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솔직히 말해요, 은월 님.”
자하가 며칠 새 한껏 퀭해진 눈으로 은월을 바라보았다. 은월은 그저 턱을 괴고 그가 준 사탕을 먹고 있는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내게 꽂힌 시선이 매우 부담스럽지만, 향과 때문에 그냥 넘어가 준다.
“뭐가.”
은월이 시선을 내게 고정한 채로 자하의 말에 대답했다.
“은월 님은 신인 거죠? 신수가 이렇게 일만 하고 살 순 없어…….”
“내가 신이었으면 과연 바랑이랑 나래가 태어났을까?”
은월의 농담 섞인 말투에 자하가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래, 은월이라면 절대 둘을 태어나게 했을 리 없지…….
며칠 동안 그를 지켜본 결과, 그는 매우 성실하지만, 굳이 불필요하게 일을 잔뜩 늘려주는 두 신수를 매우 싫어하는 듯했다.
물론 그 둘 중에서도 특히나 바랑을 마음에 안 들어 하는 눈치지만.
은월은 이따금 내게 향과를 준다. 길게는 사흘에 한 번. 짧게는 이틀에 한 번.
즉, 주기적으로 남쪽 땅을 밟고 온다는 소리다.
오물오물.
은월이 오늘 내게 준 향과가 입안에서 녹으면서 특유의 향을 내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향과가 입안에서 다 녹아버렸다. 쩝, 별수 없지.
입안에 남은 향과의 향기에 입맛을 다시며 은월을 바라보았다.
“다 먹었으면, 오늘 수업을 진행해볼까?”
그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마칠 때 안 주고 시작하기 전에 향과를 주네. 뭐, 난 어느 때 주든 큰 상관이 없긴 하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은월이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럼…… 오늘은 나도 피곤하니까, 실전으로 들어가 볼까?”
실전? 무슨 실전?
은월의 말에 내가 눈만 뻐끔거리자, 은월이 입꼬리를 올렸다.
“기를 찾는 것 말이야.”
아아, 그렇지. 그러고 보니 은월한테 난 아직 기를 못 느낀다고 했었던 거 같기도 하다. 물론, 거짓말이었지만.
오늘은 그럼 약간 쉬어가는 타임 같은 건가?
내가 이해한 것처럼 보이자, 은월이 고개를 돌려 자하를 바라보았다.
자하는 그런 은월의 시선이 매우 당황스러운 듯,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왜, 왜요?”
자하의 물음에 은월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씨익, 하고 웃었다. 그에 자하의 털이 빳빳하게 세워졌다.
“설마…… 아니죠?”
“설마, 뭐?”
은월이 일부러 능청스럽게 자하의 말을 받아쳤다. 자하가 고개를 빳빳하게 저었다.
“아니죠?”
“뭐가?”
은월이 웃으며 되묻자 자하가 할 말을 잃기라도 한 듯, 잠시간 침묵했다.
“……저보고 어디 가서 숨어 있으란 소리, 아니죠?”
“난 이래서 네가 좋아.”
“네……?”
“평소엔 눈치가 더럽게 없어도 이런 상황이면 기가 막히게 눈치채잖아.”
자하가 머리라도 한 대 맞은 것처럼, 당황한 채로 표정이 굳었다.
계속 굳어있는 자하를 보던 은월이 고개를 까딱했다.
“뭐해, 안 가고?”
“저, 저는 아리 님 곁을 벗어나면 안 되는…….”
“그럼 옆에서 지켜봐야 하는 내가 갈까?”
“…….”
“네가 아리의 경과를 지켜보고 그대로 나한테 다 보고할 거냐?”
은월의 물음에 자하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어갔다.
은월한테 보고라…… 그야말로 지옥이군.
“그리고 내가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그렇게 은월의 말에 자하는 어딘가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축 처진 귀랑 꼬리가 그의 심경을 대변해 주었다.
“300초 세고 있어라!”
그런 자하에게 은월은 마지막 당부를 잊지 않았다.
자하가 어딘가로 가 버리고, 정자엔 나와 은월, 단둘이 남게 되었다.
근데 나도 300초 세야 하나?
내가 초를 세려 손가락을 접자, 자하가 떠난 길을 보던 은월이 시선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안 세도 돼.”
뭐? 어떻게? 은월은 알아서 초가 세어지나?
그렇게 황당한 표정으로 은월을 보며 오만가지 생각을 하는데 은월이 하품을 하곤 고개를 까딱거렸다.
“대충 됐다 싶을 때 가면 되지.”
아, 이런 똑똑한 녀석 같으니라고.
애초에 그는 초를 셀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순수한 자하는 열심히 초를 세고 있겠지…….
혹여나 만일 은월이 내게 초를 세라 시킨다면 나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따르지 말아야 한다는 삶의 지혜가 늘었다.
“아, 맞다.”
은월이 소매에서 향과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뭐야, 아까 먹은 게 다가 아니네……?
“향과는 맛도 맛이지만, 그 맛 때문에 다른 걸 신경 안 쓰도록 해주거든.”
내가 느끼는 자하의 기운을 일시적으로 흩트려놓기 위한 향과는 따로 준비해 둔 건가?
잠깐만, 그럼 위험한 거 아니야?
은월을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자, 은월이 작은 실소를 터트렸다.
“향과는 위험한 게 아니야. 신경을 못 쓰는 게 아니라 안 쓰게 해주는 거니까. 맛있는 걸 먹으면 그 순간만큼은 슬픈 일을 잊기도 하잖아? 맛에 신경이 쏠리니까.”
은월의 말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새로운 맛일수록 더 그렇지. 그렇기에 다른 다과나 사탕보다도 향과의 맛에 신경을 쓰게 되지.”
아, 그런 원리인 거였구나. 자체적으로 마취 효과라던가, 위험한 효과가 있는 건 아닌가 보네.
새로운 지식에 내 눈이 자동으로 초롱초롱해졌다.
“여기 들어가는 ‘향’을 가공하면 위험한 게 되어 버리지만.”
하긴, 향과가 위험한 거라면 백령이 먹게 놔뒀을 리 없긴 하다.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고 은월의 손바닥에 있는 향과를 집어 먹었다. 달콤하면서도 시원한 맛이 혀끝에서 느껴졌다.
오물오물.
내가 오물거리며 향과를 먹는 걸 지켜보던 은월이 소매에서 하나를 더 꺼내 본인도 먹었다.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회색빛 눈은 언제 보아도 매력적이었다. 꽤 다정해 보이는 눈은 웃을 때 더욱더 아름다웠다. 물론, 웃으며 저 눈빛으로 가끔 무서운 말을 할 때도 종종 있긴 하지만.
“으너.”
사탕을 입에 머금고 그를 불렀다. 용케 알아들은 그가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뭐 궁금한 거라도 있어?”
그가 입꼬리를 올리며 특유의 미소를 지었다.
“우움…….”
그의 시선을 피해 바닥에 두었다. 나무로 된 정자의 바닥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사버까, 조아?”
사법관, 좋아?
항상 궁금했다. 그가 일하는 걸 좋아하는 편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 왜 항상 바쁜 사법관을 하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여태 들은 바에 의하면 은월은 백령과 맞먹을 만큼 강한 신력을 가진 신수고, 그만큼 높은 위치에 있는 신수였다.
그렇다면 일 못 하는 나래나 바랑을 제치고 본인이 자리에 앉으면 되는 일 아닌가? 물론, 그래도 일이 있긴 하겠지만.
“글쎄, 좋아서 하는 게 아니긴 한데.”
“그런?”
그럼 대체 왜 하는 거야?
나의 질문에 은월이 오른손으로 턱을 받치고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나밖에 할 수 없는 일이니까? 날 가장 필요로 하는 일이기도 하고.”
응? 이게 무슨 소리지?
은월밖에 못한다니?
“땅의 주인들도 일정 수준의 금기를 어기면 즉각 처단해야 할 존재가 그들보다 약하면 안 되잖아.”
그렇게 보니 그런 것 같긴 하다. 지금도 네 땅의 주인 중 한 명이 금기를 어겼으니.
누군진 몰라도 걸리면 즉각 은월한테 사형당하겠군.
“전대 사법관이 법을 집행하지 못하고 살해당한 게 좀 컸지. 난 그때 관심이 없어서 미호한테 전해 들은 거지만.”
은월이 무심하게 전대 사법관의 죽음에 대해 말해주었다.
잠깐만, 그렇다는 건 전대 사법관이 네 땅의 주인이었던 신수한테 죽임을 당한 거야?
그의 다음 말에 귀 기울여 보았지만, 그에 대해서 더 이상의 정보는 말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사법관에 대해서 왈가왈부했다고 들었어. 그래서 나밖에…… 아, 백령이라면 가능하긴 하지. 그런데 백령은 백호잖아.”
백호인 게 무슨 상관이야?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가 멋쩍게 웃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동쪽 땅의 주인이 될 애였으니까. 나랑은 달리.”
은월과는 다르다고? 백호라서?
은월은 여전히 이해를 못 하는 내게 설명을 덧붙여주었다.
“거의 모든 신수는 흑호보다 백호를 더 좋아하니까.”
뭐야, 색깔로 차별하는 거야? 이런 나쁜 신수들 같으니라고.
“백령이 지나치게 천재기도 했고. 뭐, 애초에 난 그 자리에 관심도 없었지만.”
은월이 묵묵하게 말을 이어갔다.
“게다가 난 백령보다 늦게 태어났거든.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백령은 동쪽 땅의 작은 주인이었어.”
이건 또 새로 듣는 정보다. 잠깐만, 저번에 백령이 바랑보다 훨씬 늦게 태어났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보다도 늦게 태어난 은월이 바랑 뒷바라지를 다 해주고 있다고? 진짜 바랑은 뭐 하는 신수인 거지?
“사법관 나쁘지 않아. 똥개랑 아기 새만 없으면.”
은월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둘만 사라지면 내 삶의 질이 달라질 텐데.”
은월이 입술을 꽉 물었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더 이상 듣지 않아도 대충 머릿속에 그려졌다.
충분히 이해가 간다. 한 명이 사고 치는 것도 아니고, 둘이 서로 내기라도 한 듯 밥 먹듯이 사고를 친다고 들었다.
“너라면 사법관 잘할 거 같긴 하다. 네가 할래?”
은월의 질문에 곧장 고개를 저었다.
미쳤다고 내가 내 발로 가시밭길을 걷겠어?
“더 궁금한 거 있어?”
그가 짧게 웃더니, 내게 자상한 얼굴로 물었다. 더 궁금한 거라, 흠…….
은월은 몇 살이야? 흠, 아니다. 어차피 성장한 신수는 나이가 의미가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저리 질문을 기다리고 있는 은월을 보니 무언가를 꼭 질문해야 할 것 같은데…….
“으널, 겨로해써?”
그냥 딱히 생각나는 질문이 없었다. 그 와중에 생각난 게 사랑……정도랄까.
“결혼?”
은월이 내 입에서 나온 단어가 맞는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래, 진짜 뜬금없는 질문이긴 하다.
그런데 그의 결혼 여부에 대해서 궁금하긴 했다. 그는 꽤 위치가 높은 신수인데 결혼을 안 했다기에도 이상하고, 결혼했는데 일만 하는 것도 이상한 것이 아닌가?
게다가 저 얼굴을 가만히 내버려 둘까, 여자 신수들이?
“결혼했는데 몇 달을 돌아다니고만 있으면 맞아 죽지 않을까?”
그의 말에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가 일을 잘하고 성실한 건 사실이지만 사랑하는 여자를 내버려 두고 일만 할 것 같지는 않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아, 사흘을 내리 안 잤더니 피곤하긴 하네.”
은월도 피로를 느끼긴 하는구나……. 자하가 이 말을 들었으면 평소와는 조금 다른 의미로 감격하지 않았을까?
어, 잠깐만…… 그러고 보니, 자하!
“짜, 짜하!”
나의 외침에 그가 아, 하며 탄식을 내뱉었다.
“맞다. 까먹고 있었네.”
그래, 자하야, 미안하다. 나도 널 까먹고 있었어…….
못해도 두 시간은 훌쩍 넘은 것 같다. 그 시간 동안 자하는 날 기다리고 있었겠지?
“뭐, 자하는 아직 네가 기운을 느끼는 것 정도는 능숙하게 할 수 있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니까, 찾는 데 오래 걸린 거로 하자.”
은월은 말을 마치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역시, 은월은 다 알고 있었던 건가…….
잠깐만, 근데 그걸 왜 나한테 책임을 전가하냐, 이 까만 호랑이가!
“자하한테 가볼까?”
그의 눈이 접히고 그가 활짝 웃었다.
그래, 잘생겼으니까 이번만 넘어가 주자.
그의 말대로 능숙한 솜씨로 자하의 기를 느끼고 그를 향해 갔다. 그리고, 이내 자하가 숨은 곳을 찾아낼 수 있었다.
“은월 님, 아리 님……, 훌쩍.”
자하가 훌쩍이며 구석에 박혀서 고개를 파묻고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축 처진 짧은 꼬리가 양쪽으로 번갈아 가며 바닥을 질질 끌고 있었다.
“자하, 우리 왔다.”
은월의 말에 자하가 고개를 돌려 우리를 바라보았다.
“왜 이렇게 늦게 온 거예요! 저 잊으신 거 아니죠?”
뜨끔.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다. 은월은 양심의 가책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건지 능숙하게 자하에게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저, 정말요……?”
“그래. 아리는 정말 열심히 ‘널’ 찾았어.”
일부러 은월이 ‘널’을 강조했다. 그리고 자하의 귀가 쫑긋 세워졌다.
자하야, 넌 정말 단순한 게 장점이자 단점인 것 같다…….
그렇게 단순하며 순수한 자하는 은월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는 헤실거렸다.
자하한테 미안한 건 미안한 거고, 나중에 나도 써먹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