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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님의 딸이 되었습니다 (22)화 (22/167)

22.

은월의 밤하늘처럼 짙은 검은 머리칼이 평소보다 더 차분하게 느껴졌다.

그에게 풍기는 분위기는 잔잔한 연못처럼 고요했으며,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속은 그렇지 않다는 걸 방 안에 있는 모든 이는 인지하고 있었다.

은월의 냉기서린 회색빛 눈이 바랑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바랑의 털이 빳빳하게 세워졌다.

“어어, 으, 은월…….”

적잖게 당황한 바랑이 입술을 떨며 그를 불렀다. 바랑의 황금빛 눈이 유난히 떨렸다. 은월은 여전히 미소를 띤 채 팔짱을 끼고 그런 바랑이 무슨 말을 할까, 지켜보고 있었다.

“왜, 왜, 벌써…….”

“위급하다며.”

은월이 바랑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물었다. 그는 분명 웃고 있었지만, 눈빛은 그와 상반되게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은월의 말에 바랑은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게, 왜 감당도 못 할 짓을 벌리는 거냐, 똥개야.

모두가 은월과 바랑을 묵묵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왜 급하게 날 호출한 네가 여기 있을까?”

은월의 물음에 바랑이 침을 꿀꺽, 하고 삼켰다. 은월은 여유롭게 그를 지켜보았다.

“아, 그, 그게…… 우리 좀 방향이 엇갈린 것 같…….”

“고지마이아.”

“아, 아리야……?”

뭐, 이 똥개야. 내가 틀린 말 했냐?

바랑이 부들부들 떨며 거짓말을 잘도 늘어놓길래, 내가 친히 은월에게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이 거짓이라는 걸 알렸다. 그러자 은월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어?

왜, 왜 바랑을 무시하고 이쪽으로 걸어오는 거야?

바랑을 무시하고 내 앞까지 온 은월에 놀라 입을 벌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입안에 무언가가 쏙, 하고 들어왔다.

익숙하지만 조금은 새로운 향과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은월이 내게 먹인 것의 정체를 알아차리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향과다.

향과를 머금고 은월과 시선을 마주쳤다.

백령이 향과를 머금고 있는 내게 시선을 두었다. 여전히 턱을 괴고 있는 그는 내게 시선을 둔 채로 무언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서쪽 땅에 간 것이 아니었나, 은월.”

백령의 물음에 은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갔었어. 오는 김에 남쪽 땅에 들렀을 뿐이지.”

은월의 대답에 자하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경악했다. 자하의 귀가 눈에 띄게 덜덜 떨렸다.

“은월 님은 역시, 신수가 아닌 거죠?”

“설마.”

자하의 물음에 그가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그 와중에도 아무런 미동도 없이 멍하게 굳어 있는 이가 있었으니……. 이 사건의 발단, 바랑이었다.

“오해가 풀렸으면 난 이만…….”

“어딜 가.”

뭔 오해가 풀려?

은월의 목소리에 바랑이 살금살금 움직이던 발걸음을 멈췄다.

“큼큼, 그게 말이야, 은월…….”

“더 지껄여봐. 자신 있으면.”

은월의 차가운 어조에 바랑이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어, 음……. 그게…….”

잠시간 입이 닫혀있던 바랑이 머리를 굴리며 무언가를 말하려 하자 자하가 그를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바랑 님,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마요. 아니, 찍소리도 하지 마요.”

“너 때문이야, 너!”

“바랑 님, 추해요.”

자하가 바랑을 보며 나지막한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에 나도 한술 더 떠 주기로 했다.

“쭈애, 쭈애.”

“……시끄러!”

바랑이 나와 자하를 번갈아 보며 소리치자, 은월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에 꼬리 내린 똥개마냥 바랑이 입을 다물었다.

바랑이 은월의 눈치를 슬금슬금 살펴댔다.

“화, 났냐?”

바랑이 조심스러운 물음을 은월에게 던졌다. 그 모습을 본 나와 자하는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나찌, 나찌.”

“이제 똥개, 아니, 바랑 님은 죽었다.”

“똔개애, 주거, 주거.”

자하와 내가 찰떡궁합을 선보였다. 그러자 바랑의 미간이 좁아지며 그의 귀가 쫑긋, 솟았다.

“시끄러워!”

이후 자하와 바랑은 투덕거리기 시작했다. 그런 둘의 모습을 본 은월은 한숨을 쉬며 백령을 바라보았다.

“백령.”

은월이 백령을 부르자 바랑과 자하는 투덕거리던 걸 멈추고 일제히 눈이 동그래져서는 은월과 백령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백령 또한 은월을 바라보았다. 이내 은월이 소매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서쪽과 남쪽의 경계선에 떨어져 있었어.”

은월이 꺼낸 건 깃털이었다. 까만 깃털.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익숙한 깃털이었다. 내가 저걸 어디서 봤더라?

“기운이 영 이상해서 일단 가져와 봤어.”

은월이 탁자에 깃털을 내려놓았다.

어디지? 어디서 봤던 거지?

기억이 나지 않아 가슴 속이 답답했다. 분명 봤는데.

“확실히, 처음 느껴보는 기운이군. 흑기의 것임은 분명한데.”

백령의 말에 퍼즐이 맞춰지듯, 기억이 새록새록 나기 시작했다. 그래, 틀림없다, 저거.

저번에 만났던 이상한 흑기의 털이랑 똑같아.

“흐끼, 저버에, 흐끼!”

내 말에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네? 그게 정말이세요, 아리 님?”

“부며애!”

자하의 물음에 확신에 찬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까지 바랑이랑 투덕거리던 자하의 눈꼬리가 내려갔다. 이내 그 부담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역시, 우리 아리 님, 기억력도 좋아요.”

자하가 내게 팔을 벌리며 다가왔다, 그런 자하를 은월이 잡고 있었다.

“이거 놔요!”

자하를 한 손으로 잡은 은월은 그의 발버둥에도 끄덕하지 않았다.

역시, 은월 최고야.

은월에게 엄지를 척, 치켜세웠다. 그에 은월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근데, 흑기라니?”

은월이 목덜미를 잡아놓은 자하를 보며 물었다.

“아, 아리 님이 말씀하시길, 저번에 만난 흑기의 깃털인 것 같대요.”

뭐, 정확한 통역은 아니지만 이 정도로 만족스럽다. 입 아프게 설명할 필요 없으니 됐다.

“그 돌연변이 흑기?”

은월의 물음에 자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은월이 자하를 놓고 생각에 잠겼다.

“흐음……. 보통 흑기들과 기운이 매우 다른데.”

은월의 말에 백령도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 중이었다.

“은월.”

백령이 그를 부르자 은월이 생각을 멈추고 백령의 말을 기다렸다.

“아루랑 마루에게 일단 전해두지.”

백령의 말에 은월이 고개를 끄덕이고 바랑을 바라보았다.

은월의 시선에 바랑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의 동공이 흔들렸다.

“왜, 왜……?”

“특별히 이번 한 번만 죄를 면할 기회를 줄게.”

은월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바랑을 향해 고개를 까딱했다.

난 봤다. 지금은 미소를 띠고 있지만, 그 전에 입술을 꽉 무는 은월의 모습을.

“기회……?”

“어.”

바랑이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바랑아, 네가 지금 그럴 처지니……?

“……위험한 거, 아니지?”

“글쎄…….”

바랑의 물음에 은월이 능청스러운 대답을 했다.

“근데 확실한 건.”

은월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셨다. 그의 회색빛 눈이 더욱 짙어졌다.

“지금보다 덜 위험하지 않을까?”

은월의 말에 바랑이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다. 바랑의 모습에 만족한 듯, 은월은 특유의 미소를 지었다.

은월이 탁자에 놓여 있던 깃털을 바랑에게 건넸다. 바랑은 그제야 은월이 제게 무엇을 시키는 것인지 알아차린 듯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설마가 신수 잡는다더라.”

은월이 천연덕스럽게 답하자, 바랑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나보고, 그 표범 새끼들을 따라가서 건네주라고?”

“어.”

“가능해……? 걔넬 따라잡는 게?”

“불가능한 것도 가능하게 만들어야지.”

“야, 나 늙었어! 걔넬 어떻게 따라잡아?”

신수한테 나이가 뭔 상관이야, 대체.

모두가 바랑의 얼토당토않은 소리에 고개를 저었다. 은월이 팔짱을 끼고 그를 바라보았다.

“가능해. 마치 오늘의 나처럼 말이야.”

마치 불가능한 속도로 서쪽 땅을 다녀온 은월처럼.

은월의 말을 이해한 바랑이 더 이상 할 말을 잃은 듯, 입을 굳게 다물었다.

“똥개, 아니, 바랑 님이 지금 찬 밥 더운밥 가릴 처지에요?”

그래, 자하 말이 맞다. 네 죄다, 똥개야. 이제 그만 받아들여.

“나, 나 대신 마지막 부탁이 있어…….”

누가 보면 그가 전쟁이라도 치르러 가는 줄 알겠다.

말끝을 흐리며 일부러 동정심을 유발하던 바랑이 고개를 틀어 내 쪽을 바라보았다.

뭐야, 뭐!

왜 내가 불안하지?

그의 눈빛에 불안감이 급습했다.

“나, 아리한테…… 이름으로 불리고 싶어!”

뭐, 인마?

바랑의 되지도 않는 소리에 자동으로 내 입이 벌어졌다.

어디서 똥개가 짖나, 환청이 들리네.

그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고개를 홱, 돌렸다.

“왜! 이 정도 상은 줘도 되지 않아?”

저 똥개가 뭐라는 거야!

“딱, 한 번만 아리랑 온종일 놀게 해주던가!”

네가 실성을 했구나, 똥개야.

“바랑.”

“바랑.”

은월과 백령이 동시에 그를 불렀다. 그에 바랑은 두 신수를 번갈아 보았다.

“죽고 싶은 건가.”

“내 궁에서 이만 꺼져.”

살벌한 두 신수의 말에 자하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힘내라, 호랑이 두 마리야.

“너희 진짜 너무해! 너흰 이름으로 못 불리고 똥개라고 불리는 서러움을 알아?”

바랑의 울분에 은월이 어이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흘렸다.

“애초에 네가 잘못한 대가로 가는 거잖아.”

“그래도 너무해! 나만 똥개라고 부르잖아, 아리가!”

그럼 똥개를 똥개라 부르지, 뭐라고 불러?

작은 의문을 품으며 바랑을 바라보았다. 세상에, 그의 눈과 귀, 그리고 꼬리까지 축 처져 있는 것이 아닌가.

똥개라는 말이 그 정도로 듣기 싫은 거야?

저렇게 보니 조금 가엽기도 했다. 내가 너무 심했나?

흐음…….

“빠…….”

천천히 입을 뗐다. 바랑이 내 말에 놀라 귀를 쫑긋 세웠다.

“아, 아리야!”

바랑이 촉촉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라…….”

“응, 응!”

바랑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이거, 너무 부담스러운데……?

“아리야, 조금만, 조금만 더!”

바랑의 촉촉한 눈빛이 너무 부담스러워진 내 입이 턱, 하고 막혔다.

……나 안 할래.

바랑의 너무나도 촉촉한 눈빛을 보니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몸소 깨달았다.

대신 바랑에게 무엇보다 잘 어울리는 말을 해주기로 했다. 그래, 이게 입에 착착 달라붙더라고.

“똔깨, 바버.”

나의 말에 바랑이 입을 벌리고 굳었다. 미동도 없이 굳어진 바랑을 보고 모두가 고개를 저었다.

“네. 바랑 님. 잘 다녀오세요. 아니다, 가서 돌아오지 마세요. 훠이, 훠이.”

바랑은 그렇게 굳은 채로 자하한테 끌려가게 되었다.

그렇게 방을 나가 자하에게 끌려가던 바랑이 정신이 돌아왔는지, 발버둥 치는 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렸다.

“야! 나, 이대로 못 가! 아리야! 아리야?”

잘 가라, 똥개. 강해져서 돌아와라. 그럴 일은 없겠지만.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바랑을 무사히 쫓아낸 자하가 땀을 닦으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휴. 하도 난리 치셔서 하인들이 와서 도와줬네요.”

하인들 열댓 명이 자하와 함께 바랑을 들쳐멨을 생각을 하니, 조금은 웃기기도 했다.

“그런데, 과연 바랑 님이 무사히 아루랑 마루한테 저 깃털을 전해줄 수 있을까요?”

자하의 의심 섞인 말에 은월이 입꼬리를 올렸다.

“바랑은 가능해, 저래 보여도.”

“네?”

“내가 말했잖아, 쟤는 못 하는 게 아니고, 안 하는 거라고.”

자하가 그제야 탄식을 내뱉으며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못 전해줘도 상관없어.”

“에?”

은월의 말에 놀란 건 나였다. 못 전해줘도 상관없다니?

“당분간 똥개가 아리나 나를 귀찮게 할 일은 없을 테니까. 지금은 그게 제일 중요하지.”

은월이 날 보며 눈을 반달 모양으로 접었다. 그의 미소에 넋 놓고 바라보던 내게 은월이 손을 내밀었다.

백령이 인상을 찡그리고 은월을 노려보았다.

“이제 그만 갈까, 아리야?”

은월이 내민 손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내 내게 꽂힌 백령의 시선이 느껴졌다.

“여기 좀 더 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두 호랑이가 일제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떡하지?

옆은 백호, 앞은 흑호. 진짜 미치겠다. 이 호랑이들 갑자기 왜 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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