 하다.

이렇게 귀엽고 하찮은 존재가 있었다니.

정말 갖고 놀고 싶다, 요 녀석.

하지만 자하는 어림도 없지. 절대 안 돼. 암, 그렇고말고.

작은 여우가 떨어지라고 말하니, 더욱 격렬하게 떨어지기 싫었다.

“싸, 싸부, 구, 구해……!”

여우가 힘겨운 듯 볼멘소리를 내었다.

싸부라니, 은월을 말하는 건가?

비비적대던 움직임을 멈추고 은월을 바라보았다. 푸른 여우가 은월에게 구원의 눈빛을 보냈다. 여우의 눈망울의 떨림이 내게도 느껴졌다.

“싸, 싸부……!”

은월이 푸른 여우를 보더니, 턱을 괴고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곧, 은월의 말에 여우는 그대로 굳을 수밖에 없었다.

“너, 누군데? 어떻게 여기 있는 거야?”

그의 태평한 물음에 여우는 충격받은 듯 입을 벌리고 굳어버렸고,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말랑말랑한 볼을 그의 부드러운 털에 비비적댔다.

이내 정신이 돌아온 여우가 훌쩍이기 시작했다.

“싸부, 절 잊어버리셨다니…….”

“미안한데, 난 너 같은 걸 키운 기억이 없단 말이지.”

“싸부우……!”

“애초에 내가 아리 말고 제자를 둔 적이 없는데?”

그건 그렇다. 은월은 만사에 바쁜 신수인데 여우 키울 시간이 어딨어?

은월의 말에 여우의 눈에서 눈물방울이 그렁그렁 매달렸다. 톡, 치면 바로 떨어질 것 같다.

“싸, 싸부…….”

“아까야, 우지마.”

나의 말에 여우의 눈에 달려 있던 눈물방울들이 쏙, 하고 들어가며 내 품에서 벗어났다.

“이, 이……! 이 꼬맹이가 누구보고 아기래?”

뭐야, 왜 저렇게 화내?

야, 나도 여노한테 ‘아기님’ 소리 들으며 자랐어, 왜 이래!

게다가 난 은월과 달리 자상하게 위로도 해줬는데! 억울하다, 억울해.

그의 분노에 내가 의아해하자, 은월이 푸른 여우의 꼬리를 잡아 들었다.

“아리야.”

“웅?”

“얜 이게 성체야.”

……어?

저게 성체라고? 내 얼굴만 한 게?

뭐야, 쟤 진짜…….

“흥, 들었냐? 역시 싸부야. 이 몸으로 말할 것 같으면 백 년 묵은 여우…….”

“마메 드러!”

“그래, 맘에 들겠……, 뭐……?”

곧장 은월이 잡고 있는 여우를 내 품으로 끌어왔다. 보들보들한 여우의 털에 마음이 치유되는 느낌이 들었다.

이게 다 큰 거라니, 진짜 너무 하찮고 귀엽잖아!

“뭐, 뭐야, 이거 놔!”

“하차나, 하차나.”

“뭐, 뭐라는 거야? 이거 빨리 안 놔?”

절대 못 놓지. 포기해라, 아기 여우야.

진짜, 넌 내가 평생 책임져줄게.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라.

“흐음…….”

은월은 그저 나와 아기 여우를 번갈아 보며 계속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아, 기억났다.”

그의 말에 아기 여우의 눈빛이 격하게 밝아졌다.

“싸, 싸부우……!”

“아니, 너 말고.”

은월이 눈을 반달 모양으로 접으며 웃었다. 그와는 상반되게 여우는 다시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있었다.

“자꾸 뭔가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너 하급 신수면서 어떻게 말을 하는 거냐?”

은월의 말에 다시 여우가 내 품에서 슉, 하고 벗어났다. 그가 뛰어오르며 착지할 때 푹신해 보이는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리는 걸 보고 확신했다.

넌, 내 것이야.

“싸부…….”

“내가 왜 싸부인지부터 설명해봐.”

여우가 애처로운 눈빛을 보냈지만, 그가 누구인가? 백령을 제외한 거의 모든 신수 위에 군림하는 신수, 은월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어쩔 수 없죠…….”

여우가 그렇게 말하고는 점프를 하고, 공중을 한 바퀴 돌더니 펑,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곳엔…… 나의 얼굴보다 살짝 큰 한 작은 남자아이가 있었다.

푸른 머리의 붉은 눈. 크고 초롱초롱한 눈망울. 복슬복슬한 꼬리와 여우 귀.

뭐야, 얘 수컷이었어?

뭐, 성별은 별 상관없긴 하다. 넌 어차피 내 거야.

그렇게 푸른 머리의 여우 신수가 된 아기 여우는 은월을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싸부, 기억나시죠?”

“……어.”

“진짜죠?”

“어. 그렇지.”

푸른 여우의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하, 저 폭신폭신해 보이는 꼬리마저 너무 맘에 든다.

“싸부께서, 저, 포포를 기억해주시다니, 정말 감격스럽습니다.”

……포포?

뭐냐, 이 귀여운 이름은……?

포포가 눈물을 글썽였다. 아마 이번엔 기쁨의 눈물이지 않을까 싶다.

“전 그날, 싸부께서 제게 새 생명을 주신 거나 다름이 없다, 생각합니다! 싸부!”

“어, 이름은 오늘 처음 듣네.”

은월아, 너 정말 기억나는 거 맞지……?

이쯤 되니, 은월이 진짜로 기억나서 저러는 건지 나도 전혀 분간이 가지 않았다.

흰 호랑이나 검은 호랑이나 둘 다 속을 모르겠다, 속을.

“전 평생 싸부 곁에서 떨어지지 않을 거예요!”

포포의 말에 은월이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자하한테 저런 비슷한 말을 들었을 때 저런 표정이었을까…….

“절 제자로 받아주세요, 싸부!”

“아니, 그건 곤란해.”

……싸부, 싸부해서 은월이 옛날에 잠시라도 가르쳤던 앤 줄 알았는데, 그냥 본인 소망이었잖아……?

그가 단칼에 거절하자 포포의 귀가 축, 하고 처졌다. 그뿐이랴, 방금까지도 살랑살랑 흔들던 꼬리도 처져 있는데.

“너, 그때 따라다니던 새끼 여우 맞지?”

은월이 축 처진 그를 내려다보았다. 포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포포가 눈에 띄게 풀 죽자, 은월이 나지막한 한숨을 쉬었다.

“그만 동족에게로 돌아가. 얼마나 쫓아다닌 거야?”

“그, 그치만 싸부!”

은월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흐응……?

요놈 봐라, 결국 은월 곁에 있고 싶다는 거잖아.

생각보다 그를 꾀는 건 쉬울 것 같다.

여우를 보며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후우……. 내겐 은월이 전수한 특별한 기술이 있지.

때마침 은월이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밖에 다녀올 테니까, 무슨 일 있음 불러.”

응, 응. 천천히 다녀와, 은월.

아마 바로 앞에 있는 정원이라도 가는 거겠지? 은월이 그냥 날 방치할 리는 없으니.

어쨌건, 이 궁 안에는 포포와 나, 둘만이 남아 있다는 게 중요하지.

목표물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풀 죽어 있는 저, 요망한 여우 녀석.

후후, 이 누나가 널 받아주마.

“뽀뽀오…….”

그를 부르자, 그가 경계하듯 꼬리를 즉각 세웠다.

난 너 안 잡아먹어, 여우야.

“나, 뽀뽀 아니야, 포포야!”

그거나, 그거나. 나 아직 발음 안 익숙해서 그렇게 정확한 발음 못 해, 이 여우야.

근데 포포보다 뽀뽀가 더 입에 잘 맞는 것 같은데……. 앞으로 애칭으로 쓸까?

그의 말은 가볍게 무시하고 눈을 접어 웃었다.

“뽀뽀오.”

“아, 뽀뽀 아니라니까?”

그가 겨우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은 호칭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야, 뽀뽀야.

침착하자, 은월이 전수한 특유의 여유로운 눈빛을 유지해야 해.

“나눈, 알꼬 잇눈데……?”

“뭐, 뭘?”

“으널이란 안 떠러지는 고.(은월이랑 안 떨어지는 방법.)”

이 누나는 알고 있다고, 포포야.

포포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내게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그의 피처럼 붉은 눈동자가 아름다우면서도 귀여웠다.

이 정도론 아직 약한 건가?

흐음…….

지금 포포가 원하는 것. 그건 분명 은월이랑 관련되어 있을 텐데…….

잠깐만. 뽀뽀가 분명 은월을 ‘싸부’라고 부르지?

감 잡았다.

입꼬리 한쪽이 자동으로 올라갔다.

“으널하떼, 인죵바느 반버!(은월한테 인정받는 방법!)”

이내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눈알을 위로 올려 우물쭈물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귀여워서 당장이라도 깨물어 버리고 싶지만, 그러면 도망가 버리겠지?

안 돼, 안 돼.

조금만 참자, 아리야.

애써 흐르는 침을 닦았다. 침착하자, 침착해.

“어, 어떻게 하는 건데?”

“그쎄에…….”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은월처럼 능청스럽게 대답해야 한다는 것.

어때, 나 좀 은월 같지? 믿음직스럽지? 은월이랑 판박인 모습에 마음이 흔들리지?

아니나 다를까, 포포가 눈을 빛내며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난 봤다. 포포의 귀가 흔들리면서 점점 세워지는 광경을.

“그, 그러지 말고…… 알려주면 안 돼?”

이 정도면 거의 다 넘어왔다. 포포를 보며 애써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보았다.

“후움……. 머든찌 하꺼야……?”

포포가 내 눈치를 살피며 잠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에 여유로운 미소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포포가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더니, 무언가를 결심했는지 반짝이는 눈으로 나와 시선을 맞췄다.

“응, 응! 뭐든지 할게.”

이런 단순한 녀석.

“구러엄…….”

꼴깍.

포포의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요 녀석, 참 단순하군. 자하만큼은 아니지만.

“내 요패 부터이써!”

평생.

일부러 뒤의 단어는 말하지 않았다. 말을 마치자마자 격하게 흔들리는 포포의 눈망울이 보였기에.

“그게 뭐야! 그걸로 어떻게 싸부님한테 인정받아?”

이놈, 이거. 그렇게 남을 못 믿어서 되겠냐?

이상하다, 은월은 이쯤 되면 항상 애들 홀려 놓던데. 아직 수련이 부족한 건가?

어차피 패는 나한테 있다, 뽀뽀야.

“머든찌 한다묘.”

그의 눈망울이 크게 떠졌다.

“껴우 그 쩐도라니.”

“아, 아니…….”

“으널은, 시로 해, 끄거.”

그가 내 말에 충격받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귀가 바짝 세워졌으며, 꼬리 또한 그에 따라 세워졌다. 풍성한 그의 꼬리를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저건, 내 것이다.

“미더바, 뽀뽀야.”

밑져야 본전이야, 여우야.

포포가 이리저리 움직이며 안절부절못했다.

그래, 고민되겠지. 이 누나는 다 이해한다.

그 순간에도 은월의 미소를 떠올리며 최대한 여유롭게 서 있었다.

나를 힐끔 바라보던 포포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보면 세상 고민 포포가 혼자 다 하는 줄 알겠네.

“뭐야, 너 아직도 안 갔어?”

은월이 하품을 하며 궁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의 검은 머리칼이 창으로 들어오는 빛을 받으며 더 아름다워 보였다. 그에 포포의 귀와 꼬리가 축, 하고 처졌다.

에휴, 뭐 저리 걱정을 많이 한담.

“으널.”

“어.”

그를 부르자, 그가 곧장 답하며 내게 걸어왔다.

“뽀뽀, 내 여빼 이께때!”

나의 말에 은월이 팔짱을 끼고 나와 포포를 내려다보았다. 이내 상황이 대략 이해가 됐는지, 그가 실소를 터트렸다.

“흐음……?”

그래, 저 표정이다, 저거. 세상에 혼자 여유로운 듯한 저 표정.

“어쩔 수 없네.”

은월이 특유의 미소를 지었다. 그에 포포의 표정도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은월이 자리에 앉고는 한쪽 손으로는 턱을 괴고 한쪽 손은 포포에게 내밀었다.

“앞으로 몰래 따라다니지 말고, 잘 부탁해.”

그의 말에 포포가 놀란 토끼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포포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가더니, 그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

뽀뽀야, 너도 은월 밑에서 좀 세상사는 법을 배워야 할 거 같다.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게 살면 안 돼.

그렇게 나는 은월에게 삶의 지혜를 점점 깨우쳐 나가고 있었다.

포포가 은월을 보고 있어 정신없는 틈을 타, 몰래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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