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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님의 딸이 되었습니다 (19)화 (19/167)

19.

은월이 자하를 끌고 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백령이 천천히 내게로 걸어왔다.

“은월은 갔나 보군.”

백령의 말에 나의 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짜하, 가써.”

은월과 자하가 떠난 방향을 손으로 가리키며 그를 바라보자, 그는 예상했다는 듯 그들이 떠난 자리를 바라보았다.

“벌써 감사를 시작하는 건가.”

백령이 중얼거렸다.

그렇다더라, 자하가 기겁하며 끌려갔지.

불쌍한 자하를 구해주고 싶었지만, 백령이 온다는데 그럴 수는 없었다.

이건 운명임이 틀림없어, 그럼 그럼. 그냥 받아들이거라, 자하야.

날 향해 있던 백령이 뒤돌았다. 그가 걸치고 있던 도포가 바람에 날렸다.

“가지.”

그의 말에 정자에서 일어난 나는 아장아장 백령의 뒤를 따랐다. 백령은 내게 시선을 두지 않고 걷고 있었지만 그의 걸음은 내 느린 걸음에 맞춰져 있었다.

내 방에 거의 다다를 때 쯤, 백령이 우뚝 멈춰 섰다.

“은월이 아직 무서운가?”

그가 날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의 얼굴을 보려 고개를 들어 올렸다.

뭐, 처음이야 나를 죽인다니까, 무서웠던 건 사실이지.

그렇게 매섭게 말하는데 안 무서울 이가 어디 있을까? 아, 백령이라면 그렇지 않을지도.

흠……. 지금은 딱히 무섭거나 그렇진 않다.

그가 준 향과를 떠올렸다.

엄청 맛있었지, 그거.

아직도 향과 특유의 달콤한 향이 입안에 감돌고 있었다.

이 정도면 합격이다. 여태껏 자하가 내게 준 건 사탕이 아니었음이 틀림없다.

“으너, 조아! 사탄, 마이써!”

사탕에 눈을 빛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금은 전혀 무서운 느낌은 아니다.

뭐, 대충 말하긴 했지만 뜻은 제대로 전달됐겠지?

“사탕?”

백령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백령이 허리를 숙여 얼굴을 내게 가져다 댔다. 그의 은빛 머리칼이 유독 예뻐 보였다. 고개를 따라 머리칼이 내려갔다. 그 모습마저 너무 아름다웠다.

처음 느껴보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향과로군.”

내게서 나는 향기를 맡은 백령은 굽혔던 허리를 펴고 다시 똑바로 섰다.

“향과라…….”

백령이 큰 손으로 자신의 턱을 받치고 잠시간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생각에 잠긴 푸른빛 눈이 더욱더 아름다우며 매력적으로 보였다.

“남쪽 땅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건가.”

그렇다더라. 나랑 자하한테 뭔지는 안 알려줬지만.

그가 고민하는 모습을 나는 조용히 지켜보았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고개가 점점 아려왔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는 거야, 백령.

“아, 아리 님, 수업을 마치셨군요.”

복도를 지나다 나를 발견한 여노가 나와 백령을 발견하곤 우리가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금방 나의 바로 옆에 도착한 여노는 백령에게 짧은 묵례를 했다.

“여노, 왔군.”

백령이 그제야 생각을 멈추고 여노를 바라보았다.

“네, 늦어서 죄송합니다. 전언이 있어서…….”

“전언?”

백령의 물음에 여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은월 님이 찾으신다고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은월이?”

“네.”

백령의 물음에 여노가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잠깐 무언가를 생각하던 백령이 뒤돌아섰다.

그가 뒤돌아섬과 동시에 내 입이 떡, 하고 벌어졌다.

뭐? 벌써 간다고?

왜 벌써 가! 난 인정할 수 없다.

“뿌우!”

볼을 크게 부풀리곤 아장아장 걸어가서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배, 배련!”

내가 그를 부르자, 백령이 다시 뒤를 돌았다. 이내 나의 작은 머리에 그의 큰 손이 얹어졌다.

그의 손길은 언제나처럼 따뜻했다. 그에 조금은 마음이 풀렸다.

“좀 이따 보지.”

백령이 그렇게 말하고 은월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나는 여노가 부르는 소리에도 한동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주 살짝, 잠시였지만 그가 처음으로 내게 미소를 지어주었기에.

***

백령이 벽에 기대서 있는 은월을 바라보았다. 그의 검은 머리칼이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어제 남쪽 땅이라도 다녀온 건가.”

백령의 물음에 은월이 기대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래. 갔었지.”

은월이 수긍하며 숙였던 고개를 들어 백령과 시선을 마주했다.

“백령, 넌 지금 흑기들이 숨기 가장 적합한 땅이 어디라고 생각해?”

은월의 물음에 백령이 눈을 감았다. 백령은 일전에 바랑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가 나중에 알려주겠다고 했었던 흑기들의 소식.

“만약 조사를 시작하면, 남쪽 땅을 먼저 살펴봐.”

누구보다 여행을 좋아하는 자유로운 영혼인 바랑은 꽤 자주 다른 땅을 방문하는 편이었다. 그는 이따금 백령에게 다른 땅의 소식을 전하러 와 준 적도 적지 않게 있었다.

흑기의 소식을 전해주러 온 그때처럼.

바랑이 그렇게 말하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거라 백령은 생각했다. 가령 무언가를 보았다거나, 기운을 느꼈다거나.

아니면, 시선을 돌리기 위해서라던가.

“너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루에게 남쪽 땅을 먼저 조사하라 일렀겠지.”

“…….”

“허탕이었지만 말이야.”

은월이 무언가를 생각하듯 눈을 내리고는 팔짱을 끼고 손가락으로 팔을 톡톡 쳤다.

“남쪽 땅에 간 이유가 무엇이지?”

백령의 물음에 손가락을 멈추고 시선을 그에게로 옮겼다.

“남쪽 땅에서 최근, 반란의 낌새가 보였어.”

“반란?”

은월의 말에 백령이 되물었다, 그러자 은월이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 나래의 궁에 누군가가 침입했었지. 그녀에겐 아무 일도 아니라고 치부했지만.”

“그리고?”

“그리고라니?”

은월의 되물음에 백령이 확신에 찬 눈으로 은월을 바라보았다.

“네가 반란이라고 단정 지었다면 다른 게 더 있을 텐데?”

백령의 물음에 잠시간 머뭇거리던 은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거기서 발견했지.”

은월이 회색빛 눈을 빛냈다.

“반란 단체로 보이는 문양이 박힌 두건을.”

“조만간 남쪽 땅이 발칵 뒤집어지겠군.”

백령의 말에 은월이 수긍하며 옅은 웃음을 띠었다.

“그리고, 흑기들이 가장 숨기 좋은 땅이 되겠지.”

은월의 말에 백령이 인상을 구겼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혼란 속에서 흑기를 찾아내기란 쉽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아루랑 마루가 못 찾아내고 있는 것에 찝찝했던 백령이었다. 남쪽 땅의 소식이 달갑지 않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은월 또한 잘 알고 있는 바였다.

“아마 지금 당장은 실행에 옮기지 않겠지. 아직 칼을 갈고 있을 뿐.”

“그렇겠지.”

백령의 수긍에 은월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회색빛 눈이 진해졌다.

“내가 지금 이걸 왜 너한테 말한다고 생각해?”

은월의 물음에 백령 또한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이내 그의 속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막을 생각이 없군, 은월.”

백령의 대답에 은월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래.”

백령은 그의 처사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인상을 구기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 시선에 은월이 시선을 돌려 먼 곳을 바라보았다.

“지금 막는다 해도 언젠간 일어날 일이야. 게다가 남쪽 주인이 바뀌면 내 일은 현저히 줄어들 거고.”

백령은 아무 대답 없이 그저 은월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한 가지 찝찝한 게 있다면…….”

백령이 그의 다음 말을 예상한 듯 눈을 감았다. 둘 사이에서 잔잔한 파도가 치고 있었다.

“시점이 기가 막힌다는 거지.”

“누군가의 관여가 있었겠군.”

백령이 그의 말에 빠르게 반응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지금의 상황을 설명할 길이 없지. 그 뒤에 있는 누군가를 찾아야 해.”

은월의 눈이 낮게 가라앉았다.

“일전에 아리와 여노가 봤다는 정신이 멀쩡한 돌연변이 흑기. 그리고 그를 도와주는 누군가.”

“조력자는 네 땅의 주인 중 하나겠군.”

“그래, 맞아. 배짱도 좋아, 감히 미호랑 너의 성질을 건들어대니, 말이야.”

백령의 말에 은월이 맞장구쳤다. 심각하게 고민하던 은월이 입꼬리를 올렸다.

“바랑이면 좋겠네.”

은월이 눈을 접고 웃었다. 백령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에 은월이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여주었다.

“합법적으로 죽여 버리게.”

매서운 그의 말과는 달리 말투는 매우 부드러웠다.

농담 반, 진심 반으로 은월이 말하자, 백령이 고개를 저었다.

“이랑이 크길 기다리는 것에 타협을 본 것이 아니었나.”

“그래, 그래었지.”

은월이 한숨을 푹 쉬었다. 지나간 나날들이 그의 머릿속에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때까지 서쪽 땅에 밥 먹듯이 출석 도장 찍어야 한다는 게 상당히 기분이 나쁘다고.”

‘어지간히 일을 안 해야지.’

은월이 짜증이 역력한 말투로 덧붙였다.

백령이 은월의 말에 어느 정도 공감하는 바였지만 굳이 내색하지는 않았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은월의 회색빛 눈이 흐려졌다.

“백령.”

은월이 백령의 이름을 부르자, 백령이 잠시 떨궜던 고개를 일으키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날 이후, 많이 변했었는데.”

“…….”

“다시 많이 변했네. 아리 때문인가?”

“신경 꺼라.”

백령이 은월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에 은월이 짧게 웃음을 흘렸다.

“어떻게 할 거야, 저 아이?”

은월의 물음에 백령이 고개를 뒤로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계속 네 아이가 아닌 걸 네 아이라고만 할 순 없잖아. 아무리 아리를 보호하기 위해서라지만.”

백령은 아무런 답도 하지 않은 채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보고 있었다. 백령의 시선에 은월이 어깨를 올렸다.

“그렇잖아?”

은월의 물음에 백령이 그에게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다시 돌렸다.

“참견이 늘었군, 은월.”

그 말을 남긴 채로 백령은 그 자리를 떠났다. 은월이 다시 벽에 기대섰다.

그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게, 참견이 늘었네, 나도.”

은월이 아리를 떠올렸다. 평소 아이답지 않은 무심한 표정을 짓는 아이. 신기했다. 세상에 이런 아이가 있다는 것이.

향과는 남쪽 땅에 간 김에 아무 생각 없이 사 온 거였다. 딱히 아리를 생각하고 사 온 건 아니었다. 그런데, 아리의 얼굴을 보며 수업을 시작하고 향과를 먹은 아리의 반응이 매우 궁금해졌다.

그때도 그렇게 무심한 표정을 지을까?

보통 아이들은 사탕이라는 말에 바로 눈을 빛내기 마련이다. 그런데 아리는 사탕이라는 말을 듣고 개똥이라도 씹은 것 마냥 표정이 좋지 않았다.

은월에겐 아주 생소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아리라는 점에서 그 반응이 그리 당황스럽진 않았다.

아리는 어딘가, 다른 아이들과는 달랐으니까.

아리가 향과를 먹고 눈을 반짝이던 때를 떠올렸다. 자동으로 입에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여태껏 그가 본 아이 중 가장 독특한 아이였다.

법을 어긴 아이이며 인간인 아이. 그런 아이를 은월은 싫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리를 만나고 그의 생각이 완전히 뒤집혔다.

은월에게 아리는 꽤 흥미로운 아이로 가슴 한편에 자리매김하였다.

“은월 님?”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은월이 천장에 두었던 시선을 목소리의 주인에게로 옮겼다.

“여기, 말씀하신 것들 ‘전부’ 가져왔습니다.”

자하가 일부러 ‘전부’라는 단어에 힘을 주며 말했다. 자하는 은월의 명령을 수행하며 상당히 지쳐 있었다. 이렇게까지 일을 열심히 하는 건 오랜만이었던 터라, 적응이 잘되지 않은 것이 이유였다.

그래서, 은월의 방문을 제일 꺼려하는 것 또한 자하였다.

‘이 많은 걸 언제 또 처리해…….’

자하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뱉었다.

은월이 자하가 열심히 가져온 것들로 시선을 옮겼다. 자하가 가져온 건 동쪽 땅을 사찰하기 위한 자료들이었다.

“수고했어.”

은월이 기댔던 몸을 일으키고 그가 가져온 것들을 눈으로 흘겨보았다.

“진짜…… 오늘부터 시작하신다고요?”

자하가 기겁하며 귀를 빳빳하게 세웠다. 물론 꼬리를 세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의 털이 미세하게 떨렸다.

“어.”

“진짜로요……?”

“말할 시간에 하나라도 더 하는 게 나을 텐데.”

은월은 괜한 푸념을 떨치고 해야 할 일을 차곡히 시작해나갔다. 그런 은월을 보며 자하는 멍한 표정으로 ‘은월 님은 신수가 아니야……. 신수가 아닌 무언가임이 틀림없어…….’라고 중얼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은월은 자신에게 주어진 현재의 일을 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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