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자하와 여노에게 점점 가까워지면서 그들의 실루엣이 보이기 시작했다.
분명 저 강아지와 고양이는 자하랑 여노가 맞긴 한데…… 어째 불길한 실루엣이 하나 더 보이는 것 같은 건 내 착각인가?
착각이겠지? 착각일 거야, 그럼 그럼.
애써 나 자신을 안심시키며 좀 더 다가갔다.
그들과 점점 가까워지던 나는 형체가 어느 정도 선명히 보이기 시작했고, 그대로 발이 땅에 붙을 수밖에 없었다.
네, 네가 대체 왜 여기에?
자리에 멈춰 입을 크게 벌리고 경악하던 나와 그의 회색빛 눈이 정확히 마주쳤다.
“잘 찾아왔네.”
나와 눈이 마주친 이는 아까 봤던 그 흑색 호랑이였다.
저, 저! 흑호 신수가 왜 여기 있는 거야?
내가 당황하며 황당해하고 있자 자하와 여노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아리 님, 어디 계셨던 거에요? 한참을 찾았어요. 다행히 늦지 않았네요.”
여노가 내게 무어라 말을 했지만, 지금의 내게 여노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여너…….”
여노의 치맛자락을 잡았다. 그러자 여노가 무슨 일이냐는 듯 날 바라보았다.
“저거 머야?”
손으로 흑호를 가리켰다. 여노가 당황하며 부드러운 손으로 천천히 내 손을 내렸다.
“저, 저거라니요, 아리 님.”
여노가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그녀는 상당히 곤란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저거 뭐냐고, 저거!
나의 눈빛에 흑호가 눈을 곱게 접어 웃음을 흘렸다.
지금 나랑 싸우자는 건가?
“아리 님, 그렇게 경계하실 필요 없어요.”
“머?”
무언가를 생각하기도 전에 여노가 재빠르게 말을 이어나갔다.
“저분이 바로, 은월 님이랍니다.”
뭐? 은월? 어디서 들어본 거 같은데, 누구였지?
분명 어딘가에서 들었던 것 같다. 자하랑 여노, 심지어 백령도 그다지 반가워하는 신수는 아니었는데, 정작 누군지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인상을 찡그리고 곰곰이 고민하자, 흑호, 아니, 은월이 내게로 다가왔다.
“다시 한번 잘 부탁해.”
그가 다시 한번 다리를 굽히고 앉아, 나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이어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앞으로 널 가르칠, 현 사법관인 은월.”
“아?”
그래, 이제야 기억났다. 미호가 내게 붙여준 선생 같은 존재.
사법관의 위치에 있어, 신수들의 위치나 지위에서 유일하게 억압받지 않는 자유로운 신수.
아까 나보고 여러모로 잘 부탁한다는 게 이걸 뜻하는 거였어?
그래서 시험해봤다는 건가? 내가 신력을 조절 못 하니까?
그의 행동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가 나를 알고 있던 것, 그리고 동쪽 땅에서 잠시 머문다는 것.
그건, 나를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내가 완전히 이해한 듯 표정을 풀자, 은월이 내민 손을 흔들었다.
일단은, 내…… 선생이라는 거지?
천천히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그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백령부터 찾아가 볼까나.”
그건 찬성이다, 은월아. 얼른 가자꾸나.
그가 굽혔던 다리를 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백령의 집무실을 향해 걸어갔다. 나와 자하, 여노 또한 그를 따라 백령의 집무실로 향했다.
“왔군, 은월.”
우리가 들어오자, 백령이 은월을 보며 보던 두루마리를 내려놓았다. 그의 아름다운 벽안이 조금은 피곤해 보였다.
“미호가 최대한 서둘러 달라고 부탁해서.”
은월이 자리에 앉자, 시녀가 들어와 차를 내놓았다. 차의 향이 백령의 집무실 안을 점점 채워갈 때 즈음, 자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빨리 온 게…… 이거라구요?”
자하의 말에 은월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어.”
“흑기들 때문인가.”
백령이 무심히 물었다. 은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흑기들 덕분에 내 일이 몇 배로 늘었지. 단서가 없어서 꽤나 고생 중이야. 누가 감춰주고 있는지, 원.”
은월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의 말투에서 약간의 짜증이 느껴졌다. 흑기들 때문에 제일 바빠진 신수인 것 같았다.
하긴, 사법관이랬으니까.
“아루랑 마루도 단서를 못 찾다니.”
자하의 탄식 섞인 말에 은월이 고개를 저었다.
“걔넨 지금도 전 영지를 돌아다니고 있을 텐데…….”
뭐라? 아루가 안 보이던 게 그런 이유였다고?
갑자기 아루가 불쌍해지기 시작했다. 전 영지를 돌아다닌다니……. 갈 거면 옆에 있는 자하가 가도 되는데…….
은월이 차를 한 모금 더 마시며 말하자 자하가 끔찍하다는 듯 귀를 바짝 세웠다.
“으, 전 절대로 정찰 일은 못 할 거에요.”
“시킬 마음도 없을걸?”
하긴, 자하랑 정찰은 정말 안 어울릴 것 같긴 하다. 아마 하다가 탈주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걸 아루가 잡으러 가지 않을까? 결국 아루의 일만 늘리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확실해.
은월이 별걱정을 다 한다면서 웃음을 흘렸다. 백령은 그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자하가 안심을 하며 빳빳하게 솟아있던 귀가 다시 원래의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런데, 이렇게 늦은 건 흑기 때문만은 아니야.”
“네? 벌레 때문이 아니라면 대체 뭐 때문에…….”
자하가 말끝을 흐리며 고민에 빠졌다. 그러자, 은월의 표정이 매우 안 좋아졌다. 은월이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듯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도중에 바랑이 또 사고를 쳐서.”
“또요……?”
은월의 말에 자하가 기겁하며 되물었다.
바랑, 너 이 자식. 정말 온갖 곳에 민폐를 끼치고 다니는구나! 이런 똥개 같은 놈. 아니, 똥개 자식.
혹시 악의 무리는 흑기 같은 게 아니라 바랑이 아닐까? 이건 아무도 반박 못 할 거 같은데…….
자하가 바랑의 행적에 감탄하며 고개를 저었다.
“이번엔 또 무슨 사고를 치셨대요?”
“정무 쪽.”
“아…….”
자하가 더 이상 안 들어도 알 것 같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귀가 반으로 접혔다.
정무? 정무란 행정 쪽 일인 건가?
하여튼 가지가지 해요, 만악의 근원은 바랑 탓임이 틀림없다.
“뭐, 사고라기보단 국고가 조금 털린 정도?”
은월이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그의 표정은 그렇지 못했다.
“그게 사고지 않나요?”
“바랑한테 그 정도야, 껌이지 뭐. 일을 그만큼 안 하는데.”
은월의 말에서 자포자기한 그의 심정이 잘 전달되었다.
“바랑 님은 정말 자유로운 영혼이시네요.”
여노가 얼떨떨한 웃음을 지으며 바랑을 순화해서 표현했다.
자유로운 영혼은 개뿔.
여노의 말에 나와 은월의 미간이 동시에 찌푸려졌다.
“책임감이 없는 거지.”
내 말이 그 말이다.
은월은 정말 바랑한테 쌓인 게 많아 보였다. 분명 입과 눈은 웃고 있는데 무언의 아우라가 감돌았다. 저건 살기다, 살기.
“그래도 제가 들은 바로는 원치 않던 자리였는데, 흑랑 님이 돌아가시고 울며 겨자 먹기로 끌려갔다던데…….”
여노의 말에 은월이 지그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건 봉황 새끼도 마찬가지지 않아? 봉황은 일을 못 하는 거고, 그 늑대 새끼는 일을 안 하는 거니까.”
그래, 못하는 것보다 안 하는 쪽이 훨씬 열 받지.
백 번, 천 번 은월의 말이 맞다. 안 하는 것과 못 하는 것은 다르고, 그 자리에 있으면 무릇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은월의 말에 여노가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저 말을 누가 수긍하지 못하리.
“또옹깨라서 끄래.”
나의 말에 자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아리 님. 똥개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바랑이 똥개야?”
은월이 자하와 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몰랐어? 그거 공론화된 지 오랜데. 소식 느리네.
아, 혹시 늑대인데 내가 똥개라고 해서 그 부분에 의문을 품는 건가?
“늑때, 개까야.”
“그럼요, 늑대는 갯과죠. 그러니까 똥개 맞습니다.”
“어머, 우리 아리 님 너무 똑똑하신걸요?”
후, 이제야 알아주는구나. 그동안 얼마나 서러웠는데.
자하가 감격에 젖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신력도 벌써 개방하시고, 아리 님은 대단하셔요.”
“그러고 보니 그것도 그렇네요.”
자하와 여노가 나를 칭찬하기 시작했다.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내가 이곳에 온 이유도 그 때문이지.”
은월이 마시던 차를 내려놓았다.
“확실히, 생각보다 성장이 덜 된 신수라 놀랐어.”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아름다운 회색빛 눈동자가 빛났다.
“이렇게 성장이 덜 됐는데도 신력을 개방하다니, 단순히 구슬 때문만은 아닐 텐데…….”
그가 턱을 괴고 나를 바라보았다. 자하와 여노는 그저 그의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흐음…….”
은월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노, 자하. 잠시만 나가주겠어?”
은월이 둘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노가 바로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은월 님.”
“저는 아리 님 곁에서 떨어지면 안 되는…….”
“따라와요, 자하 님.”
“자, 잠깐!”
여노가 나가지 않으려 버티는 자하를 질질 끌고 나갔다. 자하가 집무실을 완전히 나가기 전, 나에게 애처로운 눈빛을 보냈다.
“아, 아리 님…….”
무슨 몇 년을 헤어지는 연인처럼 눈물을 글썽였다.
“빠빠.”
내가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자. 자하가 충격받은 표정으로 퇴장했다.
이게 아닌가? 좋아할 줄 알았는데.
뭐, 상관없나.
방문이 완전히 닫히고 자하와 여노의 기운이 멀어지자, 은월의 오묘한 회색빛 눈이 다시금 내게로 향했다.
“인간인데도 위화감이 하나도 안 느껴지네. 마치 원래부터 신수였다는 듯이.”
……응?
뭐야, 은월이 나에 대해서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백령이 짧은 한숨을 쉬었다.
“미호가 말했겠군.”
“아무리 그래도 사법관인 나는 알고 있어야지.”
그가 싱긋, 웃으며 되받아쳤다. 그의 회색빛 눈이 가늘게 접혔다.
백령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고개를 돌려 버렸다.
“쓸데없는 짓을.”
“아예 쓸데없지만은 않지.”
백령이 그를 바라보았다. 은월 또한 곁눈질로 백령과 눈을 마주쳤다.
“인간을 이 땅에 들이는 거, 법을 어긴 건데도 모른 척 넘어가 주잖아.”
인간을 들이는 게…… 법을 어긴 거라고?
그렇다는 건 백령이 법을 어기면서까지 나를 데려왔다는 건가?
백령이 처음 나를 데려왔을 때를 떠올렸다. 미호가 예민하게 반응했던 것. 백령이 나를 돌려보낼 거라 했던 것.
모두, 법을 어긴 것이기 때문이었던 걸까?
그렇게 하면서까지 날 살려줬던 거야, 백령?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둘의 대화에 좀 더 집중할 뿐.
“미호가 아무리 절대자라지만 질서를 지키는 처지인 이상 내게 관여할 권한은 없어.”
은월이 단호히 말했다. 그의 눈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지금 알게 됐다면 이 아일 바로 죽였을 거야.”
그렇게 말하는 은월의 눈에 자비란 없어 보였다.
만약, 정말 그랬다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죽였을까?
죽는다, 라……. 분명 전생에서 내가 경험해 보았던 것.
그에 대해 생각을 하니 사뭇 은월이 무섭게 느껴졌다.
은월을 더 이상 바라볼 수 없었다. 바닥으로 고개를 떨궜다. 미세하게 몸이 떨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가 날 들어 올렸다.
“그랬다면, 너도 이 자리에 앉아 있진 못했겠지.”
날 들어 올린 건 다름 아닌 백령이었다. 백령이 날 품에 안았다. 백령 특유의 향이 느껴졌다. 점차 떨리던 내 몸이 진정되어 갔다.
“무섭게 말하기는. 미호를 통해서라도 미리 알았으니까, 그 아일 죽일 일은 없어.”
은월이 웃음 섞인 한숨을 뱉었다.
“이제 내가 저 아이의 선생이기도 할 테니까.”
그 말에 고개를 돌려 은월을 바라보았다. 은월의 차갑게 식어 있었던 회색빛 눈이 따스하게 바뀌었다.
“그저 경고였던 건가.”
백령이 작게 읊조리자, 반대편에 앉아 있는 은월이 미소와 함께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니까, 괜히 날 세우지 마.”
백령의 인상이 조금은 펴졌다. 하지만 곧 다시 은월을 노려보게 되었다.
“나도 아리가 마음에 들었으니까.”
응? 뭐라고?
놀란 토끼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가 또다시 특유의 미소를 지었다. 세상 모든 만물이 평온할 것 같은 미소.
하지만 잊지 말자, 그는 죄를 짓는다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처단하는 놈이라는 걸.
“앞으로 잘 부탁해, 아리야.”
몇 번째 부탁인가? 이제 새는 것도 지쳤다. 그냥 고개나 두어 번 끄덕여 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