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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님의 딸이 되었습니다 (12)화 (12/167)

12.

“안돼요, 아리 님!”

여노가 처음으로 나한테 ‘안된다.’라는 말을 했다.

“시러!”

왜! 왜 안 되는데!

사람이 갑자기 바뀌면 죽는다고 그러지 않았던가? 난 아직 죽기 싫다, 이 말이다!

여노의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며 다리를 굽혔다.

“안된다니까요! 이제 말도 제법 능숙하게 하시는데, 아직 걸음마를 못 뗀다는 게 말이 되느냐구요!”

물론, 말 되지!

이리 화내는 여노는 처음이었다. 그렇지만 정말로 부끄럽단 말이다!

“여노, 너무 그러지 말고…….”

“아리 님이 평생 걸음마 못 떼면 자하 님이 책임지실 건가요?”

자하의 만류에 여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내가 이 나이에 걸음마를 다른 사람 손잡고 해야 한다니, 부끄러워 죽겠다고!

원래 호랑이는 사족보행이 아니던가! 어차피 백령이 나눠준 기운 덕에 난 어쨌거나 호랑이이니 기어 다녀도 아무 이상 없는 게 아니냐고!

여노의 말에 자하가 고민하기 시작했다.

“물론, 책임이라면 충분히 질 수 있어! 평생 이 한 몸 바칠 준비는 언제나…….”

“하께, 하께!”

자하의 말을 끝까지 들어줄 순 없었다.

여노, 내가 잘못했어. 처음부터 다시 한번 해보자.

내 나이, 2살이 훌쩍 지난 2살 아닌 2살. 이 정도면 충분히 걸음마 연습할 나이지, 암암. 자, 가자, 여노!

여노의 손을 꼭 잡자 그녀는 흐뭇하게 웃으며 나를 잡아끌었다. 그렇게 천천히 걸음마를 배우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고, 나는 어느 정도 혼자서도 아장아장 걸어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역시 아리 님은 금방 는다니까요. 하질 않아서 항상 걱정이지만요.”

여노가 아장아장 걷는 나를 보며 환히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보면 여노도 참 많이 변했다. 예전보다 훨씬 따뜻해진 느낌이랄까? 뭔가 예전에 날 대하던 태도보다 훨씬 친밀감이 느껴졌다.

뭐, 내가 좋아서 그런가 보다.

나름 뿌듯해하고 있는데, 갑자기 방문이 열렸다.

“자, 자하 님!”

이름 모를 시녀가 들어왔다. 왠지 예전에 한 번 여노랑 같이 날 봐줬던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나를 포함한 모두의 시선이 문을 열고 들어온 시녀에게로 향했다.

“아루 님이 긴급 호출을 하셨습니다.”

“뭐? 아루가?”

시녀가 자하에게 쪽지를 건네주었다. 쪽지를 본 자하는 바로 밖으로 달려갔다.

아루가 자하를 호출하는 건 내가 온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단 한 번도 아루가 자하를 부르거나, 자하가 아루를 부르는 일은 하늘이 두 쪽으로 갈라진 데도 없었다.

그렇다면 내 호기심이 날 가만히 놔두겠는가!

나는 아장아장 발걸음을 뗐다.

“무슨 일일까요. 아루 님이 자하 님을 호출하는 일은 흔치 않은데…… 어, 아리 님? 어디 계세요? 아리 님!”

방 안에서 여노의 독백이 들렸지만 애써 무시하며 내 갈 길을 갔다.

나는 갈 길이 멀어, 여노야.

자하의 걸음은 아직 내가 따라가기엔 많이 벅찼지만, 내게는 구슬의 힘이 있으니 기운을 쫓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곧 네 명의 신수의 기운이 느껴졌다.

뭐지, 이 불길한 익숙함은?

이내 네 명의 신수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아, 글쎄, 분명 백령한테 허락 맡았다니까.”

“삼촌이 그렇다는데요?”

뭐지, 이 불길한 목소리는?

이내 자하와 아루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거짓말인 거 다 압니다. 저희가 바보도 아니고, 백령 님이 허락해 주실 리 없잖습니까.”

“맞아요, 우린 바보가 아니라구요.”

아니, 아루는 아니더라도 자하 너는 바보 맞아.

어쨌거나 이내 그들의 모습이 나의 시야에 담겼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불길한 예감은 정확히 적중했다.

웬 똥개 두 마리가 대문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곧장 조용히 몸을 틀었다.

내가 겨우 저런 걸 보러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다니, 순식간에 자괴감이 몰려왔다.

그렇게 조용히 지나가려 했는데, 분명…….

“어?”

한마디를 던지고 아루와 자하를 뛰어넘어 내 앞에 당도한 이가 있었으니…….

“잘 지냈어, 예쁜 호랑이야?”

……누구세요?

분명 목소리는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지만, 난 이런 똥개를 만난 적 없다!

“흐음……, 의회 때 기억이 안 나는 건가? 하긴, 그때 넌 엄청 어렸으니까.”

의회? 의회 때 만난 똥개라면……바랑이랑 이랑밖에 없는데?

그런데 아직 대문 앞에서 아루랑 자하랑 떠들고 있는 바랑을 보니, 바랑은 아닌 것 같고, 설마……

“이란?”

그래, 이랑이라고 말한 거 맞다.

나의 말에 이랑의 눈이 동그래졌다.

“뭐야, 나 기억하네?”

당연하지. 아직도 너의 말은 가히 충격적이란다.

그런데…… 왜 이 자식은 훌쩍 커버린 느낌이 드는 거지? 난 아직 콩알만 한데!

억울한 눈빛으로 이랑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랑이 당황하며 손가락으로 턱을 긁었다.

“뭐야, 나 왜 이렇게 노려봐?”

몰라, 너 마음에 안 들어!

나는 이랑에게서 고개를 홱, 돌리고 자하와 아루가 있는 곳으로 아장아장 걸어갔다.

분명 나도 성장이 빠른 축이라고 생각했는데, 분명 4살로 보였던 이랑이 벌써 6살은 족히 돼 보이니, 괜스레 자존심이 상해 짜증이 났다.

“어? 아리 님! 이쪽으로 오시면 안 돼요!”

몰라, 나 아기라서 아직 그런 거 모른다!

아루와 자하의 만류에도 나는 아루의 다리를 폭, 하고 잡았다.

아루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이내, 내 몸이 아루에 의해 들리고 그의 품에 폭 안겼다.

“어, 이 귀여운 녀석은 많이 안 자랐네.”

바랑이 안 그래도 짜증 나 죽겠는데 눈치 없게 나의 성장에 대해서 논했다.

나한테 지금 시비 거는 건가?

그에 바랑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어, 어? 왜?”

바랑이 당황하며 내 눈빛에 땀을 흘렸다.

“똥개, 시러!”

말을 마친 나는 아루의 품으로 고개를 묻었다. 그러자 적잖게 당황한 바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나 뭐 잘못한 거 있냐?”

바랑의 말에 아루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요. 이제 아셨습니까?”

아루의 표정에서 ‘알았으면 이제 꺼져 줘, 꺼져 줘, 꺼져 줘.’라는 마음의 소리가 여실히 들렸다.

그런 아루의 표정이 무색하게도, 어쩌다 보니 네 신수와 나는 백령의 서재에서 그가 일하는 모습을 다 함께 지켜보고 있었다.

“어, 음, 백령……. 바쁘면 바쁘다고 말이라도 좀 해주지, 하하.”

바랑의 멋쩍은 웃음에 아루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게 지금 할 말입니까, 바랑 님?”

“에이, 아루 너도 안 알려 줬잖아.”

바랑의 말에 진심으로 화가 끓어오른 아루의 표정에 웃음이 사라졌다.

저 똥개는 거짓말을 한 걸로도 모자라, 뻔뻔하기까지 하다.

아주 안 좋은 거라면 다 갖췄구나, 다 갖췄어.

“들을 생각도 없으셨잖아요. 뭐라 말만 하면 괜찮다면서요.”

“맞아, 맞아.”

“이건 삼촌이 잘못했네.”

모두가 아루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이랑마저 아루의 편을 들자, 바랑이 ‘이랑, 너마저…….’라며 충격을 받은 척을 하긴 했지만 이랑은 그런 바랑에게 싱긋 웃어줄 뿐이었다.

하……. 호기심은 정말 사람을 피곤하게 만든다. 내가 왜 그랬지…….

따뜻한 여노의 품을 대체 왜 저버리고 내 발로 이런 고생을 사서 하는 건지, 정말 의문이다.

몇 시간 전의 나를 떠올리며 한탄하고 있을 때 즈음, 바랑이 백령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혹시 내가 도울 일이라도……?”

백령은 여전히 쌓여 있는 일들에 눈을 떼지 않고 입을 열었다.

“굳이 도와준다면 꺼져.”

백령의 살벌한 대답에 바랑이 일부러 딴청을 피우며 시선을 돌렸다.

그런 바랑의 모습이 탐탁지 않은 자하와 아루가 백령의 뜻을 그에게 다시 알려주었다.

“꺼지래요.”

“꺼지랍니다.”

“……나도 들었다, 이놈들아.”

바랑이 백령의 눈치를 살피며 조용히 읊조렸다.

“그러게, 왜 쓸데없는 말을 합니까?”

모두가 아루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바랑이 억울한 표정을 지었지만, 우리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요즈음 다른 신수들의 방문이 잦아진 느낌인데…….”

“그러고 보니 그렇네.”

자하의 말에 아루가 동의했다. 바랑이 ‘응?’ 하면서 아루와 자하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소리야, 그게? 나 말고 다른 신수가 왔어?”

바랑의 질문에 자하가 ‘괜히 말했다.’라며 중얼거렸지만, 이미 때는 늦은 후였다.

옆에 있던 아루가 낭패라는 듯 입을 오므리고 있는 자하 대신 입을 열었다.

“구슬이 동쪽 땅에 내려졌으니, 일반 신수들이 모여드는 건 당연한 건데, 최근에 사화 님까지 방문하셨었거든요.”

“사화?”

바랑의 물음에 자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언질도 없이 갑자기 찾아오셔서 엄청나게 놀랐다고. 북쪽 땅의 주인들은 언제나 껄끄럽다니까. 특히 사화 님은…….”

자하가 몸서리치며 떨었다. 어지간히도 그녀가 싫은 것 같았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특히 사화 님이 유독 그런 부분이 없잖아 있지. 사심이 눈에 훤히 드러나시니까.”

“그래도 예전엔 이렇게 막무가내로 찾아오진 않았는데.”

자하가 영문을 모르겠다며 고개를 흔들자, 바랑이 손을 턱에 대고 짧은 고민에 빠졌다.

“흐음…….”

이내 바랑의 시선이 나를 향하며 씨익, 하고 웃어 보였다.

“뭐, 꼭 와야 할 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뭐지? 엄청나게 기분 나쁘다.

“부우…….”

턱을 살짝 내리고 바랑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바랑의 눈이 아래로 휘어졌다.

“너, 여전히 아주 귀엽구나!”

바랑이 갑자기 내 쪽으로 팔을 뻗었다.

이런, 기습공격이다!

탁.

바로 앞까지 다가온 바랑의 손을 차버린 건 다름 아닌 자하였다.

“우리 아리 님한테 너무 가까이 붙는 건 금지입니다, 바랑 님.”

자하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자 바랑이 차인 손이 아픈 것인지, 아픈 척을 하는 것인지 낑낑거렸다.

“자하, 넌 여전히 물불 안 가리는구나. 하긴, 그게 네 매력이긴 하지. 이런 귀염둥이 녀석.”

헛소리를 잘도 장황하게 늘어놓는 걸 보면, 아무래도 후자인 것 같았다.

자하가 죽일까? 하는 표정으로 바랑을 바라보았다. 바랑은 그저 능청스럽게 헤실거릴 뿐이었다.

자하가 눈으로 온갖 욕을 내뱉었지만, 바랑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것보다 이랑 님, 많이 자라셨네요.”

아루가 이랑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랑은 그저 싱그럽게 웃고 있었다.

“어어, 신수야, 뭐. 정해진 성장이 없으니까.”

정해진 성장이 없다고?

처음 듣는 신수의 정보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랑을 바라보았다. 바랑이 하품하더니, 말을 이어나갔다.

“하암. 얘가 형님이 돌아가신 이후로 30년 동안 성장을 안 해서 얼마나 걱정했는데. 어쨌거나 다행이야.”

난 여태 신수가 인간보다 훨씬 빨리 성장하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성장하는 데에는 정해진 게 없던 것이었다. 다른 신수보다 훨씬 빠를 수도, 느릴 수도 있다는 것.

새로운 정보에 내 귀가 활짝 열렸다.

“어느 정도 힘이 있는 신수는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는 이상 거의 영생의 존재니까. 30년 정도의 시간도 의미 없긴 하지.”

바랑의 말에 아루와 자하가 수긍했다.

“하긴, 우리 같은 신수에게 시간과 나이는 의미가 없긴 하죠. 30년 정도야, 뭐.”

바랑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호처럼 진짜 오래 산 늙은 여우가 아닌 이상에야……. 그러고 보면 백령은 진짜 애늙은이라니까. 나보다도 훨씬 늦게 태어났는데도 영향력이 장난 아니잖아.”

뭐? 백령이 바랑보다 늦게 태어났다고? 그것도 훨씬?

의외의 백령 정보에 내 귀가 더욱더 활짝 열렸다. 더 말해봐, 똥개야.

“그래서 전에…….”

“바랑,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 하지.”

무언을 더 말하려는 바랑의 말을 백령이 절묘한 타이밍에 끊었다. 바랑은 입맛을 다시며 얘기를 중단했다.

“알았어. 그런 눈으로 노려보지 마.”

“쓸데없는 소리는 집어치우고 오늘 온 용건이나 얘기하지.”

백령의 단호한 말에 쳇, 하며 바랑이 눈을 가늘게 떴다.

“너랑 미호, 흑기들의 뒤를 쫓고 있지?”

“아직은 아니다.”

바랑의 물음에 백령이 짧게 대답했다. 그러자 바랑이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아직 아니라니?”

이내 바랑의 표정이 다시 풀어졌다.

“하긴, 의회가 끝난 후 흑기들이 조용해지긴 했지.”

그렇게 혼자 자문자답하더니 나를 보고는 활짝 웃는 것이 아닌가.

진짜 미친 똥개인가?

“그럼, 이 얘긴 나중에 하기로 하고, 나 아리랑 놀래!”

꺼져, 이 똥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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