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지금 난 일생일대의 위기에 처해 있다.
“아리 님! 또 해요, 또!”
자하가 눈을 빛내며 내게 애원했다. 그의 모습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심호흡하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시러!”
“그럼 제가 숨을 테니까, 300초 세셔요!”
그랬다. 자하가 지금 열두 번째 숨바꼭질의 시작을 알리며 내게 강요도 아닌 통보를 했다.
아니, 내 의사는 왜 중요하지 않냐고! 솔직히 말해라, 너 내 말 안 들리는 척하는 거지?
자하가 이내 콧노래를 부르며 깽깽이걸음으로 내 시야에서 벗어났다. 그의 귀와 꼬리가 흔들거렸다.
300초 같은 소리 하네.
이렇게 된 데에는 은월의 부재가 컸다.
오늘은 은월이 어디로 가기라도 한 것인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물론 백령과 자하에게 오늘은 일이 있어서 수업은 못 할 것 같다고 미리 말했다고 한다.
그것의 나의 불행의 시발점이었다. 잔혹하게도 자하와 단둘이 남게 된 나의 수업 시간은 그와 숨바꼭질을 하는 시간이 되어 버렸으니까.
일전에 자하를 까먹었던 것이 미안해서 두어 번 같이 놀아줬다. 그런데 누가 알았으랴. 그 두어 번이 열두 번이 될 줄을.
이건 다 은월 때문이야.
그가 오늘 수업만 제대로 했어도…… 아니, 애초에 그가 자하한테 쓸데없는 소리만 하지 않았어도 자하가 이렇게까지 숨바꼭질에 목매지는 않았을 텐데.
은월이 너무나도 원망스럽다. 어디 갈 거면 이 고양이도 데려가던가!
정자에 쭈그리고 앉았다. 어쩌다 내 신세가 고양이랑 숨바꼭질하는 꼴이 되어 버린 걸까…….
“어, 아리야!”
이제 하다 하다 똥개 소리도 들린다. 하, 열두 번째 숨바꼭질은 정말 너무 큰 충격이었나보다. 똥개 목소리가 들리다니. 어우, 끔찍해!
“아리야, 거기서 뭐 해? 요 귀여운 녀석!”
잠깐만. 환청인 거치고는 너무 생동감 넘치는 목소리인데? 게다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불길하다, 불길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나는 쪽을 보았다. 그리고 난 그대로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진짜 똥개가 점점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거 꿈이지? 아닐 거야. 무슨 하루에 거지 같은 일을 두 번이나 겪어. 악몽이야, 이건.
나는 애써 현실을 부정했다. 그리고 그가 다가와서 날 안아 올리고 나서야 내 눈앞에 악몽이 펼쳐져 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이, 이! 또옹깨! 나!”
내가 놓으라고 소리 지르며 발버둥 쳤지만, 그는 날 들어 올린 채로 무엇이 그리 좋은지 빙빙 돌고 있다.
어지러워, 이 똥개 녀석아!
“왜 여기 혼자 있어. 나 기다렸어?”
이 똥개가 실성한 건가? 미친 건기?
“아니아!”
“오구, 그래쪄?”
진짜 얘 미쳤나 봐. 어떻게 신수가 가면 갈수록 더 미칠 수가 있지? 거기서 더 미친 게 진짜 신기하다.
아, 자하나 찾으러 갈걸. 자하야, 네가 너무 보고 싶다.
“짜, 짜하!”
난 예전에 말 못 하던 아리가 아니다. 자하 정도는 부를 수 있다고?
“고양이가 와 봤자지, 뭐. 아리야, 오늘은 나랑 놀까?”
이 미친 똥개가 뭐라는 거야?
뿌우!
“뭐? 너무 좋다고?”
이 똥개가 진짜 돌았구나.
볼을 크게 부풀리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어림도 없다는 듯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다.
“바랑.”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동시에 날 안아 올리고 있던 바랑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바랑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천천히 고개를 뒤로 돌았다.
“어…… 좀, 아니, 많이 큰 고양이가 와 버렸네.”
그의 시선 끝에는 푸른 기운을 풍기고 있는 무표정의 백령이 서 있었다.
똥개가 실성했나? 백령을 보고 어떻게 고양이라 말할 수 있지? 진짜 미쳤구나, 너.
제정신이 든 건지 그의 팔이 천천히 움직이더니 날 안전하게 바닥에 내려놓았다. 나는 바닥에 안착하자마자 백령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백령의 다리 뒤에 숨에서 빼꼼, 바랑을 보았다.
“하하, 오랜만이야, 친구.”
“내가 다신 동쪽 땅을 밟지 말라 했을 텐데?”
백령이 미간을 좁히며 가늘어진 눈으로 바랑을 노려보았다.
“에이, 너무 그러지 마. 요즘 동쪽 땅에 은월이 지낸다고 해서 얼마나 가슴 졸이며 왔는데.”
바랑이 말을 마치고 일부러 훌쩍이는 ‘흑, 흑.’ 거리면서 되지도 않는 연기를 펼쳤다. 하지만 백령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은월이 분명 서쪽 땅에 일이 생겨서 간다고 들었던 거 같은데.”
뭐? 그렇다면 오늘 은월의 부재가 다 저놈 때문이라는 거야?
내가 자하랑 열두 번의 숨바꼭질을 하게 된 것도 다 저놈 탓이렸다?
네가 네 죄를 알렸다.
“또옹깨, 바버!”
“왜, 왜 그래, 아리야……?”
그를 노려보며 외치자, 그가 적잖게 당황했다.
너 때문이잖아, 너!
잠깐만, 그런데 은월이 서쪽 땅으로 갔는데 얘가 여기 있으면 은월은 거기 가서 뭐 하는 거야?
“은월은 지금 어디 있는 거지?”
백령이 그에게 물었다. 바랑이 여기 있다면, 당연히 은월은 서쪽 땅으로 향하지 않지 않았을까, 예상한 듯하다.
백령의 말에 바랑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내 바랑의 눈빛이 진지하게 바뀌었다. 그에게선 정말 보기 힘든 눈빛이었다.
“백령, 긴히 중하게 할 말이 있어.”
바랑의 말에 백령이 뒤돌아, 집무실로 향했다. 물론 나와 바랑도 백령을 따라 그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셋이 모두 백령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바랑이 자리에 앉고, 나는 백령 옆에 가서 앉았다. 잠깐의 시간이 흐른 뒤, 바랑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게 말이야, 실은…….”
꿀꺽.
묘한 긴장감에 나는 미간을 찌푸리고 바랑의 입만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백령은 나와 상반되는 태도였다.
바랑의 진지한 말투와 표정에도 백령은 턱을 괴고 무심히 다른 곳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응? 백령이 왜 이렇게 무심히 반응하지?
그것의 대답은 곧이어 들을 수 있었다.
“아리 보러 와야 하는데, 은월이 너무 무서웠어!”
……뭐?
내가 방금 잘못 들은 건가?
아니면, 혹시 지금 악몽을 꾸고 있는 건가?
잔혹하게도 나의 두 가설은 정확히 빗나갔다.
말을 마치고 헤실거리며 웃고 있는 바랑을 보니 복장이 터졌다.
저, 저 똥개 놈이!
백령은 예상했다는 듯 그저 한숨만 쉬고 그에게는 일말의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진지하게 ‘저놈을 어떻게 죽일까…….’하는 표정으로 고민만 하고 있었다.
“으널, 부쨔애…….”
불쌍한 은월. 아까 뭐라 해서 미안해. 역시 만악의 근원은 바랑이었어.
서쪽 땅에 도착하자마자 무서운 얼굴로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렸을 은월이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상상되었다. 아마 이랑은 천연덕스럽게 ‘삼촌, 아리 만난다고 갔어!’라고 말했을 게 틀림없다.
“아, 맞다. 해야 할 말이 있었는데…… 나중에 해야겠다. 지금 이렇게 설명하고 있을 시간 없어. 아리 봤으니까 이제 가야지.”
진짜 이번에 가면 평생 만날 일 없었으면 정말 좋겠다.
그가 간다는 건 정말 기쁜 소식이지만 지금만큼은 그렇지도 않다. 똥개가 은월 똥개 훈련을 꿈꾸다니, 저런 비열한 녀석.
“백령, 나는 분명 은월을 데리러 동쪽 땅까지 온 거야.”
이게 뭔 똥개 소리야?
백령이 안 말한다면 내가 꼭 말해주리라, 속으로 다짐했다.
바랑은 신나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도착해보니 은월이 없었던 거고. 알겠지? ‘우연히’ 못 만난 거다?”
“바랑.”
몸을 일으키는 바랑을 백령이 불러세웠다.
무언가가 빠른 속도로 슉, 하고 날아가 벽에 꽂혔다. 그리고 얼마 후 그 형태를 알아볼 수 있었다.
어디서 나온 건지 모를 단도가 아슬아슬하게 바랑의 귓가를 스쳐 지나갔던 것이다.
“너, 너!”
바랑이 놀란 가슴을 쥐고 백령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손이 미끄러졌군.”
“후우. 뭐야, 그런 거였어?”
백령의 말에 바랑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안타깝군. 맞힐 수 있었는데.”
백령의 말에 바랑의 몸이 굳었다. 정지된 바랑은 털 한 오라기조차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방금 나한테도 백령의 살기가 느껴졌어.
이게 다 똥개의 죄다.
그렇게 바랑이 정지된 채로 서 있는데, 집무실 문이 열렸다.
쾅.
“깽!”
방문 소리와 동시에 멈춰 있던 바랑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뭐야, 바랑 님은 또 언제 오셨어요?”
문을 열고 들어온 자는 다름 아닌 자하였다.
자하를 보고 바랑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우, 얄미워.
자하가 잠시 바랑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날 보고는 이쪽으로 달려왔다.
“아리 니이이임!”
그래, 바랑보단 차라리 자하가 낫지, 그럼, 그럼.
내 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타협하기로 했다.
“왜, 왜 절 안 찾으러 오신 거예요!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자하가 슬픈 눈망울로 나를 바라보았다.
너의 잘못이라 함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그것 때문에 못 찾은 건 아니다. 바로, 만악의 근원 바랑 때문이지.
나의 작고 포동포동한 손가락으로 이제 막 나가려 집무실 문고리를 잡는 바랑을 가리켰다.
“재, 때무니아! 나느, ‘짜하’ 여씨미, 차자써!”
일부러 ‘자하’를 열심히 찾았다는 걸 강조했다. 그러자, 자하의 눈빛이 순식간에 변했다.
각성이라도 한 건지, 여태껏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빠른 속도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이내 이 상황이 전부 이해가 된 자하는 누구보다 빠르게 문고리를 잡고 나가려는 바랑의 어깨를 잡았다.
자하가 저렇게 빠른 건 난생처음 본다. 어째 저번에 흑기 쫓아갈 때보다 더 빠른 것 같은데…….
“바랑 님, 저에게 하실 말씀 없으십니까?”
“어어? 뭐가?”
당연히 상황을 이해 못 하는 바랑은 자하를 보며 의문을 품을 뿐이었다.
자하가 미간을 잔뜩 찡그렸다.
“저에게 하실 말씀 없으시냐고요!”
“왜 이래! 이거 놔!”
자하가 소리치자 바랑도 소리치며 누가 더 소리를 잘 지르는가, 내기라도 한 듯 시끄럽게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진짜 쟤네도 환상의 짝궁이야, 환상의 짝꿍. 아루가 질투하겠어.
쯧쯧.
둘을 보고 나는 작은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둘 다 의미 없는 짓을 하는군.”
백령의 말에 격하게 공감이 되었다.
쟤넨 참 피곤하게도 산다. 어째 나보다 더 젊게 사네.
“야, 이거 놔! 나 가야 돼!”
“사과하세요! 아리 님은 저랑 ‘신나는’ 숨바꼭질하고 있었는데 바랑 님 때문에 ‘절’ 찾으러 ‘못’ 오셨잖아요!”
야, 자하야, 이상한 거 강조하지 마라. 난 어차피 너 찾을 마음 없었어!
그리고 너 혼자 신났잖아!
내 속마음을 절대 알 리 없는 자하는 세상 억울한 표정으로 바랑을 붙잡고 늘어졌다. 바랑은 그런 자하에 기가 막혀 헛웃음을 내뱉었다.
“허, 그런 걸 내가 어떻게 알아!”
“사과나 하세요!”
“미치겠네, 진짜!”
“바랑 님은 원래 미쳤었잖아요!”
뭘 또 새삼스레.
자하의 말에는 극히 동감하는 바이다. 아주 바랑 욕할 땐 옳은 소리만 하는 우리 자하. 틀린 말 하나 없다. 아까 숨바꼭질 얘기만 빼고. 그건 진짜 아니야.
“뭐? 너 말 다 했어?!”
“맞는 말이잖아요!”
둘이 옥신각신 대며 소리를 지르고 난리였다. 백령은 포기한 듯 그저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잠시간 둘에게서 시선을 떼고 백령의 얼굴만 감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사이에 둘의 승부가 결정되었다.
“아, 야. 자하야, 진짜 미안하다. 좀 놔주면 안 되겠냐?”
“진심이 없잖아요!”
“뭘 또 진심 타령이야!”
그렇게 또 실랑이를 벌이던 바랑은 그만 포기하고 지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자하에게 애원하기 시작했다.
“야, 진짜 미안하다. 제발 좀 놔주라, 응?”
바랑의 말에 자하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쏘아보았다.
“뭐……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까, 놔드릴게요.”
“고맙다. 이 은혜 잊지 않을게.”
자하가 인심 쓴다는 듯한 얼떨떨한 말투로 그의 어깨를 놓아주었다. 지금 한시가 급하기에 그런 것에 일일이 신경을 쓸 여력이 없는 바랑은 바삐 몸을 돌릴 뿐이었다.
그렇게 바랑이 나가려고 몸을 돌렸는데, 백령의 집무실 문이 열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럴 필요 없을 거 같은데.”
입꼬리를 올리고 눈이 반달 모양으로 접힌 은월이 문을 열고 들어왔기에, 바랑은 그대로 그 자리에 굳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