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눈을 위로 힐끔힐끔, 연못을 바라보고 있는 은월을 몰래 힐끔거렸다. 그의 아름다운 자태를 감상하고 싶지만, 아쉽게도 오늘의 난 그렇게 당당하지 못하다.
이내 내 시선을 느낀 은월이 고개를 돌려 내 쪽으로 향했다.
“안 돼?”
은월의 부드러운 물음에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흐음……, 너무 조급해하지 마. 넌 충분히 잘하고 있으니까.”
은월의 부드러운 미소에 마음이 그나마 안정되었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은월이 가르쳐 주는 건 무엇이든 척척, 해내던 내가, 여기서 막히다니.
기의 흐름이나 느낌을 알았으니, 오늘부터 이제 본격적으로 다루는 방법에 대해서 알려주었다.
그런데, 몇 시간 째 진도가 안 나간다.
다룬다니, 어떻게?
“모루게써…….”
의기소침한 말투로 그에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숙여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괜찮아. 천천히 하면 돼.”
그의 부드러운 손길과 위로에도 내 기분은 썩 나아지지 않았다.
옆에 있던 자하가 날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의 귀까지 함께 흔들렸다.
“괜찮아요, 아리 님! 뭣하면 제가 평생 곁에서…….”
그래, 저놈이 원인이다. 자하 네 이놈!
자하가 무언가 더 말하려던 걸 은월이 그의 입을 틀어막음으로 강제로 못하게 되었다.
“으븝, 읍!”
“시끄러.”
자하가 무어라 하며 애써 발버둥 쳤지만 은월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순 없었다.
고양이가 어딜 호랑이한테!
은월아, 잘하고 있다. 요 똑똑한 녀석!
결국 발버둥 치다 지친 자하는 정자 구석에 쭈그리고 앉았다.
“힝…….”
그래, 거기서 좀 자숙이라도 하고 있어라, 자하야.
“아직도 기분이 안 좋아?”
은월이 내 눈을 바라보며 다정히 물었다.
흐음…….
아까보단 그래도 나아진 거 같다.
그래도 일단은 좀 슬픈 척 좀 해보자. 은월이 언제 또 이렇게 날 걱정하겠어?
“우웅…….”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은월이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너 정도면 이랑보다 훨씬 잘하고 있어.”
이랑보다 내가 더 잘하고 있다고?
이건 좀 솔깃하다. 어찌 보면 이랑은 내 천적이 아닌가? 작은 똥개 녀석.
은월의 효과적인 칭찬은 내 눈이 자동으로 빛을 내게 했다.
누가 그러지 않던가. 비교하면서 꾸짖으면 기분이 더 나쁘다고.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누군가와 비교하면서 해주는 칭찬은 기분이 더 좋다.
“이란, 모태?”
귀에 걸리려는 입을 애써 억누르고 인상을 찌푸리며 그에게 물었다.
일단 이미 내 기분은 아까보다 훨씬 좋아졌다.
“어, 일단 걔는 성장이 더디니까.”
어? 근데 전에 봤을 때는 나보다 두 배는 빨리 성장한 거 같은데?
저번에 만났던 이랑을 떠올려보았다. 그 어리던 이랑이 예상보다 훨씬 커서 사흘 밤낮을 원통해서 잠도 제대로 못 잤다고!
분명 내가 알던 조그마한 똥개 자식이 아니었어.
“이란, 커써!”
부정하는 나를 보던 은월이 턱을 괴고 나와 눈을 마주쳤다.
“걔네 집안은 못 하는 게 아니고, 안 한다니까.”
은월이 시선을 돌려 먼 산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그놈이 바랑보단 낫겠지.”
은월아, 이런 말 해서 미안한데, 그놈이 그놈이야.
일단 이랑, 걔도 정상은 아니거든…….
은월에게 다가올 불행한 미래를 예견한 나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쯔읏, 은월은 하여간, 요즘 것들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니까.
“기분이 좀 나아졌나 보네?”
은월의 눈이 반달 모양으로 곱게 접혔다. 그의 회색빛 눈동자가 더욱 예뻐 보였다.
정말 볼 때마다 신비롭다니까.
은월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하고 청화관에 같이 갈래?”
“쫑아간……?”
청화관이라면…….
은월이 머문다는 그 내 비밀기지였었던 곳 말하는 건가? 아니, 였어야 했던 곳.
그러고 보니 요즘 수업만 받느라 활동량이 현저하게 줄어든 거 같긴 하다.
자하랑 숨바꼭질한 건 빼 버리자, 내 인생에서 끔찍한 기억 중 하나니까.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다.
“가래, 가래!”
눈을 빛내며 신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아리 님! 저랑 놀아야죠!”
구석에서 자숙하던 자하가 귀를 바짝 세우며 소리쳤다.
그의 눈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애처롭다.
내가 미쳤다고 너랑 놀아?
하늘이 두 쪽 나도 그럴 일은 없어!
“시러! 가꺼야!”
“아, 아리 니이임!”
네가 애야? 네가 애냐고!
자하가 날 붙잡고 늘어졌다. 내 인상이 점점 험악해지고 있는 게 자하의 눈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 것 같다,
하긴, 보였다면 자하가 괜히 자하가 아니지.
아, 진짜 이 고양이를 어쩌지?
되지도 않는 땡깡을 부리는 자하를 보던 은월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하, 내가 어제 말한 건 다 했지?”
은월의 물음에 자하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얼마 후 정신을 차린 자하가 빳빳하게 고개를 틀어 은월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의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네…… 네?”
“다 했지?”
“아…… 네?”
“다 했냐고.”
방금까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넋 놓던 자하가 급하게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자하 머리 돌아가는 소리가 너무나도 여실히 여기까지 들린다.
자하야, 솔직하게 불어라. 그게 신상에 좋아 보여.
그러나 나의 속마음을 듣지 못하는 자하는 내 충고를 무시하고 부르르 떠는 입을 조심스레 열기 시작했다.
“다, 당연하죠!”
“그래?”
자하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자하의 꼬리도 이리저리 흔들리며 그가 매우 불안해하는 게 티가 났다.
누가 봐도 저건 거짓말하는 거잖아! 세 살짜리 애도 안 속겠다, 야.
은월이 눈을 가늘게 뜨고 자하를 바라보았다.
꿀꺽.
자하의 침 넘어가는 소리가 너무나도 잘 들렸다.
자하야, 넌 절대 누구 속일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말아라.
“어디까지 했는데?”
“……잘못했습니다, 은월 님.”
자하가 드디어 본인의 죄를 시인했다. 그의 뭉툭하고 짧은 꼬리가 아래로 축, 내려갔다.
으휴, 바보, 자하.
“뭐 남았냐?”
“어, 음…… 그, 자료 정리랑……대부분이요.”
……저렇게 말하는 건 손도 대지 않았다고 봐야지.
자하의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 갔다. 그의 귀도 마침내 축, 처져 버렸다.
자하야, 네가 바랑 욕을 할 처지는 아닌 거 같다.
은월이 안절부절못하는 자하를 보다가 한숨을 쉬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뭐 해.”
“네?”
“안 가?”
“…….”
“지금 하면 봐줄게.”
은월이 일부러 부드러운 말투로 떨고 있는 자하를 다독였다.
그런 그의 말에 자하가 눈을 껌뻑였다.
“정……말요? 봐주신다고요? 천하의 은월 님이?”
“그래. 인심 썼다. 오늘은 특별히 반으로 줄여 준다.”
“은월 님, 은월 님 아니죠? 은월 님이 이렇게 일을 줄여 주는 날이 오다니, 이건 꿈이야.”
“꿈이면 좋겠어?”
자하의 귀가 쫑긋, 다시 세워졌다.
“아뇨, 절대, 아니요!”
자하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은월이 그런 자하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역시 자하는 단순한 게 최고의 장점인 것 같다.
저것도 능력이지, 능력이야. 그럼, 그럼.
“……진짜죠?”
“한 입으로 두말 안 해.”
자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도 은월이 말을 번복하는 신수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듯했다.
이내 자하의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저런, 속내가 훤히 보이는 녀석 같으니라고.
“은월 님, 사랑합니다.”
“그딴 거 필요 없다. 빨리 가서 일이나 해.”
“네!”
그의 활기찬 대답에 은월이 미소를 띠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오늘까지 끝낼 수 있지? 반이나 줄여줬는데.”
“당연하죠!”
자하가 오늘 처음으로 제일 활기차게 소리쳤다.
이내 자하가 쫄래쫄래 어딘가로 향했다. 아마 은월이 시킨 일을 하러 가는 거겠지만.
은월이 정자에서 일어나더니, 내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의 회색빛 눈동자가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청화관 가는 거 맞지, 그렇지?
나도 정자에 붙여놨던 궁둥이를 가볍게 떼고 그를 따라 일어났다.
“갈까?”
“웅!”
그렇게 신나게 은월을 따라 걸었다. 그러다 문득 그가 자하한테 얼마나 일을 시킨 건지 궁금해졌다.
대체 뭘 시켰길래 아직 못 끝냈다는 거야? 자하가 말하는 걸 보면 한두 가지가 아닌 거 같던데…….
“으널.”
“응?”
그가 여전히 앞을 보며 걸어가다 대답했다.
“짜하하테, 머 시꺼써?”
“자하한테?”
“웅!”
“글쎄?”
은월이 내 걸음에 맞춰 천천히 걸어가며 능청스레 답했다.
글쎄라니?
내가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으로 서 있자, 그도 걸음을 멈추고 날 내려다보았다.
“기억 안 나는데? 걔한테 시킨 건 거의 쓸데없는 거라서. 언제 끝나도 괜찮은 잡일 처리랄까.”
“우, 웅?”
내가 뭘 들은 건가? 아까 분명…….
내 귀를 의심하며 고민하고 있을 때 즈음, 은월이 말을 덧붙였다.
“나도 쟤가 저렇게 제 발 저리고 술술 불 줄 몰랐지.”
어……?
그의 말에 내가 멍하니 그를 바라보자, 그가 특유의 미소를 흘렸다.
때마침 쓸데없게도 시원한 바람에 은월의 검은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렸다.
“그런 거 일일이 기억하면 안 그래도 피곤한데 더 피곤해, 아리야.”
은월이 능청스레 대답하곤 계속 청화관을 향해 걸었다. 나도 질세라 얼른 그를 따라 발을 바삐 움직였다.
이번 대화로 확실한 것 하나를 깨달았다. 은월은 일을 성실히 하고 잘하는 게 아니라, 그냥 더럽게 똑똑하다는 것을.
그래, 그런 거구나……. 역시 자하는 단순한 게 장점이자 단점이야…….
그렇게 삶의 지혜가 하나 더 쌓였다.
……나도 나중에 써먹어야지.
은월이랑 만난 건, 어쩌면 신이 내게 주신 선물 아닐까?
은월 말만 잘 들어놓으면 세상 사는 데 크게 힘든 일은 없을 것 같아.
은월을 따라 도착한 청화관은 여전히 내 비밀기지로 안성맞춤이었다.
쩝, 아까워라.
입맛을 다시며 청화관을 둘러보았다. 그때와 크게 달라진 건 없어 보였다.
“그렇게 청화관이 좋아?”
“쩌아!”
은월의 물음에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누가 봐도 내 작고 소중한 비밀기지인걸?
사실 그리 작은 크기는 아니다만.
말이 그렇다는 거지. 암, 암. 그렇고말고.
은월과 처음 만났던 장소, 풍경, 모든 게 그때와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청화관은 아름다웠고, 신비로운 장소였다. 뭔가 누구의 손도 타지 않은 듯한.
하긴, 은월을 처음 만났던 일이 그렇게 오래된 일도 아니니 변한 게 없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할 수도 있지.
청화관은 어찌 보면 은월이랑 잘 어울리는 장소이기도 했다. 신비롭고, 누구의 손도 타지 않은 자연적인 곳.
물론, 암만 그래도 내 비밀기지로서가 더 찰떡이다. 그럼, 그럼.
눈을 빛내며 혼자 둘러보던 나를 보던 은월이 미소를 지었다.
“안에 들어가 볼래?”
“쩌아!”
은월이 청화관 안에 있는 작은 궁을 가리키며 내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저번엔 정신이 없어서 안은 구경도 못 해봤네.
뭘 물어? 당연히 들어가야지!
내 눈빛을 본 은월은 나를 안으로 안내했다. 크게 뭔가 신기한 게 있는 건 아니었지만, 수수하지만 안락한 안은 내 마음에 쏙, 들었다.
은월을 쫓아내고 여기에 눌러살까…….
아, 아니야. 그럼 백령이랑 멀어지잖아.
그런데 여긴 진짜 탐나는데…….
그렇게 부질없는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무언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어?
여태껏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기운이었다.
그런데 이거, 기운이 참…… 하찮고 보잘것없는 느낌이야.
그래서 그런 걸까? 옆에 있는 은월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뭐 해?”
기운을 쫓아 이리저리 둘러보는 내게 은월이 의문을 품었다.
“우, 우웅, 아무거또.”
내가 고개를 저으며 아무것도 아니라 말하자, 은월이 내게서 시선을 거뒀다.
아마 편하게 둘러 보라는 은월의 작은 배려인 것 같았다.
청화관 궁 창살 사이로 작은 빛이 새어 들어왔다.
기운에 온 정신을 쏟아부었다.
분명, 뭔가 있어! 확실해!
나, 아리. 궁금한 건 아직 못 참는 호기심 많은 나이라고!
그렇게 속으로 외치고 있던 찰나, 무언가가 빠르게 내 앞을 지나갔다.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