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내가 왜 그랬을까…….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내가 한 선택이었지만 정말 그때의 선택이, 나 자신이 이해되지 않는다.
왜, 왜 호랑이들을 놔두고, 대체 왜!
“아리 님! 그럼 제가 숨을 테니까, 300초 세셔야 해요!”
300초는 개뿔.
자하가 쫄래쫄래 뛰어가더니 어디론가 숨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억장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하……. 내가 왜 그랬을까.
그 당시의 기억을 차근히 돌아보았다.
호랑이들의 시선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백령은 무심히, 은월은 다정한 미소를 띠며 나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다.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답을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 한쪽을 선택하라는 건 내게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다. 옛날 같았으면 바로 백령을 선택했겠지만, 은월은 내게 향과를 주는걸!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 자하와 눈이 마주쳤다.
자하야, 나 좀 구해줘!
나는 그 당시 다가올 미래도 모르고 그를 향해 도움의 눈빛을 보냈다.
누가 알았을까. 자하가 자하했다는 것을.
“아, 아리 님!”
자하가 나를 불렀다. 자하의 목소리에 백령과 은월의 시선이 분산되었다.
휴우…… 자하가 내 마음을 알아줘서 다행이다.
하지만 나는 어리석게도 자하가 자하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아리 님, 저랑 숨바꼭질하고 싶다는 눈빛인 것이죠?”
……뭐?
아니, 왜 그게 그렇게 되는 건데?
내 동공이 심하게 흔들렸다. 흔들리는 눈빛으로 자하를 바라보았지만, 그의 입은 이미 귀에 걸린 뒤였다.
그때 깨달았다. 무언가가 잘못돼도 한참을 잘못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호랑이 두 마리의 눈빛을 보고 두 번째 깨달음을 얻었다. 이미 되돌리기엔 늦었다는 것을.
“뭐,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지.”
은월이 미소를 지으며 손을 거뒀다. 그의 회색빛 눈이 처음으로 야속하게 느껴졌다.
“동감이군.”
백령 또한 내게 두었던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치웠다.
“아, 안니…….”
“아리 님, 갑시다!”
부정할 틈도 없이 자하가 나를 덥석 안더니, 밖으로 데려갔다.
아니야, 아니라고!
내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니란 말이야!
그렇게 나는 신나서 콧노래를 부르는 자하를 보며 소리 없는 아우성만 지를 뿐이었다.
300초가 훨씬 지난 것 같았다. 자하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날 기다리고 있으리란 걸 알고 있지만, 몸을 움직이고 싶지 않다. 자하의 기운이 여실히 느껴졌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다.
움직이기 싫은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지금 자하를 찾지 않으면 더 귀찮아질 것이란 걸 나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진짜 내 인생이 왜 이렇게 된 거지?
이게 다 똥개 때문이다. 그럼, 그럼!
이 세상에 일어나는 불행한 일은 전부 다 똥개 때문이야! 만악의 근원! 공공의 적! 퇴치해야 할 존재!
내가 똥개를 이름으로 불러주나 봐라!
***
자하와 아리가 집무실을 나가고 집무실 안에는 은월과 백령, 둘만이 남아있게 되었다. 은월은 자하와 아리가 나간 문을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거두고 자리에 앉았다.
“우리가 아리를 너무 곤란하게 했나 보네.”
은월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가.”
은월의 말에 백령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결국 호랑이싸움에 이득 본 건 지나가는 고양이였다.
둘은 딱히 그것에 크게 연연하지는 않았다. 당장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으니.
“이제 아리한테 악감정은 사라진 거 같군.”
백령의 푸른 눈이 은월에게로 향했다. 은월은 자신의 짙은 검은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악감정이랄 것도 없었어.”
“법을 어기는 걸 극도로 싫어하지 않았나.”
‘으음…….’
은월이 아리를 떠올렸다. 그리고 이내, 아리를 정의할만한 표현을 생각했다.
“재밌는 아이야.”
은월의 회색빛 눈동자가 오묘하게 빛났다.
“신기한 아이이기도 하고.”
“신기하다, 라…….”
중얼거리며 백령이 의자에 기댄 후 고개를 숙이고 무언의 생각에 잠겼다.
“백령.”
은월이 그의 이름을 부르자 백령이 생각을 잠시 접어두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난 시호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미호한테 들은 바에 의하면 상당히 닮았다던데. 만나보니 정말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별로.”
이번에도 백령이 그에게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은월은 익숙하다는 듯 그런 백령의 태도에 크게 연연하지 않았다. 그저 흥미롭다는 듯이 지켜볼 뿐.
은월은 어릴 때 만났던 시호를 떠올렸다. 당시 은월은 어린 신수이자, 성장이 덜 된 신수였기에 시호는 물론 신국의 권력체제 자체에 큰 관심 없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호에 대한 얘기까지 들어본 적 없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타인에게 관심이 없는 은월에게 그녀는, 꽤 깊은 인상을 준 신수였으니.
그렇기에 그는, 지금의 아리에게 관심이 가는 거라 단순하게 생각했다.
“꽤나 관심이 많군, 은월.”
“난 그 아이의 스승이니까……?”
백령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스승치고는 지나치군.”
“너는?”
은월의 물음에 백령이 고개를 돌려 은월을 바라보았다.
“그 아이는 너에게, 어떤 존재야?”
은월이 특유의 미소를 지었다. 그의 입꼬리가 올라가고, 백령의 푸른 눈이 짙어졌다. 은월은 백령에게 딱히 대답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은월은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다 해도 딱히 큰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대답을 알고 싶어서 물은 것 또한 아니었기에.
은월은 그렇기에 그에게서 무언의 답을 기대하고 있지 않았다. 백령이나 저나, 마음에 내키지 않는 질문을 무시해버리는 건 다반사였으니까.
그래서 백령이 대답을 했을 때, 은월은 더욱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보호해야 할 존재.”
백령이 저 말에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은월에게 설명을 덧붙여주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은월은 백령의 말에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딱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이 안 나기도 했기에.
두 신수 사이에는 긴 침묵이 이어졌다. 둘은 딱히 침묵이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쪽이 더 편하기도 했다. 쓸데없는 말을 하는 것을 둘 다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는 게 한몫했다.
먼저 긴 침묵을 깬 건 백령이었다.
“은월, 남쪽 땅에 갔던 이유가 뭐지?”
“글쎄다?”
은월이 백령의 말에 능글맞게 대답했다.
“간 이유는 딱히 중요하지 않아. 결과가 중요한 거지.”
은월이 팔짱을 끼며 눈을 감았다. 이내 눈을 천천히 뜨고 백령과 시선을 마주쳤다.
“흑기의 깃털, 이라는 수확을 얻었잖아?”
은월의 말에 백령은 더 이상 그에게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돌아올 답은 뻔했으니.
“만약 결과가 바랑의 농락에서 끝났다면 정말 그를 죽였을지도.”
마침 바랑을 죽일 명분이 없었는데, 그가 직접 만들어주다니 참 감사하기도, 짜증이 나기도 하는 모순적인 감정이었다.
어쨌거나 수확이 있었으니 은월의 기분이 그리 더럽지만은 않았다. 그리고 그렇기에 생각보다 은월은 화가 많이 나지는 않았다.
‘그렇게 큰 수확은 아니었지만 말이지…….’
그게 문제였다. 돌연변이 흑기에 대해서 결국 알아낸 건 크게 없었다. 바랑을 시켜 아루와 마루에게 깃털을 보내기야 했지만, 그들이 깃털 하나로 무엇을 알아낼 수 있으랴.
그래도 은월은 흔적조차 없는 흑기들의 정체에 한 발자국 다가간 거라 애써 위안을 삼기로 했다.
굳이 어린 아리 앞에서 칼부림할 생각도 없었거니와, 아까도 말했듯이 실제로 그는 그렇게까지 화가 나지는 않았으니.
은월은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백령과의 대화로 얻을만한 수확이 없음을 인지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건, 백령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은월은 쓸데없는 인사말조차 하지 않은 채 백령의 집무실을 나왔다.
은월은 소매 안에 남아 있는 향과를 바라보았다.
“……아.”
‘나머지를 전해 주는 걸 잊었었네.’
그가 청화관으로 가려던 걸음을 돌려 아리가 있을 만한 곳으로 향했다.
“아리와 자하가 놀만 한 데라면, 거기밖에 없지.”
그는 꽤 익숙해진, 앞으로도 익숙할 그곳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
아직도 나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자하도, 바랑도 아니야…….
내가 진짜 바보다, 바보.
자하를 믿은 내가 진짜 바보다.
지금 이게 몇 번째인지 세지도 못하겠다. 족히 스무 번은 넘게 한 거 같다, 진짜. 그보다 더했을 수도 있다.
“아리 님, 또 찾으셨네요!”
자하는 내가 그를 찾을 때마다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좋단다.
자하의 기운을 느끼고, 그가 있는 곳을 알아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이게 매우 따분하고, 재미없고, 귀찮다는 거지.
“아리 님, 또 해요, 또!”
“……시러!”
“그럼 300초만 세셔요!”
안 해, 안 한다고!
누가 나 좀 이 숨바꼭질의 저주에서 벗어나게 해줘!
너무 서러워서 눈물이 핑, 돌았다. 겨우 숨바꼭질에 지칠 대로 지친 나는, 앞으로도 계속될 숨바꼭질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역시 여기 있었네.”
이제는 익숙해져 버린 은월의 목소리가 들렸다.
진짜 너무 반갑다, 반가워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다.
애써 눈물을 삼키고 은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자하는 은월의 등장이 반갑지 않다는 듯 입을 툭, 내밀었다.
어쭈, 입, 안 집어넣어?
그러거나 말거나, 난 반가워 죽겠다. 나의 구세주.
나와 눈이 마주친 은월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래, 그리웠다, 저 미소가.
“은월 님, 청화관으로 가서 좀 쉬시지. 뭐하러 여기까지…….”
입 다물어, 자하야. 어디서 수작질이야?
자하를 한껏 노려보다 은월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으널! 자알와써!”
최대한 눈을 빛내며 은월을 바라보았다.
가지 마, 가지 마, 가지 마…….
제발 날 두고 가지 말아 줘.
내 마음이 그에게 통한 건지, 아닌 건지는 모르겠지만 은월은 근처에 있는 정자에 가서 앉았다.
나도 그를 따라 쪼르르, 달려갔다.
……어?
정자에 다다를 때였다. 숨바꼭질을 너무 하기 싫었던 탓일까. 급하게 가다 돌부리에 걸려 몸이 앞으로 쏠렸다.
저번엔 뒤집기 하다가 바닥이랑 코 박고 인사할 뻔했는데, 이번엔 돌들이랑 인사하게 생겼다.
돌이랑 인사할 마음의 준비를 마친 뒤 눈을 질끈 감았다.
몇 초의 시간이 지났지만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저번에도 이랬던 것 같은데…….
눈을 천천히 떴다. 이내 시야가 밝아지고 누군가의 팔에 걸쳐져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조심해.”
“으너, 거마어!”
은월에게 감사를 표했다. 호랑이들은 원래 이렇게들 빠른 건가?
고개를 들어 은월과 눈을 마주쳤다. 그의 회색빛 눈이 날 걱정스레 바라보고 있었다.
휴우.
돌이랑 인사할 뻔한 나는 안도감에 한숨을 쉬었다. 조금 진정이 되고, 은월의 팔에 걸쳐져 있던 몸을 일으켜 정자에 앉았다. 그러자 은월도 내 옆에 와서 자리를 잡았다.
“자.”
은월이 소매에서 향과를 꺼냈다.
역시, 은월은 향과를 좋아하는 게 틀림없다. 어떻게 맨날 소매에서 나와? 사실 은월 소매에는 남쪽 땅이랑 이어지는 통로 같은 게 있는 거 아닐까?
은월이 준 향과를 집어먹었다. 언제 먹어도 향과는 정말 맛있었다. 특유의 맛이 꼭 내 입에 딱 맞아떨어졌다.
은월이 정자에 팔을 걸치고 손으로 머리를 받치며 나를 바라보았다.
이제 향과 먹을 때 느껴지는 은월의 시선도 어느 정도 적응이 돼서 그런지 아무렇지도 않았다.
조금 긴장되는 정도.
“자하랑 숨바꼭질은 재밌었어?”
은월이 날 내려다보며 물었다. 마음 같아선 바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싶지만, 입 안에 퍼지는 달콤한 향과의 향에, 참기로 했다.
절대 자하가 반짝거리는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어서 그런 게 아니다.
“나늠, 재미떠.”
‘나름 재밌어.’
거짓말이지만 어쨌든, 그에 대답하자 자하가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신 안 해, 돌아가.
은월이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의 얼굴이 매우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나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나중에 또 할래? 시간 비워줄까?”
응, 아니야, 은월아. 할 말이 있고 못 할 말이 있지.
자하가 안 보는 틈을 타, 나는 고개를 격렬하게 저었다.
절대 싫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