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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님의 딸이 되었습니다 (16)화 (16/167)

16.

“아리 님! 어디에 계신 거예요!”

“그쪽에도 안 계셔요? 백령 님 집무실에도 안 계시던데…….”

맞아, 난 그쪽에 없어! 백령은 요즘 바쁜 것 같으니까, 안 찾아갔지.

백령은 이 시간 즈음은 항상 바쁘단 말이야, 난 눈치 없이 일하는데 방해하진 않는다고.

자하가 머리를 헝클이며 근심 가득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멀어서 잘 보이진 않지만 확실하다, 확실해.

“아리 님은 정말 못 말려요. 얌전하다가도 갑자기 이러시니…… 도무지 예측할 수가 없어요.”

어떻게 알았지? 내가 이날을 위해 잠시 얌전한 척을 했다는 것을!

눈치 빠른 여노와 내 옆에만 맨날 붙어 다니는 자하를 떼어내려면 그들이 방심한 순간을 노리는 방법뿐이었다.

“오늘은 진짜 안 되는데……, 일단 얼른 찾아보자, 여노.”

“네, 자하 님.”

멀리서 날 찾는 여노와 자하의 목소리에 기척을 숨기고 귀를 기울였다. 저번에 한 번은 자하가 냄새로 찾아온 적이 있기에, 냄새를 교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여노와 자하가 발을 동동 구르며 나를 애타게 찾고 있었지만, 작정하고 숨은 나를 찾아낼 수 있을 리 없었다.

여노와 자하가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후우…….”

숨을 크게 한 번 들이쉬었다. 그리고 그와는 상반되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성공이다!

어느새 익숙해진 걸음걸이로 백령의 궁을 천천히 나갔다.

큼큼, 역시 사족보행보다는 이족보행이 낫군.

여노와 자하의 기운을 피해가며 천천히 나의 목적지로 향해갔다.

오늘 여노와 자하를 따돌린 이유인, 그곳으로!

백령의 궁에서 보이는 가장 큰 나무가 있는 궁 바로 옆. 그곳엔 백령 궁보단 확연히 작은 별장처럼 보이는 궁이 하나 있었다.

누가 봐도 내 사생활을 보호해줄 비밀기지로 보이지 않는가?

날 애타게 찾고 있을 여노와 자하에게 미안한 마음과는 상반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점점 내 비밀기지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점점 내 차기 비밀기지와 가까워질 때 즈음, 무언의 기운이 느껴졌다.

느껴지는 기운은 자하도, 여노도 백령도 아닌 난생처음 느껴보는 기운.

하긴, 난 누가 사는지 확인해 본 적이 없으니 누군가가 사는 곳일 수도 있긴 하다.

그래도 내 차기 비밀기지가 될 뻔한 곳인데, 이곳에 사는 자가 어떤 신수인지 얼굴은 한 번쯤 봐야 하지 않겠는가?

내 몸은 점점 기운이 느껴지는 쪽으로 향했다.

기분 좋은 바람이 산뜻하게 불었다. 입고 있는 비단 치마와 내 은빛 머리칼이 바람결을 따라 흩날렸다.

이내 몇 걸음을 움직인 나는, 느꼈던 기운의 주인을 만나게 되었다.

나무 밑에서 곤히 자고 있는, 흑색 호랑이를.

……궁으로 돌아가자. 왠지 걸리면 많이 귀찮아질 거 같다.

혹시나 호랑이가 깰까, 살금살금 뒤로 돌았다.

흐음…….

조금만 더 보고 가는 건 괜찮겠지?

다시 살금살금 호랑이 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백령과 같은 호랑이 신수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뭐 하는 신수인 걸까?

흑호 신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양손으로 턱을 괴고 곤히 자는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눈을 감고 있어 그의 눈은 볼 수 없지만, 그가 티끌 하나 없는 멀끔한 얼굴이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백령이 좀 더 신비로운 느낌이라면, 이 흑호는 좀 더 점잖은 느낌이랄까?

그의 진한 흑발이 바람에 흩날렸다.

흐음……, 그가 눈 뜬 모습도 궁금하긴 했지만, 진짜 더 있다간 귀찮은 일이 생길 것 같아 그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 정도 감상했으면 됐지, 뭐.

그렇게 돌아서서 가려던 찰나, 내 작은 손목이 누군가에게 잡혔다.

깜짝 놀라 휘둥그레진 눈으로 날 잡은 손의 주인을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어디 가?”

날 붙잡고 있는 손의 주인은 다름 아닌 곤히 자던 흑호였다. 그의 회색빛 눈동자가 아름답게 빛났다.

“어, 음…….”

그의 갑작스러운 기상에 매우 당황스러웠다.

내가 일어나는 소리가 너무 컸나?

“흠……, 아직 말을 못 하는 건가?”

그가 작게 혼잣말인 듯 읊조렸다.

이 호랑이가 누굴 바보로 아는 건가?

진지하게 흑호가 나를 보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 특유의 눈빛이 상당히 기분 나빴다.

이내 그가 누워있던 몸을 일으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보다 훨씬 큰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라!”

“어, 잘했어.”

뭐지? 이 놀림 당한 기분은?

왠지 모르게 분한 마음이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여유 있는 표정으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뿌웁!”

볼을 잔뜩 부풀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위협하는 나의 모습에도 그는 그저 살며시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렇게 봐도 소용없어, 아리.”

어? 내 이름을…… 알고 있어?

난생처음 보는 호랑이인데, 내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혹시 동쪽 땅에 사는 모든 신수가 내 이름을 알고 있는 건가?

아니다, 그럴 리는 없다. 백령 성격상 아직 성장이 덜된 나를 세상에 알릴 리가 없다. 게다가 그는 나를 보호할 목적으로 데리고 있는걸?

그럼 대체 이 흑호는 내 이름을 어떻게 아는 거지?

“어, 어떠케?”

내가 당황하며 묻자, 그가 피식, 작은 실소를 터트렸다.

“그러게 말이다.”

그래, 얘도 정상은 아니야.

애초에 여태껏 만난 신수들 중에 제정신이 똑바로 박힌 신수는 거의 전무하다 싶었지. 이젠 놀랍지도 않다.

바랑보다 심각한 신수가 있다면 그땐 정말 놀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가 다리를 굽히고 앉아, 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의 회색빛 눈동자에 당황한 나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되게 멀리도 왔네.”

멀긴 개뿔이? 백령 궁 바로 옆이다. 넌 저기 있는 거대한 궁이 보이지 않는 거니?

“안 머러.”

“다시 한번 백령의 궁을 좀 볼래?”

뭘 또다시 보래? 분명 바로 옆에 있……어?

이상하다. 분명 백령 궁 바로 옆에 있었던 곳인데, 백령의 궁이 너무나도 멀게 느껴졌다.

한 가지 생각이 나의 뇌리를 스쳤다.

어디서 개수작이야, 이 호랑이가!

겉만 시꺼먼 줄 알았더니 속도 시꺼멓기 짝이 없다.

“도려나!”

나의 말에 흑호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내가 뭘?”

“네가 해짜나!”

흑호가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며 어깨를 으쓱였다.

누가 속을 줄 알아? 절대 안 속는다.

확신에 찬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갈래?”

“우음…….”

이렇게 들어 보니 그냥 돌아가기엔 뭔가 섭섭하지 않은가? 모처럼 처음 보는 풍경이 펼쳐져 있기도 하고.

그런데 여노랑 자하가 나 계속 찾고 있을 텐데…….

게다가 나는 이 호랑이 신수가 뭐 하는 놈인지 모른다.

내가 노골적으로 흑호에게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내가 못 미더운 건가.”

처음 만난 신수를 믿으면 그게 바보 아니야?

자하면 모를까, 나는 그런 바보가 아니다. 그렇기에 기고만장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웅.”

“흐음…….”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자, 흑호가 고민하기 시작했다.

“나 꽤 높은 신수인데?”

그러니까 더 못 믿겠다. 높은 신수라 함은 사화랑 바랑이 있지 않은가? 절대로 믿어선 안 되는 족속이다.

맞다, 나래도 있었지. 아무튼, 믿을 수 없는 족속들이다, 암암.

좀 더 강렬하게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그러자, 그가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바랑을 만났다면 이 말이 더 못 미덥긴 하겠지만…….”

바랑아, 착하고 성실하게 살자, 알았지?

대체 어디서 뭘 하고 다니면 평판이 다 이따위인 걸까…….

이것도 어찌 보면 그의 능력 아닌 능력이 아닐까, 싶다.

오늘도 바랑의 낮은 평판을 들으며 그에게 충고하는 걸 잊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가 더 이상 날 설득할 마음이 없는지 고민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난 되게 착한 신수인데.”

뭐? 역시 너 나쁜 신수였구나?

자기 입으로 저렇게 말하는 신수치고 착한 놈 못 봤다.

그가 잡은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아직 어리고 약한 내가 뿌리칠 힘이 아니었다.

“으, 나!”

“아직 신력을 다루는 게 익숙지 않은가 보네.”

말을 마친 그가 손을 스르륵, 놓아주었다. 자유의 몸이 된 나는 당장 이곳을 떠나고 싶었지만, 저 멀리 보이는 백령의 궁까지 갈려면 한참이나 걸릴 듯싶었다.

게다가 난 지리도 몰라!

나의 짧은 인생. 그 인생에서 백령 궁을 나와 본 적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아루한테 청마를 부르는 휘파람이나 가르쳐 달라고 할 걸……. 자하도 알려나?

“들은 대로네.”

그가 검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회색빛 눈으로 날 보았다.

“드러? 머?”

“흠…….”

그가 손가락을 튕겼다.

이내 주위의 풍경이 바뀌었다. 멀어져 있던 백령의 궁은 다시 바로 옆에 있었고, 마치 신기루처럼 내가 알던 풍경으로 서서히 채워져 갔다.

주술인 건가? 술수? 뭐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가 친절한 웃음을 지어주었다.

“신기해?”

신기? 신기는 얼어 죽을.

그를 있는 힘껏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나의 작은 입을 열었다.

“주그래?”

“응?”

나의 말에 그가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회색빛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떨렸던 것도 같다.

“나 소여쪄!”

이놈 자식! 감히 나를 속이다니!

“……그게 중요한 거야?”

당연하지, 그럼 뭐가 중요해?

그가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뭐, 어쩌라고? 나한텐 이게 제일 중요해!

진심으로 지리를 몰라서 걱정하고 있었는데, 이게 다 거짓이었다니!

눈을 가늘게 뜨고 흑호를 노려보았다.

“그렇게 노려보지 마. 네가 여기 온 김에 간단한 시험을 한 것뿐이니까.”

네가 뭔데 날 시험해? 웃기는 신수일세.

그의 말에도 눈의 힘을 풀지 않았다. 그런데 이 흑호는 개의치 않는 듯, 주위를 둘러보다 날 다시 바라보았다.

“근데, 여긴 왜 온 거야?”

……어?

그러고 보니, 나의 최종 목표가 이놈 때문에 산산이 조각나 버렸다. 나의 사생활을 지켜줄 내 비밀기지!

“모라도 대!”

그와 마주 보고 있던 고개를 홱, 돌렸다. 그 탓에 내 은빛 머리칼이 흩날렸다.

“여기가 마음에 들어?”

뜨끔.

마음에 안 든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왜인지 저 흑호에게 수긍하기는 정말로 싫다. 결국 나는 침묵을 지키기로 했다.

“여긴 내가 동쪽 땅에 올 때마다 묵는 곳이야. 예쁘지?”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맞는 말이라 부정할 수가 없다.

뭔가 비밀스럽고 신비로운 공간. 누군가가 관리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자연 그대로의 미가 느껴지는 풍경.

“가끔 놀러 와. 어차피 난 당분간 여기 머무를 거 같으니까.”

네 놈이 머무르니까 못 오는 거잖아!

“내가 있어서 싫어?”

당연하지!

지금 당장 수긍하려 고개를 돌렸지만, 그의 얼굴을 보니 막상 또 수긍하기 힘들다. 면전에다 대고 욕을 하는 건 좋지 않지, 암암.

절대 흑호의 얼굴이 잘생겼다거나, 잘생겼다거나, 잘생겨서 그런 거 아니다.

“앞으로 잘 부탁해.”

흑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은 백령만큼이나 컸다.

“머?”

뭘 잘 부탁해? 난 앞으로 너의 얼굴을 볼 일이 없을 것 같은데?

의문을 품은 채로 그를 바라보자 그가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건지 한쪽 입꼬리를 서서히 올리며 웃었다.

“그냥, 여러모로.”

그래, 난 여러모로 잘 부탁할 일이 없으니, 이만 가겠다. 잘 있어라, 흑호.

그의 손을 빤히 보다 몸을 돌려 그곳을 빠져나갔다. 어째서인지 그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할 뿐, 애써 잡지는 않았다.

얼마 안 가, 백령의 궁에 다시 몰래 들어오는 것을 성공한 나는 여노와 자하를 찾으러 나섰다.

으음…….

구슬의 힘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자, 자하와 여노의 기운이 내가 있는 문 반대편에서 느껴졌다.

아……. 귀찮게 저기까지 가야 해?

흐음…….

그래도 이번에 나 때문에 꽤 고생했을 테니, 이번만은 인심을 써주지, 뭐.

그래, 난 일말의 양심은 남아있는 존재였다.

그렇게 자하와 여노에게 향하는데, 무언가 느낌이 이상했다.

꼭 뭔가를 빠트리고 만 느낌……. 이게 뭘까? 상당히 기분이 좋지 않다. 찝찝해.

그리고 그 정체를 나는 얼마 가지 않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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